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2)
정각에 도착한 특임어사 이원석의 앞으로 수많은 상인들이 모여 있었다.
어사대의 권위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당상관들도 벌벌 떠는 것이 어사대와 사헌대의 서슬 퍼런 관리들인데 상인들은 어찌할까.
‘아무리 요 근래 금권(金權)이 정권(政權)을 넘보고 있더라지만.’
자체적으로 정부나 지방 행정조직의 통제를 받고 있는 공상(公商) 경상(京商, 도성의 상인들)과 청상(淸商, 청해의 상인들)들은 물론이고, 사상(私商)으로 분류되는 동상(東商, 건양, 동호의 상인들)이니, 남상(南商, 남포의 상인들), 예상(濊商, 동예의 상인들) 등 수많은 상인들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 툭
상인들 모두가 오랜만에 본 터라 서로 조용히 담화를 나누는 탓에 사방이 북적거렸다.
원석은 아무런 말도 없이 주머니를 끌러 탁상에 올려놓았다.
그 소리가 다소 커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열어보실 분 계시오?”
장치상이 대표로 그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풀어 내용물을 쏟았다.
― 차르르륵
익숙한 생김새의 동전들.
상평보의 모습들이다.
동화는 물론 은화와 금화까지 섞여있었는지 동전더미에서 금화와 은화들이 반짝거렸다.
“……?”
상인들은 다소 의문이 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것들이 다 무엇인지 아시오?”
평범한 화폐들.
하지만 직접 그것들을 만졌던 장치상은 유심히 동전을 들여다보다 미간을 좁혔다.
“위폐…이옵니까?”
“그렇소이다.”
좌중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간신히 정착된 화폐경제의 최대 수혜자가 바로 그대들 같은 상인이라는 것을 조정은 잘 알고있소이다.”
상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서 그대들은 이 위폐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익히 알고 있으리라 믿소.”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몰아낸다.
원석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말처럼 시중에 유통된 질 나쁜 화폐는 양화, 즉 제대로 찍혀낸 화폐를 몰아내고 국가의 경제를 흔들어 버린다.
의도치 않은 통화 팽창(인플레이션)이 일어나 물가가 상승하는 것이다.
화폐가 처음 유통되고 시행착오도 많았다.
동화와 은화, 금화의 테두리를 갈아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도 속출했다.
엄한 법집행보다 당장의 이윤을 바라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물론 그 뒤로 테두리에 톱니무늬를 넣어 그것을 방지했지만, 사람의 본성이 얼마나 탐욕스러운지를 알 수 있는 훌륭한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위폐에 비해선 가소로운 수준.
당금 고려에서 위폐를 만드는 것은 대역죄에 해당할 만큼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교수형이 아닌 이례적으로 참형이나 거열형에 처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짓거리는 계속 반복된다.
상인들이 하나둘씩 동전들을 살펴보았다.
“…솜씨가 실로 정교합니다.”
청상의 대표, 안명수가 약간 감탄과 걱정이 뒤섞인 어투로 말했다.
“통령께 보고해야 하니, 동전 몇 개를 챙길 수 있겠습니까?”
원석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용의선상에서 청상과 경상은 제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상, 혹은 어용상인에 속하는 것은 둘째치고 위폐가 돌아다닌다면 그들이 제일 많은 손해를 볼 존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자들은.
원석의 날카로운 눈이 좌중을 휩쓸자 모두가 합죽이가 되었다.
‘이놈들 중에 있을까.’
이런 섬세한 기술력을 민간의 어중이떠중이들이 구현했다고는 믿겨지지 않았다.
당연히 어느 정도의 자본력이 있는 자들이 주도했을 것이고.
그는 본능적으로 이 자리에 그 범인이 있다 느꼈다.
전국 상인들의 회합.
그 자리에 난입한 것도 이 때문이겠지.
저 말석, 뚱뚱한 덩치의 낮익은 사내가 눈에 보였다.
‘…….’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상인이 서둘러 눈을 피했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원석이 주변의 상인들과 긴 토론을 했다.
현장에서의 고충과 실제적 행정과의 거리를 적은 그가, 다소 강경하게 어사대의 입장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위폐를 만든 놈은 꼭 사지를 찢어 드릴 것이고.
그것을 방관하거나 혹은 동조하는 자들도 큰 처벌을 받을 것이다.
“명심하시오, 위폐를 잡지 않고 모른 척 유통시키는 상단은 위폐를 만든 자들만큼이나 악질이라는 것을.
법적인 책임은 물론 상단에 매우 강력한 세무조사가 들어갈 것이니 단단히 각오하시는 것이 좋을 게요.”
