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항해록(2)(지도 첨부)
네 번째 기록.
아유타야 왕국은 인도차이나반도의 패권을 쥐기 시작하려는 국가였다.
몰락해가는 옛 크메르 제국의 자리를 놓고 아유타야(태국)와 대월(베트남)은 계속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중원의 혼란을 틈타 옛 남월(南越)의 영토를 넘보려는지 둘 사이의 관계는 예전만큼 날카롭지 않았고 아유타야는 그 틈에 말라카 왕국을 보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곳과 중원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절대 멀지 않은 거리였다.
원길은 중원의 소식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고려까지는 가까우면서도 가깝지 않은 거리.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해류와 바람을 고려해보면 함대의 복귀 거리가 비약적으로 늘어날 수 있었다.
“우리가 북쪽으로 나아가 옛 고향에 도달한다면, 너무나 긴 여정이 될 것이다.”
더 높은 북반구에서 동쪽으로 가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거리를 돌아야 했다.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던 터라 그들은 다음 탐험대에게 그 일을 넘기고는 여러 소식들을 적고 주변의 지리를 파악한 후 다시 항해를 떠났다.
“마자파힛 제국이라는 곳은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 듣기로는 그 섬들의 제국은 왕실의 내분으로 인해 몰락했고 이제 해적 소굴로 변하고 있는 모양이라네.”
함대의 선원들은 주변을 단단히 신경 쓰며 수마트라섬과 자바섬들의 남부를 돌아나갔다.
별로 멀리 간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마어마한 수의 해적들이 그들의 함대에 접근해왔다.
하지만 제아무리 일반 상업 혹은 군사용 범선에 비해 작다고는 하나 협저선 열 척 모두 발달된 함포로 무장한 상태.
그들은 해적선들을 무참히 박살 내고 남쪽으로 항해했다.
원길이 이 지긋지긋한 다도의 바다에 혀를 내둘렀다.
대승을 거두었지만, 화약의 총량을 생각해야 했다.
“이 꼴로 북쪽으로 가지도 못하겠구만.”
그리고 그들은 남쪽의 거대한 땅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치 고려의 서해안과 같이 살기에는 영 좋지 않은 땅들입니다.”
망원경을 부관에게서 건네받은 원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타카마 사막과 같은 거대한 모래의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사막의 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군.”
이 넓은 대지를 따라 아래의 길로 가니 점차 땅의 동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나마 동쪽은 몹시 살기 좋은 곳들이 펼쳐졌다.
온화하고 따스한 기후와 백사장, 그리고 각양각색의 식물들.
오래간만에 정박하여 식수를 보급하고 사냥을 시킨 그는 잠시 고민했다.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떠오르는 것이 있으십니까?”
“호주(好州)가 어떠한가.”
“좋은 땅이라굽쇼?”
항해장은 괴상한 얼굴로 원길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물도 구하기 힘들었던 서쪽의 광경을 까먹으시면 안 됩니다.”
원길이 투덜대었다.
“그렇다면 넓은 땅(顥州)으로 하지.”
호라는 음에 집착하는 선장의 고집에 항해장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탐험대의 수장으로 괴상망측한 이름을 붙이더라도 딱히 말릴 방도가 없었지만.
저녁을 준비하러 사냥을 나섰던 선원들이 특이하게 생긴 동물을 잡아 왔다.
두 발로 뛰어다니는 저 동물은 배에 근육이 도드라졌다.
저 팔로 한 대 맞으면 꽤 위험할 수도 있겠다.
“강인해 보이는 동물이군.”
양념을 치고 구워봐도 누린내가 심해 원길의 비위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육포 덩어리에서 벗어났다고 좋아하며 먹어대는 선원들이 보였다.
동쪽으로 항해하며 그들은 새로운 섬을 발견했다.
원길의 이름을 따서 길주(吉州)라 이름 붙여진 이 섬은 북섬과 그보다 더 큰 남섬으로 갈라져 있었다.
남쪽 섬은 상당히 험준하여 바다에서도 그 산세가 보일 정도였다.
특이한 것으로 원주민들이 몹시 사나운 편이다.
