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1)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금방 한양에 도착한 이도.
그는 도성을 휘감는 묘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서둘러 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형님 폐하께서 무슨 일을 또 벌이신 것이지?’
자신이 보기엔 형은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명확한 인물이라 마치 물가에 내놓은 것 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황희와 맹사성, 그리고 허조와 같은 능신들이 그를 좌우로 보좌하고 있지만, 왕 또한 여러 신료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했다.
그에 비해선 자신은….
입궐을 알리고 기다리니, 주상이 그를 편전으로 불렀다.
“아우야.”
“옥체 강녕하셨사옵니까.”
이도를 끌어안은 왕은 그를 자리에 앉혔다.
한참 동안이나 서로 못다 한 담소를 나눈 이제는 드디어 일 이야기를 꺼냈다.
“개성부의 일은 어찌 되었는고?”
장계에 적힌 일 말고도 내밀한 일들을 물어보던 이제는 이도가 말하는 것에 몇 번 고개를 끄덕였다.
별 반응이 없다.
너무 수월하게 전조의 왕들에게 제사를 허하는 승낙의 표시에 이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형님, 자신의 말엔 집중을 안 한다.
“조정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마치 잘 물어보았다는 듯 아직도 약간 노기를 보이는 이제가 간략하게 일어난 사건을 설명했다.
황당선이 어쩌고 고려가 어쩌고.
마치 귀찮은 짐을 떠넘기듯 그가 말문을 열었다.
“동생아.”
“예, 폐하.”
“이 형이 생각하기엔 이번 일은 네가 맡아서 해 주었으면 좋겠다 싶구나.”
비록 그가 발끈하여 그 외부 사절을 옥에 가두었다지만 그들을 죽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러했던 것은 아니었다.
고려를 참칭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세력에 대한 것은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아직 왕씨 학살에 대한 후유증은 남아 있었고, 조정의 여론도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조금 갈라져 있었지.
이 일을 신하들에게 맡기기는 조금 꺼려지는 면이 있었다.
옥좌가 아닌 왕조 자체에 대한 충성심을 따져보면 단연코 종친들이 제일 높을 것이다.
얼마 없는 종친들 중 그나마 가장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아이가 자신의 동생이었고.
호기심을 감출 수 없던 이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소제가 그들을 만나보겠습니다.”
이도는 일단 의금부에 하옥된 그들을 심문했다.
모진 고초를 겪지는 않은 모양인지, 그들의 안색이 어둡지는 않았다.
“신원길이라 하였나?”
“예, 그렇사옵니다.”
동쪽 먼바다 건너편에서 왔다 주장하는 놈.
처음 들었을 땐 허무맹랑하기 이를 데가 없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라 여겼었는데.
하지만 그의 말을 계속 듣다 보면 일관성이 있었고, 심지어 설득력이 있기까지 했다.
‘정녕 바다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 힘든 사실.
불신의 빛이 가득한 이도의 면전에서 원길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정 믿기 힘드시다면, 다만 소인의 배에 같이 가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도는 맞는 말이라 여겨 그를 대동하고 나주목을 거쳐 진도로 향했다.
* * *
선장과 선원들이 문정을 떠났다 하더라도, 고려의 배는 제법 떨어진 바다에서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었다.
주변의 조선 배들 또한 그들을 은근하게 경계하며 주변의 진에 정박해 있었다.
열 척의 고려 협저선이 그 열 배는 넘는 조선 맹선들 주변에서 당당히 떠 있는 모습은 몹시 위풍당당했다.
원길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자, 선박 가까이 나룻배가 오는 것을 허락한다는 듯 협저선들도 흰색 기를 내걸었다.
원길의 안내를 받고 이도와 대동한 문신들 몇 명이 배에 올랐다.
“소인의 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선장의 공손한 응대에 옆의 고려 선원들도 마지못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선원들은 제각기 이상한 무기를 들고 있었는데, 길쭉하게 생긴 나무막대기와 많이 휘어진 도가 이색적이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분위기가 이들이 꽤 많은 실전 경험이 쌓인 자들이라고 말해주는구나.