상인들이 모두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들이 삼삼오오 오늘 들은 사건에 대해 논의하며 회합의 장을 나갈 때, 두 사람만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치상은 옛 유명한 유리공 장경록의 손자였고, 조부로부터 이어지는 유리공예 가업을 일구며 거대한 부를 쌓은 상인이었다.
안명수는 옛 청해 총관 안승회의 아들이며 스스로는 면포사업과 염료사업을 크게 확충하여 청해 상인 조합의 대표가 되었다.
둘 모두 능력이 출중한 것은 물론 공정하고 심성이 올곧다는 평판이 많았다.
“새롭게 취임하신 통령께선 무탈하신가?”
“…예.”
2대 통령은 전 통령이 그러하였듯 가면 속에 가려진 미지의 인물이지만, 새로이 취임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업무에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명수는 무언가 더 알고 있는 모양인지, 그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꺼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통령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저런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지.
그것은 심지어 황상께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신 게 기억난다.
머뭇거리는 안명수 대신 장치상이 제법 큰 목함을 가져왔다.
“이번에 저희 상단에서 만든 확대경입니다.”
현미경과는 조금 다른 확대경.
위폐를 감식할 수 있게 큰 유리정이 박혀 있는 확대경은 원석의 마음에 쏙 들었다.
“고맙소. 내 이 노고를 잊지 않으리다.”
반색하며 받아든 원석이 확대경을 쓰다듬었다.
업무용 물품이니만큼 사적으로 뇌물을 받는 것은 아니리라.
물론 보고는 해야겠지.
“알아낸 것이라도 조금 있소?”
장치상과 안명수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차 동쪽에서 퍼진 것이 확실합니다.”
“확대경으로 청해에서 먼저 퍼진 위폐들을 살펴본 결과, 확실히 어사께서 보여주신 것과 비슷합니다.”
명수는 두 개의 주머니에서 동전들을 꺼냈다.
“어찌 동일 위폐라 판단하시는 게요?”
“앞면에 이 위폐 특유의 꺼슬꺼슬한 면이 있고 뒷면에는 부조(浮彫)의 굴곡이 양화에 비해 불규칙적으로 우둘투둘한 것, 그리고 동전이 전체적으로 살짝 더 가벼운 것. 이것들의 특징이 양 위폐 전부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특징들이다.
“미치겠군.”
게다가 동쪽에서 퍼졌다라.
별로 좋은 예상은 아니었다.
가장 의심이 되는 것은 근거지가 동쪽인 동상 혹은 예상이다.
원석은 제일 먼저 이 회합에서 달려나가듯 빠져나간 그 뚱뚱한 상인을 떠올렸다.
‘이름이 박우진이라 하였나.’
분명히 수상쩍은 느낌이 났다.
사람의 본질은 잘 바뀌지 않는다.
전에 본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더욱 큰일을 저지르고 있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마침 그 인간도 예상 출신으로 방금의 회합에 참여했는데.
원석은 빠르게 휘하의 위사들을 모아 한밤중 예상의 본거지를 급습했다.
특임어사가 된 이상, 이 정도의 권한은 가지고 있었다.
자다 일어난 것으로 보이는 예상들은 이 사건과 무관함을 증명하기 위해 부랴부랴 어사대에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텅 비어버린 우진 상단의 창고는 이미 그들이 본거지로 떠났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돌겠군.”
* * *
동예에 그 적을 두고 있는 우진의 상단.
번국이라도 내정간섭을 할 수는 없었지만 사건이 사건이니만큼, 외무부와 재무부의 강력한 압박으로 동예의 왕실은 어쩔 수 없이 어사들을 영토 내로 진입할 수 있게 허락했다.
― 쾅쾅쾅
“대고려 제국 어사대다! 문 열어!”
단단하게 잠긴 문짝 앞에 돌파용 흑색 화약에 불을 붙인 위사들이 몸을 피했다.
이윽고 요란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쏟아졌다.
“쿨럭 쿨럭.”
연기가 걷히고 보이는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위폐 제조 기구들과 수많은 장인.
그들은 모두 어딘가 구속되어 이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로 노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놀라운 것은 그중에 창양의 조폐소에서 일하던 장인들도 납치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그랬구만.’
* * *
상민은 보고를 받고 눈을 감았다.
반은 성공했고 반은 실패했다.
위폐제조공정에 쓰인 근본적인 기구들과 장인들을 모두 압류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엄청난 양의 주화들이 배에 실려 밖으로 유출되었다.
자신이 빅브라더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범죄자 하나하나까지 모두 신경 쓸 수는 없다.
