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81화 (81/653)

만남(3)

종교에 관한 언급은 은근슬쩍 피해버린 상민은 대신 그들의 노골적인 첫 번째 목적, 즉 교역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을 배려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대가 가지고 온 것들을 청해의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도록 해주겠소.”

“저… 정말입니까?”

후안은 뛸 듯이 기뻐했다.

지금의 원정은 탐험을 하러 온 것이지 본격적인 교역을 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일이 급진전되며 가지고 온 것이 적어 매우 속이 상했는데 이번 여정에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무역로!’

앞으로도 계속 이 미지의 대제국과의 무역로를 이어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세계의 부의 흐름이 자신에게 넘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상민은 마냥 퍼주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만, 카스티야 전체가 아닌, 카나리 공 후안 그대에 한하겠소.”

상민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이는, 본관이 후안 공과 마음이 맞아 벗으로 여기고 싶기 때문이오. 공은 부디 이러한 본인의 마음을 헤아려주시오.”

후안은 벗의 개념 자체는 잘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그 말의 의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처신 잘하라고.

노골적인 말에 후안의 웃는 얼굴이 아주 살짝 구겨졌으나 다시금 원래의 기뻐하는 얼굴로 돌아가기까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에겐 이득이다.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후안과 그의 상단에 우호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벗은 개뿔.’

상민은 완숙한 외교관의 자질이 조금 부족해 보이는 후안의 표정 변화를 읽어내곤 내심 조소를 흘렸다.

“또한, 귀 공에게 아국의 이익을 위해 조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소.”

“말씀해 주시지요.”

상민은 두 가지를 요구했다.

일단, 카나리 제도에 고려의 상인들의 상행을 허락할 것이 첫 번째.

고려의 상인들이 테네리페에 가는 것도 결국은 여러모로 후안에게도 이득이었다.

테네리페가 유럽의 무역 중심지로 부흥할 수 있는 기회다.

후안은 얼른 머리를 굴렸다.

위대한 돈 앞에선 그의 신앙심도 약해지기 마련.

‘이교도와 거래한다는 것은… 교황청을 어찌 잘 구슬리면 되겠지.’

당장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는 오스만과 비교해보면 광대한 바다 건너편에 있는 고려의 위협은 그리 와닿지 않을 것이다.

상민은 그의 머리를 꿰뚫어 보는 양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동예 한 국가로는 역부족이었다.

넘치는 물산을 팔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던 고려는 드디어 그 욕망을 해소할 상대를 찾을 수 있었다.

너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후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상민은 새롭고 꾸준한 외교의 개념을 제시했다.

“아국과 귀국 간의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싶소만.”

이번 제안에는 후안이 곧바로 난색을 드러냈다.

“그것은 저도 환영하는 바입니다만… 본인은 어떠한 외교적 권한을 제 왕에게 위임받지 못했습니다.”

“알고 있소이다. 본인이 말하는 것은 카나리 공국에 한하여 비공식적인 외교적 연결망을 구축하고 싶은 것이오.”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말입니까?”

상민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후안은 고심했다.

비밀이라는 것은 없다지만 상당히 노골적인 제의가 아닌가.

그런데, 오히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 얇디얇은 끈에 열성적으로 매달려야 할 처지였다.

‘애초에 내가 카스티야에게 엄청난 충성심을 가진 인물도 아니고.’

이득을 위해 조국을 한 번 바꿔치운 후안은 역시나 이번 제의 또한 거절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들은 만족스러운 협약을 체결했다.

고려인들 몇 명은 카나리 제도의 수도, 테네리페에 거류지를 건설하게 되었고 고려와 유럽 사이의 여러 업무를 담당할 관리 무리들을 파견하기로 했다.

단일한 주권국이며 철저한 관료제가 정착된 고려야 지금 즉시 얼마든지 외교관을 파견할 수 있었지만, 중세 봉건제의 일원인 후안은 카스티야의 허락 없이 자신의 영토에 외교권을 가진 고려의 사절을 받긴 어려웠기에 이 관리들은 '표면적으론' 어떠한 정치성도 띠지 않았다.

