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80화 (80/653)

만남(2)

― 쿵 쿵 쿵

심장의 고동이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에드워드 흑태자.

후안, 아니 장은 예전에 백년전쟁의 영웅 에드워드 흑태자를 처음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진득한 살기와 피 냄새.

가장 위대한 기사. 에드워드는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와 같은 거대한 전투에서도 엄청난 용맹과 그에 버금가는 전략으로 승리를 쟁취해 유럽 최고의 장군으로 꼽혔다.

물론 그 잔인함과 난폭함도 마찬가지였지.

저자는 위험인물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생각의 방향이 그러한 결론으로 쏠릴 때쯤, 소름 끼치는 느낌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후안이 모르는 것은 눈앞의 남자가 비단 에드워드의 용맹과 지략, 그리고 난폭함을 가진 것뿐만 아니라 현명왕 샤를 5세의 능력까지 가진 정치인이라는 것이겠지.

혹은 두 사람의 능력을 합친 것보다도 더 뛰어나든가.

삽시간에 변한 분위기에 게디페어와 함께 무릎을 꿇고 있었던 후안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까먹어버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각했던 것이 모두 복잡한 감정의 변화로 인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우려 중 일부는 놀랍게도 눈앞 황제로 추정되는 인물이 스스로 풀어주었다.

본인의 입을 통해서.

“만나서 반갑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틀림없는 잉글랜드의 언어였다.

* * *

상민은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후안을 보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통역이 되지 않았다면 매우 번거로울 뻔했다.

현대의 한국어와 중세의 한국어가 다른 만큼이나 현대의 영어와 중세의 영어도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 자신이 이곳에 처음으로 왔을 때도 무슨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중세 국어 화자와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것을 보면 이번 경우에도 살짝 기대해봄직했다.

다행스럽게도 하늘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후안 또한 프랑스인이었지만 잉글랜드 사람과 문화 그리고 언어에는 매우 친숙했다.

따라서 이 ‘중국’의 황제가 영어를 쓸 줄 아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것도 심지어 몹시 유창하다.

눈만 감으면, 영락없는 오만하고 편협한 잉글랜드 귀족이 거드름을 피우는 광경이 떠오를 정도.

‘…설마 잉글랜드가 이곳까지 먼저 진출했단 말인가?’

분명히 유럽의 강대국이긴 하지만 프랑스와 치고받는 사이에도 이런 원정을 했었다고?

혹시, 저 가면의 뒤에 실제로 에드워드가 실실거리면서 그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그의 뇌에는 별 쓰잘데기없는 오해가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민은 나중에 하시오.

옆에서 게디페어의 팔꿈치가 그를 슬쩍 두드렸다.

후안은 일단 빠르게 고개를 조아렸다.

“위대한 중국(Chine)의 황제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 말을 들은 상민의 얼굴이 정말이지 끔찍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하필이면 가면이 그의 표정을 가려주는 바람에 앞의 사람들은 한국인이 들을 수 있는 극도의 무례한 발언 중 하나인 발언을 하고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다소 신경질적으로 팔걸이를 두들겼다.

후안이 흠칫 놀랐다.

“크흠, 일단 두 가지를 시정해드려야겠소만.”

상민은 첫 번째로 자신이 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설명했다.

물론 국가에 끼치는 정치적 영향력은 태양과 반딧불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상민과 황실의 내밀한 속사정을 치워본다면 겉보기엔 정 1품의 시중(侍中)의 관직은 무품(無品)의 황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였다.

반면 후안은 일개 카나리 제도를 다스리는 공일 뿐, 중앙 정계에는 프랑스 이방인 출신 및 기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끈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상민과 눈앞의 카나리 공 후안은 품계상으론 비슷한 위계였다.

제국과 왕국의 차이는 차치하고, 계급만으로 볼 땐.

그리고 두 번째.

“또한 이곳은 중국이 아니오.”

고려 땅 어디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했다가는 맞아 죽기 십상이었다.

옛 중원의 영향에서 벗어난 이후, 독자적인 천하관을 구축한 고려는 동아시아 특유의 자국 중심주의의 끝판왕인 중화사상까진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옛 허물인 중원 국가, 진(China)의 이름을 대는 것은, 그리 현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국중심주의. 혹은 또다시 피어나고 있는 고려 버전의 중화사상.

