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치세
태평양에 도착한 병권은 그 근방을 탐사하고는 청해로 위풍당당하게 개선했다.
상세한 항해일지를 받아든 상민이 다소 어이없이 웃었지만 약속대로 그의 죄를 감면해 주는 것은 물론 꽤 두둑한 상도 주었다.
“운이 좋은 놈이로고.”
병권은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지 순진한 후원자들을 모집해 다른 항로를 개척하려는 모습이다.
잠시 머리를 흔든 상민은 그를 뇌리에서 잊었다.
이제 청해 소속은 아니니 민간 탐사를 굳이 방해할 이유는 없었다.
* * *
병권의 탐사, 남부항로의 발견은 고려 전체에게 있어 실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서해안의 자원을 안전하게 이송시킬 수 있는 방법이 생긴 셈이다.
해협의 위험한 부분에 등대를 짓고 입구와 출구에 정착촌을 만드니, 처음 몇 년의 사고들을 제외하고는 항로가 익숙해져 위험 요소도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 이후로는 예전보다 더 구리와 초석의 유통이 원활하게 되었다.
육로로 노새나 말이 끄는 수레에 가져오는 양보다 배로 실어나르는 양이 더욱 압도적인 것이 분명했기에 당연한 소리기도 했다.
고려군의 위험 요소가 정리되자, 안데스 중부, 북부 고원지대의 세력들은 잔뜩 긴장했다.
불을 뿜는 병기를 아낌없이 쓰는 자들, 고려군들이 언제 침략의 검은 야욕을 드러낼까 생각하며.
하지만 불안에 떨던 만큼 중부의 형세가 많이 바뀌진 않았다.
물론 고려 북쪽 국경 근처에 있는 아이마라의 잔당들은 철저하게 토벌되었으나, 건축 중인 요새로부터 일정 거리 떨어져 있는 곳에는 고려군의 마수가 일절 뻗지 않았다.
고려로서도 험준한 산세와 고원의 황량함에 의지한 저들을 당장이라도 박살 내는 것은 요원한 일이라 판단했다.
확보한 북부 회랑의 근처에 요새를 쌓으며 내실을 다지는 행위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것이 현명했다.
그러나 고려는 여전한 팽창욕을 가지고 있었고, 정작 불똥이 튄 곳은 다른 부족이었다.
* * *
마푸체.
안데스 서쪽, 남북으로 길쭉한 대지에 자리잡은 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여러 파벌이 있었다.
제국과 혼인을 통해 동화되고 있는 과트라체.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다소 폐쇄적인 리체.
그 밖의 피쿤체 등 작지만 독특한 부족들.
그중 고려의 골칫덩이로 자리잡은 리체족은 마푸체 특유의 마초적 기질과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 끈질기게 국경을 공격하는 자들이었다.
과트라체를 이끄는 상민의 막내 해강은 오랜 세월 동안 벌어진 소규모의 전투들 끝에 그들을 산맥 너머로 밀어내는 것에 성공했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고려는 말의 유출에 굉장히 신경을 쓰고 있었으나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지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적제의 피를 이은, 태복시에서 특별관리를 받는 덩치가 큰 군마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왜소한 고려의 과하마.
그것들이나마 기를 수 있게 된 리체족들은 중부회랑을 이용해 말을 타고 유격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거점요새가 아닌 근처의 촌락을 약탈하여 재물을 빼앗고 인명을 손실시키는 것이다.
그동안 고려의 조정도 손을 놓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고려군과 과트라체가 기병을 이끌고 그들을 때려잡으려 하면, 다시금 험준하고 복잡한 산맥 너머로 숨어버리니 조정은 갈수록 화가 쌓이기 시작했다.
“비겁한 놈들!”
하지만 남부항로로 인해 그들의 본진, 즉 서해안의 작은 평야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고려군은 가진 모든 힘을 투사하여 서부의 골칫거리들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유목민에서 정주민으로 나아가는 시기.
단순한 원시 부족사회에서 벗어나 이제 막 공동의 적에 대해 연합 회의체, 혹은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정부를 구성하기 시작했던 이 민족은 한 손에는 화약, 한 손에는 곡물을 쥔 고려에 의해 순식간에 와해되기 시작했다.
참으로 절묘한 시기였다.
부족 단위로 나뉘어져 있었으면 일거에 토벌하기 어려웠을텐데.
자신들이 고려에 대해 대항하고자 모여 있던 것이 역설적으로 고려에게 큰 도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총기병들과 총병들이 배에서 내려 그들의 부락을 휩쓸었다.
동쪽에서도 회랑을 통해 대규모의 원정군이 파견되었다.
대규모의 양동작전.
