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12화 (112/653)

외교전(1)

“그래, 어떻게 지냈나?”

정녕당의 집무실로 불려온 다소 짙은 피부의 고려인은 그동안 상당히 많은 이민족을 접한 고려인들과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저 위에 있는 칼리나인과 흡사한 생김새.

하지만 그는 엄연히 고려 내방의 의원직을 맡고 있었다.

중서성 의원 함제량은 고려와 동예의 접경선에 위치한 지역의 부족 출신이었다.

접경지역은 흔히 투피라고 불리는 무리들이 많았다.

투피족은 많은 수가 동예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동예와 고려의 신분제도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동예의 투피족은 하층민 중 하층민이라 볼 수 있었고, 대부분은 동예의 대지주들이 경영하는 상업농장에서 가혹한 착취를 당했다.

목화, 고무, 목재, 적후추, 카카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흘러들어온 커피와 톤도 왕국에서 가져온 사탕수수까지.

모두 엄청난 노동이 필요한 작물들이었다.

“여전합니다. 시끄럽고 혼란스럽습니다.”

“그래?”

집무실로 고용인 하나가 차를 가져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카카오 차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던 제량은 시중이 차에 손을 뻗자 예의상 입을 가져다 대기만 하고 목으로는 넘기지 않은 채 자리에 내려놓았다.

“작물들은 잘 자라고 있는가?”

대체로 동예 남쪽은 고원지대였다.

당연하게도 열대성 기후보다는 온대에 더 가까웠다.

“강주의 곡식 소출은 안정적입니다.”

“커피 농사는 고충이 많다지?”

“…예. 커피는 노동집약적 작물임이 틀림없어….”

“동예와의 접경지역에서 월경을 하는 자들이 많다 들었다. 이들을 쓰지는 못하느냐?”

“고려의 적법한 법에 의해 마땅한 보수를 제공해야 하는바, 경제적 효율은 극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커피 농가들이 모두 비명을 지르고 있는 까닭이지요. 또한 탈예인들은 전부 자영농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탈예인들이라….”

상민은 눈을 감았다.

“그대의 그 지하 조직은 어떻게 되고 있나?”

약간은 서늘한 말.

저지른 짓이 있던 제량은 흠칫 놀랐다.

시중의 눈과 귀가 고려 전역을 덮고 있다는 말은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고 자시고를 떠나 바로 행동했다.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은 것.

“당하, 소신의 죄는 유구무언이옵니다. 다만 소신은 같은 피가 흐르는 자들의 절규에 차마 귀를 닫지는 못하겠나이다.”

“책망하는 바는 아니다.”

일어나게, 상민이 고갯짓을 했다.

비밀 조직으로 동예인들의 탈출을 도와주고 있던 제량은 시중의 가면 뒤의 표정을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날카롭지는 않아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다만 내 부덕인 듯하여 그랬구나.”

상민의 한숨에 제량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다 속마음을 내뱉었다.

“…그것이 어찌 당하의 부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굳이 따지자면 선대의 시중들 모두가 원죄를 묵인하고 있었겠지요.”

그 말을 들은 상민이 순간 허탈하게 웃었다.

“경의 말이 맞네, 맞아. 실로 오래전부터 저질러온, 그리고 방관해온 잘못이지.”

상민은 툭툭, 모아진 서류를 정돈했다.

“근래에 동예 왕실의 혼란이 있었지?”

그래도 충실한 고려의 봉신이라 평가할 수 있었던 전임 예왕 사후, 여섯 살 난 갓난아기가 동예의 왕으로 즉위하며 동예의 정국은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대비가 수렴청정을 했는데, 심지어 생모도 아니었다.

세 살 난 이복동생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온갖 흉계를 꾸미고 있는 모양.

앞으로의 전개는 불 보듯 뻔했지만, 민심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정에서는 서류로밖에 인지할 수 없다. 현지의 상황은 어떤 듯싶으냐?”

“예, 민생은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있으며, 중앙 조정은 권력다툼에 아비규환입니다. 최근 해상십자군이 결성되며 조금 나아진 듯하지만 다시금 국론이 주전파와 주화파로 분열되고 있다지요.”

“보고에 따르면, 친려파와 친카스티야 파벌이라 명해도 될 정도라던데.”

“송구하옵니다만 부인할 수는 없겠습니다.”

처음 저 말을 들었을 때도 참으로 믿기지가 않았지.

“언어도, 종교도 다른 자들인데, 친카스티야라는 것이 성립이 가능하더냐?”

“언어는 다를지언정, 예상들이 가진 황금에 대한 욕망은 같습니다. 대비를 후원하는 그 ‘적후추’ 파벌이 얼마나 강한 입김을 행사하는지 지방의 관리를 갈아치울 정도라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선 유럽과 무역을 해야 하는 상인들.

