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의 일과
정녕당(政寧堂)은 상당히 큰 건물이었다.
지금의 고려는 전(殿), 당(堂), 합(閤), 각(閣), 재(齊), 헌(軒), 루(樓), 정(亭)의 순서대로 건물 명칭의 위계를 정하고 있었다.
세밀하게 따져보면 공적 공간인지 독립성이 있는 공간인지를 나누겠지만 건축 기법이 바뀌어 고층건물들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현 고려의 상황상 예전과는 다른 것이 많았다.
그나마 목적과 생김새가 특이한 루와 정의 경우가 구분이 되겠고, 나머지 전부터 헌까지는 순전히 건물주의 위세를 나타낸다고 해도 되겠지.
궁궐의 건물에나 붙이는 전(殿)의 명칭은 고위 황족이 아닌 이상 함부로 쓸 수 없었으니 당이라는 이름은 일반인에겐 최고로 급이 높은 건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짧지만 강렬했던 해제의 치세가 끝이 난 후 다시 제위에 오른 해윤은 죽지 않는 위대한 선조에게 그에 걸맞는 영원한 업무를 주었지.
그리고는 일말의 양심에 마음이 켕겼는지 창양에서 가장 넓고 좋은 토지에 정녕당을 건설해 주었다.
창업 초기 고려의 궁궐이었던 연경궁에 비해서도 규모 면에서 크게 뒤떨어지지 않은 정녕당은 제국 내에서 가장 권세 높은 관리의 처소다운 위세를 자랑했다.
근무하는 인원들도 상당히 많았으며 호위 또한 엄정하기 그지없었다.
* * *
시중의 일과는 아침 6시에 시작한다.
따라서 정녕당의 아침도 그 이전에 시작해야만 했다.
정녕당의 시종들은 항상 일정한 주기로 물갈이되었다.
이번 대의 시중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고 있는 집사(執事, 청지기) 또한 이제 십 년에 불과하셨다 한다.
정녕당의 하녀 연화는 정녕당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아침의 맑은 물을 떠 조심스럽게 시중 처소의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겠사옵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더라도, 그녀는 평소 출입할 권한이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달칵 문고리를 돌려 아직 어슴푸레한 방 안의 어둠을 헤치며 나아갔다.
방 안의 풍경이 한눈에 다 들어올 때 그녀는 처소의 이부자리에 익숙한 남성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잠버릇은 수많은 세월에도 불구하고 잘 바뀌지 않는지, 그 남성은 상의를 탈의한 채 취침을 하곤 했다.
거대하며 강인한 신체와 매력적인 얼굴.
연화는 잠시 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고려의 최고 권력자는 일 분 일 초가 바쁘다.
마치 귀신처럼 정확히 여섯 시 반이 되면 시중께서 눈을 뜨실 것이고 바쁜 하루를 시작하겠지.
자신의 사심은 정말 중요치 않았다.
연화는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침소의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가면에 손을 뻗었다.
몹시 비싸다는 백금으로 만든 이 가면은 금속 질감 특유의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이것을 쓴 통치자들은 하나같이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풍기는 것이다.
그녀는 남몰래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가져다 대었다가 자신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듯 풋 웃고는 꼼꼼하게 가면을 닦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잡스러운 생각이 많았다.
당금 고려에서 그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는 자신밖에 없지 않을까?
있다고 해도 성상께서나 가능하시겠지.
‘이런 불편한 것을 왜 쓰시는 걸까.’
지금 분께서도 그러시고, 예전 시중께서도 항상 저 가면을 공적인 자리에서 벗으시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궁궐의 상궁 출신이셨다는 하녀장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다.
― 시중께서는 고려를 통치하심에 있어 사(私)의 영역을 배제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면을 쓰시는 것이다.
학자들과 다른 관리들도 역대 시중들이 계속 써왔던 가면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공공의 안녕을 위해 개인의 존재를 내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
연화는 그 어려운 개념을 도무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을 듣고 시중이라는 지고한 자리가 상당히 외로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외로우실지.’
그녀는 청결해진 가면을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그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사람.
무심결에 손이 들리는 것을 자제하고 아침 운동 때 입으실 옷과 준비물들을 챙기니, 여섯 시를 알리는 은은한 종소리가 정녕당에 울려 퍼졌다.
“…….”
그리고 귀신같이, 단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시중의 눈이 떠졌다.
그 검고 깊은 눈동자가 주변을 한 번 훑더니 자신을 바라보았다.
“물을 다오.”
연화는 기다렸다는 듯 시원한 물을 건넸다.