우르르 몰려와서 괴상한 함성을 지으며 상대를 위협하는데, 나중에는 심지어 공격까지도 감행했다.
부주의한 선원 몇 명이 그들에 의해 끌려갔던 적도 있었다.
물론 병력을 총동원해 그 작은 부족을 박살 내고 구출해 왔지만 곳곳에서 남아있는 식인의 흔적에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려인에게 식인종의 개념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마주치길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장께선 다신 어디 땅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소이다.”
“…….”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갑판장의 말에 원길은 어찌 제대로 대꾸하지 못했다.
길주에서 부랴부랴 떠난 함대.
원길은 선장실로 돌아와 슬쩍 자신의 비밀 지도를 펼쳤다.
상민이 그에게 무덤까지 가져가라며 쥐여 준 지도.
대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도는 정말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큰 도움이 되었어.’
지도는 분명히 고려인들이 가보지 않았던 영역까지 표시되어 있었다.
생략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항해의 계획을 설계하는 것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했다.
지도에 따르면 그들에겐 앞으로 엄청난 길이의 항해가 남아 있었다.
거리상으로 보면 남대동양과 희망곶의 항로보다는 족히 삼 할은 더 긴.
‘바다가 이름값을 했으면 좋겠군.’
크고 잔잔한 바다, 태평양에게 기도를 한 그들이 마지막 항로에 진입했다.
* * *
전무후무한 업적을 달성한 위대한 탐험가 신원길은 지구가 정말로 둥글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입증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남극 순환류와 편서풍을 이용해 거대한 태평양까지도 정복해낸 원길의 탐험대는 고려의 서해안, 과트라체 자치령의 땅에 도착해 무사히 생환함을 알렸다.
원길과 그 부하들은 중앙 정계로 복귀한 상민에게 탐험가로서 받을 수 있는 최상위의 서훈(敍勳)을 받았다.
유명세는 말할 것도 없었다.
전국의 수많은 학자들과 탐험가들이 원길의 집을 두드렸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그의 동방항해록은 ‘적당한’ 수정과 검열을 거쳐 출판되었고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갔다.
세기의 사건이라 이교도, 이민족임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왕실은 그에게 최초로 프리머스 서컴데디스티메(라틴어 : Primus Circumdedistime)의 칭호를 내리고 왕실에 초청했다.
고려와 무관심조약을 맺었지만 나름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포르투갈에 몹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온 원길은 한미하다지만 그래도 포르투갈의 귀족 출신 여인을 처로 삼고 돌아오기까지 했다.
세계를 최초로 일주한 민족.
이 행위는 고려인들에게 엄청난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저 거대한 대양들을 최초로 정복한 바다의 민족이라는 그 자긍심을.
고려인들은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인지와 지각의 범위가 넓어지며, 옛 한반도가 실제로 지구의 몹시 작은 부분에 해당했다는 사실.
그 비좁은 땅에서 자칭 ‘천자’를 칭하며 외왕내제를 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실.
심지어 그들이 그렇게 경계하고 심지어 흠숭하기까지 했던 중원 또한 지구상으로 볼 때 그리 큰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진실로 저 거대한 대륙을 지배한 옛 숙적, 몽골이 그들이 이 땅에 떨어진 이후 어떠한 일들을 해왔었는지.
비참하게 쫓겨난 이 삼별초의 후예들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자괴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에 그러한 과거의 사념들은 모조리 흩어졌다.
북적(몽골)의 시대 이후 분명히 세계의 패권을 쥐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들이었다.
고려인들은 또한 새로운 생각을 품었다.
“대체 이 거대한 거리를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건너왔단 말인가?”
원길의 항해록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극 순환류 해류와 강력한 편서풍을 이용하고 심지어 발달된 탐험용 협저선을 타고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항해였다.
불가사의한 힘이 아니라면 그들이 이 땅에 떨어진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무적의 논리가 가동되었다.
“이것은 모두 동해 용왕의 신묘한 힘 덕분이다!”
논쟁과 토론을 좋아하던 합학과 증학의 철학자들도 이 일에 대해선 꿀 먹은 벙어리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들 내에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정신없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미륵의 화신이자 동해 용왕인 태조를 모신 해문의 절, 해룡사는 이제 거의 민족적 성지와 다름없게 변했다.
