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이야기
이제는 꽤나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지만, 사건의 발생은 1273년의 12월의 일이었다.
1273년 음력 12월 15일, 여몽연합군이 규슈에 상륙했다.
가마쿠라 막부의 호조 도키무네 싯켄은 철저하게 준비한 여몽연합군을 막지 못했다.
왜를 지배했던 가마쿠라 막부, 그리고 그들을 이끌던 호조 싯켄가의 종말이었다.
왜의 군대는 대칸의 군세 앞에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렸고, 남쪽 규슈에는 원의 직간접적인 통치를 받는 규슈(구주) 울루스가 건국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원의 정벌군은 규슈를 정복해 엄청난 수의 왜군들을 학살한 이후 처결해야 할 선행 문제, 즉 남송을 공격하는 일 때문에 대부분 떠나갔다.
하지만 세상이 불타는 듯한 끔찍한 광경과 비명 소리, 공포스러운 군대에게 심적으로 짓눌려버린 가메야마 천황은 1274년, 추가적인 정벌을 막고자 막 북경으로 천도한 원 세조 쿠빌라이의 앞으로 가 고개를 조아려야 했다.
오배삼고지례를 행한 것.
그리고는 공식적으로 중원의 황제이자 천하의 지배자인 대칸 앞에서 천황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왜왕이라는 명칭을 하사받았다.
분명히 나름대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로 인해 진군하던 죽음의 군세가 다시금 본국으로 되돌아갔으니까.
왜인들에게 잠시의 평화, 그러나 영원한 굴욕감을 선사한 가메야마 왜왕은 국내에 돌아오자마자 수많은 반대파들의 흉흉한 시선에 둘러싸였다.
고려가 여몽전쟁을 겪으며 하나의 민족성을 띠게 된 것처럼 원의 공격으로 열도의 민족 정체성도 발아하기 시작했다.
“치욕스러운 관습을 행한 다이카쿠지 황통은 이제 물러나시오!”
하지만 다이카쿠지 황통의 가메야마 왜왕은 자신의 선택이 정말 옳다고 생각했다.
대원과 고려 연합군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오로지 죽음뿐이었잖는가.
저 멍청이들도 보았던 것이 분명했지만, 단지 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다.
세계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한낱 열도의 무사들이 막을 순 없었다.
“이 어리석은 것 같으니, 저 공포의 군대에 항거한다면 너희 모두에겐 죽음뿐이다!”
국내의 반대파와 격렬히 대립한 가메야마 왜왕은 교토를 잃어버리고 주코쿠로 도망가야만 했다.
하지만 군대를 물렸다고, 쿠빌라이가 아예 일본에 신경을 끈 것은 아니었다.
구주를 박살 낸 바얀을 불러들이고는 남송을 두들겨 패고 있던 그는 두 충성스러운 종복, 규슈 울루스와 고려에게 일러 시코쿠에 있는 가메야마 왜왕의 군대를 지원하게 했다.
결국 이듬해에 규슈, 고려, 남왜연합군은 간사이와 시코쿠를 탈환하고 주부라 칭해질 곳까지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반대파들은 동쪽으로 도망가 간토에서 지묘인 혈통의 후시미 왜왕을 옹립해 북조(北朝)를 성립하였고, 자연스럽게 가메야마 왜왕의 조정은 남조(南朝)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이 없으면 북조가 더 강했다.
물론 항상 그러했듯 고려가 온갖 핑계를 대고 전장에서 이탈하고, 규슈군도 은근슬쩍 발을 빼려는 모습을 보이자, 북조는 주부를 탈환하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북조 또한 주부 서쪽으로 더 이상 확장할 순 없었다.
남조는 으르렁거렸다.
“네놈들이 상국의 정복군이 다시 온다면 어찌 되나 보자!”
때마침 원에 대해 결사항전을 선포한 후시미 왜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
남조의 저 기세등등함이 어디서 기원하는지 알고 있던 북조의 고후시미 왜왕은 자신의 치세가 시작되자마자 남송을 정복하고 슬슬 북조에 대한 대규모 원정군을 준비하고 있던 쿠빌라이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았다.
그야말로 도게자(どげざ)를 박은 것.
두 명의 왜왕 모두 눈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는 광경을 보게 된 쿠빌라이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피가 줄줄 흐르는 고후시미 왜왕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친정을 하여 규슈를 정복한 당사자, 중서우승상 바얀이 그에게 귀엣말을 했다.