평상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 * *
몸을 일으켜 침상에 걸터앉은 상민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이불은 모두 흘러내렸고 옷은 걸치지 않은 탓에 전라의 신체가 훤히 노출되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로 지낸 세월만 백오십여 년.
이런 것에 부끄러워하기엔 살아온 경험이 너무나도 많았다.
눈앞의 여인은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남부의 장신족, 테우엘체 출신답게 큰 키를 자랑하는 미녀였다.
마치 모델과 같은 비율을 자랑해 고고하고 우아한 모습을 지녔다.
그러나 단언컨대 외모로 뽑은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하녀로 엄중한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자였기에 입의 무거움을 가장 우선으로 선발했을 뿐.
‘…….’
그의 눈이 그녀를 한 번 훑었다.
“물러가도 좋다.”
“예.”
짧은 대답과 함께 공손한 뒷걸음질로 면전에서 물러나는 연화를 보던 상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한 주의 시작이 다가왔다.
* * *
소매가 짧고 활동하기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상민이 가면을 쓰고 정녕당의 건물을 나섰다.
부지런한 주인 덕분에, 이미 정녕당의 복도는 환하게 밝았고 청소와 잡다한 업무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침하셨습니까.”
대부분의 하녀들은 말을 건네지 않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것에 그쳤으나, 집사는 달랐다.
“별일은 없었는가?”
“밤사이 창양 외곽에 조그마한 화재가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소방청의 관리들이 밤사이 빠르게 진압을 하여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합니다.”
상민은 고개를 찡그렸다.
“매우 큰일이 날 뻔한 사항이 아니더냐. 앞으로는 화마에 관련된 일에는 무조건 여를 깨우라 하라.”
“…알겠습니다. 당하.”
집사와 다른 관리들의 생각은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일에 자신을 깨워서야 되겠냐는 말이겠지.
그러나 적어도 이 시대의 화재는 몹시 위험한 재앙으로 번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화재뿐만 아니라 다른 일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결국 이렇게 따져보면 자신을 깨우지 않아도 될 일을 찾기가 힘들어지는 것이지.
‘…그래, 여전히 하나부터 열까지.’
이 제국은 양과 질적으로 팽창만을 거듭해왔지만 상민의 눈에는 여전히 갓난아이와도 같았다.
‘내가 과민한 건가?’
새벽의 어둠에 잠긴 밖으로 나와보면 아침이슬이 맺힌 풀과 나무들의 내음이 비강에 스며들어 온다.
본래 자신은 아침잠이 적다고 할 수 없었던 체질이었는데 이곳에 떨어져 수많은 일을 겪고 오랜 세월 동안 살아가며 마치 위인전에 나올법한 부지런하고 근면한 사람의 표본처럼 바뀌었다.
양위를 한 후로 불면증은 사라졌지만 잠을 적게 자는 것에 적응이 된 모양.
몸의 회복력 자체가 원체 뛰어나다 보니 피곤도 그렇게 많이 느껴지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아침 운동.
이 루틴은 자신이 이곳에 와 무예를 수련하며 몸에 새긴 것인데, 백오십 년이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천연 잔디가 깔려 있는 이곳은 평소에도 많이 자주 사용하는지 가운데 부분에는 흙바닥이 패여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고는 연무장 가장자리를 가볍게 뛴다.
몸이 충분히 달아올랐음을 확인했으면 병기함에서 수련용 도를 가져와 한바탕 춤사위를 펼치는 것.
매일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수련을 하는 까닭에 휘두르는 도의 끝은 여전히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었고, 실린 힘도 여전히 강맹했다.
고려 내에서 상민과 한바탕 도를 맞부딪힐 만한 무인을 찾기란 힘들었다.
원래부터 강력한 장군이었던 그는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경험을 축적했다.
그러나 노쇠해지지 않는 육신 덕분에 항상 발전에 발전만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이라면….’
괴물이 되어버린 지금이라면 옛날의 무인들과도 겨루어도 진다는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문경과 연수, 그리고 상관이었던 통정까지.
‘…….’
상민은 밀려오는 추억에 쓰게 웃었다.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고.
한바탕 땀을 흘리면 스트레스가 많이 녹아드는 느낌이 났다.
제위에 올라 있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시중직을 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는 조금 궤가 달랐다.
전자는 자신이 영원토록 모든 것을 관할해야만 한다는 부담감, 이 나라가 어떻게 변해버릴까에 대한 두려움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시중직의 스트레스도 일견 비슷할지 몰랐다.
여전히 자신은 이 나라의 수많은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불현듯 떠나버린다면 아마 제국은 큰 혼란에 빠지겠지.
