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크와 하와이
새로운 땅에 대한 탐사가 곧 그곳에 대한 개척을 의미하진 않는다.
자고로 개척이란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보통은 수백 명, 혹은 천 명 정도의 개척민들이 지역에 도달하여 목책을 세우고, 농경지를 개간하며 목축을 시작한다.
자리잡기까지 이들은 순전히 먹여 살려야 할 입이었고, 그것도 아주 긴 보급로를 가진 부대와 다름없었다.
또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본국의 지원을 기다리기에는 초창기의 개척민이란 존재는 너무나도 연약했다.
달랑 몸뚱아리만 가지고 갔다간, 이미 수백 수천 년도 전에 먼저 자리 잡은 원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농후했으며, 그것도 아니라면 기근과 질병 등으로 죽어가는 일이 허다했다.
바깥으로 갈 사람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범죄자들을 이용해 개척을 하는 방안 또한 매우 근시안적인 선택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척을 해야만 하는 땅이 있기 마련.
마제도를 비롯한 동북해안의 여러 섬들과 연죽곶이 그런 경우가 되겠지.
섬들을 제외하고는 내륙의 파나마가 다음 순서로 꼽힐 것이다.
고려는 이제는 자리가 잘 잡힌 그곳들에 도독부와 도호부를 설치해 군정을 실시했다.
그러나 고려의 나머지 해외 영토의 개척 방식은 약간 달랐다.
강력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남려대륙을 제외한 곳의 개척지는 현지 세력을 포섭하는 절차를 밟으며 식민지로 삼는 것이다.
여러 가지 특장점이 있었다.
현지 세력을 무조건 적대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안그래도 힘든 자연과 인간의 투쟁에서, 그곳에 평생 살아왔던 인간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생존의 불확실성을 한층 높였다.
고려인들은 수많은 지역들을 복속하며 깨달은 것이 있었다.
새로운 곳이라 해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항상 적대적인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옛날 어린이 동화 같은 곳에선 원주민들은 모두 평화롭게 어깨동무를 하며 살았다 서술되어 있겠다만 당금의 인간 문명이란 집단과 집단 간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 원주민들이라고 해서 다를 것 하나 없었다.
그렇다면 이용하는 것이 순리였다.
가령, 강력한 세력인 갑과 상대적으로 약한 을이 있다면, 을을 도와 갑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호의와 함께 당근을 제시한다.
너희들이 계속 제국에 우호적이라면 이 일대의 패권을 쥐는 것도 꿈이 아니라고.
한 번의 전투에선 이겼지만 제국이 없다면 다시금 갑에게 패배할 것이 분명한 을은 고려의 간섭을 받게 되는 것이지.
다짜고짜 성십자를 앞세워 원주민들을 총칼로 짓이기고 있는 동시대의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인들에 비해선 한참 세련된 방식의 이런 식민지 개척은, 마치 훗날 대영제국이 해외 속령들을 대우하는 것과 상당히 흡사했다.
조금씩 물에 젖듯, 고려의 풍습과 문물을 전래시키고 그들에게 당근을 주며 교류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상당히 고난도의 과제였다.
식민지의 책임자는 본국에서 필수교육을 이수해야 했으며 그들의 문명과 언어를 가장 열심히 배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고려의 해외 첫 번째 식민지는 미워크(Miwok)였다.
미워크는 고려에서 어마어마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속령이었다.
옛 지구로 따져보면 남부 칠레에서 미합중국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야 하는 여정.
고려 제국 서부의 대도시 영서나 그 북쪽에 있는 사곡에서 출발해도 남위 30도 이남에서 북위 30도 이북까지 가야 하는 엄청난 길이였다.
길이가 조금 멀어지면 식민지의 유지비용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미워크, 그리고 미워크와 고려의 중간에 있는 파나마 도독부를 끙끙거리면서도 붙잡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형언할 수 없는 전략적 가치를 지닌 요충지였기 때문.
파나마야,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세상을 바꿀 곳이었다.
미워크인들의 땅 또한 마찬가지.
