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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106화 (106/653)

누벨 오를레앙(1)

― 촤아아

선수상에 닿을 만큼 유난히 큰 물결이 산산이 부서졌다.

오랜만에 바다에 나와 그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옆에 자리한 청년 무장은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민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뭐가 그리 심통이 났느냐?”

“시중께서 굳이 이곳에 오셔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청해 함대의 진로는 명백했다.

청년의 불만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번 불만을 가진 그의 말은 다소 거침이 없었다.

“또한 저들은 기껏 수천이며 주민들을 전부 합하여도 몇만에 불과합니다. 제아무리 고려의 육군을 동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청해의 해군이라면 충분히 밀어버릴 수 있는 것인데, 어찌 결단을 주저하십니까?”

“그들은 기사가 많으며 휘하의 병사 자체도 많은 전장을 구른 자들이다. 전면전을 하여 많은 피를 흘릴 이유는 없다.”

상민은 말을 하고서도 자신의 모순을 느꼈다.

삼별초의 강력한 무장이었던 자신이 조금의 희생이 무서워 저들을 삭초제근하길 두려워한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지.

청년도 그것을 느꼈는지 불퉁한 기색이 더 심해졌다.

“오직 겁쟁이들만이 싸우지도 않은 채 미리 패배를 근심하는 것입니다.”

“…….”

“말을 삼가거라!”

뒤에서 약간의 다그침이 들려왔다.

이도는 무엇을 하는지 선실에 박혀 있다가, 계속 글을 읽는 것이 멀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은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의 언행을 바로 꾸짖었다.

시중이 그와 그의 아들들에게 몹시 우호적이었으나, 그 선은 지켜야 했다.

“편찬하시고 있는 서책은 진전이 잘 되고 있습니까?”

업무를 보는 공적인 자리에서야 자신이 상관이었으나, 사적인 자리에서 그는 황제의 장인이며 자신과 비슷한 공의 위치였다.

게다가 자신의 생각 밑바닥에 깔린 공경하는 마음은 여전했기에.

‘이곳에 와, 오히려 더 밝게 빛나고 있구나.’

그는 앞으로 비단 한민족의 성군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로 꼽힐 것이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아직은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본인은 그러한 생각을 전혀 하고 있지 않은 모양이지만.

그가 현재 저술하고 있다는 순수종교비판의 완성본을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만, 그는 진득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상민은 철학적 관점에서 딱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직 고등학교 수험 생활과 대학교 때 몇 가지를 암기했고 책과 신문, 사설과 여러 매체를 통해 어렴풋이 보고 들었을 뿐.

감히 고려의 ‘칸트’에게 자신의 헛된 지식을 알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내 존재를 더 깊이 아는 순간 그의 철학은 훼손되고 말 것이다.’

싹트고 있는 계몽주의.

하지만 자신이라는 괴상한 존재는 그 씨앗에게 제초제로 작용할 것이니.

상민은 문득 쓸쓸하게 웃었다.

‘지숙, 그대가 보고 싶구려.’

조정의 신료들 중, 자신이 가장 신뢰했으며 속을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던 김지숙의 얼굴이 오늘따라 그리웠다.

이도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가자, 선수루 위에는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

상민은 이도의 아들, 이유가 말한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겁쟁이라.

‘그럴 수도.’

상민은 눈을 감았다.

그는 두려웠다.

이는 아마 이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종류의 두려움일 것이다

‘한 번 받은 선물을 다시 빼앗아가는 것은 매우 쉬운 법.’

거대한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자신의 운명이란 그 손바닥이 억세게 쥐어진다면 반항도 못 하고 터져버릴 그러한 달걀에 불과했다.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손바닥의 주인과 대면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그에게 확신을 줄 테니까.

* * *

청해의 함대는 그 면면이 화려했다.

기존의 범선, 즉 상민의 기준으론 초기 카락이었던 여명급 함선은 이미 세월의 뒤로 퇴장했다.

그 후에 등장한 제대로 된 카락급 범선은 대체로 주장선(稠檣船)으로 통칭되는 경우가 많았다.

돛대가 많다 하여 붙은 범선, 주장선은 또 전투용과 상업용으로 나뉘는데, 전투용 주장선은 선미루와 선수루가 상업용보다 훨씬 높고 커 망루와 같다고 하여 누장선(樓檣船), 혹은 누범선(樓帆船)이라 따로 칭하기도 했다.

