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 이제
태종 이방원.
이방원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것에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공을 세웠으며, 여러 사건을 겪고 즉위를 한 후에도 수많은 일을 행하였다.
사병을 혁파하였고, 관제를 정비하였으며 내실을 다졌다.
공신과 외척을 숙청하여 그들이 갉아먹을 조선의 뿌리를 지켰으며 행정적으로, 외교적으로도 대업을 이루었다.
군사적인 면에서는 어떠하였는가?
요동 정벌에 성공한 이성계의 아들답게 북방 건주(建州) 여진족들을 몰아내었고 오도리(吾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의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그의 치세에 엄청난 영토가 조선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조선은 옛 허물을 벗어 던지고 외왕내제를 칭할 수 있을 만한 국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태자 제(禔)는 어릴 적부터 몹시 사납고 난폭했다.
여색을 밝혔으며, 비행을 밥 먹듯이 했다.
신료들은 그러한 제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이방원도 처음에는 마찬가지였다.
이방원은 태자 제를 심양에 보내었다.
국력이 커졌으나 영토가 넓어 관리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렇다고 국본을 보내는 것은 과한 처사라 신료들의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강행했다.
‘만약에 불운한 일이 생긴다면, 영특한 충녕에게 보위를 잇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이방원은 냉철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성품이 어질며 공손하고 가진 재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하여 매일같이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는 아이.
방원은 충녕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다.
막내를 생각하면 환히 밝아올 조선의 앞날이 너무나도 명백했기에.
그리고 모자란 맏형 놈은 조금 굴러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하지만 이방원의 마음은 그 단호한 성정에도 불구하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태자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이방원의 눈 밖에 났던 제는 마치 유배처럼 보낸 심양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심양은 북원과 여진 양쪽에 돌출된 위험지역임에도 꽤나 안정되었다.
문관이 쓴 장계와는 어조가 완벽히 달랐지만 장수들의 장계에는 국본에 대한 찬탄이 이어졌다.
“국본께서는 실로 태조대왕의 현신이십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직접 곁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매우 과장된 보고임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일신의 능력만큼은 있다는 소리겠지.
이방원 또한 큰 전쟁을 겪은 사람.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제가 이러한 아이였던가?’
이제(李禔)의 호탕함은 여진족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의 음란함은, 적어도 미망인들이 많은 심양에선 그리 큰 흠결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무예에 대한 재능과 군략에 대한 일가견은 상당했다.
난폭하여 행동이 앞섰으나, 정작 전면전에 들어가면 상당히 냉철한 판단을 하는 아이였다.
북원의 발톱과 여진의 침탈에 맞서 북방과 조정의 군대를 이끌고 저지한 것은 오로지 제의 공이었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이방원은 이제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
한양으로 온 태자의 얼굴은 마치 북방의 거친 사내들과 닮아 있었다.
얼굴에는 큰 상처가 나 있었고, 호피로 두른 가죽 무구가 눈에 크게 띄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존경심보다도 불만과 원망이 더 컸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에게 나름대로의 예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래, 그는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를 닮았다.
오랜만에 아들을 마주한 그 순간 이방원은 허허롭게 웃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구나.’
수많은 일을 겪으며 사람의 관상을 잘 본다고 생각했었던 것은 자만이었다.
정작 자신의 맏아들의 저런 면모 또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저 아이는 들판에 풀어놓으면 마치 한 마리의 늑대가 되어 초원을 질주할 아이였다.
사대부들의 경서를 읽는 것이 아닌, 북방에서 검을 휘두르고 활을 쐈어야 할 아이.
그 흔들림 없는 눈에 이방원은 결단을 내렸다.
“들으라.”
조선은 명군이 필요했다.
뛰어난 군주의 분류에는 여럿이 있겠지.
학문적으로 출중한 자와, 전쟁에서 승리할 자.
북서쪽의 숙적 북원이 목숨이나마 붙어 있고 북동쪽의 여진, 그리고 바다 건너 북조의 위협은 커져만 가는 상황.
지금의 상황은 분명히 후자가 나을 수 있었다.
그의 성품상 분명히 도덕적 성군을 칭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허나, 그는 적어도 패왕의 자질이 무엇인지는 얼추 배워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또한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맏아들의 정통성은 제에게 큰 무기가 되어주겠지.
“짐은 보위를 태자에게 양위할 것이니라.”
“망극하옵나이다. 폐하!”
