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론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판단하는 데엔 몇 가지 이론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나네.
옛날 대학생 시절 교양과목으로 세계사를 선택해 조별발표를 했던 주제였었지.
이렇게 써먹을 데가 있으니, 대학 생활이 직장과 사회생활에 하등 쓸모없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온 상민 자신이 무안해질 따름이다.
아마 기억하기로는 환경이 인간과 집단의 풍습을 결정한다 해서 붙인 환경결정론이 있었다.
한 집단의 문화나 전통이 영향을 크게 끼친다는 것이 문화 결정론이었을 테고.
환경의 제약 내에서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변형할 수 있다는 환경 가능론이 있었던 것 같고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며 환경가능론을 비판하는 생태학적 관점도 있었지.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지금 수준의 문명에서 논할 관점이 아니니 넘어가자.
이 남려대륙에 오고 난 후 고려는 문화적, 풍습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흰개미로 인해 촉발된 가옥 구조의 변경과 남반구의 특징을 수용하게 된 풍수지리학의 변화 등등이 있겠지.
또한 의복도 바뀌었으며 식생활도 많이 달라졌다.
하상계수의 감소에 수차의 보급이 원활해졌고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진 덕분에 첨저선의 도입이 한층 쉬워졌던 예도 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이 고려의 본질을 바꾸기만 한 것인가?
그것은 또 아니었다.
문화결정론적 관점에서 보면 고려인들은 남미에 떨어져도 여전히 고려인들이었다.
밀 농사를 장려하고 감자를 보급하며 고구마를 가져와도, 이 고려인들의 쌀 사랑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그들은 기어코 이앙법을 도입하여 창강과 광하의 습지를 개간해 엄청난 양의 식량을 뽑아내고 있었지.
지금 와서 그들을 규제하기란 어려운 법이었다.
‘이 대륙엔 학질도 없는 것 같으니 그럴 이유를 찾기도 힘들고.’
새로운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로 예전과 비슷한 음식을 해 먹는다.
옛 한반도의 산과 들에서 나는 식물 대신에 남려대륙의 식물로 무친 나물들이 밥상에 올라왔다.
나물의 맛은 어쩐지 비슷하다.
건축물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그 디자인과 구조는 예전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다.
벽돌집의 지붕은 여전히 아름다운 빛깔의 기와로 만들어지고 있으며 심지어 목조 건축물처럼 다포양식의 전(塼)조 건물도 보였다.
인간과 국가는 바뀌는 것과 바뀌지 않는 것이 분명히 공존하고 있었다.
이를 국가의 흥망성쇠와 비교해보자.
흥할 나라라는 것이 원래부터 정해져 있었을까?
상민은 이곳에 떨어진 이후부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로 촉발된 서유럽의 번성은 이베리아반도의 국가들의 공이 컸다.
유럽의 중심부에서 한 발 물러난 그들 국가는 특유의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사방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뻗어 나갈 방향은 오로지 대양이었으니 그들이 배를 만들어 대서양을 건너는 것도 마냥 허황된 일은 아니었다는 것이지.
이렇게 해석하는 방향이 환경결정론적 관점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비슷한 위치에 있던 북아프리카의 마린 왕조는 이베리아 국가들처럼 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세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이것은 또 문화결정론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겠지.
예를 들면 이슬람과 기독교의 차이 같은.
이 논리는 비단 유럽 말고도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동에도 적용될 수 있다.
‘결국은 인간의 환경과 문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맞을지도.’
다소 차별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히 시대와 역사의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가설은 유니버설 킹덤즈에도 반영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역사적 주요국’이라는 항목으로 존재해 있었지.
흥할 국가들은 흥한다는 개념이다.
그것이 문화적, 지리적 요소에 영향을 받았는진 굳이 따지진 않았지만.
유명한 열강들, 즉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등의 나라들은 성공할 만한 지리적 여건과 문화적 여건을 모두 충족했다고 판단되어 항상 상수적인 혜택을 받았다.
그 개념을 부정하긴 어렵다.
적당히 험준하고 적당히 풍요로운 대지.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은 기후.
북해와 발트해, 지중해와 대서양을 통한 원활한 물류 이동이 가능한 유럽은 과연 환경결정론적 승자의 땅이라 볼 수도 있었다.
또한 게르만, 앵글로색슨, 노르드, 라틴, 프랑크 등 문화와 민족적으로 이질적이라 끊임없이 역동적인 다툼이 벌어지지만, 종교적으로는 동질적이라 과도한 전쟁은 중재 가능하며, 심지어 이민족에 대한 공동대응까지 할 수 있는 곳.
