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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07화 (107/653)

누벨 오를레앙(2)

상민이 불쑥 회의장을 나간 이후, 꽤 멀리서 어렴풋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연회장의 사람들 사이에선 적막이 흘렀다.

― 달그락

누벨 오를레앙의 기사들과 고려의 무사들이 제각기 먹던 음식을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약간의 적막감이 주위를 휩쓸었다.

“겁먹지 말게, 누군가를 초대하고 칼을 휘두를 만큼 경우가 없지는 않으니.”

프랑스 기사 사이에서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껄껄대며 입을 열었다.

처음 그들을 맞이하며 도열할 때 시중에게 실례를 범한 자가 틀림없었다.

저 구석에서 작은 빵을 주워 먹던 어린 수련 사제가 통역으로 끌려와 에티엔의 말을 전달해주자 고려의 무장 사이에서도 화답하는 이가 있었다.

이도의 아들이자, 숭무감을 졸업하고 임관된 청년 무장, 이유(李瑈)였다.

몸이 몹시 단련되어 체격이 좋고, 사나운 낯빛만큼은 에티엔과 비슷했다.

“초대? 자신의 적법한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을 프랑스어로는 초대라 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 단어를 귀환이라고 부르고 있다만.”

말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기색은 불손하기 그지없었다.

뉘앙스를 알아들은 에티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위협적인 얼굴로 수련 사제를 바라보았고 어린 사제는 덜덜 떨면서도 통역을 이어갔다.

제대로 통역을 받은 에티엔이 분개하는 낯빛을 띠었다.

“적법? 우리는 신성한 계시를 받아, 저 먼 유럽에서 이곳으로 와 진정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웠고 앞으로도 가꾸어 나갈 것이다. 엄연히 이곳은 우리의 땅이며 그대들은 단순히 손님이니 다만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을 권한다.”

반발하듯 콧방귀가 튀어나왔다.

이유 또한 한 치도 물러섬이 없었다.

대범하기로는 숭무감에서 해당 기수를 통틀어 제일로 꼽히는 인물이니만큼, 그의 언행엔 거칠 것이 없었다.

“이 땅은 한참 전에 우리 선제 폐하들께서 친히 순수(巡狩, 황제가 친히 변방에 나아가 둘러봄)하셔서 비석을 세우신 땅인데 그대들이 무슨 연유로 권리를 주장한단 말인가?”

물론 거짓말이 다소 섞여 있었다.

황제는 친히 순수하지 않았다.

거리가 얼만데.

하지만 상민이 대충 만들어 이리저리 심어둔 비석의 진위를 파악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석? 순수?”

기사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실 동양의 순수비(巡狩碑)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던 유럽인들로서는 고려가 무엇을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련 사제는 고려인 통역과 한동안 손짓 발짓을 해야만 그 뜻을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덕분에 번역은 조금 우스꽝스러워졌다.

“커다랗고, 큰 비석에 글자를 적어 넣은 것이라 합니다….”

― 와하하!

프랑스 기사들이 웃었다.

무덤도 아니고 무슨 비석 하나만을 달랑 세워놓고 저리 말을 하는 건가?

“그깟 돌멩이가 어찌 그대들의 권리를 주장한단 말인가?”

제 무덤이 이곳이라는 것을 참 예전에도 알았던 모양이구나.

미개하기 짝이 없는 이들이로다.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프랑스 기사들의 비웃음에 이유가 뒤틀린 얼굴로 화답했다.

“그대들의 선지자 또한 석판에 적힌 몇 개의 구절을 일컬어 하늘의 말씀이라 했다 들었는데? 명심하게, 똑바로 누워 하늘에 침을 뱉어 보았자 결국은 자신의 얼굴에 떨어지기 마련이니.”

― 으하하하!

고려인들은 이에 질세라 프랑스인들보다 더욱 큰 웃음소리로 화답했다.

“…….”

황제의 순수비를 모욕한 프랑스와, 모세의 십계를 모욕한 고려.

덕분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살기등등해졌다.

― 쾅!

에티엔은 물론 질과 기사들 모두가 분노했다.

“네놈 이교도들은 이곳을 살아서 나갈 생각이 없는 것인가?”

― 촤차착

기사들이 모두 검을 뽑았다.

고려의 무장들 또한 도집에서 도를 꺼내었다.

