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98화 (98/653)

불교(2)

극단주의 무장 불교 만종은 노골적인 저격에도 별로 타격을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승려의 무리가 아니었다.

광신적이었을 정 무능하고 부패하진 않았으니.

오히려 검소함 혹은 독신함에서 다른 종파보다 더욱 돋보였던 만종은 빠르게 변화해가는 종단 특유의 활동성 또한 두드러져 종교의 윗물부터 아랫물까지 모두 활기가 넘쳤다.

‘마치 초창기의 기사단처럼.’

예루살렘을 수호하기 위해 결성된 기사수도회, 성전기사단(Knight Templar)의 초창기 모습이 딱 저랬을까.

그러나 아무리 구성원들이 열성적이며 검소하고 규율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집단을 형성하는 순간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중세 봉건 시대에 과도할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소유하고 있다면 더더욱.

해윤이 저들에게 수여한 토지는 곧 그들의 성역이 될 것이며, 그들이 받은 호의는 그들의 권리로 변질될 것이다.

오로지 프랑스의 군주만이 성전기사단을 박살 낼 수 있었듯, 고려에서 이를 해결할 사람은 해윤뿐이었다.

‘다소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하니, 내가 가는 것이 맞겠지.’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나, 잠시간의 시찰을 다녀온다 생각하고 가는 것이 마음 편할 것이다.

상민은 손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궁리하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다녀오세요.”

이제는 아내가 된 연화의 배웅을 받으며 그가 여정길에 올랐다.

* * *

창강과 적강이 만나는 지점, 즉 양수까진 선박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나 그 위부터는 도로를 통해 가야 했다.

자신은 말에 몹시 능숙하니 다른 고관들마냥 마차가 필요 없었다.

오직 소수의 호위만 대동하는 것이 전부였다.

준마들이 도로를 빠르게 내달렸다.

속도는 빨랐지만 거리는 아득히 멀었다.

북쪽의 관문도시, 북령(北嶺)까지는 다소 완만한 지형이라 쉽게 달려올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안데스의 시작이다.

‘이제는 다르게 불러야겠지.’

그동안 이 산맥을 말할 때 현지어를 굳이 바꾸지 않는 정책에 따라 루나 시미로 높은 산을 의미하는 안데스라는 단어를 계속 써 왔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이 거대한 산맥이 고려인들에게 민족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매우 신성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기에 야인들의 말을 계속 쓸 수는 없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었다.

안데스 산맥은 공식적으로 태동(太棟)산맥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 땅의 거대한 용마루라는 뜻이리라.

민간에서는 천용마루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에 그를 참조한 것이다.

옛 반도의 척추가 태백산맥이었다면, 현 고려의 척추는 태동산맥이었다.

높이는 비교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태백산맥의 최고봉, 설악산의 높이가 대충 1700m라 친다면 태동산맥의 최고봉은 그의 세 배 혹은 네 배 이상이었으니까.

만년설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

상민은 다소 그리움을 느끼며 태동산맥의 최고봉에도 설악(雪嶽)이라는 이름을 붙였더랬지.

그 비경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아닌 듯하다.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이 거대한 산맥은 다소 부산스러울 정도로 바쁘게 변화되어가는 인간들의 세상과는 무관하게도 여전히 높고 험했다.

그곳에 깔린 길에서 상민은 만종의 승려들을 마주칠 수 있었다.

북령 이북은 근래에 고려에 복속된 곳이었다.

시중에 오른 상민이 원정군을 내조할 때 울퉁불퉁할지라도 도로를 깔면서 진군을 할 수 있도록 행정적으로 도와주었으나 내방(內方)에서 꾸준히 관리되고 있는 상설 가도에 비해선 몹시 부족한 면이 있었다.

치안적으로도 마찬가지.

군정은 실시되고 있었지만 원주민들의 습격이나 도적들에 의한 범죄는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나 여전한 골칫거리였다.

고려의 민정이 실시되기까지는 꽤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따라서 규율 잡히고 전투력이 강한 만종 승려들이 치안을 순찰하게 된 것은 인근의 백성들과 병사들에게는 좋은 일이 분명했겠지.

“수도에서 오셨습니까?”

다소 거칠지만 단단한 얼굴의 만종 승려가 그 일행에게 붙었다.