고려의 상인들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지만 예상(동예의 상인)들은 적절한 개입이 없었고, 너무나도 크게 성장해버렸다.

“지난 몇 년간 동예는 누에바 갈리시아와 마찰을 빚었다. 엔리케와 사이가 좋지는 않았을 터인데?”

“기주를 확보하여 북쪽으로 진출을 꾀하던 예왕의 죽음 뒤에 그 적후추 파벌이 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엔리케와 손을 잡은 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이가 없구나.”

조그마한 알갱이 하나가 뭐라고 이리 세상을 바꾸는지.

막장스러운 금권정치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동예는 더 이상 백 년 전의 충성스러운 번국이라 보기 힘들어졌다.

“고려가 노예제를 혁파하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이 파벌들은 앞으로도 아국을 적대할 것입니다.”

“그 정도인가?”

제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침내 속에 있는 말을 꺼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끙끙거리며 참아왔던 말인지 모르겠다.

원하는 것은 별것이 아니었다.

그의 부족, 투피족을 다른 부족과 동등하게 대우해달라는 것.

단지 그뿐.

“시중, 더 이상 선대의 죄악을 묵인하지 마시옵소서. 한 가지 화근을 남기고 두 발짝 앞으로 나아가느니, 한 발짝만 앞으로 내딛는 것이 맞사옵니다.”

* * *

의원이 떠나고 상민은 그때까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추밀원부사를 불렀다.

“가능한 여력이 있나?”

정보총국의 일을 말하는 것이로다.

그는 추밀원에서 황제의 곁에 있을 추밀원사 다음의 이인자였기도 했지만, 역대 대대로 상민의 뜻에만 따르는 정보총국 그리고 여의국의 수장이기도 했다.

“대내국의 인원을 빼 동예에 파견하겠습니다.”

“그래.”

“…하오나, 당하. 만약 그들이 실제로 그러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면….”

어째서 당장 밀어버리지 않으십니까?

측근들이 직접 말하지 않으나 항상 가지고 있을 물음.

상민은 씁쓸하게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동예는 고려의 어두운 면을 상징했다.

건국 직후는 저들의 민심과 고려의 한계로 인해 복속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고려가 수없이 먼 곳까지 뻗어 나갈 역량을 갖춘 이후 몇 차례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들을 복속시키지 않은 것은 많은 이유가 있었다.

자영농 중심의 고려는 노동력이 값비쌌다.

예전부터 노비제도를 혁파해나가고 있었고 최근에 죄를 지어 남아있는 노비들은 죄다 관비에 속했으니, 민간의 노비 자체는 이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어떠한 강제성 없이 농부가 과연 저런 상품작물을 재배하겠는가?

고려는 지금 전 세계에서 경자유전을 엄격하게 실천하는 나라 중 하나였다.

이는 명백히 좋은 제도였지만, 제약도 존재했다.

대농장에 대한 극도의 경계 어린 시선 때문에, 상업작물 농가는 여러모로 큰 제약을 받았다.

목화는 벼와 밀, 감자와 고구마, 기타 수많은 작물에 비해 압도적인 노동을 요구한다.

곡물은 추수를 한 이후, 조금의 노동(상대적으로)인 탈곡과 도정을 거치면 바로 식량이 된다.

심지어 감자와 고구마는 그런 것조차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화는 다르다.

이 중세의 세상에선 목화는 수확을 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조면 과정에 진입한다.

이 흰 식물 섬유 덩어리가 몸에 걸쳐지는 질 좋은 옷감이 되기 위해서는 실로 어마어마한 노동이 필요했다.

고무와 카카오, 적후추와 커피 또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노동력의 공급은 필수적인데, 제도상으로 이를 확충할 방법은 없다.

소작? 고용인?

소작은 법으로 금지고, 고용인은 금값이지.

게다가 이들은 단일재배라는 단점이 있어 시장이 불안정하면 경제가 박살이 나고 기후 변화와 병충해에 몹시 취약했다.

안 그래도 이 물품들은 곡식에 비해 수요의 가격탄력성 자체가 몹시 높았으니.

먹고 사는 바가 순식간에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렴한 노동력은 필수조건이었다.

― 흑인 노예는 우리 백인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미국 건국의 주역 중 하나였던 토마스 제퍼슨도 저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비단 필수품과 기호품에 대한 위탁 생산을 맡기고 있다는 이유 말고도 고려는 도덕적으로 흠결 없고 대내적으로 완성도 높은 체제를 위해서는, 본래의 체제와 비견될 상황이 필요했다.

― 보아라, 저 번국에 비해서 이 고려는 얼마나 자애로운 국가인가?

절망에 빠진 누군가와 비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민들은 다소의 우월감과 안도감, 그리고 내적 단결성을 느낀다.

