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십자군(2)
고려는 지난 백오십여 년간 급격한 내적, 외적 팽창을 거듭해왔다.
도덕적 규율과 통치의 개념조차 잡히지 않은 반군 조직에서, 이제는 옛 고려의 향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나라로 자리 잡아가는 중이었다.
뜨겁고 습한 곳에서부터,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곳까지.
바다에 접할 정도로 낮은 땅에서부터,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곳까지.
거대한 땅이 고려의 손에 들어왔다.
팽창에는 전쟁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고려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했다.
해윤은 그것을 타완틴수유에 풀고 있었으며 끝맺음이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이 내부의 정리를 다 마치기도 전에 유럽이 성큼 다가왔다.
― 북려대륙.
거대하기로는 남려 못지않거나, 혹은 더 큰 대륙.
고려는 불안감에 젖었다.
그 땅은 자신들이 자리잡은 이 땅만큼이나 축복받았으며, 또한 이 땅만큼이나 소유권을 주장할 명확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자신이 이 땅에서 일어났고 앞으로도 거대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기에.
고려가 앞으로 존재할 비슷한 존재를 지극히 경계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려는 설계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실제로도 주장하는 권리가 되었다.
하지만 역사 이래로 힘이 따르지 않는 명분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저 북쪽의 땅을 지킬 능력이 되지 않으면 순수비는 단지 글이 적힌 돌덩어리에 불과할 뿐이니.
* * *
개천 165년(CE 1440) 12월 29일.
창천궁 태성전.
창양.
고려.
조참이 열리는 날이다.
하지만 오늘의 조참은 기존의 규모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정전보다도 더 큰 공간이 필요했기에 그들은 요 근래에 완공된 태성전(太成殿)이라고 이름 붙인 대회의실에 모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태성전은 꽤나 독특한 구조로 지어졌다.
시중의 지시로 지어진 이곳은 마치 반달형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앞에 설치된 높은 연단을 바라보기 쉽게 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연단에서 신하들을 바라보기도 쉽다는 말.
아마 이곳에서 계속 상참이나 조참을 하게 된다면, 아침에 몰래 조는 버릇이 있는 신하들은 작은 곤경에 빠질 것이었다.
외무상서는 가장 늦게 태성전에 도착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그를 질타할 수 없었다.
얼굴에 가득 깔린 피로감과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육신은 절로 동정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먼저 도착한 9부의 상서들은 그러한 그에게 흉흉해지는 유럽과 고려의 현황을 은근히 물어보았다.
“외무상서는 조금이나마 쉬고 있게.”
상서령의 지시에, 외무상서 김영손이 감사의 표시를 표하며 자신의 앞에 있는 탁자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리고는 이마를 팔에 대자마자, 깊은 잠에 빠졌다.
“허어….”
그들이 다소 복잡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때 태성전의 문이 또 열렸다.
중서령을 필두로 중서성의 관료들 한 무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무려 150명에 달하는 의원들.
중서성 의회의 구성원이자, 이제 바야흐로 작동하는 초창기의 입법기관이었다.
의회의 필요성은 근래에 상당히 대두되었다.
그들은 물론 21세기의 의회처럼 철저한 투표로 선출되어 제대로 된 민의(겉으로나마)를 대변하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역 사회의 현안 자체를 중앙에 건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제국이 엄청나게 팽창하며, 먼 거리에 퍼져있는 수많은 지역 권력자들을 달래고 그들의 필요사항을 듣고 해결할 기관은 필수 불가결했다.
무려 백오십 석에 달하는 의석들은 고려의 내방, 외방의 인구수에 맞추어 적절하게 분배되었다.
물론,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에는 대개 불확실성이 따른다.
이는 상민과 황실의 입장에서도 바라는 바가 아니라 안전장치는 몇 가지 있었다.
우호 세력 오십 명을 황실이 임명할 권한.
거부권을 행사할 권한.
의회의 해산권을 행사할 권한.
기타 여러 가지 등등.
상당히 고압적이지만, 동시대 카스티야―레온 의회나, 잉글랜드의 모범의회(시몽 드 몽포르 의회), 혹은 좋은 의회(Good Parliament)과 비교하여 볼 때에도 훨씬 더 합리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실제로 한미한 지방과 막 복속된 지역의 불만은 중서성의 전면적인 가동 이후 눈에 띄게 감소했다.
조정이 들어야 할 욕을 이제는 그 지역의 중서성 의원과 나누어 먹게 되었으니까.
내방 중서성 의원들은 대체로 전직 관료 출신이 많았다.
상서성에서 능력을 보였던 관리들, 집법성에서 공명정대함으로 이름을 떨쳤던 법관들이 주였다.
외방은 해당 지역 부족의 부족장 출신들이 많았다.
그 지역에서 군정을 잘 실시한 고려인 장군들이 가끔가다 지역의 대표 의원으로 오기도 했지만, 그 사례는 흔하지 않으니 논외로 해도 되겠지.