바얀은 원나라의 강력함은 알고 있었으나 전쟁을 거듭할수록 섬이라는 근본적인 특징, 그리고 동쪽으로 갈수록 험준한 혼슈의 산지에 원정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지금 저들이 머리를 조아린 순간, 위엄을 지키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좋았다.
“폐하, 저들을 쪼개 놓으소서.”
바얀의 설득으로 쿠빌라이는 대규모 원정을 중지했으며, 공식적으로 고후시미 왜왕을 북조의 정당한 지배자로 임명했다.
이후 상처뿐인 두 왜왕은 비와호(琵琶湖)를 경계로 서로 노려보기만 할 뿐 크게 대립하진 않았다.
평화는 꽤 길었다.
체급상으로는 혼슈의 대부분을 가진 북조가 더 강했지만, 구주 칸 쿠틀룩테무르의 딸과 맺어진 남조의 고우다 왜왕은 만만치 않은 뒷배를 등에 업고 있었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두 나라 모두 원에 입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먼저 머리를 숙인 남조가 더 원과 사이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고려와의 관계 또한 북조가 더 서먹했고.
북조도 도게자를 박은 지묘인 혈통의 왜왕들의 권위가 자연스럽게 떨어지며 전통적으로 다시금 막부의 시대로 돌아갔고 이를 무로마치 막부라 불렀다.
남조는 고려와 같이 부마국의 지위를 얻고 다이카쿠지의 왜왕들이 대대로 친정을 펼치니 이를 다이카쿠지 친정기라 불렀다.
남북조 시대는 역설적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이 강화되는 순간이었다.
친정을 한 남조의 왜왕들은 원과 고려를 본받아 중앙행정을 강화해 나갔다.
북조 또한 이 대립 시기에 막부의 통제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혼란기에 잠시 악명을 떨쳤던 왜구의 준동은 크게 줄어들었다.
발원지인 동해 부근의 이키와 마쓰우라 등의 지역 또한 구주 울루스의 통제하에 있었으니.
왜국들을 살펴보아도 남조는 같은 부마국이며 꽤 강력한 수군을 가지고 있는 고려와 동맹국으로 행동해야 할 동기가 있었고 북조는 거리와 여건상으로 남조에 비해 태생 왜구들이 그리 많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개경의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꽤 안온한 시대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어갔다.
고려에 대한 원의 착취는 여전했으며 고려 내의 권문세족의 횡포 그리고 대지주와 사찰에서 비롯된 불건전한 토지 구조 등 사회의 모순은 오히려 증가했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는 왕조 최악의 암군 충혜왕의 치세가 끝나고 나름대로의 명군을 맞이했다.
왕전(王顓, 공민왕)은 자신의 시대가 오자 본격적으로 원에게 반기를 내들었다.
고려 내에 쌓여있던 불만이 그의 즉위와 함께 발화되어 버린 것.
대륙의 혼란기는 고려에게 큰 기회였다.
왜구의 침입이 없는 삼남의 물산은 건재했다.
원이 한창 홍건적에게 고통받고 있을 때, 왕전은 정치적으로도 반원정책을 펼쳤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고려의 왕이라면 탐낼 수밖에 없는 심양왕의 봉역을 넘보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남조의 왜왕은 물론이고 장사성의 주나라와 긴밀하게 연합했다.
남조 또한 쿠툴룩테무르 사후 방계끼리의 다툼이 격화되는 구주 울루스를 보다 자신의 피에 섞인 황금씨족을 운운하며 그 다툼에 난입했다.
그러나 고려에게 곧 큰 위기가 닥쳐왔다.
무시할 수 없는 규모로 쳐들어온 홍건적 잔당의 침입 이후, 마치 짜고 치는 것처럼 원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홍건적이야 어찌 막을 수 있었는데,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원의 병력은 홍건적과 비교가 불가능했다.
거의 7년 동안이나 또다시 대몽항쟁과 비슷한 일을 겪어야만 했던 고려는 심지어 개경과 남경(서울)을 빼앗기고 상주목까지 도망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던 고려는 삼남의 저력을 모조리 끌어모아 북원과 영혼의 단판 승부를 벌였다.
하늘이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는지, 정세운 등을 필두로 한 고려의 명장들이 그들을 대파하는 것에 성공했다.
신궁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는 옛 쌍성총관부 출신의 청년 무장, 이성계의 이름이 드높아진 것도 그 시기의 일이었다.
주와 왜의 소소한 도움도 있었다.
장사덕의 북진과, 고려의 후방을 노리던 구주를 공격한 남조.
어쩌면 이 순간이 삼국의 세력이 첫 번째로 진실되게 연합한 순간이 아닐까.
