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79화 (79/653)

만남(1)

후안은 자기 자신을 모험가라 생각했다.

그것은 계급과 영지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본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카나리 제도를 탐험하며 그는 태어난 프랑스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욕망과 환희를 느낄 수 있었다.

아마 그것은 프랑스 북부에 위치해 있던 자신의 영지가 파괴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던 어린 시절의 악몽 덕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 개척이라는 행위는 자신을 또 다른 전성기로 이끌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던 프랑스의 남작은 이제 떠오르는 카스티야의 대공이 된 것이다.

주님은 자신에게 미지의 땅을 정복하라는 운명,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라는 운명을 주신 것이 틀림없었다.

‘발견하긴 했지만, 꼴이 우습군.’

물론 신대륙의 섬에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끌려와 가둬졌고, 긴 시간 동안 배를 탄 뒤 또다시 외딴 방에 처박혀 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신분을 어찌 알긴 알았는지, 선원에 비해 꽤 호사스러운 ‘감금’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신변의 자유가 억압된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후안은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저택은 독특하게 지어져 있어,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가두기 위해 지어놓은 구조가 틀림없었다.

네 방면의 망루에선 저택의 구석구석을 확인할 수 있어 벽을 기어올라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땅굴을 파야 하나.’

― 끼이익

수많은 계획을 세우던 후안은 누군가 등 뒤에서 다가오자 흠칫 놀랐다.

중무장한 병사 네 명과 들어온 중년의 여인은 하녀들로 보이는 자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자가격리가 끝났으니, 이제 준비를 해야 한다.”

무슨 뜻인지는 몰랐으나, 하녀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아하니 자신을 죽이려는 것은 아닌 모양.

그는 그래도 평생을 귀족의 신분으로 살긴 했으니 익숙하게 젊고 아리따운 여인들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는 이윽고 자신을 욕탕에 밀어넣는 손길을 느끼고 고함을 질렀다.

“이것들, 감히 나를 죽이려고!”

물은 따뜻했으나 뜨겁지는 않았다.

거센 저항에 혹여 목욕물의 온도가 이상한가 싶어 중년의 여인이 직접 다가와 팔을 걷어붙이고 손으로 온도를 측정했으나 별문제가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의문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말했다.

“고려의 시중을 뵈시려면 몸가짐을 단정히 하셔야 합니다.”

“그렇게는 못 한다!”

쌍방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렸고, 두정갑을 입은 병사들이 그를 물 속에 ‘공손히’ 밀어 넣고 나서야, 후안은 맥이 빠진 듯, 물 안에서 그저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그가 검술을 열심히 수련한 기사였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을 텐데.

고대 로마부터 시작된 유구한 유럽의 목욕 문화는 목욕탕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매춘을 질색한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분명히 예전의 성세를 누리진 못했다.

그러나 명맥 자체는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특히 십자군은 터키의 히맘(목욕탕) 문화에 큰 영향을 받아 유럽으로 가져오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14세기를 강타한 흑사병 이후, 목욕에 대한 근거 없는 낭설이 퍼지며 목욕탕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낭설까진 아닐지 몰랐다.

목욕은 좋은 문화지만, 그것이 대중목욕탕이 깨끗하다는 말을 의미하진 않았으니.

확실히 섬세하게 관리되지 않은 대중목욕탕에서 흑사병이 돈 사례가 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원인을 잘못 짚었다.

목욕을 하면, 따뜻한 물이 피부의 모공을 열어 나쁜 병균을 몸 안에 들어오게 한다는 그 괴상한 생각은 유럽인들의 개인위생을 최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이 후안을 보라.

길고 긴 항해로 매우 오랫동안 씻지 않았다는 것을 가정해 봐도, 무려 목욕물을 세 번이나 바꿔야만 했던 것을.

여인들은 이 극히 더러웠던 인간을 드디어 사람 비스무리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몸에 일던 악취는 사라졌고 칫솔질도 시켰으며, 머리도 감겼고 옷도 입혔다.

고려의 면(棉)복을 입은 후안이 영 익숙하지가 않은지 적색 관복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시녀 한 명이 수군거렸다.

“적포가 맞습니까?”

“시중께서 공(公)의 위로 대우하라 하셨으니, 맞을 것이다.”

* * *

후안은 저택을 드디어 나설 수 있었다.

무려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처박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마차에 오른 그는 저 옆, 익숙한 무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이끌고 온 선원들.

