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전조(1)
“유럽이라….”
쿠스코에 처박힌 해윤은 국제 정세에 어두웠다.
그에게 유럽은 바다 건너의 나라들에 불과했다.
“카스티야가 본격적으로 북려대륙에 발을 디뎠소.”
카스티야 귀족 사회의 정쟁이 알바로 데 루나의 승리로 굳어지면서 반대파들은 모두 실각의 위기에 처했다.
알바로는 정적인 비예나의 공작 엔리케를 실각시키는 것에 성공했으나, 차마 인판테(이베리아의 왕족)를 죽일 수는 없었다.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을 것이다.
그의 주군 후안 2세 또한 사촌 엔리케를 상당히 싫어했으나 엄연히 같은 트라스타마라 가문이었으며 삼촌인 아라곤 왕 페르난도 1세와의 관계 등을 고려해 죽이고 싶은 생각까진 없었다.
그래서 알바로는 그 짐덩어리를 북려대륙으로 보내버린 것이리라.
“아국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까?”
“…황상, 북려대륙은 아직 우리의 땅이 아니라오.”
해윤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들이 이 땅의 존재를 알아차린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북려대륙은 열정적인 상인 탐험대에 의해 탐사되었던 모양이다.
다양한 국적의 상인들은 많은 후원자들을 등에 업고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교류가 확산되며, 유럽 세력은 강력한 고려의 힘을 알게 되었지만 반대로 약한 부분도 어느 정도 눈치채버린 모양.
유럽의 첫 번째 개척지는 플로리다 즈음에 생겨났다 한다.
“골치 아프군요.”
“전면전을 하기에는 고려 또한 여의치가 않으니.”
고려의 대육군이 북부 태동산맥에 묶여 있는 상황, 해군만으로 고려의 방위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소손이 만약 타완틴수유 정벌을 하지 않았다면, 그 병사들로 북려대륙을 수호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해윤은 심지어 약간의 후회하는 감정도 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들은 상민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황상의 결단은 실로 옳았소. 만약 파차쿠티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었다면 그는 고려의 심환 수준이 아니라 대적이 되었을 수 있었으니.”
강력한 인구와 충분한 잠재력를 가진 타완틴수유가 본격적인 문명을 열었다면 고려는 한동안 크게 고생을 했을 것이었다.
또 북려대륙에 개척지들과 병사들을 흩뿌려놓는다고 그 땅들을 전부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은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은 체급으로 결정되는 것이니까.’
카스티야에 의해 새롭게 건설된 개척지는 누에바 갈리시아(Nueva Galicia), 그 도시는 산티아고 데 라 누에바 갈리시아(Santiago de la Nueva Galicia)라 불렸다.
“그곳의 총독은 인판테 엔리케라 하지.”
이제부턴 그놈을 편의상 갈리시아의 엔리케라 하자.
그놈의 엔리케(Enrique).
포르투갈어로는 엔히크, 영어로는 헨리, 프랑스어로는 앙리라 불리는 이름이며 이 시대에는 상당히 흔한 이름이었다.
이놈도 엔리케, 저놈도 엔히크.
당연하게도 포르투갈의 항해왕자 엔히크와는 별개의 인물이었다.
“카나리의 대공은 어째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까?”
해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 또한 카스티야의 봉신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자들은 단지 상인에 불과했다. 귀족의 탈을 쓴 상인.
“분명 아국은 그들과 우호적인 교류를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상민은 피식 미소지었다.
“황상, 국제 관계는 철저한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되는 법이라오. 하물며 우리가 카스티야와는 포르투갈처럼 명문화된 조약을 맺은 적이 없기에 더욱더 그러할 것이지.”
희망곶 조약에 따라 서쪽에서 눈을 거둔 포르투갈은 인도에 도달해 열심히 개입을 하고 있는 모양.
희망곶을 내준 것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북려대륙을 범하려는 것이 오직 카스티야뿐입니까?”
“불행하게도 아니오.”
상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도성에서 가져온 유럽의 최신 동향을 그린 지도를 펼쳤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이 프랑스의 대승으로 끝나며, 잉글랜드는 하루아침에 대륙에 대한 교두보를 모두 잃었지.”
“그렇게 빨리 끝날 전쟁이었습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 같소. 교황이 움직였다는 소문도 돌았고.”
상민은 얼굴을 찡그렸다.
