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71화 (71/653)

남부 항로(지도 첨부)

마제도와 연죽곶, 동예를 거치고 드디어 청해로 돌아온 상민은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지었다.

청해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는 도시였다.

태자 해권이 도성으로 떠난 후 청해의 일을 총괄했던 총관 안승회는 유능한 재상 출신답게 별 무리 없이 맡은 일을 해내었다.

청해에 있는 정보총국, 여의국 소속의 인원들을 통해 아들에게 옥을 진상한 상민은 그다음 주, 몸소 호들갑을 떨며 청해에 행차한 해진을 항구에서 마중하며 떨떠름한 얼굴을 해야 했다.

“황상께선 이 나라의 지존이라는 자각이 별로 없으시오?”

“…아버지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부자는 잠시 투닥거렸다.

잠시 소회를 풀고 태자는 잘 있냐 물어보니 해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태자도 이제는 충분히 제 몫을 해야 하는 나이입니다. 동궁에 많은 권한을 위임했으니 국정 전반에 대해 빠르게 능숙해지겠지요.”

아버지께서 이미 청해의 업무를 많이 가르치셨잖습니까.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해진은 벌써부터 은퇴가 마려운 회사원처럼 굴었다.

“보내주신 신물은 가히 아름답더군요.”

해진은 쿠쿨칸의 눈, 거대한 경옥을 떠올리며 연신 감탄했다.

“그 옥보다 더 완벽(完璧)이라는 수식어가 따를 수 있는 보물이 존재할까 싶습니다.”

제아무리 화씨의 벽이라도 이에 비견할 수 없어 보였다.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모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옥새를 만들고 있더랬다.

완성된다면 감히 중원의 전국옥새도 이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해진은 이곳 청해로 친히 행차하며 그 옥을 가지고 온 원정대 모두에게 엄청난 포상을 내렸다.

포상식이 끝나고 상민은 황제를 통령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그래, 오랜만에 이 아비를 보러 오신 김에 저녁이나 함께 드시지요.”

“물론입니다.”

해진은 기대감에 잔뜩 젖은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항상 독특하고 이색적인 음식을 개발해 내셨다.

또한 황위에서 물러나신 이후엔 가끔 취미로 요리를 손수 하셨기에 그 실력도 범상치 않았다.

군주란 자리는 궁중의 모략에도 철저한 대비를 하는 존재라 매번 기미상궁의 기미를 보고서야 은수저로 떠먹는 것이 일상.

그 고독하고 씁쓸한 저녁 식사에 익숙해진 뒤로 가끔가다 이렇게 아버지와 겸상을 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소중한 순간이었다.

물론 밥상머리의 잔소리를 겪는다면 그 생각이 백팔십도 달라지겠지만 천만다행으로 아버지는 식사할 때만큼은 별말이 없으셨다.

다만 짓궂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시는….

음?

입에 넣은 젓가락을 빼며 해진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상민을 바라보았다.

“어때, 마음에 드시오?”

― 화악

혀끝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이 몰려왔다.

“으으으!”

해진은 아주 잠시, 정말로 찰나의 시간에 이 아버지가 정녕 자식을 독살하려는 마음을 품었는지 의심을 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인의 혀에 처음 닿은 캡사이신의 맛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묘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물! 물!”

해진은 본능적으로 물을 찾았다.

상민이 건네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나서야 진정을 하게 된 해진은 다시금 몰려오는 고통에 채신머리없이 혀를 내밀어야 했다.

그리고는 잊고 있었던 것처럼 갑작스럽게 화를 내었다.

“아버지!”

“자, 이 계란을 좀 드시지요.”

상민은 껄껄거리며 삶은 계란을 내밀었다.

아들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계란을 입에 넣고, 서서히 가라앉는 통증에 눈을 치켜떴다.

“대체 이 붉은 가루는 무엇입니까?”

“어떤 원주민들 말로는 칠리(Chili)라 부른다지만, 내 직접 고추라는 이름을 붙였지요. 어떻소?”

고추.

시대와 장소를 격해 고려인들의 식탁에 드디어 등장하게 된 식물의 이름이었다.

분명히 고통스러운 감각만을 선사하는 식물일 텐데.

묘한 중독성을 참을 수가 없다.

이미 한 번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앞의 붉은 돼지고기볶음에 다시금 젓가락을 뻗어야만 했다.

트루 한국인은 무려 팔백 년 전에도 저 매운 감각을 선천적으로 좋아하는 유전적 형질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허억 허억.”

황상의 평상복은 잔뜩 땀에 젖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쉴 틈 없이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이다.

평소 식욕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들었기에 폭식을 하는 것이 우려되어 상민이 한 소리를 했다.