이도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려 선박을 관찰했다.
탐험용 선박의 개념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이도는 이것이 군선이라 생각했다.
“맙소사….”
생전 처음 보는 양식으로 만든 이 배는, 무겁고 육중했으나 결코 허투루 볼 수 없는 선박건조기술로 지어진 물건이었다.
당대의 어떤 자들이 이러한 배를 쉬이 건조할 수 있겠는가.
주?
주라면 가능하겠지만, 그들의 대적은 명과 원인데 굳이 뭐 하러 이리 큰 군선을 만들겠는가?
장강과 황하에서 쓰기도 어려워 보이는데.
왜?
왜국이 이러한 배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동안 조선을 넘보는 일도 가능했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등골에 우수수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이도는 안내받은 선장실에서 자신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조정의 관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절재(節齋), 경은 이런 배를 들어본 적이 있소?”
파견 관리의 우두머리이자 전 요동경차관이었던 김종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 태종과 형님 폐하의 밑에서 많은 경험을 한 문신인 그는 무관에 필적할 만큼의 군사적 소양도 갖춘 이였다.
그도 알아볼 수 없는 배라.
사실 문정을 행하였던 수군처치사도 몰랐었는데 김종서가 알 리는 만무했다.
옆에서 한창 선장실의 책을 뽑아 읽고 있던 젊은 관리 한 명이 머리를 긁적이며 얌전히 그것을 책장에 꽂았다.
원길이 그곳이 아니라는 듯 꽂은 책을 다른 곳에 정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서책에 적혀 있는 것이 도통 어느 나라 글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도 또한 흥미가 생겨 주변의 책들을 펼쳐보았다.
제목부터 독특한 생김새의 글자가 적혀 있다.
한자와는 전혀 다른 그런 글자는….
이도는 무언가 홀린 듯 그 서책의 표면을 한참 동안이나 어루만졌다.
“어엇!”
덤벙대는 관리가 길쭉한 원통에 눈을 대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경호성을 내질렀다.
상념에서 강제로 깨어난 이도가 바닥에 기물을 떨구는 관리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학역재(學易齋), 좀 조심을 하시오!”
김종서가 투덜대며 허리를 펴고 낚아챈 망원경을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미안하게 되었소.”
분명 인질들을 잡고 있다지만 객으로 온 주제에 이리저리 민폐를 끼치는 것은 김종서의 성정과는 맞지 않기에 그는 가볍게 읍을 하며 덤벙대었던 관리 대신 원길에게 사죄를 했다.
관리, 정인지도 머쓱하게 읍을 했다.
원길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충격으로 떨어져 나간 유리정을 들고 살펴보았다.
나무 바닥이니 깨진 것 같진 않고….
“…가히 아름답구나.”
원길의 손에 들린 투명한 유리정을 바라보던 이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책 가득 적힌 알 수 없는 글자.
자신의 손에 들린 이 투명한 수정을 만들고 정교하게 세공할 수 있을 정도로 발달된 나라.
“조선 팔도에서 장인들을 불러보아야겠다.”
* * *
이도는 주진에 조선 팔도에서 특출나기로 이름 높은 장인들을 불러모았다.
여러 사람이 있었다.
자기에 능한 자, 목수 일에 능한 자, 야금에 능한 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정녕 엄청난 배입니다.”
맹선을 건조하는 일을 하던 관노 출신 장인은 혀를 내둘렀다.
“조선도 이런 배를 건조할 수 있나?”
장인은 이도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게 흉내는 낼 수 있겠사옵니다만…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선박 건조라는 것도 국가적 차원의 꾸준한 지원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누전선 몇 척을 만드는 데에도 그렇게 인력을 쏟아야 하는 것인데, 이 배는 대체 얼마나 많은 나무와 인력을 쏟아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도는 다른 여러 가지 기물들도 보여주며 그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이것은 어디에 쓰는 물건인 듯하냐?”
선장실에 놓여 있던 꽤 큰 크기의 육분의와 망원경, 그리고 수많은 천체관측기구들을 보던 장인들이 고개를 저었다.