상민은 지금까지 이 사상의 장단점을 알고 있었으나 딱히 대응하진 않았었지.

‘왜냐면 언젠간 이날이 올 줄 알았으니까.’

자신이 아무리 유학의 힘을 약화시키고 증학과 합학을 도입하여 사상의 큰 줄기를 바꾸었다지만 그 시대적 한계는 존재했다.

주변에는 오직 석기시대의 부족들뿐.

여몽전쟁 이후로는 국운을 걸어야 할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도 않았다.

제대로 된 경쟁자도 없이 머나먼 남려대륙에 처박혀 안온함에 취한 제국은 필연적으로 서서히 사고방식이 경직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부터는 대항해시대에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바뀌어 나가겠지.

“그렇다면 어떻게 불러드려야 합니까?”

영어에는 존칭이 없다지만, 그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분명히 자신을 굉장히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고려.”

“고려(Corea)?”

K나 C의 발음은 유럽의 언어의 속성 즉 프랑크어 계열과 게르만어 계열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과거, 인터넷에 떠돌던 도시전설(일제가 알파벳 순서 때문에 조선의 국명을 바꿨다느니 하는) 비슷한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던 상민은 자신에게 익숙하면서도 발음상 혼란의 여지가 없을 K를 조금 더 선호했다.

어찌 되었건, 이 지구에서는 고려인들이 스스로 고려의 국명을 선택하는구나.

상민이 손수 적어서 내민 종이, 그곳에는 익숙한 단어―Korea―가 적혀 있었다.

두 유럽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방견문록에 코리아라는 나라가 있었나?’

동방에 대한 가장 유명한 참고 자료를 떠올리던 후안이 게디페어를 살짝 보았다.

게디페어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험을 좋아하는 저 기사는 동방견문록만 여러 번 읽은 적이 있었으니, 게디페어가 모른다면 모르는 것이다.

게디페어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까오리(Cauli)라는 나라는 들어보긴 했는데.’

발음은 살짝 흡사하나, 이미지가 완전히 달랐다.

이런 규모의 제국이었다면, 서술의 방향성이 완전히 달랐겠지.

상민의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안이 옷을 정돈했다.

그리고는 유럽의 예법에 따라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대로 인사드리지요. 본인은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카나리 공 후안 데 베텐쿠르 테네리페라 합니다.”

“본인은 대고려제국의 섭정공이자 청해의 통령이오.”

상민 또한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고려 내에서 황실의 권위는 실로 대단했으나 상민은 그들에게 억지로 제국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즉 뭐 황제의 초상화 혹은 상징에 대고 절이라도 하라든지―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것은 참 꽉 막힌 생각을 가진 중원의 나라들이나 강요하는 것이고.’

세상 모두가 천자의 봉신이라는 생각을 가진 중원의 멍청이들이 어떻게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져 버렸는지 아는 사람으로 그와 같은 우를 범할 이유는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주 예수에게만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들이다.

주군에게조차 한쪽 무릎을 꿇기만 했으니까.

괜한 반감을 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해윤이 원정에 나가 있는 상황.

당사자가 없으니 눈치 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상민과 후안, 두 명의 공(公)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려와 카스티야의 소소한 이야기들.

서로의 나라를 대변한 두 명은 아마 거대한 제국이 될 나라들의 첫 번째 공식적인 외교 만남이라 평해도 될 것이다.

첫 시작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 * *

일단은 먹을 것부터 제대로 먹여야 좋은 소리가 오고 가는 법이다.

성대한 연회를 연 상민은 커다란 식탁 가득 차려진 정찬으로 그를 예우했다.

“엄청나군요.”

젓가락을 쓰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배려한 포크들.

후안이 다소 어색하게 고려의 음식들을 입 안에 넣었다.

“이게….”

“김치라오.”

킴치? 키임치?

붉은 채소 절임은 독특한 향을 뿜고 있었다.

그는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으나, 역시 마늘과 고추에 미친 고려인들의 새빨간 김치에는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다.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한 그는 이내 포크를 다른 곳으로 뻗었다.

