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77화 (77/653)

장 드 베텐쿠르(지도 첨부)

1362년에 노르망디에서 태어난 생 마르텡 르 가이야르(Saint Martin le Gaillard) 남작.

장 드 베텐쿠르(Jean de Béthencourt)는 실로 프랑스의 풍운아라 할 수 있었다.

흑사병 창궐 이후에도 유럽은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먼 땅이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 전쟁이라는 엄청난 시대의 흐름이 그를 휩쓸었다.

그의 아버지 장 베텐쿠르는 현명왕 샤를 5세의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렝의 밑에서 복무했다.

명장이라고 한들, 병사와 기사가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프랑스와 나바라 사이에서 벌어진 코 체렐 전투에서 싸우다 전사하고, 마침 노르망디를 비롯한 프랑스 북부를 유린하는 잉글랜드 에드워드 흑태자의 군대에 봉역마저 박살이 나 버렸을 때, 그는 어린 나이에 앙주 공작 밑으로 문객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나름대로 가진 재주는 있어 어찌 먹고 살긴 했지만 그때의 그 기억들은 유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럽 전역에 엄청난 위명을 떨치던 에드워드 흑태자가 죽고 프랑스가 다시 노르망디와 가스코뉴 일부를 제외한 영토를 수복했을 때, 그의 영지도 아슬아슬하게 프랑스의 봉역 내에 있었기 때문에 어찌 재건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이런 젠장!’

허락받는다고, 영지가 뚝딱 건설되는가?

이미 영지는 거의 황폐화가 된 땅이었다.

대체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암담할 정도로.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에서 일개 남작은 무력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어중간한 계급과 어중간한 능력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차라리 일개 평민이라면, 아 주인장이 또 바뀌었군 하며 순응할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자신은 자신의 영토 내에서는 무한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었다.

장은 원대한 야심을 품었다.

자신은 더 나은 땅을 가진 귀족이 되어야 했다.

그에게 이 봉역은 정말이지 밉상 그 자체의 땅이었다.

말 안 듣는 가신들, 전쟁으로 너덜너덜해진 땅 그 자체, 허구한 날 일어나는 농민반란과 역병.

‘이 전쟁은 이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지금 숨을 고르고 있는 모양.

심지어 잉글랜드는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도덕적 가치관을 버린 그는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미묘한 평화 사이에서 열심히 해적질까지 벌여대며 돈을 모았다.

꽤 많은 재물이 모일 때쯤, 역시나 양국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그에게 도달했다.

그 시선을 느낀 그는 잠시 피신해 있기로 결정했다.

돈도 충분히 벌 만큼 벌었잖는가.

현명왕 샤를 5세는 몹시 유능한 사람이라, 자신의 이 알량한 행동이 들키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역시 죄를 지었으면, 그때의 관습에 따라야지.

속죄에는 십자군만 한 일이 없다.

마침 프랑스 남부와 아라곤 해안가 근처, 북아프리카의 바다를 유린하는 이슬람계 바르바리(Barbary) 해적들이 맹위를 떨치는 상황에 제노바 상인들의 주도로 바르바리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장은 이 십자군에 뛰어들기로 했다.

* * *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만.’

장은 자신의 재산이 적힌 장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많은 돈을 모았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모아야만 전쟁에서 먼 적당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십자군은 속죄의 기회로 뛰어들었지만, 한탕 벌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그러나 이 프랑스―제노바 십자군은 당시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러왔던 정예병과 그들이 가진 엄청난 중무장에도 불구하고 이 아프리카 이슬람 해적들을 빠르게 토벌하지 못했다.

빌어 처먹을 지휘관 때문에.

마디아(Mahdia)의 지루한 공성전의 현장.

역시나 오늘도 뭐가 진척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공성전을 하려 했으면, 적어도 공성 장비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 상식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오.”

게디페어 드 레 살(Gadifer de La Salle).

이 프랑스 기사는 자신보다 족히 스무 살은 많았으나 완고하고 오만하며 고집불통인 기사들과는 달리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어 잘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이 사태에 대해서 큰 회의감을 느끼는지 상관의 욕을 은근슬쩍 거들고 있었다.

