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1)(지도 첨부)
고려는 태조 시절에 정착된 주기가 있었다.
기독교적 문명의 잔재라 볼 수 있는 7일의 주일의 개념 대신 동양적 개념으로 만든 이 주기는 5일이 일주일이 된다.
당연하게도 해권이 반포한 정일력 이전에 실시했던 이 주기는 보름을 삼등분하는 음력 친화적 개념의 주기였으나 태양력 후에도 별 탈 없이 계속 이어져 가고있었다.
화, 수, 목, 금, 토요일이라는 오행의 원리를 붙여가며 만든 한 주(周)의 개념은 이젠 관민 모두에게 굉장히 널리 스며들어 있었다.
딱히 휴일의 개념이 없던 예전 고려시기와는 달리 5일에 한 번이나마 쉴 수 있는 것은 관리들에게 축복과 다름없었다.
민간에도 토요일마다 상점이 쉬는 경우도 있었고 오히려 몇몇 상점은 그날만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개천 68년(CE1343) 8월 1일.
오늘도 어김없이 한 주의 시작, 화요일이 다가왔다.
어사대의 바쁜 일정도 다시 재개되었다.
대외감찰을 담당하는 이 기관은 상당히 많은 업무를 떠안고 있었다.
‘으으… 난 대체 언제 집에 들어가려나.’
창가에 있던 장년인은 밤새 찌뿌둥하게 뭉쳐 있는 근육들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했다.
관원들이 주말 동안 가족들, 친지들과 회포를 풀었는지 졸린 눈을 비비며 등청하는 모습이 삼층 사무실에서는 너무나도 잘 보였다.
부럽군.
아내와 아들들의 얼굴이 희미해질랑 말랑 하는 것 같은데.
위폐 사건을 총괄하는 특임어사 이원석은 현재의 보직에 임명된 이후 거의 한 달여간을 집에 가질 못하고 있었다.
‘허허, 내가 자네를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지? 이번 일도 잘할 수 있을 거야.’
지난달 어사대부가 마련한 술자리가 떠올랐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입에 발린 소리를 했었지.
적임자가 없다느니, 너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느니.
‘개새….’
하지만 진급이라는 당근에 홀라당 넘어간 것은 다름 아닌 자신.
그날 밤 경계를 놓고 허리띠를 푼 채 열심히 술을 마신 것도 자신.
누굴 원망하리오.
원석은 잠시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쳐다보다 이윽고 밤새 정리한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이제 좀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구만.’
원석은 이번 일에 대한 요약본을 다시 한번 읽어내렸다.
사건을 머릿속에 정리하려는 그의 습관이다.
[상평보에 대한 현황]
현재 유통되고 있는 상평보의 현황이 문서에 잘 요약되어 있었다.
상당히 많은 양의 화폐가 시중에 돌아다니는 모양.
어찌 보면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화폐가 널리 퍼지기 위해선 국가의 체급 자체가 성장해야 했다.
백만 명의 인구는 국가가 최소한의 경제적 인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충분한 숫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도입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것은 역설적으로 국가의 체급보다 확연하게 성장한 상업의 발달 때문이었다.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면포와 목재와 광석 같은 핵심 자원들, 기호품 카카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물질인 고무 등의 수입이 활발했고, 그 반대로 수출하는 품목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 모든 상거래 행위에 매번 미곡과 면포를 옮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곡은 상할 테고, 면포는 그나마 괜찮겠지만 결국은 옷감으로 쓰여져야 하는 운명이다.
게다가 육지면이 고려 내에서도 생산된다고 하지만, 동예에 비할 수는 없다.
번국이긴 하지만 그래도 타국에게 국가 화폐의 권한을 넘겨주는 면포본위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상평보는 등장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원석은 아직도 기억했다.
처음 상평보 동전, 즉 상평동보(常平銅寶)의 발행이 실시되자, 상인들과 백성들은 콧방귀를 뀌었지.
“허, 누가 이 동 쪼가리로 미곡을 교환한단 말인가?”
건원중보니, 삼한통보니 심지어 예전 동전들도 경험하지 못한 신고려의 백성들은 화폐에 대해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원석이 직접 시장에 나가보니, 쓰는 사람들은 드물었고 여전히 면포와 미곡으로 물품이 거래되는 것이 많았다.