불빛이 도와 검의 끝에 반사되어 어지러웠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얼굴이 차갑게 굳은 이유가 한 손을 들고 주먹을 쥐어 보였다.

“그만.”

고려인들이 상관의 단순한 한 번의 손동작에 도집에 도를 수납하고는 자세를 정돈했다.

철저한 상명하복에 프랑스 기사들 또한 서늘함을 느꼈는지 얼굴에 서려 있던 분노 대신 긴장감을 보였다.

“실례했구려. 우리는 여기서 싸울 생각이 없소.”

시중은 그가 알기로는 몹시 뛰어난 무장이었다.

자신조차 상대가 될지 의문스러운.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도는 천성 문인이라 난리 통에 부친의 신변에 위험이 갈 수 있었다.

그는 말다툼에서 지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것이 더 큰 피해로 번지는 것을 경계했다.

고개를 숙이고는 한 발 물러서는 이유를 보며 에티엔이 또 시비를 걸려 나섰으나, 장이 이를 말렸다.

그들은 암수를 써 상대를 죽이려 드는 비열한 잉글랜드인이 아니었다.

“우리가 다음번에는 전장에서 만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일 필요는 없겠지.”

연회장의 무리들은 다시금 제각기 자리에 앉았지만 서로 어떠한 말도 오가진 않았다.

* * *

상민은 극도로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 숨을 골라야 할 정도로.

그녀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뭐, 조금 정도는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녀가 사기꾼이었다면 그녀 휘하의 장수들과 이단심문관, 그리고 유럽의 신학에 빠삭한 추기경들과 교황이 먼저 발견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수많은 의심스러운 눈길을 버틸 정도로 신앙과 확신으로 똘똘 뭉친 존재였다.

하지만 잔은 자신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그녀에게보다는 그냥 이 상황에 화가 났을 뿐.

생각해보면 경우의 수는 너무나도 많았다.

자신을 이곳에 떨어뜨린 그 전능함을 가진 자가 저들의 신앙의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었고, 애초에 잔 자체가 그저 조현병에 걸려 자기암시가 대단한 천재 소녀일지도 몰랐다.

혹은 그냥 그 전능한 존재가 대답하기 싫어했을 지도 모르지.

그는 피식 웃었다.

그래서, 이다음은 뭐지?

뭐 칼리프나 이맘에게 가야 한단 말인가?

그들도 명칭과 역사, 교리가 다를 뿐 같은 존재를 모시고 있지 않은가?

상민은 그나마 살면서 접점이라도 있었던 기독교나 불교에서 해답을 느끼지 못하자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평생 익숙지도 않았던 수많은 종교들을 모두 찾아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쿠르릉

밖에서는 천둥이 쳤다.

날씨가 꽤 변화무쌍한 마야만답게 비가 한바탕 쏟아지려고 하는 모양이다.

상민은 정처 없이 성 내를 거닐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가야 할지를 도무지 모르겠다.

성안은 꽤 단조롭게 지어진 듯, 그는 마침내 다시금 연회장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상민이 자리로 다가오자, 고려인들이 모두 시립하려 했다.

“그만.”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신경 쓸 건 아니다.”

상민은 자리에 착석하지 않고 다시금 그 연회장을 통과해 회의실로 향했다.

무례를 저지른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기 위해, 그리고 최후통첩을 날리기 위해.

상민이 다가가 보니 회의실 안쪽에선 여전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허면 왜 그런 것입니까?”

“그것은….”

“…….”

상민은 노크를 하며 그 안을 들어갔다.

주교 마티외라 했는가.

머리가 벗겨진 것인지, 아니면 원래 수도회의 인물들이 저렇게 깎는 것인지는 몰라도 마치 파키케팔로사우루스마냥 가운데가 휑 한 주교는 대체 무슨 이유에선지 이도의 질문에 선선히 응하고 있었다.

이도는 빈 종이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고.

‘의도가 불순할 것이 뻔하지만.’

어쩌면 주교는 그가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어린 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주교 마티외가 만약 이도가 저술하고 있는 책의 이름을 알게 된다면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지겠지만, 이도는 그의 속셈을 잘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랜드 마스터는 어디에 있습니까?”

주교가 힐끗 그를 보더니 다른 방을 가리켰다.

“그분은 참회실로 들어갔습니다.”

“…알겠소.”