“소인은 잘 모르겠습니다요….”
“저도 도무지….”
그러나 구석에 있던 젊은 장인 한 명만은 이 와중에도 열심히 육분의를 관찰했다.
“…만져도 되옵니까?”
장인은 물건의 주인에게 허락을 구했다.
원길은 그에게 흥미를 느낀 듯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장인은 무엇을 떠올렸는지 그것을 들고 서둘러 배의 밖으로 나간 뒤 그것을 눈에 대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원길은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이것은 하늘의 태양과 별자리를 관측하여 위치를 측정하는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장인은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체… 어찌 이런 물건을….”
상민이 원길에게 내린 이 육분의는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매우 정교했으며, 질 좋은 유리정은 물론이고 겉의 골격도 바닷바람에 부식되지 않기 위해 값비싼 금과 여러 광물들을 합금하여 만든 고려 기술의 총화(總和)였다.
이도 또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 말이 사실이오?”
원길은 다소 우쭐해하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대군마마.”
양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꽤 크긴 했지만 개인이 휴대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물건.
그런데 저것으로 감히 하늘과 땅을 관측할 수 있다고?
이도는 이 ‘고려인’들에게 전율을 느꼈다.
심지어 약간의 공포심마저도.
그들의 고려는 실체가 있었다.
없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이도는 탐색 이후 서둘러 개성부로 올라왔다.
자신은 전조의 여러 서적들을 맡아 관리하고 있기도 했었지.
그중에 생각나는 사료들이 있었다.
한달음에 서고로 들어가 수많은 사료를 뒤적이던 이도가 불현듯 경호성을 내질렀다.
“여기 있구나!”
[경오(庚午, CE 1270)년 팔월….]
* * *
이도는 알아낸 사실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형에게 가져다 바쳤다.
이제는 어정쩡한 눈으로 그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단 말이지?”
“칙서와 조서 또한 소제가 살펴보았는데….”
첫마디의 말에 격분한 이제는 사실 뒤의 내용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었다.
이도는 꼼꼼하게 그 조서를 탐독해 조언을 건넸다.
“몇 가지 말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아국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제국이라면 바꿀 수 없는 첫마디를 제외한 조서의 표현들을 찾아보자.
능수능란한 외교적 수사법은 그들의 참칭하는 천자국에서 제후국으로 보내는 서신이라기엔 상당히 격식이 있었다.
심지어 내용도 별 뜻이 없었다.
‘아국에 내린 선원들이 고향에 들러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는 것이 전부.’
마치 제례를 중시하는 조선이라면 들어 줄 수밖에 없을 요구사항을 적어놓은 것이다.
실무적 일을 언급한 칙서에도 식량을 조금 나누어 달라는 정도가 적혀 있었고.
이제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설명을 들었다.
무언가 이해가 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고향은 무슨?”
“…….”
이도는 약간 주저하다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이 참칭하는 전조에 대해 약간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주저하는 아우의 태도에 이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관 한 명이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며 못 들은 척 붓을 놀리고 있다.
빌어먹을 인간.
이제는 아버지 이방원 또한 포기한 족속들과 괜한 입씨름을 해 역사에 폭군으로 기록되긴 싫었는지 투덜거리며 아우에게 종이와 붓을 내밀었다.
“으흠.”
사관이 고개를 쭉 빼고, 그것을 힐끔거리자, 이제는 눈을 부라렸다.
[상께서 충녕대군의 서신을 밀히 받으시고, 따로 보여주시지는 않으셨다.]
이도와 사관 모두 맹렬히 붓을 놀리는 소리만이 편전을 울렸다.
속필로 빼곡히 적은 서신을 읽어내려가던 이제가 쓰인 내용에 크게 당황했다.
“이것이 사실이냐?”
만약 신뢰하는 아우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괴상한 도참설이나 떠들고 다녔다고 당장 곤장을 백 대 때리고 내쫓았겠지.
“예….”
하지만 이도의 눈에는 자신과 비슷한 놀라움이 담겨 있을 뿐 흔들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