옛 고려와 중원의 누선(樓船)에서 그 이름이 기원했다 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 높이와 크기를 비교하기에는 고려의 누장선에게 미안했다.

물론 연해로 들어가면 수많은 종류의 작은 배들이 있었다.

고려의 옛 초마선과 맹선을 개량한 것들도 있었고, 연안용 쾌속선도 존재했다.

그러나 대해로 나가기에는 무리였으며 유의미한 전력이라고 평하기에도 하자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 대체로 고려는 계속 개량되고 있는 탐사용 협저선과 상업용 주장선, 전투용 누장선을 운용하고 있는 셈이었다.

청해 함대는 그중, 전투용 누장선만 무려 열다섯 척에 달했다.

상업용 주장선은 서른 척이 넘었고.

유사시에 상업용 주장선 또한 개장하여 무장이 가능하니, 마음만 먹는다면 거의 사십, 혹은 오십에 가까운 수의 전투 함대를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고려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해양 세력을 만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전투용 범선에 대한 개발이 지지부진한 감도 있었다.

‘그래도 현시점 세계에 고려에 어찌 감히 해상전을 시도할 생각을 품을 수 있는 나라는 오직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청해의 함대 말고도, 고려 근위함대 또한 존재했다.

그들은 지역방위전략으로 웬만하면 고려의 핵심 도시들이 위치해 있는 태황강의 해문에서 벗어나지야 않겠지만.

상민은 상의 주머니의 시곗줄을 당겨 회중시계를 꺼냈다.

우아하게 장식된 회중시계는 째깍거리며 잘도 돌아갔다.

시곗줄과 연결된 열쇠를 이용해 안의 태엽을 제때 돌려주기만 하면 이제는 지구 어디에서나 시간을 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 탈진기(脫進機, 외부의 진동을 줄여주는 장치)라는 것이 개량이 된다면 훨씬 더 정확해지겠지.’

물론 그는 지금도 만족이다.

이 정도의 항해를 가지고도 연안항해는 충분히 정확하게 갈 수 있었다.

마제도에서 전주를 거쳐, 파남에 정박하여 개척지의 상황을 살핀 상민은 마야의 스토커들은 건너뛴 다음 목적지로 직행했다.

일주일 후 그들은 마침내 누벨 오를레앙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려에 뿌리내린 유럽인들의 두 번째 개척지.

또한 가장 강력한 개척지이기도 하다.

누에바 갈리시아는 갈리시아의 엔리케가 어찌 뭘 해보려고 해도 본국의 지원이 시원찮았다.

알바로 데 루나는 몰락했더라도 한때의 정적을 후원해 줄 정도로 관대한 사람이 아니었다.

반면 누벨 오를레앙은 교황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

그 기세를 알려주듯 항구에는 많은 포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사거리는 고려의 발달된 청동 대포에 비해 짧겠지만, 어찌 되었든 육지의 포대 자체는 부서지고 침몰할 수 있는 선박의 포대보다 훨씬 안정성 있게 운용 가능한 전술적 무기였다.

하지만 그를 감안해보더라도 고려의 전력은 그들보다 엄연히 몇 수 위였다.

이는 사절로 방문한 고려인들의 자신만만한 태도에서도, 그리고 이 함대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유럽인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다.

“준비는?”

“명령만 내려주소서. 청해의 함대는 통령의 부름에 언제나 응답할 것입니다.”

선장은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듯 단단하게 대답했다.

* * *

항구에 도착하니 마중을 나온 기사 둘과 병사 몇십 명이 그들을 에워쌌다.

딱히 불손하거나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프랑스 기사들은 감정을 숨긴 채, 고려인들을 내부로 안내했다.

주변의 광경을 눈에 담는다.

이것 하나하나가 모두 전략적 자산이었다.

‘겁 없이 외지로 들어가는 버릇은 나이를 먹어도 고치기 힘들군.’

― 펄럭

푸른 바탕에 흰 십자가 그려진 문양.

스코틀랜드의 국기를 돌려놓은 듯한 문양이 그들의 깃발과 그들의 옷에 그려져 있었고 성벽과 망루에 꽂혀 있었다.

