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76화 (76/653)

14세기의 끝

물론 실패한 자들이 있으면 성공한 자들도 있는 법.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성공한 자가 생겨났다.

개천 90년(CE 1365)

첫 번째 인물, 탐험가 신수일은 앞서 바다에 도전했던 자들의 항로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그리고는 그들이 만난 해류와 바람의 방향에 주목했다.

수차례 멀지 않은 대해에 나가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그는 주변의 바다의 풍향을 측정하고는 놀라운 얼굴을 했다.

“위도에 따라 부는 바람이 다른 것인가?”

연죽곶의 위도와 청해의 위도, 동예의 위도와 남포의 위도에서 부는 바람이 모두 달랐다.

남포 등 남쪽 도시들의 앞바다에 가서야 그는 동쪽으로 부는 바람, 즉 편서풍(偏西風)이라 불리는 바람을 발견해냈다.

수없이 많은 검증 결과를 얻은 수일은 결국 자신의 원정대를 꾸렸다.

그는 남포로 향해 다소 서쪽에서 출발하더라도 강력한 편서풍을 이용하기로 작정했다.

때마침 배의 아래에는 거대한 해류가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편서풍과 해류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내달린 배는 기어코 동쪽의 끝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극동의 대륙 최남단, 신수일은 그 땅에 처음으로 도달하고는 이 곶에 희망곶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곶이라고.

이곳을 기점으로 고려인들은 희망곶의 북서쪽과 북동쪽을 서서히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 * *

고려 대륙 서쪽, 즉 안데스 서쪽의 탐험도 진척되었다.

개천 95년(CE 1370) 영친왕(英親王) 해강의 핏줄이 이어지는 황실의 방계의 일원인 해석(解晳)은 과트라체 자치령의 후원을 등에 업고 서해안과 태평양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연안의 몇 개의 섬들을 발견한 그는 대원정을 계획하고는 서해안을 따라 엄청난 거리를 이동했다.

마침내 해석은 파나마라는 땅을 발견했다.

그 어원은 나비가 많은 땅이라는 근처의 원주민어에서 따온 것으로 보였다.

칼리나해의 지도와 비교해보면, 몹시 얇은 땅만이 이 태평양과 대동양을 가르고 있는 셈이었다.

‘이 대륙이 이렇게 생겼구나.’

대륙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얄팍한 땅.

그 후로는 여태까지 고려대륙이라 불리웠던 군데군데 부풀어 오른 삼각형 모양의 땅은 이제부터 남려(南麗)대륙, 혹은 아(我)대륙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말인즉슨, 북려(北麗)대륙의 존재가 밝혀졌다는 것이지.

파나마를 찍은 그는 다음의 대원정에서 북려대륙의 해안가를 따라 북상했다.

칵틀 루임과 가까운 땅에선 마야어를 쓰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칵틀 루임의 영향력이 닿지 않은 자들이니 조심해야 했다.

마야인들 위에는 또 새로운 언어, 즉 나와틀(Nahuatl)어를 쓰는 사람도 많이 살았지.

이놈들은 한술 더 뜨는 놈들이다.

나와틀 땅의 인간들의 잔혹한 풍습은 사서에나 볼 법한 치첸 이트사의 광경을 능가했다.

‘이 미친놈들과는 상종을 말자.’

예시칸 틀라톨로얀 혹은 멕시카라 불리는 저 막장 무리들은 고려 내에서 몹시 혐오하는 마야의 인신공양 수준을 넘는 인간들이었다.

미친놈들, 즉 멕시카의 땅을 넘어 위로 올라가보면 괴상하게 생긴 매우 길쭉한 반도가 나온다.

이곳은 코치미족이 산다고 해서 코치미반도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

척박한 탓에 따로 정박하진 않았다.

반도를 다시 돌아가면 꽤 살기 좋은 땅이 나오는데, 이곳의 원주민들은 중부 대륙의 민족과는 달리 나름대로 평화로운 제스처를 취했다.

이 미워크(Miwok)족을 발견하는 것을 끝으로 해석은 자신의 원정을 마무리지었다.

* * *

상민은 지도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남려대륙의 해안가는 이제 완전히 밝혀져 있었다.

북려대륙은 좌로는 캘리포니아, 우로는 옛 플로리다 반도와 마야만, 그리고 미국 동부가 위치할 곳까지 밝혀져 있었으나 캐나다 쪽의 지도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저 위의 땅은 아직까지는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곳이 많았다.

‘이제는 시간이 된 것인가.’

많은 세월이 흘렀다.