한 나라의 시중을 호위하는 일행의 면면이 범상치가 않기에 그들은 약간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이곳까지 시중의 여정 소식이 퍼지진 않았을 테고.

“그렇소이다.”

상민 대신, 호위를 하던 무장이 대답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으니 소승들이 동행해 드리지요.”

딱히 암행은 아니었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모자가 달린 판초(Punchu, 마푸체의 전통복이자, 고려의 여행복을 칭한다)를 깊게 뒤집어쓰고 있던 상민이 불쑥 말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가?”

“아닙니다.”

그들은 즉답했다.

잠시 동안 그 덤덤한 눈을 마주한 상민이 다시금 반문했다.

“본관이 이 나라의 관리라 그런 것인가?”

철제 가면 대신 복면을 쓰고 있었으니 신분을 정확히 알아차리지는 못할 것이었다.

다만 알아차려도 별 상관은 없었다.

불교계의 공적이 된 이도는 심지어 살해 협박을 받을 정도로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어 근위대를 따로 파견하여 호위를 할 정도였지만 상민에게는 큰 여파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가 만종은 물론 종교 자체에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니 호감을 사진 않았겠지만 적어도 노골적으로 적대하지는 않는 모양.

“소승들은 불자로서 오직 교리에 따라 행동할 뿐입니다.”

‘…웃기지도 않는군.’

상민은 짐짓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그나저나, 이자, 참으로 무예가 깊은 모양이구나.

만자군 모두가 이 정도라면 참으로 심란한 일이었다.

하지만 복면을 마주한 승려도 큰 위압감을 느꼈는지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마그네슘이라도 먹여주고 싶군.

“그대도 알다시피, 본관의 일행은 딱히 호위가 필요한 것 같지는 않네.”

“…잘 알겠습니다. 부디 보살들께서도 평안하시길.”

“고맙군.”

승려들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그들의 가슴팍엔 천으로 만자문이 그려져 있었다.

상당히 익숙한 문양.

저것을 좌우로 뒤집으면, 그 악명높은 하켄크로이츠가 되겠지.

‘…스와스티카(슈리바차)라 했었나.’

사실 독일 제3제국이 가져다 쓴 이 문양은 본디 인도의 것이었다.

인도―아리아와 독일이 선전한 아리아 ‘인종’, 그리고 나치즘의 상관관계는 복잡하기도 할뿐더러 별 상관도 없으니 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튼 저 문양은 근원 깊은 동양의 문양이었다는 것이지.

이곳에서도 딱히 좋은 의미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지만, 적어도 서양에서 대놓고 쓰일 확률은 조금 내려가지 않았을까.

근데 궁금하니 물어나 보자.

상민은 뒤돌아선 그들의 등에 대고 물었다.

“그대들은 왜 이곳을 순찰하고 있는가?”

상민의 물음에 승려들이 대답했다.

“고려인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보수도 받지 않고 험준한 산맥의 가도들을 순찰하는 승려들 덕에, 후방의 전략물자와 병사들의 교대는 꽤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모양.

세상은 참 복잡하구나.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주변을 둘러보던 상민이 짧게 혀를 차고는 말을 계속 몰았다.

* * *

산맥과, 강, 사막과 계곡을 건넜다.

장구한 여정은 결국 끝이 났다.

딱히 기억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만종의 영향력이 적어도 북부에선 서류에 적힌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던 정도.

해윤은 시중이 직접 쿠스코로 왔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최근 그들 사이 꽤 많은 갈등이 일어났다지만, 수많은 정치적 행보 속에서 그 먼 거리를 서신으로만 의사소통을 하던 사이였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오히려 놀라울 정도로 마찰이 적은 사이라 해도 될 것이었다.

상민에 대한 해윤의 신뢰는 아직 견고했다.

눈빛만으로 그 사실을 알아차린 상민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기른 정이 있기에 자식이라 부를 수도 있는 놈이니까.’

이놈의 원정은 대체 언제 끝나는지.

이제는 해윤의 머리에도 흰머리가 많이 자라고 있었다.

해윤의 안내로 쿠스코 궁전의 내실로 자리를 옮기자 황후 안씨가 그에게 무릎을 숙이며 절을 했다.

“인티의 현신을 뵙습니다.”

“인티…?”

해윤은 쓴웃음을 보였다.