훗날 유럽과 고려에선 이러한 관리의 명칭을 영사라 불렀다.

* * *

카스티야인들을 제국 물산의 보고, 청해로 인도한 상민은 입술을 핥으며 지도를 보고 있었다.

독대를 원한 탓에 밖으로 물러나 있어야만 했던 상서성의 상서들이 하나둘씩 호기심이 깃든 얼굴로 들어왔다.

그중 병부상서가 서두를 꺼냈다.

“합하(閤下), 도성 밖의 숙영지는 이만 해체합니까?”

“그러시오.”

수만 명이 묵을 만한 숙영지에는 그의 백분의 일에 해당하는 병사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상민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후안의 표정과 행동으로 볼 때, 그의 연막작전은 꽤 성공을 거둔 것 같았다.

잠시의 시간 정도는 벌 수 있겠지.

‘적어도 남려대륙의 동해안과 북해안은 빠르게 개척해야 한다.’

남려대륙의 면적은 그의 생각보다 너무나도 거대했다.

과거 중고등학생 시절에 보던 지도에서 기록된 남미는 그리 크지 않게 느껴졌는데, 막상 행정적 업무를 하다 보면, 이 광대한 땅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어쩌면 내가 보던 지도가 왜곡되어 있었을 수도.’

잠시 정각도법으로 그린 지도 특유의 왜곡을 떠올리던 상민이 투덜거리면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무장 출신의 병부상서는 약간 다혈질의 기색이 있었다.

잠시 물을 마시며 기지개를 피는 시중을 바라보던 병부상서가 내심 속내를 드러내었다.

“그들의 태도로 보아 할 때, 조금은 과하지 않았나….”

상민의 번뜩이는 눈길에 병부상서가 말을 하다 말고 목을 움츠렸다.

아무리 다혈질의 무장이라도, 시중 앞에서는 항상 고양이 앞의 쥐처럼 주눅이 들었다.

현 황상이 어릴 적부터 섭정을 해온 고려 시중이자 청해의 통령은 마야의 한복판에서 적들의 시신을 쌓았다는 전대의 청해 통령만큼이나 무서운 자였다.

“경은 저들이 약한 자들이라 생각하오?”

병부상서는 긍정과 부정 둘 다 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모르는 나라였는데 어찌 대답할 수 있겠나.

다만 총기와 대포로 무장하고 엄청난 화약 생산량을 지닌 제국의 힘을 믿고 있는 듯했다.

“경과 고려의 무장들이 가진 자신감은 높게 살 만하지만, 오만함은 경계하도록 하시오.”

“…명심하겠나이다.”

고려는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예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아니다.

또 지금 막 원정을 진행 중이라 해안가와 외부의 개척지가 모두 위태로운 형태였다.

군대를 운용하는 지휘관들도 숭무감에서 열심히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을 제외하면 전투 경험(원주민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 자체가 많진 않다고 봐야 했다.

‘내가 매번 친정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불가능하기도 했고.

고려는 아직 으르렁거리는 대호의 풍채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성질 사나운 고양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쪽이 호랑이가 되고 싶은 고양이였다면 저쪽은 독수리가 되고 싶어 하는 참새라는 사실.

‘아직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에 불과하니까.’

카스티야는 본래부터 강대한 국가가 아니었다.

과거에는 더욱더.

아주 머나먼 서고트 왕국과 우마이야 왕조의 이야기는 생략하자.

레콩키스타가 진행되었던 12~13세기만 보더라도 그들은 강했지만, 절대 패권국이라고까지 칭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약한 놈 두 명이 뭉치면 조금 센 놈이 된다.

카스티야는 레온과 결혼을 통해 동군연합을 꾸리며 지금의 카스티야 연합왕국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문제지.’