자신이 수박 겉핥기로 배운 세계사적 지식은 이미 크게 뒤틀렸다.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까지.
* * *
고려인 신원길은 세계 최초로 세상을 일주하며 고려에 엄청난 자긍심을 불어넣었다.
그는 나이가 많아지며 가정에 충실하기로 한 모양인지 아름다운 포르투갈의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딸을 잘 낳고 오순도순 살고 있는 모양.
그러나 그가 던진 파문은 결코 작지 않았다.
원길은 고려인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었다.
그 자긍심은 가끔은 이상하게 변질되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고려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가능성에 대한 무궁무진한 상상들.
황실에 대한 권위와 조정에 대한 믿음.
우리가 해낸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측정할 수도 없지만 이 사회적 분위기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사회에는 미풍양속이 퍼져나갔으며, 이웃은 이웃을 도와주었다.
유리걸식을 하는 이들은 줄어들었고 내방의 범죄 또한 감소하였다.
압도적으로 찬란한 문화에 원주민들은 빠르게 동화되었고, 그들의 옛 정체성 대신 고려의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사현제가 아닌, 해윤을 통칭하여 오현제의 시대로 불리게 된 시기에 접어든 고려는 황금기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 * *
하지만 원길은 또한 유럽에게 경각심을 불어넣었다.
이것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세상을 관조하며 탄식했다.
‘기독교는 바람 앞의 등불이구나!’
카톨릭은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옛 이웃까지.
과거,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형제였으며 둘 다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였지만 그들의 후계는 서로 멀리 갈라지고야 말았다.
베드로의 후계는 로마에 거했으며 안드레아의 후계는 콘스탄티노플에 자리를 잡았지.
그러나 동서대분열 이후에도 그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했을지언정 딱히 반목하진 않았다.
과거에 있었던 상호 파문 사태는 정치, 종교적으로 그렇게 유의미한 상황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 후 형이 저지른 단 한 번의 죄악의 대가는 참으로 거대했다.
제4차 십자군 원정.
이교도에게 겨눴어야 할 칼날은, 동생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대신 콘스탄티노플을 불태웠고 동로마는 그 일격 이후 재기불능의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이제 그 업보로 오스만은 로마를 멸망시킬 것이다.
‘지기스문트….’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는 니코폴리스에서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에게 대패하며 희망의 불씨마저 꺼트렸다.
발칸반도는 이제 어떠한 개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의 난민을 이탈리아의 땅에 받아들이는 것뿐.
비단 오스만만 문제인가?
아니었다.
서쪽의 거대제국은 세계일주라는 대업을 세우면서 기독교적 천문학의 틀을 부쉈다.
박살 내다 못해 그 파편까지도 꼼꼼하게 망치로 분쇄해 버렸다.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신학자들 또한 동의하는 사실이었으며, 대서양의 횡단 이후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동설은 의미가 달랐다.
일부 깨어있는 신학자들과 천문학자들은 그 가능성에 대해 인정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먼 이교도, 불교도들에 의해 발견된 사실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매우 정교한 태양력인 정일력도 마찬가지.
전통 농경사회에서 정확한 달력이란 무시무시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고려의 학자들이 수많은 자료를 모으고 긴 세월 동안 수정을 거듭해 만든 이 고려의 정일력은 마르티노 5세조차도 무심결에 찬탄을 할 정도로 정교했다.
세상의 중심은 그들이 아니었다.
종교의 권위엔 큰 흠집이 났다.
만사비변과 불폐논변으로 대표되는 불교도들끼리의 '종교 비판'은 카톨릭 사회에 조그마한 파문을 던졌다.
지금은 단순히 계란의 껍데기에 흠집이 난 것에 불과했지만.
마르티노 5세는 그 새로운 사상들과 새로운 관념들에게서 불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아직은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은 예전보다 좋았다.
카스티야와 제노바는 그들과 단순히 통교를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누리고 있었다.
이탈리아 역시 마찬가지.
마르티노는 꼭대기에서 그 황금의 줄기를 쥐고 있는 교황이었지만 매일 밤 침대에서 악몽을 꾸었다.
서쪽의 미륵과 동쪽의 무함마드.
‘오, 주님.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마르티노 5세는 큰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해야만 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장 혼란에 빠진 유럽부터 수습해야 했다.
교황의 권위는 서구 대이교 이후 떨어졌으나 아직 조금은 날이 서 있었다.
― 발루아와 플랜테저넷의 전쟁은 지금 부로 중단하라.