유럽인들이 보면 메카와 예루살렘과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할 수도.
전국 각지에서 방문객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는 독특한 사람들이 있었다.
원주민들과 섞이며 고려의 평균적인 외모와 체형이 꽤 바뀌었지만, 그 바뀐 모습과도 현저하게 이질적인 사람들.
칵틀 루임의 왕족과 사제단이 고려의 해룡사에 참배하러 온 것이었다.
고려의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구식 협저선을 타고 오직 신념으로 그 장거리 항해를 한 이들은 종교적 열망이 정말로 충실해 보였다.
“대체 왜?”
고려인들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민중들의 사상적 흐름도 바뀌었다.
“그렇다면 정녕, 이 땅에 떨어진 고려인들은 선택받은 민족인 것인가?”
고려인들은 자문자답하기 시작했다.
저 물음은 유럽과 조우하며 음지로 퍼져나가는 아브라함계 종교에 대해 엄청난 방어력을 가질 수 있는 논리로 적용되었다.
분명 그러한 면으로는 좋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만약 저것이 통제가 가능한 범위를 넘어간다면.
아직은 그것은 단지 물음에 불과했다.
아직은.
* * *
불과 4만 명의 함대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일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엄청나게 바꿔놓았던 것 같다.
서책에 실린 내용은, 상민 자신이 생각하는 상상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세계를 말 그대로 바꿔버린 몽골제국은 역사상 가장 넓은 강역을 지배한 국가로 기록되었다.
유럽은 그 공포에 덜덜 떨었으며 루스의 공국들에겐 타타르의 멍에가 씌워졌다.
강력한 이슬람 국가들도 대칸의 위엄 아래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진정으로 동과 서를 ‘물리적으로’ 이어버린 초강대국.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국가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유목민은 정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무너진다.
그들이 마지막 정복을 멈춘 뒤, 몽골의 수많은 울루스들은 서로 점차 따로 놀기 시작했고 비옥한 중원에 자리 잡은 대원(大元)제국도 차츰 중원화되기 시작했다.
엄청난 초강대국이었지만 자체적으로 내재한 민족적, 체제적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원은 건국한 지 백 년도 되지 않은 시간인 1348년에 일어난 홍건적의 난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강남에 들어선 수많은 군웅들에 의해 북쪽으로 쫒겨나가야만 했다.
화북에 자리한 원을 북원(北元)이라 불렀다.
사상적 기반이 되는 백련교도들의 나라들, 그리고 중원 동쪽 해안가의 상업 세력들은 중국에 새로운 난세를 열었다.
고려와 왜의 남조, 그리고 심지어 옛 숙적 구주 울루스와 무역을 해 세력을 크게 넓힌 장사성(張士誠), 그리고 그의 동생 장사덕(張士德)의 대주(大周).
어찌어찌 숙적 진우량(陳友諒)을 토벌했으나, 엄청난 물산을 가진 대주 황제 장사덕에게 패퇴를 거듭해 쫓겨나간 주원장은 사천에 있는 명옥진의 명하를 박살 내고 파촉을 기반으로 대명(大明)을 세웠다.
북원과 대명, 대주의 삼국시대가 도래했다.
이들은 한바탕 전쟁을 한 뒤로 한동안 대치해야만 했다.
상민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원길이 가져온 보고서를 읽어내렸다.
바뀌어도 너무 황당할 정도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역사의 흐름을 간략하게나마 아는 상민도, 원말명초의 군웅할거를 잘 배우진 못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주원장의 세력이 대단하여 불과 몇십 년 안에 라이벌들을 때려눕히고 빠르게 명나라를 세웠던 터라 사실 중요도가 떨어지는 시기였기도 했다.
이렇게 또 다른 난세가 펼쳐지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지.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상민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은 수많은 정보와 가설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삼별초.’
싸움 귀신 정병 1만 명의 군세와 민간인 3만 명의 함대는 몹시 중요한 존재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던 과거의 역사에는 삼별초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고려에게는 매우 중차대한 문제였겠지.’
변수를 통제하고 가설을 세워보자.
동북아시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