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83화 (83/653)

타완틴수유

북진하면서 고려군은 마침내 껍데기만 남아있는 치차스 왕국을 합병했다.

타완틴수유와의 잦은 분쟁에서 매번 패퇴하기만 하는 이 북쪽의 제후국은 이미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들에게 대한 지원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름없었다.

고려 내의 치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치차스의 백성들도 고려의 신민이 되기를 청했지, 무능한 왕 밑에서 언제 찾아올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기를 바라진 않았다.

합병 이후 외교권과 군사권은 행사할 수 없었으나 영역의 일정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치차스 왕은 고려의 군왕으로 대우받았다.

그의 후예들은 치차스의 공위에 오를 것이었다.

그 후 고려는 꾸준히 공격을 감행했다.

타완틴수유는 군마도 별로 없이 알파카와 치차스에서 노략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노새와 당나귀를 이용해 산맥에서 유격전을 수행했다.

예상 안의 작전.

물론 피해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낮은 지역이 해발 이삼천 미터가 되는 바람에 고려는 당장 눈앞의 적병들보다도 희미해진 산소와 싸우는 것이 우선순위였다.

해윤은 조급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제국에게는 제국의 전쟁방식이 있는 법이다.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던 고려는 한 걸음씩 영토를 꾸준히 흡수해 나갔다.

엄청난 넓이의 소금사막(우유니)과 큰 호수는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꾸준하게 쿠스코로 진격하던 고려군은 어느 야트막한 구릉지에서 야영을 했다.

“이곳에서 은이 참으로 많이 난다고 합니다.”

아이마라 출신 신하의 말에 해윤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한가?”

“예, 이 포토시라는 지역은 원래 루나 시미로….”

설명을 들어보니 이 근방에서도 유명한 지역이라 했다.

해윤은 정세가 안정된다면 이곳에 광산을 건설하기로 했다.

원정이 이제 십 년 차가 훨씬 넘은 무렵, 고려군은 고산지대의 기후에 많이 적응할 수 있었다.

때문에 이제는 날카롭게 반격이 가능하여, 적병들의 유격전은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

거침없는 진격으로 고려군이 그들의 수도 코앞까지 점령하자, 타완틴수유는 드디어 물러설 수 있는 지역이 없음을 깨닫고 크게 싸울 생각을 했다.

쿠스코로 통하는 관문에 있는 꽤 넓은 후아카페이 호수에서 두 제국은 서로 마주 보았다.

잉카는 엄청난 수의 군사를 동원했다.

물경 오륙만에 달하는 대군.

투창병과 궁병, 투석병과 엄청난 숫자의 일반 보병들이 눈에 띄었다.

고려의 영향을 받은 치차스와 전쟁을 치르다 보니, 저들의 문화도 크게 바뀌었다 한다.

예전에는 보일 수가 없었던 철제 무기와 잘 편성하지 않았던 궁병을 쓰기 시작한 것.

치차스와의 전투에서 방진의 개념을 도입해 서로 끈끈히 모여 있는 것.

하지만 적들의 진영을 본 해윤은 코웃음을 쳤다.

고려와 제대로 된 전투를 해 보지 못한 자들의 전형적인 판단 오류였다.

이것이 지휘관 차이였다.

저들 전열의 맨 앞에서 화려한 가마가 눈에 띄었다.

거대한 가마의 위엔 지고한 태양신의 후예라는 타완틴수유의 사파 잉카가 거들먹거리며 앉아 있었다.

그 꼴이 매우 보기가 싫었다.

자신도 이렇게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고 있는데.

“위대한 존재라, 땅에 발을 디디면 안 된다 하였지?”

그 말을 들은 무장들 또한 몹시 분개했다.

장수의 자질은 물론, 이곳이 감히 어디 안전이라고 저리 행세하는 것인지.

“참으로 망측한 자들이옵니다.”

이구동성으로 머리를 숙인 장수들이 모두 의욕을 불태웠다.

해윤은 미소 지었다.

고귀한 자?

태양신의 자손?

“하!”

그 말을 감히 누구의 앞에서 하려는 것이냐.

해윤은 도집에서 도를 꺼내었다.

젊은 소년 장수는 이제 장년이 되었고, 전장과 이 험준한 산맥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이 높은 고도의 대지도 그의 숨을 가쁘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빈번하게 저들의 유격전에 시달려 왔던 고려군은 마침내 사지로 들어온 자들에 대해 가차 없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전진!”