이것은 문화결정론적 승자의 요소일 수 있겠지.
이곳에서 깨어나기 전날 밤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역사적 주요국 버프와 인물의 유사성 항목은 분명히 체크했었지.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직접 경험해 본 바로는 저것들도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개념일 것이었다.
지구 반대편에 떨어진 것부터 늙고 병들어 죽지 않는 자신까지.
지금 이 순간에도 매초 느끼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니까.
‘후대의 학자들은 환경결정론이니, 문화결정론이니 떠들겠지만.’
상민은 다소 착잡한 표정으로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고한 원길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보고서의 마지막 문단에는 명나라가 주나라를 서서히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내가 결정한 개념이라는 것인데.’
많은 생각이 들어 혼란스러웠다.
앞으로의 유럽의 정세가 대충은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과,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이 남고려의 운명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 고려가 유럽의 '역사적 상수'를 어떻게 파괴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
‘어찌 되었든, 적어도 현대사회가 밝아올 때까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지.’
생각에 너무나 깊게 빠진 덕분에 상민은 자신을 부르는 문관의 말을 몇 번이나 듣지 못했다.
젊은 문관은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고 있었다.
“당하. 귀빈께서 오셨사옵니다.”
뒤늦게 그것을 들은 상민이 팔걸이에 대고 있던 손을 떼었다.
자신의 실책이다.
귀빈들이 많이 기다리지 않았다면 좋겠는데.
“…아. 미안하구나.”
문관이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들라 하시게.”
지시를 받은 위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다.
“아참.”
옷매무새를 점검하던 상민이 아직 그 사신들의 신분과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고서는 어제 올라온 것 같았지만 볼 시간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문관에게 물어보았다.
“사절들의 인적사항이 어떻게 된다 했더냐?”
문관이 다시금 그에게 귀엣말을 했다.
소매깃을 정돈하던 상민이 마치 석상처럼 우뚝 제자리에 정지했다.
“당하, 괜찮으시옵니까?”
젊은 문신은 굉장히 보기 드문 상민의 반응에 그의 건강부터 확인했다.
“…….”
육체적인 충격은 아니었다.
녹이 잔뜩 슨 양철로봇마냥 삐거덕대던 상민이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앉았다.
그와 동시에 정전의 문이 열렸다.
상민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친히 멀리서 온 조선의 왕제를 맞이했다.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위인 중 한 명을 맞이할 땐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존댓말을 해야 하나?
아니지. 나는 이미 고려의 시중이다.
세종… 아니 이도는 일개 조선의 왕제일 뿐이고.
너무 격식을 차리는 것도 외교적 관습에 맞지 않는다.
사실 살아온 세월만 따지고 봐도 자신이 그에 비해 네 배는 더 많이 살았다.
‘하지만 DNA적으로 박혀있는 공경감은 대체 어쩔 건데.’
마치 좋아하는 배우를 만난 팬처럼 안절부절못했던 상민이 젊은 이도에게 막상 꺼낸 말은 별달리 특별할 것이 없었다.
“고려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대군.”
* * *
조선의 사신단 일행은 창천궁의 정전으로 향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장영실은 숙소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이도와 정인지, 김종서 세 명이 관리의 안내를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그들 사이에서는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이도는 나머지 두 명을 곁눈질했다.
묵묵하고 조용한 김종서는 물론이고 다소 방정맞은 성격인 정인지까지 할 말이 별로 없는 모양.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물결칠 것이었다.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바닷길 자체를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은 그 어마어마한 넓이의 대양을 경험한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셋 중에 기껏 김종서만 남조로 가는 배를 탄 적이 있었을 뿐이었다.
태평양은 그 조그마한 해협보다 넓고, 넓고 훨씬 더 넓다.
그 넓이에 대한 마땅한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이 가진 개념 이상의 넓은 바닷길.
하지만 이들이 더욱 충격을 먹은 것은, 그 길을 노련하게 항해하는 고려인들이었다.
고려인들은 공포스러울 정도로 넓은 바다 위에서도 자신감이 가득했으며 폭풍을 마주해도 두려움이 없었다.
고려인들은 조선인들에게 거대한 다랑어를 잡아다 준 적도 있으며 고래를 보여주기도 했지.
아직 어린 유(瑈)에게 미지의 바다 괴물, 그리고 유령선의 전설에 대해 알려주기도 했다.
남반구와 북반구의 별자리들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설명할 때에는, 아이들이 아니라 장영실과 이도가 눈을 반짝이며 듣기도 했다.
