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94화 (94/653)

석전

구대륙의 가축들과 종자들을 확보한 고려는 전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농업 및 축산기술력을 뽐내는 나라답게 먹을 것이 몹시 풍족하고 다양했다.

온갖 종류의 산해진미와 거대한 음식 앞에 이도와 정인지, 김종서는 넋을 잃었다.

본래라면 검소함과 절제를 미덕으로 여기는 조선의 문신들답게 은근히라도 겸양하는 것이 마땅했으나 길고 긴 항해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던 덕분에 눈앞에 깔린 산해진미의 마력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리 근엄했던 김종서도 서둘러 젓가락을 뻗어 고려의 전통 음식들을 집어 먹더니 눈을 감고 만족스러운 침음성을 흘렸다.

단고추(피망/파프리카)와 함께 볶은 오리고기 요리를 음미하는 모양.

정인지도 손 위에 올려놓은 음식을 게눈 감추듯 집어삼켰다.

“이것은 실로 진미입니다.”

프리지아―홀슈타인 품종의 소를 도입하는 것에 성공한 이후, 고려에서 우유와 건락(乾酪, 치즈), 그리고 수유(酥油, 버터)를 이용한 음식은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반죽하여 숙성한 밀가루 반죽을 전을 굽는 것마냥 넓게 펴 그 위에 토마토 소스에 바른 뒤 수많은 재료를 올린다.

고기가 될 때도 있고, 해산물이 될 때도 있었다.

그 후 잘게 자른 건락을 뿌린 뒤 화덕에 구우면 이 피자(披子, 나누어 먹는 음식)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존의 앉은뱅이 밀 말고도 유럽의 밀들이 들어와 강력분과 중력분, 그리고 박력분의 품종이 다양해지며 밀가루의 쓰임새도 많이 늘어났다.

빵도 더 부풀어 올랐고 식감이 개선되었지.

귀한 밀가루 음식을 이토록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고기 애호가로 유명한 이도는 정작 구석에 있는 돼지고기 요리에 젓가락을 뻗었다.

카스티야 산 이베리코 돼지로 만든 불고기를 맛본 그가 몹시 흡족해하는 것이 보였다.

상민의 머릿속에 문득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세종대왕은 당뇨를 앓고 비만이었다 했었지.’

절대 안 된다.

자신의 나라에 들어온 이상 이도는 장수를 누려야 했다.

장수를 해 자신을 위해 갈… 아니 학문적으로 도움을 줘야 했다.

이도 자신도 고려에서 정착해 출사를 할 생각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억지로 강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참 다행이지.

상민은 흡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도가 또다시 더부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

그러나 상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인재에 목말라 있었다.

비록 정인지와 김종서는 아직 조선의 사람이라 볼 수 있겠지만, 제까짓 게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면 알아서 살아야겠지.

조선까지 갔던 탐험대는 소기의 목적을 완수했으니 굳이 다시 그 멀고 험한 길을 갈 선단은 딱히 많진 않을 것이었다.

반도 역사상 제일의 명군이었던 이도는 물론이고 저 둘도 능력만큼은 모두 출중했다.

정인지야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김종서도 북방개척의 일등공신이었을 만큼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

어찌 상민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빛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의문을 가지는 사람, 혹은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당금의 고려는 자신이 뿌린 씨앗들이 이미 발화해 능력 있는 사람들이 국자감과 한림원에 가득했다.

어릴 적부터 절세의 신동이라 불렸던 사람도 있었고, 늦게나마 대기만성한 관리들도 있었다.

출신도 다양했다.

번듯한 명문가에서 좋은 교육을 받은 자제들부터, 진흙탕 속에서 꽃피운 연꽃과도 같은 인재들까지.

현시점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인 교육과 등용 시스템을 갖춘 고려는 인재난과는 거리가 있었다.

솔직한 말로 그들의 능력으로도 제국을 충분히 경영할 수 있었다.

조선인 관리들이 고려에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더 좋은 방안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것도 미련한 것이다.

저 삼인방에게는 고려인 관리가 가지지 못한 특출난 장점들이 있었다.

‘저들 모두 어떠한 기반도 없는 혈혈단신의 사람들.’

이 나라에 온 것 자체가 그야말로 가장 엄격한 상피제인 것.

기반이 없으면 이해관계가 적기 마련이고, 따라서 그들에겐 사욕에 따라 움직일 동기가 다른 이들에 비해 현저하게 적을 것이었다.

학연과 혈연, 지연을 위해 인사를 농단하거나 부정부패를 할 요소가 적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고려가 외국 출신의 귀화인에게 관대하다 하나, 관료사회에서는 어느 정도의 견제와 시기를 받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저들이 의지할 곳은 상민 자신뿐일 것이고.