얼마 동안 상관 부르봉 공작 루이 2세를 욕하며 시간을 보낸 게디페어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의 눈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용사의 모험기를 읽은 젊은 기사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혹시, 서쪽의 섬에 대해 들어는 보셨소?”

“예…?”

게디페어는 제노바 상인들에게 들은 풍문을 말해주었다.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서쪽) 서쪽에 꽤 큰 섬들이 모여 있다 하오. 미개한 원주민들만 살고 있어 많은 섬들이 소유권이 없는 빈 땅이라 하던데.”

“아무도 살지 않을 정도의 섬이면, 얼마나 똥땅입니까?”

장의 일침에 게디페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고는 소심하게 항변했다.

“…그래도 개척을 시도했던 제노바 상인들 말로는 그곳에 지의류가 자란다고 하오.”

지의류.

이끼와 비슷한 이 생물체는 주로 염료의 제작에 쓰였다.

염료는 이 시대에선 적어도 같은 양의 금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게디페어가 툭 던진 말은 장의 머릿속을 관통했다.

그는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 십자군은 아마 실패로 끝날 것이고, 자신은 여지껏 이곳에서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있었다.

하루하루 속이 타들어만 갔지.

하지만 저 기회를 잡을 수만 있다면?

장은 서둘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십자군은 역시나 여전히 진척이 없다.

물품을 대주는 제노바 상인들에게 열심히 정보를 수집한 그는 지도를 펼쳐놓고 머리를 굴렸다.

‘이곳쯤이라고 했었나.’

마그레브 서쪽. 카나리 제도(Canary Islands).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에 한 번 이 제도의 북섬을 개척했다는 제노바 상인들은 지중해를 거점으로 삼아야 하는 필연적인 운명 덕분에 극성을 부리는 바르바리 해적을 통과해야만 제도에 도달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프랑스인인 자신은 대서양을 통해 얼마든지 접근이 가능했다.

살다 보니 프랑스인이라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하네.

‘아니야… 차라리.’

장은 날카롭게 미소 지었다.

차라리, 이제는 자신을 옭아맨 프랑스의 굴레를 떨쳐버릴 때가 왔다.

돌아가 봤자 왕 눈 밖에 난 까닭에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 같기도 했고.

장은 멀리서 친척들을 통해 가산을 처분하고는 홀가분하게 원정을 준비했다.

영지와 저택, 사치품, 자신이 소중하게 여겼던 가문의 유산까지도 모두 팔아버렸다.

그래도 돈이 모자랐다.

전쟁터 근처에 있는 불안정한 영지는 역시나 가치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돈을 융통할 방법을 찾던 그는 자신의 삼촌, 로베르트 드 베텐쿠르에게 무려 칠천 파운드를 빌릴 수 있었다.

“너는 이제부터 카스티야의 봉신이 돼야만 할 것이다.”

카스티야에 있던 프랑스 대사 로베르트는 카스티야 왕 엔리케 3세에게 열심히 이 원정의 이점을 설득하여 돈을 꿔다 준 모양.

장도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작은 섬이고 외부의 환경에서 보호받으려면 든든한 뒷배가 필요했다.

한창 레콩키스타를 성공적으로 진행 중인 카스티야는 떠오르는 유럽의 강대국이었다.

그리고 이 카나리 제도와는 매우 가까웠고.

대서양에 서서히 그 영향력을 투사하는 왕국이기도 했고.

* * *

자금은 풍족하고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게디페어와 함께 280명의 원정대를 꾸린 장 드 베텐쿠르는 마침내 카나리 제도 북쪽에 마련된 옛 제노바인들의 거점, 란자로테(Lanzarote)에 상륙하여 원정을 시작했다.

그것이 1402년의 일이었다.

“원주민들과의 전쟁을 치르기 전 정찰을 먼저 하자.”

원정에 앞서 주변 섬들의 지리를 정찰하던 원정군들은 가장 서쪽의 라 팔마섬의 해안가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당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 이게 대체?”