마침 고려의 원정을 주도하던 능신 토크토아테무르를 본국으로 불러들여 정치적으로 숙청해버린 원나라는 이 일로 한동안 어떠한 대외활동을 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치명적인 일격을 맞이하게 되었다.
백 년 전 몽골에 의해 국사에 유례 없는 치욕을 맞이했던 고려는 지금에 와서 북원에게 복수의 칼날을 꽂으며 설욕을 하기 시작했다.
친원파를 숙청하는 것은 물론 독살당한 장사성 대신 대주의 2대 황제로 즉위한 장사덕에게 고려의 수군을 지원해 줘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의 머리가 다 뽑히도록 만들었으며, 남조에 대한 북조의 공격에 지원군을 파병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나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원에게 맞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공민왕을 순식간에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명군에서 암군으로 떨어뜨렸다.
사별의 후유증으로 칩거한 공민왕 대신 난신들이 다시금 활개 치기 시작했고, 고려에는 탄식과 절망이 흘렀다.
그리고 그 뒤로 길고 긴 이야기가 있었지.
그러나 결국은 준비된 자가 왕좌를 차지하는 법이었다.
1383년, 개경의 고려는 멸망하고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었다.
상민은 밤새 동아시아의 지도와 원길의 검열되지 않은 원본 사서를 보며 머리를 굴렸다.
‘될 놈은 된다는 것인가.’
비록 중원일통에 성공했던 원 역사에 비해선 약간 초라해졌지만, 그래도 중원을 삼분하는 거대한 대명을 일구는 것에 성공한 주원장.
그리고 하늘이 내린 무예를 이용하여 마치 운명처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하지만 바뀌는 것도 있었다.
‘대주의 황제라.’
장사성의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장사덕의 이름은 아예 몰랐다.
‘일본은 또 왜 저런담.’
자칭 만세일계의 천황가, 이제는 왜왕가로 불려야 할 가문은 앞으로 화합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분열되어버린 모양이고.
세력 구도를 보던 상민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조선으로서는 불리할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
정신만 똑똑히 차리면, 옛 조상들은 이 난세에서 빠르게 승천할 수 있었다.
적혀있기로는 조선도 심양에 발을 담근 것 같았다.
명군들 몇 명만 제 때에 나온다면, 만주를 꿀꺽 삼킨 아름다운 판도를 완성할 수도 있겠지.
나오기만 한다면.
그건 미래의 일이니 알 수 없고.
‘대체 삼별초는 어떤 적폐세력이었을까.’
삼별초 출신의 무장이자, 삼별초의 치세를 끝내버린 상민은 한동안 헛웃음을 흘렸다.
* * *
신원길의 2차 항해.
환태평양 일주(사실 엄밀히 따지면 아니었지만)라 불리는 이 북태평양 횡단은 고려인들의 진실된 열망에서 기원했다.
시중이 된 상민 말고도 수많은 부호들이 원길의 탐험대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소 허황된 소리로 들렸던 세계일주를 보란 듯이 성공해버린 원길이 이제는 그들의 고향으로 가보겠다는 것이다.
번듯한 집과 농장을 가지게 된 옛 탐험대의 동료들도 뱃사람 특유의 근질거림과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시금 그의 원정에 뛰어들었다.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의 눈망울을 뒤로한 채.
정작 원길은 조금 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도 꽤 고된 여정이 될 것이었다.
시중의 집무실에서 다시금 국서를 받은 원길이 주저하며 물었다.
“그 옛 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맞는 말이다.
과거의 잔재에 불과했던 자들.
개성의 변절자들.
북적에게 대항하길 포기한 자들.
이 창양 고려에서 교육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알 그런 사실들.
원길의 말에 상민은 덤덤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지.”
“예?”
어이없다는 얼굴로 상민을 쳐다본 원길이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고개를 숙이는 것을 바라본 상민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의미한다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이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결국은 가지와 잎을 뻗지 못한다.
이 일은 정리되어야만 했다.
또한 확인해봐야 할 것이 있었다.
역사개변이 대체 어떠한 기준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 세상에서 자신만 알고 있는 이 법칙을 확인해야만 했다.
쉴틈없이 개변될 세상의 흐름을 간략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도록.
‘분명히 나는….’
이 세상의 '설정사항'을 기억하고 있다.
그 설정사항은 마치 하나의 법칙처럼 이 세계를 통제하고 있는 모양.
유럽과 접촉 이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지.
만약 조선과 만난다면 익숙한 역사와 실제 현실과의 대조를 통해 완벽한 사실확인이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