앞으로 북태평양과 북려대륙 서해안에 영향력을 펼치려면 이렇게 좋은 입지의 땅을 누군가 채 가도록 놔둘 수 없었다.
비록 시간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좁은 해협, 즉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가 있을 자리를 넘어가면 8자 모양의 만이 나타난다.
대규모의 함대를 정박할 수 있으며, 충분한 식수를 공급할 강과 농경에 적합한 풍요로운 대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원주민 미워크족은 북려대륙의 원주민이 일반적으로 그러했던 것처럼 아직 초기농경사회에 진입한 정도의 문명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남쪽에는 요쿠츠족이 있었는데,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은 민족이라 생물학적인 의미로는 거의 같은 민족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분화가 일어났는지, 어느 순간부터 둘 사이가 멀어졌고 지금은 시도 때도 없이 창을 들이밀고 오는 것이 저들이란다.
고려는 그 두 세력의 틈바구니에 개척지를 건설했다.
대체로 미워크와 우호적이었다.
입지는 환상적이었다.
아늑한 만을 앞에 끼고 뒤에는 높은 언덕 성채를 지은 뒤 화기를 배치하면 원주민 수준에서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탈바꿈된다.
고려인 거류지는 차츰 크기가 커져만 갔다.
거류지라기엔 너무 커진 이 도시는 중앙 조정에서 미주(美州, 미워크에서 이름을 딴 것이 분명해 보였다)라는 이름을 하사받기도 했지.
예전 같았으면 피골이 상접한 개척민들이 그들에게 달려 나와 본국의 물품들을 서로 받으려고 난리를 피웠을 것인데, 지금은 사정이 꽤 나아졌는지 안색이 좋았다.
“이곳은 올 때마다 휙휙 바뀌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일주에 성공하여 항로를 발견한다면 앞으로 더 잠재력이 있겠지.”
원길은 함대에 보급을 한 후 남하했다.
북위 30도 남쪽의 무역풍지대.
함대를 운용하여 대각선으로 진입한 원길은 이윽고 상민이 준 지도에 묘사된 섬을 발견했다.
미워크가 북태평양의 요충지라면, 이곳 하와이는 모든 태평양의 중심이 될 곳이었다.
북과 남, 동과 서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섬.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대양의 배꼽에 있는 하와이 제도의 가장 큰 섬은 옛 탐라의 영토의 네다섯 배에 달했다.
다른 섬들을 합쳐보면 꽤 상당한 크기.
농경으로 충분히 자립 가능하다 평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섬의 식민지가 자급자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이런 여건은 행운이라 말할 수 있었다.
원길은 다만 정박하지 않은 채,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간은 심지어 망망대해 가운데 있는 이 섬에도 거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감탄을 뒤로 하고 그들 부족들을 관찰하던 원길이 단언했다.
“이곳도 하나의 군집체로 연결되지는 않은 모양이야.”
“섬들 간의 거리가 카누로는 안전하게 갈 수 있다고 장담하진 못할 정도군요.”
“그렇지.”
가는 것이야 할 수 있다지만, 정복해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겠지.
“이곳은 개척자들한테 맡겨두고 우린 떠나자고.”
고려는 이곳을 식민지가 아닌 직접 다스리려는 계획을 가졌다.
연락선을 보냈으니 후발대들이 와 이곳을 개척하는 일에 뛰어들 것이었다.
또 한동안은 기나긴 항해가 지속되었다.
남태평양의 긴 항로처럼 끝없는 지루함이 이어지는 곳.
그러나 꽤 여러 섬들이 그들의 진로에 있어 소소한 발견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먼 거리를 항해하여 그들은 톤도 왕국(필리핀)의 땅에 도달했고 몇 가지 종자와 물품을 거래한 뒤 북상하여 주(周)의 땅이 분명해 보이는 대만(臺灣)의 영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주나라가 목적은 아니기에 정박하지 않고 먼 거리에서 관찰을 한 원길은 생각보다 주의 배들이 활발히 오고 가며 배들이 튼튼해 보인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열심히 보고서에 끄적거린 원길은 북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 * *
황당선(荒唐船)).