게다가, 이번에는 공식적인 청해 통령과 통령의 이취임식(자신은 휴가라 불렀다) 기간에 벌어진 일.
허점을 제대로 찔린 상민이 다소 미안한 얼굴로 해권에게 말했다.
사실상 그의 앞마당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이건 내 잘못이지 황상의 잘못이 아니오.”
“아니옵니다. 소손 또한 제대로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는데.”
또한 만물을 책임져야 할 황제도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양.
벌여놓은 일이 하도 많아 눈코 뜰 새 없이 국정에 몰두하던 해권도 침음성을 삼켰다.
다른 것보다도 중앙의 장인들이 납치된 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돈이란 마귀와도 같아 가끔은 황명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길 때가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위폐를 전담하는 정보조직을 신설해야겠습니다. 다만 이미 일어난 일은….”
최연소로 상서령의 자리에 오른 김지숙의 손자, 김속명이 성려를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선태황 폐하, 성상 폐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저들이 장인과 기구들을 모두 잃어버린 이상, 도주하며 들고 간 주화의 양은 한정될 수밖에 없고 제국의 경제 체급으로 그 정도의 악화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사옵니다.”
“만약 그들이 더 그 화폐를 찍어낼 수 있다면?”
기구들도 압류하고 장인들도 모두 풀려났다 하나, 해권은 항상 최악의 상황도 고려하기로 마음먹었다.
“스스로의 흔적을 뿌리는 것이니 다시금 추적하여 발본색원하시면 되옵니다.”
사실상 고려와 고려 북쪽, 칼리나해의 바다는 제국의 영향력 안에 들어온 땅들이다.
그들이 어디로 도망갔건, 충분히 찾아낼 수 있었다.
마제도 근처에서 순찰을 하고 있을 청해 함대도 있으니 토끼를 몰듯 위로 올라가는 추격함대를 편성해서 딱 잡아버리는 것이 깔끔하고 좋겠다.
하지만 범죄자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해권도, 속명도, 그리고 상민 또한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 * *
수많은 상인들이 오고 가는 바다는 더 이상 미지와 공포의 존재가 아니었다.
지동설과 지구구형설은 고려가 바다로 뻗어 나가며 부인할 수 없는 정설로 채택되었다.
마야의 자료에서 옛 고려의 천문지도와 흡사한 별자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해준은 고려의 영토 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심지어 지구의 크기까지 대충이나마 구할 수 있었다.
한 곳에서 출발해 계속 직진할 수 있다면 다시금 출발지로 도착할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진 탐험가들은 수평선으로 여정을 떠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죽을 운명에 처해졌다가 하루아침에 유명인사로 되어버린 송병권의 일화를 꼽을 수 있겠지.
남부항로 개척 이후 고려에서 제일 유명한 탐험가가 된 병권은 청해로 돌아온 뒤 이번에는 대동양을 횡단하려는 꿈을 꾸었다.
“나는 울부짖는 바다에서도 살아 돌아온 인간이다!”
그는 야심만만하게 탐험대를 꾸렸다.
호기심 많은 고려의 귀족들과 학자들이 그에게 후원금을 주었다.
협저선 다섯 척을 빌린 그는 청해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후원자들이 마련한 성대한 출정식을 뒤로하고 다섯 척의 배는 용감하게 대양을 건넜다.
그리고 소식이 끊겼다.
십 년 후. 공식적으로 그들은 모두 청해의 관청에서 사망 처리되었으며, 유산은 가족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다.
물론 후원자들은 투자한 돈을 되돌려받지 못했지.
그 후로도 몇 명의 용감한 탐험가들이 동쪽에 도착하기 위해 바다로 떠났지만 성공한 자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악명이 누적된 바다를 앞에 두고 우진의 상단 또한 연죽곶에서 선택을 내려야 했다.
남쪽에서는 제국의 추적함대가 눈에 불을 켜고 북상하고 있었으며, 북쪽에선 청해함대가 순찰을 돌고 있다.
도망칠 곳은 없다.
한 곳을 제외하고는.
‘빌어먹을 변낭.’
우진은 직감적으로 그 사소한 사건이 자신을 이 궁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돌이킬 순 없었다.
“만약 땅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곳에서 머물고 정비하자. 시간이 흘러 사태가 잠잠해지거나 우리가 잊혀진다면 다시 동예로 돌아가는 것이지.”
주화 더미를 바라보던 우진이 선원들을 설득했다.
황금빛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은 한 방이다. 이제는 그저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
선원들도 탐욕에 찬 눈으로 결의를 다졌다.
그의 선단은 대동양으로 조타륜을 돌렸다.
앞서 수많은 뱃사람들이 생환하지 못했던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