황실이 선발한 오십여 명은 출신도 이채로웠다.
인품과 능력이 좋은 상인, 불심과 덕망이 높은 승려, 유명한 학자와 기술자들.
기술, 상업 및 종료 계층으로 대변되는 이들은 황실의 골수 지지자였으며,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출신을 막론하고 이백 명의 중서성 의원들 모두 약간, 아주 약간 기분이 상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당연했고 종교계(만종이 떠난 조계종과 천태종으로 대변되는 원류를 일컫는다.)와 상인들도 분쟁을 그리 원하지 않았다.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카스티야가 분명했지만, 강 대 강의 힘 싸움으로 치달아 결국 해상십자군을 선포받기도 했으니.
― 끼이익
반면 마지막으로 들어온 자들은 약간 달랐다.
얼굴이 굳은 것은 중서성의 의원들과 비슷했지만 이들은 기세가 등등했다.
자신감. 혹은 기대감.
전쟁이 열리면 가장 많이 죽어 나갈 이들이지만, 가장 많이 성공할 수 있는 자들.
군부였다.
고려의 황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완전무결한 군통수권을 지니고 있다.
금헌칙서 이후 시중도 집권 시 이를 위임받아 행사할 권한이 있었고.
그 밑의 권한들은 조금 달랐다.
군정권(軍政權)만 놓고 보자면, 평소에 이는 군무상서의 지휘하에 있었다.
하지만 전시로 들어가게 된다면 조정은 군령권(軍令權)을 가지게 되는 사령관을 뽑게 될 것이고 이 사령관이 모든 작전을 총괄하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타완틴수유에 있는 현 고려의 육군은 황제가 직접 군령권을 친히 행사하고 있는 셈이니.
남아있는 무장들은 대체로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하급 무장들이 많았다.
하지만 해상십자군이 선포되며 고려의 군을 확충할 것은 분명했으니, 이들은 내심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특별한 발언권은 없지만, 그래도 제국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몇 명의 집법성 법관들을 끝으로, 고려의 수뇌부라 부를 수 있는 이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실로 바글바글하다.
만약 카스티야가 이곳에 엄청난 양의 화약을 설치한 후 점화를 시킬 수만 있다면, 고려는 한순간에 붕괴 직전까지 내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하께서 드십니다.”
― 끼익
관리의 말에 두런거리던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사방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대체했다.
― 처처척
관리들, 의원들, 무장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시중을 맞이했다.
상민은 반달형으로 된 연단의 측면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가장 높은 곳은 해윤의 자리. 물론 비어져 있다.
그 밑에는 시중의 자리가 있었는데, 모든 공간 중에 두 번째로 높았다.
심지어 황태자조차 그의 자리 좌측 하단에 있었으니까.
자신의 자리에 앉고 손을 들어 보이자, 사방이 또다시 의자 끄는 소리로 요란하다.
아, 바퀴 의자 도입 안 되나.
“제1회 특별 조참을 개최하겠소.”
상민의 말과 함께 청명한 의사봉 소리가 들렸다.
이른바 특참(特參)은 이 역사적인 날을 맞이해 고려에 처음으로 실시되게 되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약간의 흠결이지만.
상민은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 의사봉을 든 채로 잠시 쪽잠을 잤는지 이마에 붉은 흔적이 보이는 외무상서에게 말했다.
“외무, 저들의 원정이 준비되는 시간은 대략 얼마 정도로 유추하시오?”
물론 이미 보고를 받았지만, 주변의 대신들과 여러 의원들에게 전부 환기시키는 의미의 질문이었다.
“리스보아에 있는 아국의 정보원에 따르면 저들의 해상십자군이 완비될 때까지는 적어도 이 년, 혹은 삼 년이 걸린다 하옵니다.”
카나리의 고려인 거류지가 박살 났다 하더라도, 고려는 포르투갈과 조그마한 관계를 아직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를 통해 전달받는 정보에 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한 전쟁은 선포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십자군은 유럽의 거대한 힘을 한 곳으로 집결시키고 있는 중이었으나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
내무상서가 발언권을 청했다.
상민이 끄덕이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본대(本隊)의 경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선봉대는 조금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합니다.”
“그렇겠지. 당장이라도 올 수 있다 생각하는 것이 맞을 것이오. 군무, 예상 공세로는?”
호명된 군무상서가 대답했다.
“해류와 해풍을 가정해 볼 때, 연죽곶과 용경도로 대표되는 동해안, 혹은 칼리나해의 만궁 열도와 마제도입니다.”
“본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확률이 낮으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생각합니다.”
군무상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회의실의 가운데 크게 그려져 있는 지도로 자리를 옮겼다.
큰 종이에 그려진 지도라, 그는 멀찍이 기다란 나무 봉으로 상민이 잘 보일 수 있도록 보고를 했다.