“다음 날 아래가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적당히 드시는 것이 좋을 것이오. 황상.”

엉덩이에 불난다, 아들아.

“소자, 도저히 이 음식을 입에서 뗄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매우 흡족한 식사가 끝이 났다.

얼얼한 입을 달래기 위해 황제가 대동한 궁인들이 서둘러 후식을 가지고 나왔다.

달짝지근한 조청을 바른 과자에 곁들인 차는 이색적인 향기를 내고 있었다.

― 후우

매운맛이 많이 가신 모양.

손바닥 부채를 부치며 땀을 흘리던 해진이 따뜻한 차의 향기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향이 참 좋습니다.”

검은 가루에 뜨거운 물을 붓고 조금 저으면 완성되는 이 차는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를 품고 있었다.

해진이 그것을 한 모금 마시더니 탄성을 질렀다.

“맛 또한 매혹적입니다.”

상민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카오(Kakao, 본래는 Kakaw지만 익숙한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차는 각성효과는 있지만 마라차와는 달리 중독효과는 없으니 안심하고 드셔도 됩니다. 내 넉넉하게 싸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 후르릅

해진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여유를 즐겼다.

상민은 카카오 종자들을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나머지는 동예에 퍼트리기 시작했으니 곧이어 그곳의 농장에서도 이 열매를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카카오란 열매는 마야에서 화폐와 비슷하게 쓰인다오.”

“그렇습니까?”

“치첸 이트사라는 도시는 들으셨겠지요?”

“예, 들었습니다.”

대동한 사관은 상부에 철저하게 모든 일을 보고했다.

상민은 별로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원문이 오롯이 해진에게 넘어갔으니, 저 영악한 아들이 그 사료에 무슨 짓을 할지는 자신도 예측 불가능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곳에는 고려에서 면포가 화폐로 쓰이는 것처럼 모든 물물거래를 카카오로 한답니다.”

예를 들면 건장한 성인 남성 노예는 카카오 백 개.

닭과 오리, 칠면조는 열 몇 개.

옥수수 가루 한 포대는 다섯 개.

이런 식으로.

“그 크기 때문에 운반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겠습니다.”

“과연 그랬지요.”

그래서 나온 말인데.

상민은 고려의 화폐도입이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동전을 주조할 기술력은 이미 갖추어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구리 원산지의 상태가 북쪽 이민족들의 공격에 다소 위태로운 것이 사실이니….”

해진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초석과 구리의 산지 아타카마 사막은 채굴꾼들이 바로 위에서 내려오는 이민족들에게 공격당하며 그 형세가 혼란스러웠다.

비축한 수량은 상당히 많아 당장의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모든 일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고려에게 정식으로 조공을 바치며 번국을 자청한 치족, 즉 치차스 왕국은 작년에는 수도(타리하)까지 공격당하면서 백척간두의 형세에 빠졌었다.

아마 고려의 원정군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파병되지 않았다면 번국 하나가 몰락해 버리는 상황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북부의 이민족들이라….”

치차스 왕국이 고려와 교역하며 철제 무기를 도입한 이후, 북쪽으로 크게 형세를 넓힌 것이 사실이다.

아이마라 12 부족 왕국 중 자신을 제외한 세 부족을 병합했으니.

나머지 여덟 부족 또한 산맥의 북쪽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패퇴하는 과정에서 아이마라 여덟 부족들의 잔당들은 북쪽에 웅크리고 있는 자그마한 부족왕국에게 또다시 공격당했다.

아이마라 난민들을 엄청나게 흡수한 왕국.

그 이름은 다소 생소했다.

“쿠스코 계곡의 왕국이라.”

“예. 그 왕국에 카팍 유팡키(Cápac Yupanqui)라 하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난 모양입니다.”

해진은 입 안에 머금고 있던 카카오 차를 꿀꺽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성장세가 놀라울 정도로 빠릅니다. 때문에 나머지 아이마라 잔당들이 위로 더 올라가지 못하고 초석 산지 근처에서 떠돌고 있는 것이 골치가 아프군요.”

남쪽과 북쪽의 강한 힘에 의해 중부 안데스는 혼란의 시대에 빠져들고 있었다.

잔당들은 죄다 도적떼로 변했다.

번국을 무리지어 공격할 만큼 강력한 약탈집단으로.

공격하고 도망가는 것을 반복하니 치차스 왕국으로서도 방도가 없었다.

구리와 화약의 안정적인 공급.

그것의 방안을 생각해야 했다.

국경을 방어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번국에게 기댈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해결책은 있습니다.”

해진은 상민이 집무실에서 가져온 지도를 훑어보았다.