다음 순서는 불고기.

후안은 입에 퍼지는 그 독특한 맛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것이 동양의 맛인가.

‘음식문화도 엄청나게 발달했다.’

후안의 입맛은 아직 프랑스인 그 자체였다.

물을 거의 쓰지 않는 프랑스의 음식과는 달리 고려인들은 몹시 수프(탕) 같은 음식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여기도 탕, 찌개, 전골 등의 수십 가지 요리들이 나와 있었다.

또한 고려인들은 서양의 것처럼 크게 부풀지는 않았지만 매우 독특한 식감의 맛있는 빵을 구울 줄 알았으나, 그것이 식사 대용으로 쓰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배려해서 놓아진 조그마한 기본적인 빵은 고려인들의 식탁에는 올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맛이 느껴지지 않은 기본적인 '밥'이라는 것이 있었지.

그는 이 윤기가 흐르는 곡물 덩어리를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추구하는 맛의 방향을 알 것만도 같았다.

‘전반적으로 맛이 상당히 깔끔하고 부드럽다.’

이 세기, 퀴진 프랑세스(Cuisine française, 프랑스 요리)는 몹시 많은 양의 향신료를 사용하는 관습이 있었다.

동시대의 가장 유명한 요리사, 샤를 5세의 주방장 기욤 티렐(Guillaume Tirel)은 비앙디에(Le Viandier de Taillevent; 타유방의 요리서)라는 저서에서 육계나무 및 정향, 육두구와 후추 등의 향신료를 가득 쓰는 요리의 방법을 제시했다.

후안은 기독교 신자로서 그 음식이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풍습에 의해 기원했다고 인정하고 싶진 않았으나, 적어도 프랑스 요리의 화려한 맛에는 항상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고려의 음식은 몇 가지 매운 음식들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간결하며 본질적이었다.

아직까지 불교적 성향이 짙게 남아 있는 음식들.

재료 본연의 가치를 최대한 이끌어내려는 요리의 기법은 매우 순수했다.

화려함과 순수함, 미식가인 후안의 입장에서도 두 요리중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하하… 그렇소이까?”

“…….”

“예, 이 수프, 아니 저언고올? …전골(Jeon―gol)? 은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요.”

“…….”

후안과 상민은 음식에 대해 관심이 있고 흥미가 있는 사람들이기에 공통된 주제로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떠들 수 있었다.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의 교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고려의 음식 문화에 프랑스의 영향이 퍼지는 것, 그리고 프랑스 음식에 고려의 영향이 퍼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스러운 일이겠지.

* * *

밥을 먹고 후안을 다시금 회의실로 안내한 그는 본격적인 외교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쓰인 외교적 수사로 점철된 국서(國書)를 받아든 후안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위대한 제국과 우리의 왕국이 이렇게 만난 것도 모두 하느님의 가호 덕분이겠지요.”

그러면서 내심, 이 제국에 대한 포교 활동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

후안의 옆에 서 있는 게디페어가 눈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치켜떴다.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

상민이야 믿는 종교가 없어 모든 종교를 별 편견의 눈동자 없이(아즈텍과 같은 일부 괴상한 종교들을 제외한다면)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이 자신의 제국에서 함부로 포교를 하려는 놈들을 용인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게다가 당금의 고려는 불교 종단과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니, 잠시만….’

사현제의 치세에 불교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연이은 타완틴수유에 대한 성전(聖戰)의 승리로 불교가 조금씩 맛이 가는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원 역사에 있었던 고려 말 불교계의 폐단조차 겪지 않아 한 번 큰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그러나 상민은 고개를 흔들었다.

‘적어도… 적어도 마틴 루터가 이 거대한 가톨릭 사회에 균열을 일으킬 때까진 함부로 가톨릭의 무리를 제국에 들여놓을 수 없다.’

아브라함계 종교는 매우 전파력이 빠르다.

조금은 신중하게, 꽤 긴 시간동안 숙고를 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겠지.

결국 그가 구상하는 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신민 스스로 더 이상 신에게 매달리지 않는 나라.’

그 목표를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영원불멸의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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