조선인들의 항구적인 충성을 받기 쉽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고려 사회에 정착하여 일가를 이루면 몇 대 안에 곧 사라질 장점이겠지만.

‘가장 큰 이유를 따져 보자면….’

그들은 자신의 ‘대전사(代戰士)’가 되어야 했다.

셋 모두 유교적 이념이 국시였던 조선에서 온 자들이다.

불교에 대해 그렇게 좋은 생각을 가졌던 자들이 아니었다.

한창 기세등등하며 그간 세운 공으로 지방의 토지를 점유해 나가고 있는 일부 불교 종단의 만행을 막기에는 안성맞춤인 인물들.

물론 상민이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나서 그들을 개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 나라가 그들을 통해 수많은 지역과 부족에서 온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나간 이상,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막대한 정치력이 소모되었다.

잉카와 마푸체, 테우엘체와 푸엘체, 과라니와 투피, 칼리나와 기타 수많은 자들.

이들을 고려에 귀속하고 있는 것은 불교의 공이 컸다.

앞으로도 자신이 국정을 운영하기 위해선 종교계의 협조 또한 필요할 것이다.

아쉬운 소리를 할 경우가 분명 생겨나겠지.

관료의 정치력이란 한정된 자원이다.

직접적인 적대감을 살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대리인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는 것은 다르다.

냉정한 말이지만, 언제든지 꼬리를 자를 수도 있었으며,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고 선을 그을 수도 있었다.

또한 예기치 못한 상황에 책임을 지게 하고 잠시 파직한 후 불러들일 수도 있었다.

눈 가리고 아웅이겠지만 그렇게 책임을 떠안을 대상자가 있다는 것은 수많은 결단을 하는 입장에 있어 매우 편리했다.

또한 그들은 개경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보고 배운 시대의 증인이었다.

‘저들이 옛 반도 고려가 어찌 망했는지 이야기를 잘 풀어나간다면 고려의 어떤 인재보다도 설득력 있게 불교를 억제할 수단이 되겠지.’

상민은 천천히 이도를 바라보았다.

들뜬 분위기는 서서히 가라앉았다.

저분은 존경할 만한 분이지만, 엄연히 지금은 자신의 신료에 불과했다.

‘그것은 오로지 과거, 혹은 지금으로선 존재하지 않는 일에 불과하니.’

잠시나마 옛 생각을 품고 이도를 바라보았던 상민의 눈동자에 드리운 선망의 빛이 차츰 사라졌다.

다시금 철혈의 재상다운 눈으로 돌아온 그가 느릿하게 이도에게 술잔을 따랐다.

“대군께선 본인에게 보여 주셔야 할 것이 많소.”

삽시간에 변한 태도와 어조에 다른 고기 조각을 집던 이도가 움찔 놀랬다.

이도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치워보자.

그의 능력 자체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다만 검증받아야 할 것이 있었다.

이곳은 야구와 축구로 따지면 메이저리그, 혹은 프리미어리그다.

조선은 솔직히 말해서 저기 변방의 리그 정도였고.

유학의 나라인 조선에서보다 훨씬 더 다양한 실무적 능력을 요구했으며 업무강도도 빡셀 것이다.

‘국자감에는 갈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것이 좋겠지.’

다만 대과인 동당시와 보직을 배정받는 전시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상민이 그에게 자신의 뜻을 넌지시 밝히자, 이도가 불현듯 고개를 저었다.

“시중의 뜻은 감사합니다만, 만약 제가 출사를 한다면 고려의 다른 선비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길 원할 뿐입니다.”

그는 오히려 상민의 그러한 배려마저도 거부했다.

상민의 몸이 굳었다.

이도는 자신의 말에 그가 혹여나 불쾌해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모양이지만 상민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탄복했을 뿐이었다.

“…알겠소.”

몹시 기분이 좋았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미안하외다, 먹고 즐기는 자리에서 이러한 말을 꺼낸 본인의 잘못이오.”

즐거워하는 상민과 대조적으로 정인지와 김종서가 마치 체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자, 그가 다시금 저들에게 처음 보여주었던 쾌활한 태도를 장착했다.

정인지는 아직 외국에서 출사할 마음을 가지지 않은 모양인지 다소 혼란스러운 모양이었고 조선왕 이제의 측근이었던 김종서 또한 마찬가지인 모습.

밥은 뜸을 들여야 맛있는 법이다.

탐욕스러운 시선이 다시금 정인지와 김종서를 훑었지만, 그 시선은 이윽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피자에 거북열매(파인애플)를 올려 먹는 정인지를 차마 못 볼 눈길로 바라보던 상민이 고개를 저었다.