앞에 펼쳐진 지도에는 동시대 사람들은 존재를 알 수 없는 땅들이 그려져 있었다.

상민이 기억을 더듬어 그려낸 지도, 실제로 관측되지 않은 땅들은 미시적인 면에선 부정확한 부분이 상당히 많았지만 거시적인 면을 볼 때에는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남쪽, 남쪽 항로를 뚫는 것이 첫 번….”

해로를 이용하자는 의견.

옳은 접근이었다.

아타카마 사막은 사막이지만 해변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배를 타고 갈수만 있다면 오히려 훨씬 더 많은 양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해진이 끄응 하며 스스로의 말을 완성하지 않은 채 삼켰다.

울부짖는 바다는 안 좋은 쪽으로 매우 유명하니까.

“아닙니다. 제아무리 용감한 탐험가라 할지언정 울부짖는 바다에 밀어넣는 것은 가혹한 처사이지요.”

두 번째 방법도 있습니다.

해진은 자신이 꺼낸 첫 번째 말을 지우듯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 손은 거대한 산맥을 가리켰다.

육로를 견고히 보강하자는 의견.

“이 산맥의 회랑은 원주민들이 동서를 오가는 곳으로 유명한데, 가혹한 산세를 자랑하는 주변과는 다르게 완만하여 제국군도 충분히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폭이 매우 길고 좌우측에서 협공을 당한다면 곤경에 빠지기 쉬웠다.

“요새를 차근차근 이어나가 지역을 안정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맞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흐음.’

상민은 문득 떠올렸다.

“그 탐험가가 용감한 탐험가일 필요는 없지 않겠지요?”

“…?”

* * *

청해의 감옥.

그곳에는 오랫동안 갇혀버린 한 남성이 있었다.

이 감옥에는 그리 오래 있진 않았지만 칵틀 루임과 배 안에서도 그는 줄곧 죄수의 신분이었다.

이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힌 인간은, 대체로 쓸모가 없어 청해에 도착한 후 교수형으로 매달리는 판결을 받을 것이 분명했으나,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운명의 장난이 일어났다.

“내가 널 어찌하면 좋을까.”

한밤중, 감옥 내의 면회실에서 철가면을 쓴 남자가 와 그리 말했다.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통령을 바라본 병권이 울면서 빌었다.

“제발 소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 탁 탁

함대를 지휘하는 지휘봉으로 손바닥을 두들기던 상민이 갑자기 뚝 그 행동을 멈추자 병권은 속에서 딸꾹질이 나는 것을 느꼈다.

다음에 나올 말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리라.

“한 번의 기회라.”

상민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믿을 만한 놈은 아니었다.

착한 놈도 아니었고

그러나 그렇기에 이 일에 매우 적합했다.

“그것이 죽을 가능성이 높은 기회라도?”

병권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상민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러지. 너에게 세 척의 협저선을 주겠다.”

병권은 그 파격적인 말에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러니, 울부짖는 바다를 건너거라.”

“……!”

이어지는 말에 새파래진 얼굴을 한 병권이 반문했다.

“예?”

“생각해보아라, 이곳에서 교수형에 걸려 죽거나, 바다에 빠져 죽거나, 뭐가 뱃사람으로 더 고귀한 죽음이냐?”

병권은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만약, 네가 안전한 항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역사서에 너는 인물됨은 좋지 못했지만 유능한 탐험가로 남을 수 있겠지.”

싫음 말고.

내밀어진 함대의 지휘봉.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잡은 병권.

그의 눈은 분명히 아까 봤을 때에는 썩어버린 달걀과 같았지만 지금은 무언가 타오르듯 동공이 빛나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다시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바닥에 얼굴을 쿵쿵 박으며 눈물 섞인 고함을 내질렀다.

* * *

울부짖는 바다.

고려 대륙 최남단과 남극 대륙(아직 존재는 모르겠지만) 사이를 흐르는 거대한 해협.

이 무지막지한 바다는 탐험가들에게 거대한 공포로 전해지고 있었다.

집채만 한 파도와 얼어붙을 듯한 추위.

그리고 그곳에 뱃사람들의 전설이 추가되는 것이다.

괴상한 악귀가 산다느니, 거대한 상어가 배를 집어삼킨다느니.

예전부터 그 바다의 존재는 널리 퍼져 유명했지만 도전한 자 중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심지어 노련한 항해사인 윤주형도 그곳에 도착하고 바다를 짧게나마 겪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온몸을 부르르 떨 정도.

하지만 달랑 세 척의 배로 그곳을 넘어야 할 운명에 처할 병권은 아직 이글거리는 눈으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죽음 직전에 받은 마지막 기회.