어찌 되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했던 그는 정욕이 넘칠 정도로 여유가 있는지 시녀들에게 지근거리는 선원들을 보곤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걱정은 무슨.’

등 뒤의 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진입하려는 한 프랑스 기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게디페어!”

“대공,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대야말로 이자들에게 봉변을 당하진 않았는가?”

“별다른 짓을 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물에다 강제로 집어넣은 것만 빼고….”

그들은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병사들이 눈치를 주고 나서야, 꽤 호화롭게 생긴 마차에 오른 그들은 마차가 출발하자 꽤 놀라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차들이 상당히 화려하군.”

* * *

해문의 거류시설을 나선 그들은 각기 마차들에 나눠 타 창양으로 향했다.

쭉 뻗은 도로.

창으로 보이는 엄청난 농경지.

산적과 도적 떼가 없는지 잘 정비된 도로를 평온한 얼굴로 오가는 사람들.

짧은 시간에 이 국가가 실로 엄청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안이 충격에 젖어 있을 때, 저 멀리 거대한 성벽이 보였다.

성종 해정의 치세에 완공된 창양의 외성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성벽이었다.

비록 성벽을 완공한 이후에는 대포의 등장으로 그 기능이 빛을 바랬으나, 그래도 외형에서 오는 거주민들의 심리적 안정감과 외부 인원들의 위압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침 성벽 밖으로는 거대한 숙영지가 펼쳐져 있었다.

족히 수만이 주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숙영지에선 식사를 준비하려는지 불을 때는 연기가 군데군데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군기는 정예하고, 빈틈이 없다.

솔직한 말로, 자신의 모국 프랑스와 지금 모시는 카스티야의 군대도 이와 비교하면 쉽사리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였다.

복잡해진 얼굴을 한 후안은 위엄차게 지어진 성문을 통과하고 성안의 대로를 내달렸다.

길가에는 그가 탄 마차보다는 약간 수수해 보이지만 그래도 수많은 마차가 왕래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도시는 매우 청결했다.

그는 세계의 중심이라 칭해지지만, 도시 가득 썩은 내가 나는 파리를 떠올렸다.

백년전쟁의 파리.

쥐가 들끓고, 사람들은 냄새나며, 길거리엔 똥과 오물이 뒤섞인 그 난장판을.

뒷골목엔 거지들과 불량배들, 도둑들이 서성이며, 언제 당신의 복부에 칼을 찔러 넣고 돈을 훔쳐 갈지 모르는 아비규환을.

반면 이 도시는 어떠한가.

쭉 길게 뻗은 도로는 한눈에 직관적이었고, 도로는 잘 정비된 것을 넘어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으며, 군데군데에는 나무도 심어져 있었다.

사람들은 차도와 인도의 경계석을 밟지 않았으며 마차길을 지날 때도, 약속된 지점에서만 건넜다.

‘회엥 다안 보오르도오?’

마부들이 하는 말을 들어봤는데 발음이 웃기다.

집들은 벽돌로 지어진 것이 틀림없었고, 모두 이 층, 삼 층으로 올려져 있었다.

집과 집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비슷한 길이만큼 떨어져 있었고, 때문에 집을 지나칠 때마다 작은 소로의 광경이 한눈에 보였다.

자신을 연행하는 병사들과는 다른 복장의 청색 갑옷을 입은 자들이 무구를 들고 도로를 순찰했다.

그 광경을 보는 백성들은 딱히 불안에 떨지 않았다.

마차 내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게디페어는 수많은 곳에서 수많은 경험을 한 노련한 프랑스 기사였지만, 장담컨대 가장 신성한 도시인 바티칸에서도, 가장 강성한 국가인 오스만에서도, 가장 화려한 국가였던 로마(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이러한 광경을 보진 못했다.

충격과 공포.

그들은 꿀꺽 침을 삼켰다.

이 나라가 대체 무슨 나라인가?

그 후로도 그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법궁이 후안의 눈앞에 펼쳐졌다.

태조 해민의 치세부터 건설을 시작했으나, 아직도 채 다 지어지지 않은 창양의 법궁, 창천궁(蒼天宮)은 하늘의 궁궐이라는 오연한 이름에 어울리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무리가 아닌 선에서 증축과 개보수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급속도로 팽창하는 국력 덕분에 지어진 부분은 이미 5할은 넘었고 핵심기능을 하기엔 충분했으니 세종 해권의 치세에는 연경궁에서 창천궁으로 정식으로 이어(移御)할 수 있었다.