조정에서도 회의감이 섞인 시선을 비추는 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황상께선 화폐의 도입을 매우 강력하게 실시하길 원하셨다.
조정의 강력한 주도로 관리들의 임금을 비롯하여 각종 국책사업의 보수를 동전으로 주고, 또한 세금도 동전으로 납부할 수 있게 하자 그나마 백성들 사이에서 이 동그란 금속이 가치를 지니는 물품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조세의 금납화, 이는 고려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한번 화폐로 거래한 사람들은 무거운 면포나 곡식을 직접 운반하지 않아도 되는 엄청난 편리함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런 민간의 이득뿐만 아니라 여러 경제 주체들도 마찬가지였다.
* * *
하지만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화폐만 있으면 만물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당연하게도 위조 화폐 제작을 시도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상평보의 가장 하급 동전, 동화는 앞에는 글자와 숫자 뒤에는 관모수리(부채머리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이 땅에서 꽤 자주 보이며, 고려에서 국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수리인 관모수리는 마치 관(冠)을 쓴 독수리처럼 생겼기에 용맹함은 물론 근엄함과 고귀함, 입신양명의 상징처럼 여겨진다고.
은화는 익숙한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습, 그리고 금화는 용이 표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어찌되었든 초창기의 위조 화폐들은 중앙에서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화폐에 비해서 굉장히 조악했다.
처음에는 신수와 동물들의 모양이 형편없어 시중의 백성들조차 위폐를 보고 코웃음 치며 신고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치밀함이 대단해지더니, 이번 사태 때 뿌려진 악화들은 겉보기에 양화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동전의 경우, 솔직한 말로 괜찮았다.
그 작은 구리의 주조차익은 별로 없었고, 만들어내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으니까.
풍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구리의 꾸준한 공급 덕분에, 동화에 저질 철을 합금하는 것도 그렇게 매력적인 선택 요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가치주화인 은전이나 금전의 경우에는 매우 치명적이다.
국가의 화폐 통제력이 없어지고, 주조차익도 극도로 줄어든다.
물가가 상승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진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국가에 대한 신뢰가 감소하게 된다.
성상께선 한 나라의 경제를 파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위폐를 뿌리는 거라 직접 사륜하신 것이 떠올랐다.
그 또한 동의하는 바였다.
원석은 정교하게 찍어낸 주화들을 만지작거렸다.
솔직한 말로 눈으로 구별이 조금 힘들 정도로 비슷해 보였다.
이 정도의 기술력이라.
‘구린 냄새가 심하게 나는구나.’
이번 위폐 사건은 앞선 여러 번의 위폐 사건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요약한 서류들을 챙기고 행낭을 꾸렸다.
보좌관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관청을 나선 그가 마차에 올랐다.
* * *
창양 시내만큼은 이미 철저하게 포장된 도로가 깔려 있었다.
내구력이 향상된 벽돌로 시공된 도로는 배수구도 잘 설계된 덕에 폭우에도 쉽사리 진창으로 변하지 않았다.
수레를 쓰기에 매우 편리한 환경이 구축되었다.
개인의 이동수단도 바뀌었다.
토목공사로 인력이 극도로 귀한 시절, 많은 가마꾼들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가마는 조정에서 금지를 한 이후 순식간에 역사의 저편으로 도태되었다.
대신 목축업이 강한 나라이니만큼 마차가 그 자리를 서서히 채웠다.
역시나 나온 거리에는 마차들이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중앙선 오른쪽은 상행, 왼쪽은 하행, 전형적인 고려 다차선 도로의 모습이다.
대부분은 고위급 관리들이겠지만 가끔은 부유한 상인들도 마차를 타고 다녔다.
마차를 탈 수 있는 신분은 따로 없었다.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한 정도.
다만 황가의 인원을 제외하고는 황금으로 장식은 하지 못했다.
― 히히힝
“저… 저!”
마부가 다급히 말을 멈춰 세웠다.
약간 앞으로 몸이 쏠리는 것을 느낀 원석이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섬주섬 챙겼다.