“중전은 아클라에 속한 여인이었습니다. 태양신 인티를 모시는 자들이었지요.”

“오래 살다 보니 별소리를 다 듣는구나.”

해룡이며, 쿠쿨칸, 케찰코아틀이며, 인티까지.

난리도 아니군.

황후 안씨와 태자에게도 안부 인사를 나눈 상민이 본격적으로 해윤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다.

“충녕공의 일 말입니까?”

해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짐… 아니 제가 작위를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러한 책들을 썼더군요.”

다소 앙금이 있는 목소리에 상민이 물었다.

“황상, 그 책에 적힌 사실이 과연 틀린 것이라 생각하시오?”

순수한 궁금보다는 약간의 질책이 들어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해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틀리지는 않습니다.”

해윤은 방 안을 빙글 돌았다.

“하지만, 할아버님. 이곳에서 수많은 장병들이 원정을 지속함에 있어 고려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을?”

“군심이지요.”

원정이 장기화되며 부대의 병사들을 교대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순환근무체제를 실시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심은 흔들리고 있었다.

공세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군심이 필요한 법.

따라서 그들에게는 사명감이 필요했다.

“천시와 지리와 인화, 셋 모두 고려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해윤은 골치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는 특히 지리를 예로 들었다.

“타완틴수유 잔당들의 사파잉카를 자칭하는 파차쿠티(Pachacuti)는 실로 걸출한 자라 우아스카란(Huascarán)라는 산 근처에 푸라카 픽추(Pukara Picchu)라는 험준한 산성을 지어 고려를 괴롭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화포로도 못 밀 곳이오?”

해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쿠스코 북쪽의 요새, 삭시와만(Saqsaywaman) 또한 화포로 공략할 수 없을 정도의 험준함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만 저들이 스스로 회전을 벌이는 자충수를 두었기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었지요.”

“푸카라 픽추는 삭시와만보다는 더 험준한 곳이겠구려.”

“예, 이자들의 건축술이 실로 놀라울 정도입니다.”

해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21세기에 발견되었다면 희대의 역사 유적지로 불리겠지만 지금의 고려에겐 가는 길에 깔린 날카로운 마름쇠에 불과했다.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밟으면 굉장히 고통스러울.

“물론 일개 지도자의 걸출함에 의지하는 조그마한 단체는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실제로도 내분이 일어날 조짐이 보인다 하니까요.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자멸하기 전까진 우리의 공세와 압박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렇구려.”

그러나 그 어떠한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릇된 일은 그릇된 것이다.

상민은 프랑스의 군주 펠리페 4세와 성전기사단의 일화를 알려주었다.

“…….”

결국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무력단체가 어떻게 변질되는지.

황권은 해윤 또한 몹시 중대하게 여기는 요소였으니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손도 이제야 깨달았으나 과거의 과오를 도로 주워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길 뿐입니다.”

해윤은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책의 표지를 톡톡 두들겼다.

여러 번 읽었는지 표지가 꽤 너덜거리고 있는 책은 만사비변이 틀림없었다.

“토지 문제를 말하시는 게요?”

“…그렇습니다.”

군주의 약속은 신성하며 절대적이다.

이미 만자군에게 토지적 보상을 약속한 해윤은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지 못했다.

“…….”

상민은 인상을 썼다.

“그들이 가진 땅이 뭐라 하였지요?”

“타완틴수유의 옛 고성들과 요새들입니다.”

“…흐음.”

상민은 지갑을 열었다.

“그 땅, 이 사람이 전부 다 사리다.”

무지막지한 발언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 해윤이 다소 멍청한 얼굴로 상민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 재력은 충분히 있으니 걱정 마시오. 다만 그들이 금전적 대가 말고도 봉지를 요구한다면 칼리나해의 섬을 주는 것이 좋겠지.”

“섬은 왜입니까?”

“광신도들은 광신도들로 막는 것이 이치에 맞으니까.”

그래, 이 미친개는 우리 미친개다.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어 줄 미친개.

상민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기대었다.

“황상, 유럽이 다가오고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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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카라 픽추는 마추픽추에서 모티브를 받았습니다.

현시점, 파차쿠티는 마추픽추 대신 푸카라 픽추를 건설한 셈이 되는군요.

안데스, 즉 태동산맥의 최고봉은 ‘신’ 설악산(아콩카과산)이며 6,962m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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