북원과 여진을 몰아낸 두 번의 대승 이후에는 신하들조차 그 말에 반대할 수 없었다.
이제가 마침내 조선의 네 번째 보위에 올랐다.
* * *
잠재적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형제란 고금을 통틀어 완벽하게 마음 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세 형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효령은 불교에 반쯤 귀의하게 되어 계승권을 거의 상실했다.
불교의 불자만 들어도 사대부들은 경기를 일으키는 시대였기에.
하지만 충녕은 조정의 대소신료에게 엄청난 인망을 받고 있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사랑스러운 아우를 싫어할 수 없었다.
매번 미워하려는 감정을 가지고 그를 만나면,
아우의 빛나는 눈동자가 자신을 선망과 존경이 가득 담긴 눈길로 쳐다보고 이러한 말을 하지.
“형님, 심양의 일은 어떠셨습니까?”
한마디 말만 하면, 자신은 이 영특하고 귀여운 동생에게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과거 일과 무용담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러면 동생은 또 박수를 쳐 가며 자신을 칭송하고.
하지만 자신이 계속 이도를 아낄수록 측근들이 자꾸만 동생을 견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은 절대 동생을 해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절대.
이제는 문득 묘수를 떠올렸다.
“아우야, 개성에 가 주겠느냐?”
조선의 약점.
전조의 수도 개성은 아직 이성계와 그 자식들에 대한 증오로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울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이도의 인품과 능력이라면 그곳에 떠도는 불운한 기운들을 모두 없앨 수 있을 것이고.
측근들도 감시하기 편한 곳이며 세력을 쌓을 수 없는 곳이니 마음을 놓을 것이고.
자신도 생각날 때마다 불러 술을 같이 한잔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닌가?
자신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이도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폐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 * *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다.
진도 앞바다에 황당선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은 이제는 긴급히 대신들을 불러모았다.
“수군의 준비는 어떻게 되었는가? 당장이라도 저들을 격파할 준비는 되어 있겠지?”
항상 그렇듯이 금상은 치고받을 생각만 하는 무골이다.
대신들은 진땀을 흘리며 그를 막았다.
“폐하, 비록 야인의 함대라 하나, 순순히 문정에 응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그들과 대화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사옵니다. 또한 나주목사와 수군처치사가 올린 장계에 의하면 그들이 우리의 말을 능숙하게 한다 하니 조정에 불러 그들에게 바다 너머의 정세를 고하라 하시옵소서.”
이제는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다.
이왕이면 음흉한 남북조 놈들의 소식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리하라.”
조정의 답변을 받은 관원들은 서둘러 준비했다.
나주목에 있던 고려인들은 조선의 맹선에 타고 강화로 향했다.
“그냥 우리 배를 타면 안됩니까?”
기어가는 것 같습니다.
항해사의 투덜거림에 원길도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최대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품 안에 있는 국서를 만지작거린 원길이 꼬고 앉았던 다리를 풀었다
맹선에 자리 잡은 고려의 무인들도 제각기 옛 땅의 바다를 보며 감회에 젖는 듯했다.
“이곳이 우리 선조들께서 사셨던 곳이구나.”
뻔한 바다와 뻔한 육지에 뭐 볼 게 있다고 저리 난간에 다닥다닥 붙어 바깥을 바라보는지.
조선 장수들은 외인들에게 한마디 했다.
말이 통하는 이민족이란 참 이상한 관계다.
“거, 배 뒤집어지오, 다시 자리로 가시오.”
“…누가 이 똥배를 아직 타고 다니랬나?”
고려인이 던진 말에 발끈한 조선 장수가 콧김을 뿜었다.
“대조선국의 맹선을 무시하는 것인가?”
“그럼 이 낡아 빠진 배를 존숭하게?”
“이놈이 자꾸…!”
“그만!”
수군처치사가 고함을 지르자, 조선 장수가 목을 움츠렸다.
원길도 굳이 분위기를 망치는 갑판장에게 한마디를 했다.
“우리는 이 고… 아니 조선에 온 이상 일개 탐험대가 아니라 공식적인 사절이다! 내가 시중께서 주신 국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냉막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고려인들과 조선인들의 다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 * *
조선의 법궁 경복궁(景福宮)
태조 4년에 건설을 시작한 이 궁궐은 이제의 치세에 도달하며 거의 목적했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일부 벽과 전각들만이 남아있었고 기능을 하기엔 충분했다.