결국 해진의 치세 말기에 서해안의 강역은 거진 확보되었고, 그곳은 제국의 막내아들이 이끄는 과트라체의 봉역이 되었지.
해진으로선 앓던 이가 빠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숙원, 마푸체의 복속이 완료되었다.
* * *
신적 숭배를 받는 황제, 해민의 아들이자 전조 왕씨 황실의 마지막 딸, 왕예의 아들.
두 용의 혈통, 쌍용지손(雙龍之孫)이라는 고귀한 피를 물려받은 해진은 그 일신의 능력 또한 대단하여 국가의 내적, 외적으로 많은 일들을 해왔다.
황권은 극도로 강화되었으며, 학문이 융성할 토양을 일구었고 항로 발견과 개척에 충실했다.
군사적 능력 또한 출중해 해민이 창시했다 알려지는 총창방진과 총기병을 정예하게 육성하고 진법을 가다듬었다.
그를 기반으로 서해안의 엄청난 영토를 확보하였고, 심지어는 청해의 통령을 통해 재위 기간에 저 북쪽 미지의 왕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다.
그런 그도 세월은 피해갈 수 없었다.
머리는 이미 새하얗게 변했고, 눈은 침침했으며, 자꾸 피로함이 느껴졌다.
전능하신 그의 아버지였다면 끄떡도 없었겠지.
하지만 해진은 아버지의 불멸을 딱히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으니까.
‘아버지께서는, 결국 자식들의 죽음을 목도하셔야 할 운명이시니.’
그 슬픔을 대체 어찌 짐작할 수 있을까.
해진은 어느 날 밤 갑자기 결심을 하고는 들고 있던 마지막 문서에 정성스럽게 결재한 후 태자 해권에게 갔다.
밤늦은 시간, 막 자려고 준비하던 태자와 긴 시간의 대화를 나누고 끝내는 옥새를 넘겨 버린 해진은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홀연히 떠나버렸다.
이후 행적은 상당히 많았다.
전국을 유람하며 정부의 행정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탐관오리들을 때려잡기도 하고, 남쪽의 자식들의 얼굴도 한 번 보러가기도 하고, 청해와 동예 부근에서 출몰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훌륭한 은퇴를 한 것일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해진이 개천 64년(CE1339), 향년 64세의 나이로 하늘로 떠났을 때 그의 조카 해권은 선황에게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리고 해씨 고려의 창업을 보좌하고 제국을 중흥으로 이끈 위대한 군주임을 선언했다.
* * *
개천 55년(CE1330)
옥새를 받은 다음 날.
해권이 서른한 살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가히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비범함을 자랑하는 군주였다.
해권은 많은 일들을 정비했다.
비록 많은 부분이 훈요 128권의 내용에 수록되어 있었지만, 그것을 최고 책임자의 입장에서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지 상민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첫 번째로 법률을 집대성한 것을 꼽을 수 있겠지.
태조 해민의 치세부터 만들어진 전국대전(全國大典)은 드디어 반포될 수 있었다.
이제는 판례로 보완을 해야 할 시기.
집법성의 관리들은 전문적인 법교육을 받아, 체계적으로 민사와 형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권력의 분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지방 관리들 사이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 있었고 이는 지배구조의 모순을 획기적으로 줄여주는 장치가 되었다.
중앙에서도 집법부의 견제력이 상승되었으며 법치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되었다.
해권은 또한 비옥한 토양에 학문을 가꾸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천문학.
옛 고려의 천문지도 대신 현저하게 다른 남반구의 천문지도가 새롭게 만들어졌으며, 정일력(正日曆)이 반포되었다.
상민 자신의 첫째이자 해권의 아버지, 해준의 공이 상당히 컸다.
음력 혹은 태음태양력 기반이던 예전의 역법 대신 훗날에도 주류가 될 태양력을 도입한 것이다.
결국 날짜라는 것은 달의 움직임이 아니라, 태양을 도는 지구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 분명했기에.
오차는 줄어들었고 정확한 역법이 필요했던 농경사회에도 도움이 되었다.
‘마야의 천문학이 조금 도움이 되긴 했을까.’
칵틀 루임에서 마야의 천문 자료를 가공하여 아들에게 준 상민이 속으로 생각해 보았으나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화학의 발전도 두드러졌다.
현미경의 발달로 미시세계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게 된 학자들은 수많은 가설들을 세우며 하나씩 학문을 진보시키기 시작했다.
원자와 분자의 개념과 같은 것들이 슬그머니 떠오르기 시작했고.
‘주기율표까지 나온다면 바랄 것도 없겠는데.’
수헬리베 붕탄질산… 다음이 뭐였지?