비교적 큰 범선 한 척이 해변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원주민들과의 전투를 기대하며 석궁과 활을 들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그들은 이윽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범선의 갑판에 올라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범선은 독특한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세 개의 마스트가 있던 모양이지만 전부 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다른 곳의 상태는 서서히 세월의 흐름에 썩어가고 있긴 했지만 비교적 멀쩡했다.

“어디 배지?”

“제노바? 아니면 포르투갈일 수도….”

아니면 베네치아일 수도 있겠고.

장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일단 섬기는 나라가 된 카스티야는 확실히 아니었고.

“이것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묵주인가? 십자가는 어디에 있지?”

끊긴 흔적은 없는데.

장은 학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기에, 이것이 불교의 염주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주변을 둘러보던 장이 선장실로 보이는 선미의 고풍스러운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이곳도 이상한 무늬로 장식되어 있었다.

‘흐음….’

문은 도통 열리지 않았다.

발로 차 보아도 꿈쩍도 안 하는 문은 오랫동안 바닷물과 빗물을 머금어 뒤틀린 모양.

그는 나이 많은 힘 센 친우를 불렀다.

“흐아압!”

― 쾅

큰 망치를 휘두른 게디페어 덕분에 문은 산산조각났다.

그리고 그 둘의 등 뒤로 비쳐오는 햇살에, 선장실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망치를 휘두른 게디페어와 그 파편을 피하려 숨은 장 모두 잠시지간 그 광경에 할 말을 잊어버렸다.

“와….”

유골 하나가, 거대한 주화의 산에 싸여 죽어 있었다.

* * *

그날 밤.

“으하하하!”

원정대의 구성원들이 맥주를 뜯고 술판을 열었다.

엄청난 양의 금은동화를 발견한 그들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말로만 듣던 전설 속의 보물선 아닌가.

옛 바이킹들이 유럽의 내륙까지 약탈하며 긁어모은 그런 재화인가?

혹은 대서양으로 진출한 바르바리 해적들이 난파당했나?

병사와 선원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저 저 수많은 상자에 차곡차곡 쌓인 주화들을 보고 있으면 근심이 사라지는 것이다.

기쁨에 들뜨는 와중에도 장은 냉철한 눈으로 천천히 주화들을 살피고 있었다.

금화, 은화, 동화.

“생각보다 금은이 그리 많지는 않아요.”

장의 말을 들은 게디페어가 취기에 불그스름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럼 적은 양이오?”

“그건 또 아닙니다.”

구리도 구리만의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특히 이 대포의 시대에서는 더욱더.

게다가 이 주화들은 독특하기 짝이 없는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니 수집가들이나 귀족들에게 훨씬 더 비싼 가격으로 팔릴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그런데….’

장은 동화에 적혀 있는 이 글자들을 보고 갸웃거렸다.

“대체 어느 나라 말일까?”

[상평동보]

언어를 식별할 수 없는 것이 컸다.

장이 발품을 팔아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상인들에게 글자들을 물어봐도 아무도 속 시원하게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확실한 것은 저 먼 중국의 글자는 아닙니다.”

멀리 비단길을 겪었다는 사람은 글자들을 슬쩍 훑어보더니 그리 단언했다.

“아랍과 타타르, 몽골의 언어도 아니고.”

실로 처음 보는 글자.

“그래도, 동전에 적힌 이 글자와, 항해일지를 살펴보면….”

상인은 아라비아 글자가 적힌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분명히 레반트와 어느 정도 교류가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장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지의 동방 나라가 분명했다.

그리고는 한 박자 늦게 머리를 울리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자신이 알기로는 지중해에서 육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동양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에.

정말로 사람들이 떠드는 것처럼 지구가 둥글어 이 서쪽 바다 끝을 향해 항해하다 보면 미지의 왕국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황금과 은, 그리고 구리가 가득한 꿈과 희망의 나라에 말이지.

장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엄청난 재화를 얻은 그는 더욱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본디라면 이곳에 정착하여 원주민들을 죄다 죽이고 자신만의 작고 소중하며 평화로운 영지를 개척할 계획이겠지만.

저 먼 바다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황금의 땅, 엘도라도(El Dorado)의 전설은 그렇게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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