* * *

연회에서 돌아오자마자 또다시 업무를 보던 상민은 보고서의 틈바구니에서 오늘의 사건·사고를 적은 문서를 발견했다.

“석전이라?”

보고서의 제목만 보자마자 적힌 내용이 상상이 갔다.

‘젠장.’

불길한 생각은 대체로 들어맞는다.

보고서에는 북령에서 석전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고려계 출신들과 치차스계 출신들과의 분쟁으로 격화될 뻔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 야만스러운 풍습을 어찌 근절해야 할지.’

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흉폭한 놀이는 놀이라기보단 집단 난투극에 가까웠다.

부상자도 많았고, 사망자도 심심치 않게 나왔으니까.

돌을 던지는 '놀이'에 사망자가 안 나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을까.

인구 생각에 밤마다 악몽 아닌 악몽을 꾸는 상민으로선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인력들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숭무정신은 개뿔.’

옛 자칭 민족사학자 한 명이 석전을 고구려 때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숭무정신이 가득 담긴 행위라 기고했던 신문 칼럼이 생각났다.

하지만 직접 현장에 가 보면, 그냥 막장스러운 집단과 집단 간의 폭력사태에 불과했다.

두개골이 깨져 뇌수가 질질 흘러나오고, 눈을 잃고 사람들에게 밟혀 죽고.

던지는 인간들이 모두 절제력이 뛰어난 인간들인 경우는 만무했기에 가끔은 큰 소요로 불거지기도 했고, 방화와 살인, 약탈이 뒤따르는 일도 있었다.

옛 고려의 석투반과 석투군의 사례를 들며 석전도 군의 전력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당금의 고려는 이미 화약으로 떡칠을 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다.

석전을 통한 군사력의 증강은 지나가는 개도 비웃을 말이었다.

돌을 든 평민은 화기를 든 맨엣암즈에게 절대 저항할 수 없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득보다 실이 압도적으로 많다.

금지?

당연히 했었다.

해민은 물론이고 해진, 해권, 해정 모두 칙령을 내려 금지시켰고 그리고 시중의 지위에 오른 지금의 자신도 몇 번이나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사람들은 서로의 머리를 향해 돌을 던져댔다.

백성들이라고 위정자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상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같은 뿌리 깊은 민족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이도를 불러 그것을 논의하니, 이도도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사실 그의 아버지 이방원도 석전을 매우 좋아했던 인물이었으니 언행이 조금 조심스러웠다.

“이 나라에 그렇게 즐길 거리가 없는 것이 문제이지 않을까 합니다.”

“……!”

그랬다.

상민이 앞장서서 만든 이 나라는 노잼의 나라였던 것이다.

중세사회의 오락거리란 대체로 잔혹한 상황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망나니가 입에 머금은 술을 화려하게 뿜고는 죄인의 목을 내리치는 것.

피보라가 일면 사람들은 눈을 가리면서도 은근히 그것을 구경했다.

누군가 오체분시가 되는 광경 또한 마찬가지.

상민도 많은 전쟁을 치른 사람이다.

사람이 죽는 것 자체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전장의 그 분위기를 가끔은 그리워하기도 했지.

그러나 아무리 죄인이라도 무방비한 사람을 처형시키는 것을 굳이 근처에서 보고 싶은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자신과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현대인들이라면 소름 돋고 역겨운 광경이겠으나, 그것들은 의외로 지금 시대의 대중들에겐 인기가 좋았다.

‘알지 못하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걸까.’

마치 사람들이 공포영화를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일지도 몰랐다.

혹은 자신에게 저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심과 남의 비참한 처지를 보며 자기위안을 삼으려는 것일지도 몰랐지.

내밀한 속마음까진 몰랐다.

그러나 가장 표면적인 사실은 그것이 단순히 ‘재미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하지만 개혁을 진행하며 상민은 그들의 유흥거리를 많이 빼앗았다.

수급 혹은 시신을 전시하는 행위는 시신의 부패로 인한 위생의 문제로 금지했으며, 처형 방식도 피가 튀는 참수나 오체분시에서 비교적 조용한 교수형으로 바꿨다.

심지어 그 시신은 해부의 재료로 쓰기 위해 조용한 곳으로 옮겨졌지.

또 여러 이유를 들며 노름을 단속하고 석전을 금지하니 그들에겐 놀 수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았다.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야 말을 타며 격구를 하거나 활을 쏘고 사냥을 다니겠지만 민간의 백성들에게 그러한 재력이 있을 리가 만무했고.

바둑과 장기?

재미는 있겠지만, 석전만큼 피가 끓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민은 대중들에게 마땅한 오락거리를 제공해야 했다.

로마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그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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