그러나 자신은 가면을 쓴 고려의 시중일 뿐 불멸의 최고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람들에게 관료제 안의 인물이라 인식이 되는 것.
그 차이는 상당했다.
없어져서는 안 될 존재와 없어져도 누군가는 대신할 수 있는 존재.
비합리적인 존재와 그나마 합리적으로 보이는 존재.
그런 차이점이 있지.
적어도 자신을 엄습하는 부담감은 차원이 달랐다.
이렇게 한바탕 땀을 흘리고 나면 충분히 개운해질 정도였으니까.
운동을 하고 나면 배가 고프다.
아침식사를 하고 가볍게 몸을 씻은 뒤 적색의 관복을 입고 등청을 준비한다.
정녕당에서 궁궐은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거리.
궐에 도착하면 곧바로 정전으로 향한다.
거대한 크기의 정전엔 수많은 신료들이 미리 도착해 삼삼오오 떠들고 있는 광경이 보이기 마련이다.
마치 엄격한 중대장이 생활관에 들어오면 삽시간에 부대가 조용해지는 것처럼 상민이 정전에 들어서면 분위기가 팽팽해진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옥좌의 밑에 시중의 자리가 있지.
그곳에 가 앉으면 그제서야 다른 관리들이 제각기 따라 앉는다.
“오늘의 상참을 시작하겠소.”
그러하면 다시금 정전 안에는 조그맣게 두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너무 시끄럽지만 않으면 관리 사이의 토론은 장려하는 편.
오늘의 상참에선 전날의 화재에 대해 말을 하고 소방청과 다른 재난 시설에 대한 점검을 지시했다.
완공된 북서, 북동부 가도에 이어 남서부의 도로를 확충하는 현재 국책사업에 대한 현황을 파악하고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도록 지시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흉년(상민은 이 이상기후의 정체를 엘니뇨로 생각하고 있었다.)에 널뛰는 물가와 여러 범죄들을 엄하게 단속하라 지시했다.
내부의 일 말고도 외부의 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간의 무역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기나긴 백년 전쟁이 종말에 다다르는 것에 대해 토의를 하기도 했다.
그 사건의 여파가 고려에는 어떻게 작용할지 생각해 보기도 했고.
그렇게 오전의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엔 내빈을 맞이하는 순서가 있었다.
첫 번째로 카나리 제도의 새로운 주인 산초 1세가 고려에 직접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온 것을 접견한다.
유럽에서 가장 활기 넘치는 도시로 바뀌고 있는 테네리페는 그 위세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지만 그 힘의 원천은 분명히 고려였기에 섬의 주인들은 자신의 주군 카스티야 왕에게 인사를 드린 후 고려에도 방문하여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굽신거렸지.
여러 외교적 수사법으로 두 세력 간의 우호와 평화로운 교류를 약속한 후 돌려보내면 다른 곳의 사신들도 제각기 머리를 내민다.
번국 혹은 자치령에서 온 사람들을 접견하면 또 국내의 인간들도 신경 써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지방에서 상경한 관리들, 특명을 받고 파견했던 어사들, 그리고 민간의 거대 상인들과 만남을 가지면 드디어 조금이나마 흥미가 도는 탐사대의 일을 처리할 수가 있는 것이지.
오늘따라 일이 바쁜 탓에 상민은 하루의 끝이 다가와서야 서쪽의 일에 대한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개경 고려로 갔던 탐사대가 돌아온 모양입니다.”
내관이 귀엣말을 했다.
조선이겠지만 딱히 정정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래?”
상민은 반색하며 원길을 불러들였다.
오랜 항해의 끝에 원길의 얼굴은 반쪽이 되어 있었다.
환태평양 일주 또한 세계일주처럼 힘든 여정이라는 사실이 와닿았다.
원길은 공손하게 서책을 건넸다.
“그대가 중요한 일을 해 주었구나.”
상당한 분량의 책은 조선과 옛 고려가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 아유타야에서 수집했던 정보들보다 훨씬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을 것이었다.
원길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온 사절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사절단이 왔다?”
상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먼 거리에서 어찌 사람이 왔을까.
“지구의 반대편에서 온 사절들이라… 대체 어찌 돌아가겠다는 것인지.”
원길에게 혹시나 귀화를 요청하는 조선인들이 있을 경우 데려오라는 밀명을 내리긴 했지만 국가의 사절은 이야기가 달랐다.
‘대체 왜 온 거야? 우리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어쩌려고.’
오고 가는 거리를 조선과 대만 정도라 생각을 한 것인지.
상민은 피어나는 호기심에 영빈관(迎賓館)에서 쉬고 있을 그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들이 오는 시간 동안 기다리며 책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