그것이 몹시 저열한 감정에서 기인할지라도.

번국의 주권은 존중받아야 한다.

프로파간다는 필요했다.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과거에 저질렀던 변명, 그리고 그 변명을 변호하기 위한 변명들.

그러나 상민은 누벨 오를레앙에서 그 생각을 바꿨다.

어떤 부족은 조금 남쪽에 산다는 이유로 고려의 신민이 되어 자신만의 농장을 꾸리고 사는 반면 같은 피의 다른 부족은 평생 대농장에서 착취되어 죽는다.

그는 물론 그의 자식들까지도.

단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곳에서 살았다는 이유로.

통치자는 현실정치에 능해야 했지만, 그것이 부도덕함에 익숙해지라는 것은 아니었다.

누벨 오를레앙에서의 깨달음.

상민은 비로소 자신의 통치관을 확립했다.

‘연성권력(軟性權力)이라.’

업보는 시간이 흘러 흘러 먼 미래에 되돌려 받을 것이다.

그것이 대낮에 테러리스트에게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든, 기타 여러 가지 외교적 압박이든.

저지른 죄악은 벗어날 수 없다.

전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이를 알았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고려에 검을 뽑은 당사자 중 하나였고 단점도 많았지만 몇 가지 면에서는 충분히 높게 평가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동시대의 유럽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악에 대해 규탄한 칙서, Sicut Dudum.

이를 통해 교황은 노예무역상들에게 언젠가는 모두 죗값을 치르게 되리라 경고했었지.

우리가 화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저들의 화근을 이용할 유일무이한 권한을 가지게 될 것이므로.

전근대적인 총과 칼, 그리고 화약에 의한 지배뿐만 아니라 문화와 호감에 의한 지배.

고려는 자체가 내재한 근원적인 체제적 우월성과 종교적 자유성을 통해서도 세상에 뻗어 나가야 했다.

마침 내적 단결성은 외적에 대한 방어를 통해 공고히 할 수 있으니.

따라서 모순을 제거하기에는 지금밖에 없었다.

* * *

다국적 기독교 연합군이라는 십자군은 내재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느슨하게 연결된 고리와 일원화되지 않은 지휘체계.

출신 성분에 따른 수많은 이해관계와 기타 여러 가지 사항들.

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바보겠지.

가장 처음의 시작은 포르투갈이었다.

선대 왕 주앙 1세로부터 이어지는 아비스 왕조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는 포르투갈의 왕 두아르트는 굉장한 친고려파였다.

계기는 꽤 이른 시간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 주앙 1세는 1433년 흑사병에 걸려 죽었다.

부친을 잃고 병에 대한 공포심에 젖어 있던 그는 고려의 의학이 세계에서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후 그는 궁정에 몇 번의 전염병이 돌자 고려의 황제에게 의원들을 파견해달라는 말을 했었지.

궁정에 돌던 흑사병이 고려의 의원들에 의해 효과적으로 제어되자, 그는 그 이후 고려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비단 의학뿐만 아니었다.

교황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 여러 가지 책들도 몰래 반입했다.

늦은 밤 아무도 몰래 고려의 풍습을 담은 재미난 소설을 읽고 낄낄거리기도 했다.

십자군이 결성되고, 교황의 압력에 십자군에 배를 판매해야만 했던 두아르트는, 고려에게 이 사실을 넌지시 귀띔하며 어쩔 수 없었다고 애써 해명하기도 했다.

고려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화를 내었으나, 외부의 압력에도 리스보아와 마데이라의 고려인 거주지를 철거하지 않은 포르투갈의 성의에 넘어가기로 했다.

이 덕분에 고려는 아직도 유럽을 다소 편하게 엿보고 있었다.

교황의 칙서로 인해 노예무역이 타격을 받자, 두아르트는 교황을 몰아내려는 공의회의 계획에 동참해 이베리아의 여론을 움직여 사보이아의 아메데오를 대립교황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현명하신 결단입니다.”

이를 배후에서 금은으로 지원한 고려의 사절은 고개를 조아리며 넌지시 찬사의 말을 건넸다.

“이것이 고려에 무슨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단 말이오?”

두아르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메데오, 아니 펠릭스 5세가 교황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는 떨어진 교황직의 권위로 인해 한번 일어난 십자군을 취소하진 않을 것이오. 오히려 후원했으면 더 후원하겠지.”

추밀원에서 포르투갈의 고려인 거주지로 파견되었던 대외부의 요원은 조용히 말했다.

“저희는 단지 교황청의 적대감을 희석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그는 속내를 숨기고 다만 약한 척을 했다.

“교황의 적대감을 희석시킨다 하더라도, 교황청, 아라곤, 카스티야와 나폴리의 유대는 끈끈할 수밖에 없소.”