원길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거대하고 화려하며 위압적인 창양의 창천궁에 감히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수수하고 미려한 곡선과 옛 향수가 물씬 풍기는 목조건물은 만약 그가 문신이었다면 속 안에서 우러나오는 시조를 참지 못하고 뽑아냈을 것이었다.
‘대단하구나.’
조선의 위상은 쉽사리 판단하기 어려웠다.
들은 바에 따르면 수차례 외침을 막아내며 국가적으로 위신이 높았고 건국의 청량함이 아직 궁궐을 감도는 모양.
고려 또한 태조 이래 사현제의 치세가 있었었지.
감히 그분들에 견주긴 힘들어 보였으나 전 왕이 상당한 명군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다.
마침내 근정전에서 조선 4대 국왕 이제를 마주하게 된 원길은 거리낌 없이 그 앞에서 절을 올렸다.
이제는 다소 이채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궁중의 예법에 상당히 익숙한 자가 아닌가.
“소인, 신원길, 조선의 지존을 뵙습니다.”
“일어나라.”
심성이 거칠긴 하나, 자신에게 마땅한 예를 올리는 자를 처음부터 미워하긴 힘들다.
처음보단 확연하게 누그러진 얼굴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며, 어디에서 왔는가?”
원길은 능숙하게 자신의 앞에 있는 두루마리를 옆의 내관에게 건네었다.
몸 수색 때 오해를 살까 저어해 미리 빼놓은 두루마리는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나게 화려했으며 무거웠다.
내관은 차마 그것을 펼쳐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주상에게 올렸다.
종이에서 전해지는 강대국의 품격.
세밀한 금사가 입혀진 부드러운 천과 순백의 종이.
사절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대주와 대명에서 온 것과 같은 저런 자신감.
누그러진 이제의 얼굴이 다시금 날카롭게 벼려졌다.
‘중원의 인물들이 저리 조선말을 능숙하게 한다고?’
괴상한 방언들을 쓰는 족속들이지만, 분명히 그 근원은 조선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많았다.
궁금증은 이 안에 있다.
이제가 답을 찾기 위해 두루마리를 활짝 양옆으로 펼치자, 제일 처음 적혀있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 大高麗帝國 皇帝
조선 왕은 들으라,
자칭 조서(詔書)에 적힌 단 몇 마디 말에, 이제의 피가 머리로 솟구쳤다.
“네 이놈!”
다음 말은 주변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져 잘 들리지 않았다.
이제가 대노하여 소리를 지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길과 그 무리는 즉시 옥에 갇혔다.
감히 망령되게 전조를 적어놓은 것도 모자라,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칭하고 조선 왕에게 하대하는 이런 말은 당금 대주의 사절이나 할 수 있는 외교적 어법이었다.
의금부의 관원들이 그들을 거칠게 옥으로 쑤셔 박았다.
그러나 원길의 얼굴은 평온했다.
“전… 아니 폐하께 조서 말고 칙서(勅書)도 있다 전해드리게.”
마침 대전에 놔두고 온 것 같단 말이야.
의금부의 관원들은 이 간이 배 밖으로 나와버린 듯한 위인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화가 날 법했으나, 오히려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은 대국의 사신 그 자체와 같았다.
“나를 대하는 것은 곧 아국을 대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야.”
의금부에선 이들에게 삼시 세끼 꼬박꼬박 고기반찬을 줄 수밖에 없었다.
* * *
개성부(開城府)로 간 이도는 부사와 여러 관리들을 이용하여 현지의 민심을 다스렸다.
중앙에 호소를 하여 왕씨에 대한 학살을 멈추게 하였고, 여러 인물들을 복권했다.
드디어 안정을 찾은 개성부.
이도는 전조 왕들의 능의 관리와 배향 문제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개성부의 민심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이 직접 이곳에 와서 보니, 고려는 다시 재건할 수 없는 왕조였다.
불교와 원, 그리고 권문세족의 패악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도 깊어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개성을 제외하곤 전국 어디에서도 전조의 복위 운동에 호응할 리 없었다.
만약 전조에 대한 마땅한 예우까지 한다면, 가장 완고하다는 개성부 내부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돌아설 것이다.
자신의 치세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았지만, 형님의 치세에서는 어떤 식으로 성상의 마음이 움직일지 몰랐기에 그는 머리만 쥐어뜯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 되겠다, 직접 올라가 봐야겠구나.”
이도는 짐을 꾸리고는 도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