또 한 번의 결혼이 일어날 것이다.

위대한 가톨릭 부부 군주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에 의해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다시 하나가 될 것이고, 찬란한 부부 군주 아래에서 성립된 에스파냐(España, Spain) 왕국은 전 유럽, 아니 전 세계를 호령할 제국이 될 것이다.

조금 센 놈 둘이 합치니 진짜 센 놈이 돼버린 것.

마지막 남은 이베리아의 이슬람 세력인 그라나다도 두 부부에 의해 곧 쫓겨날 처지였다.

‘게다가 잠시 동안은 포르투갈과 이베리아 연합으로 묶이기도 했지.’

상민은 지구를 마음껏 잘라 먹었던 강대국들이 하나로 뭉쳤던 순간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긴 했다.

만약 이것이 게임이라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겠지.

이베리아의 국가들이 강대한 식민제국이 되기 전에 대함대를 꾸려 정복해버리는.

시스템의 허점과 현란한 컨트롤, 그리고 적절한 혐성을 부리면서.

그러나 현실 사회는 그렇게 손쉽게 전개되지 않는다.

머나먼 대양을 건너 병력을 온전히 전개시키는 것은, 적어도 19세기 수준의 제국주의 열강이 되지 않는 이상 어려운 일이다.

또한 파병한 군대에 대한 보급과 현지를 복속시키는 것, 공세종말점을 최대한 뒤로 늦추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적어도 양차대전의 수준에 도달해야겠지.

또한 원정에 소요되는 천문학적인 금액과 가다 입을 엄청난 비전투손실도 중대한 문제였지만, 일단 어찌어찌 하늘의 가호로 고려군이 이베리아반도에 안전하게 상륙한다 하더라도 아마 바로 교황에 의해 십자군을 맞고 전 유럽의 공적이 되어 너덜거리게 될 것이다.

고려는 이슬람처럼 지하드로 반격할 수 있는 근처의 신앙 동지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북미, 아니 북려대륙에 대한 욕심?

상민은 영토에 대한 욕심이 상당히 많은 인물이었다.

밤에 자다가도 판도를 외치며 깨어나는 인간에게 북려대륙이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양념이 잘 스며든 쫄깃쫄깃한 육포였다.

한 입 베어 물면 그 향과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울.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기껏 남려대륙의 해안선 중 일부만을 순찰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의 함대를 북부까지 운용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함대를 증설할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어찌어찌 신민들의 고혈을 쥐어짜 함대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 넓은 해안선을 모두 지킬 수는 없었고.

‘미합중국 해안경비대라도 구멍이 숭숭 뚫리는데.’

눈물을 머금고 바라만 봐야 할 뿐.

상민은 선택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유럽이 대항해시대의 흐름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 자체는 필연적인 시대의 흐름이었다.

후안에게 고려가 가진 막대한 힘에 대해 선전과 경고를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에 불과했다.

저들은 곧 이 대륙에 대한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할 것이다.

상민 자신과 함께 수많은 지식이 들어있는 백과사전이라도, 하다못해 위키라도 넘어왔다면 선택의 폭은 훨씬 넓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결국엔 남들보다 미래의 일에 대해 조금 더 아는 사람에 불과할 뿐, 중세에서 단기간에 산업혁명을 이끌고 바로 근현대로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이 시대에는 이 시대만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외부상서가 말했다.

“소신이 듣기로는 유럽의 나라들은 합종과 연횡을 밥 먹듯이 한다 들었사옵니다.”

“그렇지.”

“따라서, 저들 사이를 이간하는 것이야말로 고려의 국력을 최소한으로 소모하며 저들을 방어하는 계책이 될 것입니다.”

역시 국자감에서 수석으로 수료한 자는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구나.

상민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내적으로는 사대 조공관계(고려와 동예, 치차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종횡가와 비슷한 외교술이야말로 본받아야 하는 과거의 사례였다.