“카스티야의 상인들은 세비야, 카나리, 푸에르토리코 그리고 연죽곶으로 이어지는 항로에 상당히 익숙합니다. 이곳을 통한다면 바람을 등에 업고 비교적 빠르게 아국의 동해안에 접근할 수 있으니 몹시 중요한 곳입니다.”
“또한?”
“조금 더 아프리카 남쪽으로 내려가면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애용하는 항로가 존재합니다. 대부분 천축, 아니 인도나 맘루크, 혹은 티무르 같은 중앙아시아에서 교역을 한 상인들이 아국으로 향하는 항로입니다.”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상황은 명백하게 다르군.”
“예, 후자 항로의 종착지는 곧 동예와 아국의 심장부로 향할 수 있으니, 몹시 위협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항로는 없소?”
“북대동양의 역풍을 맞고 온다면 몹시 비밀스럽고 또한 안전하나, 바다에서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길 것입니다. 또한 도착한 곳은 북려의 북동쪽이니 기습의 묘리를 살린 것 치고는 얻어갈 수 있는 게 너무 적습니다.”
상민은 고심했다.
나라 한둘이 아니다.
저들의 해상 전력이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선소에 빠른 속도로 건조를 명했고, 또 상선들의 개장 절차가 많이 완료되었지만 유럽 십자군의 규모에는 수적으로 불리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내세울 것은 더 나은 기술뿐.
그러나 역시나 예전부터 전전긍긍해왔던 긴 국경선이 고려의 발목을 잡았다.
규모가 적은 병력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다.
모든 함대를 모아 바다에서 적을 격침하는 것이 제일 이상적인 시나리오.
하지만 현시대에는 인공위성도, 레이더도 없다.
적의 출발 시기를 보고받는다 하더라도, 유럽의 정보원이 협저선에 그 소식을 실어 나를 때쯤엔 이미 바다를 대부분 건너왔겠지.
또한 그들은 명백히 해전을 피할 것이다.
고려의 함대가 뛰어나다는 사실은 소소한 갈등을 벌여왔던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모두가 나름대로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적어도 수십 년은 먼저 바다에 진출했으며, 세계의 바다를 한 바퀴 돈 자들이다.
몽골이 말 위에서 생활하던 인간들이라면, 고려인들은 배 위에서 먹고 자던 인간들이니.
따라서 그들 제일의 목표는 병사들을 상륙시키는 것이겠지.
‘이상하군.’
하지만 남려의 동해안은 몇몇 거점을 제외한 나머지의 땅은 사실상 큰 군대가 주둔하지 못할 정도로 환경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상륙에 성공하면 그들은 또 함정에 빠진다.
고려가 상륙 장소를 특정할 수 있게 되니, 해상에서 보급로를 끊어 서서히 말라 죽일 수 있게 되는 것.
애초에 다른 대륙으로의 원정 자체는 상당히 모험적인 결단이었다.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오로지 속전속결뿐.
혹은 현지에서 보급이 가능한 곳에 내리는 것 정도.
“…….”
몇 가지 가정을 상정한 상민의 표정이 굳었다.
“…함대의 배치는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시중의 침묵이 길어지자, 당장 움직여야 했던 제독들이 조급함을 참으며 말했다.
칼리나해는 몹시 위태로워 함대가 주둔하지 않으면 그간 개척한 모든 공로가 다 물거품이 될 것이다.
반면 동해안은 제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상황.
“근위함대는 평상시대로 태황강의 하류를 방어, 청해함대는 누에바 갈리시아를 포함한 칼리나의 방어를 맡는다.”
“아국의 동해안은 어찌합니까?”
“해안가에서 일정한 거리에 거주하는 자들을 소개시킬 준비를 하라. 그들에게 돌아갈 구호 식량은 재무부에서 협조를 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청해의 방위는 상당히 위태로울 것입니다.”
상민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곳은 제아무리 바다 위의 성채들이 몰려온다 하더라도, 지원군이 오기까지 적어도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시중의 말에 군부가 술렁였지만, 청해에 한 번이라도 다녀온 자들은 고개를 모두 끄덕이고 있었다.
군부는 육전 또한 회피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당하, 소장들을 믿어주십시오. 고려의 힘은 최고로 강력합니다. 이 세계에서 아국의 군대를 이길 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관리들과 의원들의 분위기가 계속 저조하자, 무장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허울뿐인 주장은 아니었다.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 어떤 나라도 그들을 이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동시대의 흐름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상민 또한 그 말에는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저들은 여럿이고,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지.
국가 단위의 전쟁을 치를 때, 변수는 되도록 적은 것이 좋다.
고려는 승리할 만한 여건 속에서 싸워야 한다.
상서성과 군부에 당면한 문제에 대해 지시한 상민은 그들이 퇴청한 이후에도 한동안 중서성의 의원들과 지방에 관해 토의를 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줄지어 출구 앞에 기다릴 때, 중서성 의원 한 명이 부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