노련한 선원들 덕에 항해는 대체로 평탄했다.
그들은 미주(미워크)를 거쳐 파나마로, 파나마를 거쳐 고려 본토의 사곡에 도달했고 조금의 정비시간을 가진 뒤 남부항로를 타 창양으로 귀환했다.
모든 것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거대한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만으로도 범인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바다들을 건너 개척지를 건설하고 물자를 주고받는 고려를 바라본 이도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대체 이 나라는….’
도착한 본토도 마찬가지였다.
광대한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각양각색의 기후가 공존하는 나라.
바닷길이 몹시 발전했는지 수없이 마주치는 선박들.
한양을 제외한 다른 조선의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체계적인 항구도시 해문.
그리고 넓게 뻗은 가도와 압도적인 규모의 도성까지.
이 충격들, 아니 이 사실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음미하고 느껴보고 싶었지만 사절의 신분이라 서둘러 도성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좋다.’
시간은 충분했다.
자신은 빨리 이 나라의 위정자를 만나보고 싶을 따름이다.
‘그와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알 수 있겠지.’
아무리 귀화인을 평등하게 대하더라도 외국의 왕족으로서 고려에서 할 일은 많이 제약될 수 있었다.
‘그래도 좋아.’
처음 조선을 떠나며 가진 막연한 생각은 이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은 이 나라에 절대적으로 머물고 싶었다.
설령 자신이 이 도성의 거름꾼이 될 운명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 * *
그리고 마침내 정전에 도달해 재상을 만났을 때, 이도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의 분위기가 어쩐지 어수선했다.
시중의 인사에 이도가 화답했다.
“본인은 조선국 왕제(王弟) 이도라 합니다.”
“…만나서 반갑소.”
격식을 갖춘 인사말이 오갔다.
가면을 쓴 탓에 표정을 읽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어수선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라졌지만 그의 태도는 여전히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고려의 시중은 이 자리에서 처음 본 이도에게 몹시 우호적이었다.
피부로 여실히 느껴질 만큼.
“대군 대감의 신분은 이 고려에서 유효하지 않으니, 본인이 직접 성상 폐하께 청을 드려 마땅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게끔 하겠소이다.”
그것은 몹시 감사한 일이었다.
자신의 귀화 요청을 단번에 수락하는 것을 넘어 시중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신경을 쓰겠다는 대답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감사합니다.”
심지어 그 우호는 자신에게만 적용되지 않았다.
“또한 대군의 가족들과 식솔들이 평안하게 쉴 수 있도록 창양에 거처를 마련해 드릴 것이며….”
시중은 줄줄이 그를 위한 자신의 성의를 읊었다.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는 그의 정성에 감동한 이도가 극진한 감사를 표했다.
“이리 신경을 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하, 조선과 이 고려는 본디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형제와 다름없는데, 어찌 이 정도도 해주지 못할 것이 있겠소이까?”
정녕 그런 것인가.
전조의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지만 이 해씨 고려는 왕씨 고려와 정녕 다른 나라임이 틀림없었다.
이도가 내심 감동을 받아 고개를 주억거렸다.
“실로 그러합니다.”
이도는 슬쩍 원길을 바라보았다.
원길의 눈동자는 더없이 커져 있었다.
‘당신이 그랬잖소, 이 고려의 시중이란 사람은 참으로 엄격하고 근엄하다고.’
황당함이 가득 담긴 원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이도가 다시 눈을 돌렸을 땐, 여전히 자신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시중이 있었다.
대체 이 사람, 왜 이러지.
“…….”
이도는 갑자기 목이 마른 것을 느끼며 마른 침을 삼켰다.
― 꿀꺽
그것에 불현듯 시중이 기대감을 품고 질문했다.
“식사는 하셨소?”
그러고 보니 영빈관에서 따로 음식을 먹은 기억은 없었다.
그리고 어찌 저 얼굴에 대고 밥 먹었수다, 대답을 할 수 있겠나.
이도가 부정의 뜻을 표하자, 시중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분명히 가면의 뒤에선 함박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었다.
“여봐라!”
시중이 밖에 고함을 질렀다.
그 기세와 소리가 자못 커서, 김종서가 흠칫 놀랐을 정도였다.
서둘러 들어온 내관에게 시중이 말했다.
“큰 연회를 준비하라!”
그리고는 슬그머니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작게 말한다고는 했는데, 그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이도의 귀에는 여지없이 또렷하게 들렸다.
“더없이 귀중한 분들을 뫼시는 자리이니 한 치의 흐트러짐도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