손에 쥔 이탈리아의 황금과 목에 걸린 십자가의 권위로 마르티노 5세는 기나긴 백년전쟁에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 모두 반발이 심했다.
비록 전황은 프랑스에게 극도로 유리하게 흘러들어가고 있었지만, 아직 잉글랜드가 가진 대륙의 땅 또한 많은 상황.
마르티노 5세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발루아가의 샤를 7세를 적법한 프랑스의 왕으로 인정한다.”
잉글랜드는 또한 교황에 의해 일 드 프랑스를 샤를 7세에게 줘야만 했다.
어차피 지고 있었지만, 강제로 빼앗기는 것은 상당한 수치.
잉글랜드는 교황의 과도한 개입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 어찌 성하께서 이럴 수 있단 말이오?
잉글랜드는 특사를 보내 따졌으나 마르티노 5세는 매우 단호했다.
― 그대들도 그대들이 앞으로 프랑스에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발루아의 프랑스는 예전과는 달랐다.
과거엔 무너질 듯 무너지지 않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마치 등 뒤에 견고하게 벽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잉글랜드의 섭정공 베드포드 공작 존은 이를 갈면서 답장했다.
― …그렇다면, 그년만큼은 교황께서 처리를 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 그 성녀.
마르티노 5세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집어 들었다.
“아르크의 잔은 바티칸으로 와 직접 그리스도의 대리자 앞에서 재판받으라.”
* * *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기나긴 전쟁은 결국 1433년에 공식적인 종말을 맞았다.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오를레앙의 성처녀, 잔 다르크를 발굴해 내 한창 북부를 유린하던 잉글랜드군을 오를레앙에서 패퇴시켰다.
그 후로도 잉글랜드는 이 ‘성녀’라는 존재에게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녀의 재능은 무엇일까?
신의 목소리?
아니면 일신의 군사적 재능?
잉글랜드는 그 해답조차 찾지 못하며, 무력하게 랭스와 보르도를 빼앗겼으며 마지막엔 일 드 프랑스 전부를 내줘야 했다.
프랑스는 잉글랜드의 예상 이상으로 강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했으나, 카스티야와 제노바 등, 프랑스의 동맹국들이 갑자기 재정적으로 활기를 띠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순 있었다.
저 거대한 대양 건너편 남쪽의 제국과 교역이 열린 탓에.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군사적 지원은 부족하지 않게 된 셈이었다.
‘패배는 필연적이니 더 이상 왕실의 금전을 낭비할 순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실리를 챙기려고 했던 베드포드 공작은 정작 귀족들의 신망을 전부 잃어버렸다.
가뜩이나 그의 섭정기에는 패퇴뿐이었으니.
섭정공도 무능했을뿐더러 심지어 겨우 열 살 남짓한 헨리 6세가 정신병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국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잉글랜드의 정계는 바야흐로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부터 심어진 불화의 씨앗은 흰 장미와 붉은 장미 간의 전쟁으로 격화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 칼레와 노르망디 일부를 제외한 잉글랜드가 점유했던 땅들을 재정복하는 것에 성공한 프랑스는 그 기세가 몹시 올랐다.
봉건귀족의 힘은 극도로 약화되었고 ‘승리왕’ 샤를 7세의 권위는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계층회의인 삼부회는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국왕의 권위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졌다.
절대군주제의 기틀이 잡힌 셈.
또한 카스티야로부터 들어온 진보된 화약 무기는 기사 시대에 종말을 고함으로서 중앙군의 기틀을 다질 명분에 크게 일조를 하게 되었다.
실로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부담스러운 여자 한 명을 제외한다면 말이지.
샤를이 그 ‘신성한’ 존재에게 부담감을 느낄 때 마침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직접 그녀를 바티칸에 거둘 의향을 보였다.
샤를 7세는 냉큼 그녀를 바티칸에 바쳤다.
그녀와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마르티노 5세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너는 보았느냐?
― 네,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느냐.
― 동쪽과 서쪽에서 사악한 악마가 일어나 이곳에 불을 뿜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는 프랑스의 딸이지 않았느냐?
― 저는 단지 주님의 딸입니다.
너는 그것들을 막으려 하느냐?
― 신의 사도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네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느냐?
― 성인들께서는 오직 유럽의 편에 서 계십니다.
선종한 마르티노 5세의 유해 앞, 그녀는 검에 대고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