자신은 청해에서 고려 무역을 주도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베네치아를 제외하면 아마도) 해양 세력 중 하나였지만 원양 탐험에는 그리 많은 투자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흐름은 언제나 도도하게 흐르니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와 북미까지 발견해 버리는 것이지.

‘북려대륙이라.’

상민은 살짝 미소지었다.

자신이 살아왔던 인생과는 이제 백팔십도 바뀐 세상.

유럽과 만나는 것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와 버렸다.

아프리카를 발견한 이상, 그 위의 항로를 개척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고.

몇 번 왕복을 하다 보면 이제는 제집 드나들 듯이 항해술이 발전할 것이고.

그리고 마침내 후세의 사관들은 이 시대를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라 부르겠지.

그러나 그 주도 세력은 이베리아반도의 카스티야와 포르투갈 사람들뿐만 아니라 남려대륙의 고려인들에게서도 주도되었다고 기록될 것이었다.

‘필연적인 순간이다.’

이제는 정녕, 혼돈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상민은 천천히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유럽으로 갈 시도를 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옳은 선택일까.

‘판도라의 상자일 가능성이 농후해.’

가장 큰 문제는, 일단 저 대륙을 휩쓸고 있을 검은 죽음, 즉 흑사병이 있을 것이다.

괜히 가서 그 무시무시한 전염병이라도 옮겨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결과가 나올 뿐.

그리고 두 번째.

고려가 그에 의해 안정된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긴 했지만, 영토와 몇몇 특정한 분야에서의 기술력을 제외하고는 아직 진정한 ‘제국’이라고 불리기엔 상당히 미흡한 점이 많았다.

인구수도 해권 재위 초창기 백만에서부턴 다소 완만하게 상승하는 형태가 되었다.

정복 전쟁을 그리 많이 벌이지 않았고, 주변의 복속할만한 부족들 또한 열대우림에 들어가 있는 자들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많지가 않았으니까.

시간이 흐른다면 꾸준한 자연 성장세를 통해 증가하기야 하겠지.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흑사병으로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어 나간 잉글랜드의 인구수가 자신들과 비슷하거나 더 많을지도 몰랐다.

식민지 개척도 여러 이유로 지지부진했다.

아프리카와 북려대륙의 땅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것이 곧바로 식민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제도에 어느 정도의 기반시설을 짓는 것만 해도 엄청난 돈과 재물을 투자해야만 했었다.

창양과 청해의 거리보다 족히 열 배가 더 멀다.

덥고 습하며 물산은 적고 무역도 할 건덕지가 없다.

아직 유카탄반도에서 주변 부족들과 전쟁을 벌이는 칵틀 루임과는 조그마한 무역을 이어나가고 있지만 그곳의 특산품은 옥 같은 사치품과 동예에서 잔뜩 생산되고 있는 카카오, 고추 등의 작물밖에 없었지.

작물들은 동예에서 사는 것이 더 효과적이며 옥의 경우에도 시장 공급을 조절해가며 소량만 수입해야 했다.

고려 근처의 빈 땅도 수없이, 아니 과다할 정도로 많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고 거대한 대양을 넘거나 한없이 먼 거리를 이동해 새로운 터전을 일구겠는가.

심지어 국내 치세는 가히 황금기였다.

태조(太祖) 해민(解旻), 태종(太宗) 해진(解溱), 세종(世宗) 해권(解勸), 성종(成宗) 해정(解晸).

즉 네 명의 위대한 황제의 치세라 불리우는 사현제(四賢帝)의 시대에는 국내적으로 가끔씩 찾아오는 재난에도 상당히 잘 대처해 역사상 유래없는 태평성대라 불리울 정도로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되며 문화적으로 크게 융성한 모습을 보였다.

살기 좋은 시대에는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적어지기 마련.

― 아, 안 가요.

길거리에서 거지를 보기 힘들다는 시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백성들을 데리고 어찌 식민지를 개척하겠는가.

금과 은이 흐른다고 목숨을 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탐험가일 뿐, 백성들은 한평생 일궈온 농토들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선천적인 본능이었다.

‘영유권이나 열심히 뿌리고 다녀야겠군.’

상민은 남려대륙과 칼리나해의 온갖 섬, 심지어 북려대륙 남해안에도 특제 비석을 만들었다.

비록 지금은 정말 쓸모없는 일이겠지만, 나중에 크게 돌아올 것이리라.

* * *

개인적으로도 개척 말고 할 일이 생겼다.

능력주의 상속제.