그들 모두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면, 그들 모두와 싸우지 않으면 된다.

적절한 외교는 고려가 상대해야 할 적을 줄여준다.

유럽의 정치 지형은 실로 복잡해서 한 국가에 대한 적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곧 카톨릭 사회에서 이탈할 것이고, 북유럽과 저지대, 독일의 일부 영지도 마찬가지겠지.

카스티야도 곧 적이 생길 것이다.

전체를 지킬 수 없다면, 지켜야만 하는 땅만 지키면 된다.

아프리카 서쪽을 발견한 탐험가들, 그리고 그 땅의 사람들에겐 조금은 미안한 말이지만 아프리카는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유럽인들의 탐욕의 방향이 온전히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향할 수 있도록.

상민은 씁쓸한 마음에 탁자를 두어 번 두들겼다.

‘이기적이군.’

그러나 현실적이다.

북려대륙 또한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와는 달리 그곳에 대한 기회와 명분은 얼마든지 있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필연적으로….’

상민은 손을 펼쳤다.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큰 남려대륙은 아직 고려의 깃발이 꽂힌 곳이 많이 있지 않았다.

그는 깃발들을 들어 해안가에 꽂았다.

이곳은 무조건 사수해야 할 곳.

그리고 눈을 돌려 가운데와 북쪽의 대지를 바라봤다.

옛 인연, 칵틀 루임이 있는 바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있을 북중려대륙.

이곳은 혼란에 빠져들 곳.

하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다.

과다한 욕심은 화를 부른다.

천천히 인내심을 가지고 힘을 기르다 보면….

'자명한 운명(Manifest Destiny)'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까.

* * *

후안의 함대는 청해에서 교역을 하고 본국으로 귀국했다.

갈 땐 어마어마한 양의 고려 특산물이 모든 창고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알파카와 라마의 털로 짠 모직물은 양털 모직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하고 질이 좋았으며, 육지면으로 만든 면포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카카오라 불리는 씨앗을 비롯한 말린 고추와 같은 향신료.

고려의 수준 높은 도자기와 유리제품.

그리고 명실공히 품질만큼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좋다고 볼 수 있는 종이까지.

귀족들의 허영심을 충족할 물건들은 드디어 유럽으로 향하고 있었다.

후안은 돈이 별로 없었다.

주화들을 조금 가지고 오긴 했는데….

‘나쁜 일이 좋은 일도 되는구만.’

후안은 호기심에 돈을 주고 고용한 고려어 선생에게 물어보았다.

한참 동안 온갖 방법으로 설명을 듣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보 고려어 학습자를 위해 또박또박 발음을 했다.

“전화위복.”

후안의 일행이 신대륙에 도착했다가 고려의 함대에 의해서 해문으로 연행될 때, 소지품 검사를 통해 가지고 있던 주화와 일지를 빼앗긴 적이 있었다.

나중에 들어서 그 함선과 유골들이 고려의 화폐위조범이라는 사실을 통보받은 후안은 다소 억울한 마음이 들었으나 고려 조정이 위조주화와 일지를 압류해 갈 때도 대놓고 항의하진 않았다.

목숨이 소중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보진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보상도 엄청나게 받았으니까.

하늘이 돕는지, 귀국할 때의 바닷길도 순조로웠다.

고려의 뱃사람들에게 들은 무풍지대는 이제 예상할 수 있는 시련이었다.

예상 가능한 고난은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극복할 수 있었고.

게다가 가는 길에 새로운 영토 또한 발견했다.

작은 섬들이 모여있는 이 제도들은 포르투갈 개척지 다카르 바로 앞바다에 있었다.

고려와 카스티야를 이어줄 땅.

“이 섬은….”

후안은 싱글벙글 웃으며 이름을 지었다.

“푸에르토 리코(Puerto Rico, 부유한 항구)라 부르도록 하자.”

우린 부자가 될 거야.

그의 소망을 담은 섬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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