참회를 하는 인간을 끄집어낼 수는 없었기에 상민은 물러났다.

시간은 졸지에 많아져 버렸다.

비바람은 더욱 거세지고 있으니 고려의 함대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자신들 또한 꼼짝없이 이곳에서 하루를 더 묵는 수밖에.

* * *

연회가 끝난 연회장 가운데에서 무장들이 모닥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사방에는 감시의 눈길이 있었지만 어찌 쉴 만했다.

상민은 귀한 신분답게 편안한 방을 제공받았지만 여러 이유로 굳이 따로 묵지 않는 것을 택했다.

깊은 새벽.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조용했다.

불침번을 서던 무장들은 제각기 도의 손질을 끝냈는지, 나무조각을 다듬거나 놀이패를 주고받고 있었다.

긴 나무 의자 위,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상민이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오셨습니까?”

“송구합니다, 시중.”

영감이 떠오른 모양인지, 늦게서야 이곳으로 합류한 이도의 눈동자는 벌게져 있었다.

아마 오랫동안 시달린 마티외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주교를 구워삶은 솜씨가 일품이구려.”

이도는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그들의 종교가 혼미하다 하더라도 그 성직자가 모두 악인은 아닌 듯합니다.”

마티외의 인품에 대해 칭찬한 이도가 열심히 적은 종이들이 전부 말랐는지를 확인하고 정돈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상민이 불쑥 물었다.

“충녕공께선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싶으셨소?”

이도는 뚱딴지같은 말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한때는 저 또한 보위에 오르는 것이 꿈인 적도 있었지요.”

먼 조선이라는 땅에서 이도는 자신의 대군 시절을 회상하며 말했다.

“허나 저는 지금 이 생활이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이도는 권력욕이 있던 만큼이나, 학구욕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자신의 삶에 정녕 만족하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상민은 복잡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진로에 대해선 혼란스러웠다.

상민은 마음만 먹으면 영원토록 이 나라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지만 스스로 전능한 신이 되지 않기 위해 제위에서 물러났다.

그 후로도 음지와 양지에서 지금껏 한 나라를 위해 살아온 것이 전부였고 그 이상의 거대한 목표를 가지지는 않았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원대한 목표였겠지만.’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나가야 하는가.

“충녕공,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하오?”

상민은 자신이 만난 동시대 최고의 천재에게 답을 구했다.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이성과 지성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이도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했다.

“옛 선현들은 자신을 갈고 닦은 이후, 남을 돕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렇소?”

“또한 위정자로서는 신민들을 배불리 먹이고, 외세의 침략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혹은 개인적으로는 부모를 공경하며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돌보아 가정을 평탄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소?”

“자신과 신민들의 행복이 있겠지요.”

이도는 웃으며 덧붙였다.

“시중, 인생과 정치는 결국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객체의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벼락과도 같은 말에 그는 전율했다.

자고이래로, 통치자는 저 간단한 상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괴물이 되어버렸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 변질된 수많은 지배자들.

고려의 충혜왕과, 앞으로 즉위하지 않을 연산군.

중원의 제양공과 왕망, 유송의 전폐제와 후폐제.

무제와 소문제, 수양제 등.

비단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 역시 마찬가지의 사례들이 널리고 널려 있었다.

오로지 군림하기 위한 통치자들.

자신은 대전략게임을 할 때에는 분명히 이러한 소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팽창해가는 국력을 가질 때마다 희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지.

그러나 그는 이제 나이가 먹을 만큼 먹었다.

지나칠 정도로 먹었다.

건국을 다짐하며 했던 권력욕은 이미 충분히 채웠다.

세상 사람들의 꼭대기에서 군림하며 살아온 지 백 년.

이제는 더 이상 영광과 광휘만을 쫓고 살아갈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고 심지어 필멸적인 죽음에 대해 초조함을 가질 운명도 아니었다.

통치는 목적이다.

결국은 자신의 신민들을 행복하게 하는.

그것은 비단 통치에 한정되지 않았다.

인생과 종교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리석었구나.’

진작부터 그에게 신은 필요가 없었다.

필요가 없어야만 했다.

이 세상, 그리고 자신의 인생은 신이라는 존재에 의해 채점받는 시험지가 아니었다.

설령 채점받는다 하더라도 오로지 역사에 의해서만 받을 것이니.

상민은 불현듯 이도가 든 책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책이 두꺼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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