속된 말로 황가의 인물들 사이에선 훈요 상속제라 불리는 이 악랄한 승계법은 자신이 장자로 태어났어도 차남과 심지어 사촌들보다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면 제위에 오를 수 없는 지독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황제들은 후계를 지정할 때, 태종이 창시한 고유의 계산법을 사용했다.

아무래도 혈통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혈통의 가까움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물론 장남도 가산점이 부여되긴 했다.

그러나 적어도 같은 위계, 즉 같은 세대 안에서는 그렇게 많은 차이가 벌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였다.

쌍용지손, 즉 해민과 왕예의 피를 이은 황실의 인원이라면 어느 정도 기본 점수를 가지고 있을 테니까.

두 번째는 바로 저 지독한 판별법.

즉 128권이라는 미친 책을 얼마나 잘 소화해 낼 수 있느냐다.

이 엄청난 양의 분량이 압박으로 다가왔는지 황자들 중 몇 명은 절반도 읽지 못하고 그냥 때려쳤다.

― 더럽고 치사해서 안 하고 만다!

이렇게 이 점수는 혈통점수처럼 황실의 인원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점수가 없어 극과 극의 분포를 보였다.

때문에 친자와 조카 간의 점수가 뒤집히는 일도 허다했다.

못난 놈이 잘난 놈보다 한없이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이다.

해진이 이를 악물고 자신의 친자들을 원해도로 쫓아내며 해권을 태자로 삼은 것도 이 점수가 도저히 못 봐줄 정도로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가진 바 국정 운영에 대한 능력을 확인한 이후에는 일신의 건강과 사교성, 그리고 품행 등의 자질을 고루 판별하여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인간의 일이기에 하늘의 일까지 고려하진 못했다.

성종 해정은 아버지 해권처럼 일흔둘까지 장수를 누리진 못했지만 그래도 무난한 능력을 자랑하는 장남을 후계로 지정하고 쉰 살에 붕어(崩御)했다.

하지만 이 지정된 장남이 익일역월제를 따르는 한 달여간의 국상(國喪)을 끝내고 제위에 오르기도 전에 덜컥 병으로 훙(薨)한 것이다.

‘이런 게… 사실 정상적인 중세의 역사긴 하지.’

결국 꼬여버린 계승 구도.

그동안은 이러한 일이 발생하진 않았지만 만약 발생했다 하더라도 양위를 한 선황제가 후사를 지정할 법적, 제도적 근거가 있었다.

즉 해정이 살아만 있다면 되는데.

죽은 사람을 능에서 일으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골치 아픈데.’

상민은 그동안 제국의 후계를 양육하는 보모, 아니 보부 노릇을 해 왔었다.

자신을 신격화하지 않기 위해 정체는 오직 황가의 일부 인원들과 몇몇 충신들, 측근들만 아는 사항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믿는 것은 다른 이야기.

상민이 비어버린 권좌에 대한 교통정리를 하려 도성으로 올라오자 해정의 차남과 삼남이 ‘수양’하려 했다.

― 으악!

물론 떡이 되도록 처맞은 뒤 상민 앞에 끌려왔지.

살기를 흘리는 젊디젊은 태조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빌던 그들은 강제로 파나마의 개척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성종의 손자이자 후처를 따로 들이지 않고 덜컥 죽은 장남의 유일한 혈육, 다섯 살 난 해윤을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은 너무 위계가 멀었고, 능력이 처참하거나, 혹은 제위에는 질색하는 이들뿐이니.

결국 이 어린아이가 제위에 오르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

작은 아이는 조그마한 나무 장난감에 한창 심취해 있다가 자신에게 반응하지 않는 젊은 5대조 할아버지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제위를 바꿔주랴?”

백 년도 더 어린 애한테 협박 아닌 협박을 해 보았지만, 알아듣는 기색은 없었다.

네가 무슨 죄를 지었겠니.

이제는 제법 먼 후손이지만 그래도 똘망똘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그냥 안쓰럽고 귀여울 뿐이다.

자신이 이 끈적끈적한 궁정의 일에서 손을 떼고 나가버린다면 저 아이는 형제들 말고도 다른 못된 손길에 무기력하게 당하겠지.

어쩌면 이 제국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섭정을 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지 않을까.

꼼짝없이 몇십 년간 보부(保父) 노릇을 해야 할 운명.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철가면을 쓴 청해의 섭정공은 오랜만에 권력을 쥐고 그동안 급속도로 팽창한 제국 안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사회 구조적 모순과 병폐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그렇게, 원 역사대로라면 새로운 세기라 불릴 14세기가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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