* * *

교환비는 거의 성립하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꽤 있었을지언정 단 한 명의 고려인도 죽지 않은 이 회전은 전투가 아닌 학살이라 불러야만 했다.

진형을 갖출수록 그들에게 주어지는 피해의 양이 엄청났다.

단 한 번의 충돌 이후, 그들의 본대는 패배했다.

총창방진과 황립포병대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그들은 고깃덩어리가 되었다.

시신에서 나온 핏물이 후아카페이 호수를 붉게 물들였다.

― 끼이이익

한 무리의 큰 새들이 하늘 위를 빙빙 날았다.

포식의 날이 다가왔다.

보통의 일이라면, 들판에 뉘인 시체들을 내버려두고 떠나는 자들은 이 타완틴수유인들이었을 텐데.

땅에서 시체수리(안데스콘도르)에게 뜯어먹히는 시신들의 부릅뜬 눈에 그들의 신성한 도시, 쿠스코로 들어가는 고려군의 모습이 비쳤다.

전투에서 수많은 귀족들과 더불어 타완틴수유의 8대 사파 잉카 위라코차를 사로잡는 것에 성공한 해윤은 쿠스코를 점령한 후 전쟁을 종결지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난리통에 그의 아들 파차쿠티가 패잔병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가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겹군.”

정보를 수집한 결과 북부에 위치한 치찬 수유의 세력을 규합해 다시금 저항을 하기 위함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해윤은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조금 눌러 붙어 있기로 했다.

강노지말(强弩之末)이라 했지.

강한 쇠뇌의 화살도 사정거리 끝에선 비단에 구멍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위무하고 다시금 전열을 재정비하려는 해윤은 위라코차 잉카가 있던 쿠스코의 왕궁에 둥지를 틀었다.

“약탈을 한시적으로 허한다, 다만 인명은 살상하지 말라.”

십수 년에 걸쳐 험준한 산맥을 걸어온 병사들의 욕구를 풀어주어야 했다.

다만 해윤은 그들의 무차별한 욕망을 통제 가능한 범위에서 풀게 했다.

필연적으로 일어날 강간이 아닌 처로 삼게 한 것.

젊었을 때부터 종군하여 결혼을 하지 못한 자 위주로 타완틴수유의 여인들과 맺어주니, 도시가 빠르게 안정되었다.

해윤은 그들의 왕궁과 신전들을 구경했다.

이곳은 황제의 전리품으로, 약탈이 허용되지 않았다.

발달한 낮은 땅(루나 시미로 고려는 낮은 땅이라 불렸다)의 야금술이 흘러들어오자 그들의 금속 공예는 꽤 많이 발달해 있었다.

이제는 이렇게 엄청난 양의 황금으로 의자를 만들기도 했지.

입이 떡 벌어지는 황금옥좌에 제장들과 호위들이 놀랐으나 정작 해윤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다른 곳을 구경하러 다녔다.

그리고 이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아클라(Aclla), 태양신 인티와 그의 자손 잉카들을 모시는 여인들.

이 여인들은 열 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선택받아 몇 년간의 교육을 받고는 여사제 혹은 잉카와 고위 귀족들의 아내가 되었다.

하지만 고려가 그들에게 엄청난 위협을 가해오자, 이 여인들에게도 수난이 닥쳤다.

인신공양(차팍 후차; Qhapaq hucha)의 대상으로 꼽힌 것.

국난에 인티께 최고의 제물을 바치기 위해 잉카는 타완틴수유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지적이며 가장 뛰어난 여인들을 선발했다.

모인 백 명의 여인들은 차례차례 인신공양의 제물이 되었다.

누구는 둔기로 맞아 죽어있었고 누구는 교살당한 채 버려져 있었다.

해윤은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정처 없이 그들의 유골 사이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그 참담한 흔적의 잔해 사이에서도 한 줄기의 빛은 살아남아 있었다.

가장 아름다워 쿠스코의 가장 안쪽 성스러운 동굴에 가둬진 여인.

폐쇄된 동굴을 강제로 열고 그 안의 광경을 본 해윤은 뇌리에 번개가 치는 것을 느꼈다.

오물과 악취.

거의 한 달여간을 동굴에 흐르는 물을 받아 마시고 이끼를 뜯어 먹으며 버틴 여인은 인간의 가장 처절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정심과 안쓰러움, 그리고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감정을 느낀 해윤은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았다.

점차 원기를 찾은 여인은, 과연 한 국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빼어난 미모와 총기를 자랑했다.

해윤은 이 어린 여인을 마침내 비로 삼았다.