이는 여전히 고려로서도 부담스러운 병력.

두아르트는 조금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반면 프랑스와 베네치아는 이권에 의해 좌우될 것이니, 적재적소에 충분한 양의 금을 뿌린다면 그들의 여론을 돌릴 수 있을 것이오.”

두아르트는 몇 명의 귀족들의 이름을 읊었다.

유럽의 군주 중 하나인 그의 조언은 상당히 가치가 높았다.

기독교인임을 감안해 볼 때,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와 우리의 동맹국으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지.’

하지만 두아르트는 요 근래 잉글랜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모친부터 랭커스터 가문의 여인이었으니.

카스티야, 프랑스, 나폴리, 교황청으로 이어지는 이 동맹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같은 연합뿐.

비록 지금은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정도에 불과할지라도 교황청의 패악은 조금씩 커져만 가고 있을 테니까 곧 그에 대항하는 세력 또한 부흥하리라.

‘또한 우리의 가문이 이 이베리아에서 왕위를 공고히 할 수 있는 방법은 이웃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에 있다.’

본디 포르투갈의 아비스 왕조와 카스티야의 트라스타마라 왕조는 같은 피를 공유한다.

그렇기에 호시탐탐 포르투갈의 왕위를 노리는 카스티야는 몇 번이고 그들의 왕가의 승계에 간섭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권력에는 같은 친척으로서의 동질감 따위는 전혀 고려대상이 되지 못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다툼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이 시대, 먼 옛날 흘렀던 피는 유대감과 평화보다는 상대방의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는 도구로써 이용되기 마련이니.

“귀중한 말씀 감사합니다. 전하.”

“귀국의 황제께 아국의 성의를 전달해 주시구려.”

“우리가 신의로 맺어진 이상, 우리의 우호는 계속될 것입니다.”

* * *

궁정에서 나온 고려인 이창언은 주변을 조심스럽게 확인하며 거리의 음지를 골라 이동했다.

그의 주변을 몇 개의 그림자가 조용히 감싸며 호위했다.

전 유럽의 첩보망을 책임지고 있는 창언은 추밀원 정보총국의 고위급 요원이었다.

본래는 내지에서 시중의 곁을 지켰겠지만, 사안의 중대함으로 인해 직접 리스보아까지 오게 된 것이다.

별 불평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위급으로 올라갈수록 책상에 앉아 하는 업무가 많아져 이렇게 야전으로 나오는 상황을 꿈꾸고 있었기에.

창언은 리스보아 항구 부근의 창고로 갔다.

벽돌로 지어진 창고.

다른 포르투갈의 창고와 똑같이 지어진 이곳은 주변과 비교해봐도 전혀 특색이 없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떠한 이상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

문을 열자 몇 명의 포르투갈인 경비원이 신원을 확인하는 절차를 요구했다.

자신의 얼굴을 알지만 절차는 절차였다.

오래전부터 고려를 위해 일하고 있는 자들은 기근과 여러 재해로 삶의 낭떠러지에 몰렸다가 고려의 요원들에 의해 구출되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다.

대화 없이 몇 번의 손짓과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신원 확인이 완료된 창언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포르투갈산 와인들이 담겨 있는 오크통들을 지나쳤다.

― 통 통

와인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창언은 이 액체가 가득 들어찬 소리가 마음에 들곤 하여 살짝 두드렸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인 와인 생산국이었다.

게다가 프랑스가 길고 긴 세월 동안 전쟁을 할 사이, 고려에 와인을 풍부하게 공급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포르투갈이 유일했다.

붉은빛이 옅게 감도는 포르투갈 와인은 그 특유의 단 맛으로 매운 음식과 상당히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었다.

‘일이 다 끝나면, 나도 경치 좋은 한적한 곳에서 포도를 길러 포도주를 만들고 싶군.’

고려는 상당히 술을 잘 마시는 나라였다.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시는 것은 미덕이 전혀 아니었다. 적당히 흥이 오를 때까지만 마시는 버릇은 흡사 다례(茶禮, 다도)에 비유해 주례(酒禮, 주자가례가 아니다.)라 불렀을 정도.

음주에 의한 범죄는 간혹 일어나기 마련이었지만, 경감의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옛날, 한 상서가 상서성의 회식 때 다소 술에 취해 시중의 가면을 벗기려 했던 적이 있었지.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상서는 다음 날 등청하지 않았다.

말은 사직서를 냈다던데, 실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시중은 그것을 빌미로 사회에 깔려 있던 음주 범죄에 대한 관용적 시선을 박살 내셨다 하던데.

우수수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 창언은 생각의 흐름을 바꾸었다.

와인저장소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자, 다시금 조그마한 비밀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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