황당선, 혹은 이양선(異樣船)이라 함은, 종래 조선과 중원, 그리고 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황당할 정도로 독특한 배를 일컫는 말이었다.
대개는 덩치가 커다란 배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그 위협적인 모습이 마치 바다 위의 성곽과도 같았다.
이 용어는 조선이 건국한 지 불과 반백 년이 지나지 않아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의 탐험 선단은 총 열 척.
많은 식량을 실을 수 있게 개조한 협저선은 협저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이미 덩치가 상당히 커진 상태였다.
대형 협저선은 좀 더 많은 식량을 적재하기 위해 덩치를 키웠으며 마자파힛 부근에서 마주한 해적의 교훈을 떠올려 부족한 대포의 문 수도 늘렸다.
좌우 각각 장포(長砲) 2문, 중포(中砲) 8문에 달했으니 속력과 화력, 그리고 적재량으로도 동시대 아시아의 어떤 함대로도 견줄 수가 없었다.
바닷가에 거주하던 백성들은 모두 공포에 떨었다.
신라 이전부터 바다에서 오는 적은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국가를 휘청이게 할 대규모 공격은 없었으나, 작은 규모의 해적들은 항상 존재해 왔고 심지어 고려인들, 조선인들 중에서도 해적이 되는 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왜의 남조와 북조가 혼란에 빠져들면 왜구들이 갑자기 증가하니 필히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함대의 위세가 자못 두려워, 바닷가의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졌고 심지어 땅과 집을 내다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는 이들도 생겨났다.
조선의 무장들과 관리들은 좌시할 수 없었다.
건국 초, 아직 국가의 규율은 날카로웠으며, 관리들의 행동도 민첩했다.
그들은 서둘러 전령을 띄워 물자와 병력을 소집한 후 그들을 맞이했다.
역성혁명을 치르면서 조선의 수군은 약화되어 대주와 비교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남조의 수군과 견줄 순 있었다.
주변 진의 누전선과 맹선을 긁어모으니, 무려 백 척에 달하는 대함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저 황당선들은 별 대응을 하지 않았다.
“싸우려는 것이 아닌 것인가?”
조선 관아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일단은 모두가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는 것에 동의했다.
주와 남조 간의 교류도 아직 이어지는 터라 외부세력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 도처에 만연하지는 않았기에.
서남해안을 지키는 수군도안무처치사가 이 외부 함대에 대해 먼저 문정을 실시한 후 중앙에 장계를 올렸다.
쉽사리 믿기 힘든 말들이 적혀 있었다.
[경술년 12월 12일, 진도 앞바다에 이양선 열 척이 이르렀습니다. 표류한 선박들은 그 독특한 모습으로 포에 정박하기가 위태로워 거부하였고, 다만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를 포함한 열 명이 순순히 육지에 내려 취조를 받았습니다.
…중략….
이들의 선박은 마치 거대한 목조 성곽과 같아 높으며, 많은 대포를 좌우에 올려놓아 사방에 뽐내니 가히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큰 돛은 세 개나 달려있으며, 몹시 넓었으며 용과 같이 생긴 문양을 그려 넣었습니다.
…중략….
이들의 생김새는 괴이하였는데, 어찌 보면 조선인들과 흡사하게 생겼고, 어찌 보면 그렇지 아니하였습니다. 남쪽 해안의 야인들과 비교해 볼 때, 체격이 상당히 크고 눈매가 사납게 생겼으니 경계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들이 쓰는 말은 우리의 말과 너무나도 흡사하니, 이 어찌 해괴하고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저들이 저들끼리 말하는 것을 계속 엿들은 바, 참람되게 전조의 이름을 대고, 전조의 수도에 가기를 원하니 참으로 망측하고 못된 무리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장계를 품은 전령이 서둘러 한양으로 뛰어갔다.
수군처치사는 이들을 일단 나주목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원길이라 한 우두머리와 그 밑 고급 선원들은 마치 고향이라도 가는 것처럼 유유자적하게 남아서 배를 관리하는 선원들에게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당최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