주변은 한눈에 보기에도 군기가 넘치고 몹시 질서정연했다.

기사들이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도열해 있는 것이 상당한 위압감을 선사해 주었다.

백년 전쟁이라는 길고 길었던, 그리고 끔찍했던 아수라장을 헤쳐나온 역경의 전사.

어디서 많이 들은 이야기가 아닌가?

‘…비슷하군.’

이들은 고려의 삼별초와 너무도 많이 닮아 있었다.

몽골과의 대전쟁 이후, 이곳으로 쫓겨 들어온.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은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검들은 자신들을 지극히 경계할지언정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중 맨 끝에는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여인 한 명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프랑스인.

경번갑과 비슷했지만 기동성보다는 방호성에 치중한 묵직한 판금갑옷을 입은 여인의 머리카락은 목 보호구까지는 내려오지 않았다.

입술은 붉고, 눈과 코를 비롯한 이목구비는 크고 곧다.

피부는 화장을 하는 다른 귀족 여인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아, 수많은 전투의 흔적까지 숨길 수 없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생기있었다.

대체로 아름다웠고, 대체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보기에는 그녀의 눈빛과 분위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프랑스를 구원한 처녀.

몇 명의 사학자들은 그녀의 능력을 의심했다.

단순한 행운이 겹친 일도 많았으며, 그녀의 휘하에는 상당한 수의 명장들이 포진해 있었다며.

따라서 그녀는 어쩌면 필연적인 흐름을 타 성공한 운이 좋은 사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의심하기에는 그녀의 등장 전 프랑스의 상황이 너무나도 좋지 않았다.

카스티야의 노골적인 지원에도 프랑스는 성녀의 등장 전까지 어떠한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패배했으며, 그 잘난 명장들 또한 마찬가지.

결국 그녀가 조국을 살린 것은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리고, 상민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녀를 본 순간 그녀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도열한 기사들.

그 쟁쟁하며 명예욕과 호승심에 살아가는 그러한 자들을 통솔할 수 있는 불과 스무 살 중반의 여인.

잔은 분명히 시대의 영웅이다.

상민은 천천히 그녀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고무를 섞은 군화지만, 밑창은 전투용으로 개발되어 금속을 덧대었다.

그 특유의 소리.

신장만큼은 동시대의 북유럽인보다도 훨씬 컸던 상민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기사들의 위압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 절그럭

누군가 의도적으로 실수를 가장해 자신이 가는 길에 한 걸음 나와 위협하는 제스쳐를 취했다.

상민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선조차 두지 않으며 칼날같이 쏘아 보낸 살기에, 에티엔이 지레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 크흠.

상민은 마침내 그 대열의 끝에 도달했다.

전설 속에나 나올 시대의 위인을 마주한 상민은 손님의 예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이런 일에 놀라기엔 자신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Bonjour.”

잔이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놀랐다.

이윽고 그녀도 사절에 대한 응당한 예의로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려의 재상이여.”

* * *

고려는 그 ‘정체불명의 함대’에게 납치된 선교사들과 그 일행들을 온전하게 이곳으로 데려왔다.

따라서 누벨 오를레앙의 분위기는 그렇게 험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스스로 이곳에 발을 들이민 고려인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셈이었다.

비록 항구의 앞에 거대한 선단들이 기세를 올리고 있다 하더라도.

착각은 자유라고 할 수 있겠지.

어찌 되었든 조촐한 연회가 벌어졌다.

그토록 싸운 이슬람과 기독교인도 가끔은 식사를 같이 했었다 한다.

본래의 대적이라는 사실은 서로가 인지하고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로가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을 위해 축배를 들 정도의 여유는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상민은 본인은 그러한 여유가 없었다.

그것은 잔을 본 순간부터 강렬하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질문.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찾아왔었다.

―절그럭.

긴 탁자 위에 놓여져 있는 감자와 고구마를 다소 불만스럽게 노려보던 상민이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향해 말했다.

“오를레앙의 그랜드 마스터에게 독대를 청하오.”

좌중의 시선이 쏠렸다.