궁궐 성벽은 왜 저리 지었는지 몰라도 몹시 이상하게 생겼다.

삐죽삐죽 굴곡들이 앞으로 튀어나온 성벽.

심지어는 성벽 바로 앞에 삼각형의 괴상한 언덕이 있었다.

거대한 강과 접해 있는지, 깊고 넓은 해자까지.

종합해보자면….

오망성 모양이군.

‘매우 독특한 요새로군. 공략하기가 힘들까?’

후안은 잠깐 생각해 보았으나 군사적 식견이 특출나진 않았기에 저것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반면 동승한 게디페어는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이 독특한 궁궐의 벽을 넘으면 드디어 고려 건축의 정수, 창천궁의 궁내가 나온다.

남반구 하늘의 기준점이 되는 대표적인 별자리, 십자성(十字星, 남십자성)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이 궁궐은 고려의 다른 건축물들처럼 북향으로 되어 있었다.

엄숙함과 부드러움, 수수함과 화려함이 공존하는 이 모순적인 광경은 몹시 불경스러운 생각, 즉 자신이 진짜로 옛 설화와 미신에 나오는 신들의 궁전에 도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 무리의 행정관료들이 후안 일행을 흘낏 보다가 자신의 품에 안긴 서류들을 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들은 모두 얼굴이 밝은데, 저들만 침울하구나.

그리고 후안은 마침내 복도의 끝, 고려 최고 실세인 시중(侍中)의 접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선원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간 모양이고, 자신과 게디페어만 접견실에서 멀뚱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스티야의 공작을 이리 홀대해서 쓰겠습니까?”

게디페어는 반쯤 농담이 섞인 얼굴로 그리 말했다.

후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히 다른 귀족 같았으면 화를 내었겠지.

그러나 후안은 도저히 이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가 지구를 서쪽으로 한 바퀴 돌아 중국 황제의 앞에 온 걸까?’

마르코 폴로가 저술한 동방견문록.

그곳에는 한창 전성기를 누린 대원제국의 기록이 생생하게(너무나 생생해서 비객관적이 될 만큼) 쓰여 있었다.

후안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국의 천자라면 이런 권세와 이런 도시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 설명된다.’

현시대, 분명히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국가는 중국이었다.

후안은 머릿속의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겼다.

이슬람의 땅을 통해 건너온 소문에는 원나라가 멸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단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뭘 말입니까?”

“우리가 위대한 중국의 황제 앞에 섰다면 말이야.”

“여기가 중국입니까?”

다소 멍청한 얼굴을 한 게디페어를 내버려두고 그는 호칭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Votre majesté impériale)?

그래도 유럽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프랑스어를 써야겠지?

근데 황제가 프랑스어를 알아듣긴 할까?

예법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공손하게? 정중하게? 그래도 그리스도를 믿는 입장에서 너무 비굴하진 않게?

하지만 그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덜컥

중무장한 병사 두 명이 공손하게 문을 열었다.

등 뒤에 소름 끼치는 위압감이 들더니, 후안은 절로 자신의 주군 엔리케 3세, 혹은 교황을 뵙는 것마냥 땅에 한 쪽 무릎을 꿇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노련한 게디페어조차도,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자신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

그 자각은 행동을 한 이후에나 들었는지, 서로는 놀란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천천히 상석의 의자에 앉은 남성은, 철가면을 쓰고 있었다.

‘문둥병에라도 걸린 것일까.’

그는 한쪽 손을 들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평범한 피부.

분명히 병을 앓고 있진 않았다.

손을 든 상민의 행동에, 시종들과 문관들, 그리고 무관 모두가 자리를 비웠다.

강력한 자신감.

그들은 처음엔 조금 놀랐다.

자신들은 두 명이었고, 눈앞의 남성은 비무장 상태였으니.

후안이 아는 게디페어는 저렇게 다소 순진한 구석이 있었으나 매우 용맹한 기사였다.

농노 수백은 혼자 도륙할 수 있을 정도.

나이가 이제 많은 축에 속한다지만, 그래도 가진 기량이 아직은 출중한데.

분명히, 이는 조금 위험한 행동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후안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이 기분은….

한 번 경험한 적이 있다.

저 사람.

에드워드를 닮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