앞으로는 안온하게 살라고 안(安)씨를 사성받은 숙비(淑妃) 안씨는 이 제국에 대한 증오심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철저하게 고려의 황제에게 이 제국을 분열시키고 무너뜨릴 수 있게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타완틴수유가 그동안 복속했던 창카와 우앙카, 아이마라의 잔당, 북쪽 우림에서 잡혀 온 차차포야족 등의 부족 대표들이 고려에게 접촉해왔다.

이들 모두 타완틴수유의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복속되었던 자들이었으나, 학살과 가혹한 통치에 잉카에 대해 엄청난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타완틴수유의 잉카들은 적대적 부족의 족장을 죽이고는 그 살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시신을 능욕하기까지 했으니, 그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었겠는가.

영특한 숙비의 내조로, 해윤은 타완틴수유를 빠르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접촉해온 부족들은 강성하면서도 매우 자비로운 편에 속하는 고려에게 입조를 하였고, 해윤 또한 타완틴수유를 반면교사 삼아 군정을 실시했다.

* * *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울려 퍼지는 밤.

쿠스코 계곡의 밤은 항상 고요하고 조용하다.

특히 고려인들이 이곳을 점령한 후 내실을 다지기 시작한 후에는 야간의 왕래를 철저하게 금했기에 더욱더 고요했다.

해윤은 새벽에 갑자기 목이 말라 눈을 떴다.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숙비 안씨는 의지하던 체온이 사라지자 움찔 몸을 떠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깰까 얼른 두툼한 솜이불에서 빠져나온 해윤은 보름달의 빛이 희게 부서지는 그녀의 맨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 올리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옷을 걸쳐 입고 한켠에 마련된 책상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이 산맥의 여인에게 몹시 빠져들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국정의 상황을 살펴야 했다.

언제나 그렇듯 별 이상은 없다.

남려대륙 서해안과 고려의 북방 도로를 통한 원활한 보급은 고려군의 공세를 날카롭게 이어지게 하고 있었다.

해윤은 그의 선조에게 엄청난 경외의 감정을 품었다.

‘본디 병법의 가장 큰 부분은 보급이라 하지 않았는가?’

창천궁의 섭정 자리에 앉아 이토록 먼 거리의 군대에게 군량을 제때 보급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가파른 산맥인 이 땅에 거칠게라도 도로를 깔며 전진해 오는 것은 그로서는 대체 상상도 가지 않은 행정 능력이었다.

‘제국을 밑바닥부터 세우신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위대하고 위대한 네 명의 황제 중 이견이 없을 정도로 가장 인외의 경지에 있던 자.

문과 무 모두에서 필적할 자가 없으셨던 분이셨다.

그래서 해윤은, 위대하고 위대한 네 명의 황제들은 가지지 않았던 의문을 품었다.

분명히 자신은 선조들처럼 위대한 자가 될 자질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제는 군세를 손발처럼 운용할 수 있었지만 초창기의 정벌 때 미숙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가.

치기어린 소년 황제는 자신의 부하들의 피로 성숙해갔다.

그렇다고 죽은 자들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황제는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능은 죄로다.

해윤이 그러한 생각을 하며 자신에게 올라온 비밀 서신을 읽어내렸다.

이 서신은 그의 생각을 다시금 자극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가 노기를 다스리며 콧김을 뿜었다.

“성상, 무슨 일이신지요?”

그 소리가 조금은 컸는지 갑자기 사라진 체온에 뒤척이던 여인이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다 촛불 세 개에 의지해 서신을 읽고 있는 해윤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사랑에 빠진 만큼이나 죽을 지경에서 백마를 탄 황제에게 구원받은 여인 또한 지극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그 사랑의 힘으로 불과 몇 개월에 지나지 않아 고려말을 거의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지.

해윤은 한동안 그녀를 쳐다보았다.

부스스한 얼굴이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화(畵)로 유명한 명인이 화폭에 온전히 담기 힘들 정도의 미색을 발했다.

숙비의 깊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내리면,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으나 숨길 수 없는 불룩한 배가 눈에 띄었다.

‘…….’

중년의 황제는 서신을 다시 둘둘 말았다.

“아무것도 아니오.”

그리고는 다시금 촛불을 끄고 침상으로 되돌아 가 안 숙비의 옆에 누웠다.

“…….”

태의의 말로는 숙비는 건실한 남아를 회임했다 했지.

회임으로 몸이 피곤한 모양인지 그녀는 다시 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해윤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쉽사리 잠들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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