아무리 일국의 재상이라지만 그 사람이 이곳의 지휘관이자 단장인 잔과 독대를 청하는 것은 불안한 면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무리 강인한 척을 하더라도, 육체의 능력 자체엔 한계가 있는 여성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잔은 즉시 대답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음식에 손을 뻗고 있던 에티엔과 질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저도….”

“저도 같이 가지요.”

그러나 잔은 상민의 요구대로 오직 주교 마티외만을 대동한 채 유유히 회의실로 들어갔다.

질이 괜히 에티엔을 노려보았다.

* * *

“말씀하세요.”

잔은 드디어 이 사내가 방문의 목적을 털어놓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천천히 입장을 정리했다.

호출된 마티외가 뒤늦게 도착할 때까지 상민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저 회의실 한구석을 바라볼 뿐.

그곳에는 벽에 걸린 거대한 십자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 달칵

마티외는 머뭇거리다가 잔의 시선에 회의실의 문을 잠갔다.

상민이 그 소리에 그녀와 마티외를 잠시 바라보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실합니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무슨 장치가 되어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둘 모두 고개를 저었다.

“또한, 우리가 나눈 대화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을 것입니까?”

“…주님께 맹세코.”

잔과 마티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해성사를 하는 사람과, 성녀라는 입장은 적어도 입 하나는 무거울 것이다.

‘그렇다면 믿어도 좋겠지.’

후우.

상민이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마티외와 잔을 향해 꿇은 것은 아니었다.

등 뒤의 사람들이 몹시 놀란 것이 느껴졌다.

시간은 저녁이니, 저녁기도가 좋겠지.

그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조용히 성호를 그렸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털썩

상민의 말과 동시에 마티외는 너무나도 놀라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지 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잔 또한 부릅뜬 눈으로 그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주님, 오늘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자세히 살피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깨닫게 하소서.”

귀에 들리는 언어는 특이하다.

이것이 고려어라는 사실은 당대의 유럽인들도 몇 명은 알고 있었다.

잔 또한, 바티칸에서 그들의 언어를 포교용으로 간략하게나마 접했기에 몇 개의 단어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제례는 너무나도 같았다.

성호의 순서와, 성호의 표식 또한 같았다.

모아쥔 두 손과 성십자 앞에 무릎 꿇은 것도 지극하게 경건했다.

또한, 마지막으로 그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간절함까지 느껴지는 것은 대체 왜.

잔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

대체 왜?

기도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 모습은 짧지 않았고, 동음은 반복되지 않았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 억지로 내용을 읊어가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 어조와 기색 또한 너무나도 친숙했다.

눈앞의 외국인은 분명히 보편교회의 마땅한 제례를 올리고 있었다.

마침내 거구의 고려인 사내가 예배를 마치고 일어섰다.

그리고 그 담담한 눈이 그녀와 마주했다.

끝도 없는 심연과 같은 동공 뒤에는, 한 줄기의 기대감과 눌러놓은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묻겠소. 바티칸의 공인을 받은 성녀여.”

상민이 무교 주제에 굳이 구차하게 어린 시절 천주교 보육원에서 배운 기억을 괜히 끄집어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확인받을 것이 있었다.

옛 고승들, 보성과 해심도 그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지.

그는 정말로 답을 찾고 싶었다.

“주님께선 이 사람에게 어떠한 말을 하고 계시오?”

잔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 자신도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저자가 교회의 성스러운 기도를 하는 것이며.

저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이고,

저자는 무엇 때문에 저리 방황하고 있는가?

그녀는 말씀을 구했다.

보통 주님은 그녀가 혼란스러워할 때에나, 그녀가 도움을 청하면 천사들과 성인들을 통해 답을 내려주셨다.

그렇기에 그녀의 행보에는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었다.

지금까진.

다시 뜬 그녀의 두 눈엔 그녀 자신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한 황망함만이 가득했다.

“…그분께선.”

지나치게 공허하다.

마치 자신을 감싸고 있는 그 성스러운 후광 자체가 사라진 듯한 느낌.

동레미에서 보았던 성 미카엘도, 성녀 카타리나, 성녀 마르가리타 모두 대답해주지 않으셨다.

잔은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대답했다.

“아무 말도 없으십니다.”

상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대감은 무너졌고, 버려졌다.

이윽고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으며 일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 방문을 박차고 나섰다.

뒤에는 주저앉은 주교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잔이 남겨졌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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