상민은 아쉬움에 젖어 손을 꼽아 보았지만 기억의 저편에 넘어간 것을 다시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문과는 오늘도 서러울 뿐이다.
해권의 업적 세 번째.
지방제도 정비라 할 수 있겠다.
당시 고려의 인구는 물경 백만에 달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는 자연적 증가율도 상당했으나 여러 지역에서 복속된 부족의 영향이 매우 컸다.
대부분의 인구는 강남대평원, 혹은 창강대평원으로 불리는 비옥한 반달 지대, 즉 팜파스에 몰려 있었다.
이 안전한 땅, 즉 민정이 이루어지는 내방(內方)은 현대적 명칭의 지방조직이 들어섰다.
큰 구역은 시, 도, 구, 군의 명칭이 붙었고, 그 밑의 행정조직도 세분화하여 정리되었다.
외방(外方), 평원 이북에는 덥고 자연적 장애물이 많았으며 흉폭한 야인들이 많았다.
과라니나 투피 같은 부족이 대표적이다.
접경선의 지역은 도호부나 도독부가 설립되었고 도호부사와 도독부사가 파견되어 그 지방을 군정으로 다스렸다.
같은 외방이지만 평원 남쪽의 대지는 분위기가 좀 달랐다.
이 거대한 황무지는 강 하나를 넘는 순간 기후가 급변한다.
춥고 건조하며 황량하여 농사를 짓기에는 매우 힘든 대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감자가 없었다면 아예 쳐다도 볼 수 없을 그러한 땅(Patagonia).
이곳도 원주민들이 있긴 했었다.
테우엘체족은 키가 180, 즉 상민과 비슷할 정도로 거대한 키를 자랑하는 장신족(長身族)이었다.
황량한 땅에 사는 만큼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리체족과의 악연이 있었는지, 고려에게 그렇게 적대적인 분위기를 보이진 않았다.
해권은 이들에게 자치령의 권한을 보장하며 차근차근 흡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비옥한 땅에 익숙한 고려인들은 남쪽까지 내려오진 않을 것이 분명했고.
다만 서서히 물에 젖듯이 고려문화와 고려어, 그리고 여러 풍습을 퍼트려 그들을 제국의 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좋겠지.
영토는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중앙의 통제력은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해권은 큰 국책사업을 벌였다.
중앙 통제력도 그러했고, 선황이 북쪽에 쌓기 시작한 요새에 대한 지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도로를 깔아야 하는 것이 필수였다.
또한 성장하는 경제의 잉여생산물이 전국에 원활하게 유통되기 위해서도.
‘산맥의 요새로 가는 길은 어렵겠으나, 다른 부분은 쉽다.’
국경지대로 가는 몇 개의 주요 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평야였다.
도로는 매우 빠른 속도로 건설되기 시작했다.
상당히 많은 숫자의 리체 노비들이 공급되고 있는 상황.
정부는 그들을 불러모아 노역 십 년과 면천의 권리를 제시했고, 의식주에 대한 것도 일정 부분 제공했다.
고려군의 감시를 받으며 땅을 파고 있는 리체 노비들의 표정은 적어도 절망적이진 않았다.
내적 팽창의 종결점.
가장 큰 화두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화폐.
고려사에서 화폐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왕씨 고려 성종의 치세였다.
건원중보(乾元重寶)는 성종 15년(CE996)에 만들어져 이듬해에 유통되었다.
재질은 철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곧 그 한계점을 드러내며 사장되었지.
옷감보다 신뢰성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 후에 숙종때 활구(은병), 삼한통보, 해동통보, 그리고 동국통보가 만들어졌으나 이 또한 널리 쓰이지 못했다.
해권은 앞선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화폐의 필요성을 무시하지 못했다.
시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구리 산지는 해로를 통해 완전히 안정되었고, 인구와 경제는 무럭무럭 성장하기 시작했으니까.
결국, 개천 68년(CE1343) 화폐가 발행되었다.
상시평준(常時平準)의 준말을 붙인 상평보(常平寶)는 대체로 시세를 따져 백 개의 동화(냥)가 한 개의 은화의 가치를 지녔고, 열 개의 은화(환, 換)가 한 개의 금화(원, 原)의 가치를 지녔다.
희귀금속의 공급 또한 전혀 걸림돌이 아니었다.
축복받은 안데스에는 구리뿐만 아니라 은광과 금광도 엄청났으니까.
동전 1개, 즉 1냥의 가치는 적지 않았다.
한 끼 식사를 배불리 할 수 있을 만한 정도.
은화 한 개면 서민이 한 달을 굶지 않고 버틸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한 화폐의 도입은 처음에는 그리 순탄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