슬쩍 보니 앞에 있는 마부가 사거리에서 앞 마차에 삿대질을 하는 광경이 보인다.
“아니, 차선 변경할 때에는 손을 들어 표시하라는 것을 배우지 못하였단 말이오?”
“미… 미안하오.”
앞차의 마부가 고개를 조아렸다.
그와 동시에, 들창이 열리고 날카로운 고함이 튀어나왔다.
“뭐해 이 멍청한 것아, 저런 놈 신경 쓰지 말고 가라고 했지?”
원석은 처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으려 했으나, 자신의 마부에게 욕설을 내뱉은 뚱뚱한 상인의 마차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성큼 옷을 펄럭이며 문을 열고 나왔다.
“차주 나오라 그래.”
“예…?”
“어서!”
마차 안에서 내린 사람은 인상을 찌푸린 뚱뚱한 상인이었다.
그는 여전히 원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야근으로 땀 냄새가 배인 관복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원석은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마주 쏘아보았다.
이것이 누굴 저리 쏘아봐?
그러나 어사대의 관리로서 지켜야 할 선은 있었다.
시선이 불경하다고 양인을 사사로이 처벌할 수는 없었다.
뼛속까지 어사대의 관원인 원석 자신이 그럴만한 인간도 아니었고 집법성과 중서성의 눈길도 무섭기도 하고.
“네 죄를 알렸다?”
“마부 놈이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것은 사죄드리겠소. 하지만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상인은 입술을 씰룩대며 쏘아붙였다.
저게 미안하다는 사람의 태돈가.
한술 더 떠서 상인이 옆에 서 있던 마부의 오금을 발로 찼다.
“쓸모도 없는 자식!”
그 모습에 원석이 더욱 화를 내었다.
이 자식은 끝까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있구나.
“아니! 분명히 작년에 반포된 의무부의 행정명령을 듣지 못했느냐 이 말이다!”
무려 일 년 전 법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법을 이렇게 소홀하게 다루고 살았는지 눈에 뻔히 보였다.
원석은 상인이 타고다니는 말의 궁둥이에 삿대질을 했다.
“마차에 매단 말의 변낭(똥주머니)을 차지 않은 것은 오로지 차주의 책임이니, 내 네놈의 마차 번호판을 기억해 두었다가 직접 심판하리라!”
“그깟 똥 주머니가…!”
상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가 이윽고 등 뒤의 마차에 시선을 옮겼다.
[대고려국 어사대]
마차에 붙은 팻말.
그제서야 자신이 말똥 때문에 똥통에 빠졌다는 것을 실감한 상인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분명히 경범죄에 속했지만 저 야차 같은 인간들과 엮이면 세상이 극도로 피곤해진다는 것은 세 살배기 아이들도 아는 사실.
“대… 대인, 한 번만 봐주시면!”
특임어사에게 씨알도 안 먹힐 말을 하는 상인을 재차 노려본 원석이 번호판의 번호를 적고는 도포자락이 휘날리게 자신의 마차로 돌아왔다.
자신이 탄 관공서의 공용 마차에는 모범적으로 두 마리의 말 엉덩이 모두에게 변낭이 달려 있었다.
“하여간….”
상인의 마차가 지나간 자리에 드문드문 떨어진 말똥을 혀를 차고 바라본 원석이 다시금 마부를 재촉했다.
“어여 가자.”
그가 아무리 위계 서열상 그 모임의 상급자라 하더라도, 약속에 늦는 것은 고려인의 미덕이 아니지.
마차는 느릿느릿하지만 착실하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고,
흔들거리는 그 율동에 원석의 고개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흡!”
무슨 악몽을 꾸었는지 소스라치게 일어난 그가 입가를 닦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마차는 정지해 있었고 마부가 그의 문을 열어주었다.
경상(京商)의 대표 장치상이 장소의 주인답게 버선발로 마중을 나왔다.
“나으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 본관이 약간 늦은 것 같구려.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아닙니다. 아직 물시계의 종이 울리지 않았으니….”
― 뎅 뎅
그 말과 동시에, 오후 여섯 시를 알리는 종이 도성에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련하게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