'어떻게 받은 기회더냐!"

그와는 달리 선원들은 당연스럽게도 겁에 질려 있었다.

역시나 통령은 그 잔혹한 성정답게 죄를 저지른 선원들, 그리고 항명 선원들로만 이 선단을 구성하는 친절함을 보여주었지.

“도망가면 안 됩니까?”

선원들이 애원했다.

이곳이 섬들이 많고 따뜻한 마야의 앞바다였으면 도망갈 생각도 조금 했을지 몰랐다.

하지만 남쪽으로 향했는데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동해안을 따라가다 근위함대나 청해함대에 걸리면 바로 물고기밥이 되어 버릴 텐데.

그들은 꼼짝없이 울부짖는 바다를 건너야만 했다.

게다가 병권은 통령의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넘치는 명예욕을 정곡으로 자극받은 그는 모두가 죽더라도 이 바다에 선원들을 밀어넣을 만큼 열정적인 미치광이로 변해 있었다.

“이 겁쟁이들! 따라해라, 우리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선원들은 앞에서 대충 따라했으나 뒤로는 중얼거렸다.

“지랄 염병을 하세요….”

남쪽으로 항해하길 며칠째.

최남단의 거점, 원해도에 도착한 그들은 무척이나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고귀한 존재, 유배된 황자들을 알현했다.

태자의 앞길을 방해하지 않도록 치워진 황자들은 그래도 나름대로 잘 먹고 잘 사는 모양이다.

성질이 더 더러워진 것은 틀림없지만.

“뒤지러 가는구나. 잘 가렴.”

선원들의 사기를 뒤흔드는 심드렁한 말을 뒤로한 채 병권의 함대는 물자를 보충하고 본격적으로 바다를 향해 조타륜을 돌렸다.

― 촤아아

거대한 파도.

정말이지, 옛 치첸 이트사에서 본 신전의 높이마냥 거대한 파도가 꾸물거리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배의 우측에는 육지가 있다.

심지어 육지를 따라가는 연안의 파도도 이렇게 거센 것이다.

“빌어먹을, 모두 준비해!”

― 콰앙

물과 배가 부딪힌 순간인데 마치 대포라도 맞은 듯 배가 출렁거렸다.

거대한 파도에 선원들이 바다로 휩쓸렸다.

바닷물은 마치 얼음장처럼 추워 아마 생존하기 어려울 것이다.

― 으아악!

아니, 우리도 살아남을 순 있을까?

중돛대가 꺾여버린, 삽시간에 나아갈 동력을 잃어버린 선두의 배를 본 병권이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이 바다를 건너는 것은 자살행위다.

바닷물에 쫄딱 젖은 두 척의 배는, 침몰해버린 한 척을 뒤로하고 다시 원해도로 돌아왔다.

그것을 본 황자들은 낄낄 웃었다.

부푼 그의 야망은 대자연의 힘 앞에서 다시금 무력하게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휘봉을 잡은 순간, 그는 무조건적으로 맡은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 네놈은 대륙 서쪽에 도착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와야 할 것이다.

통령은 그에게 말했었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영악한 인간 병권은 잔머리를 굴렸다.

“차라리 산맥을 걸어서 증거를 가지고 오겠다!”

두 척의 협저선은 슬금슬금 내륙으로 접근했다.

밑으로 더 내려갈 순 없고. 어쩐다.

“강을 따라 올라가보면, 어쩌면 걸어야 할 길이를 크게 줄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병권이 남쪽에 자리한 강들 중 유난히 넓은 하구를 자랑하는 강에 함선을 이동시켰다.

“강치고는 상당히 물결이 거세구나.”

울부짖는 바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강이라 볼 수 없을 정도의 파도가 치고 있었고, 암초도 많았다.

도저히 알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구조의 괴상한 강은 본류가 어디인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생겼다.

“무조건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병권은 단순무식하게 항로를 설정했다.

“하지만….”

남쪽으로 가는 길은 넓었고 서쪽으로 가는 길은 좁았다.

누가 봐도 안전한 길은 남쪽.

하지만 여러 번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병권은 마치 그 순간 신내림이라도 받았는지 계속 서쪽만을 고집했다.

그리고 또 참사가 벌어졌다.

― 쿠웅

항해를 하다 파도와 바람에 통제력을 잃어버린 협저선 한 척이 가뜩이나 좁은 강폭에 매복해 있던 암초에 운명을 달리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선원들을 구조할 시도는 할 수 있었다.

절반 정도는.

동료들을 잃어버린 선원들이 원망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병권을 바라보았다.

좁은 길을 선택한 선장의 잘못이 분명했다.

이미 배는 서쪽 강으로 진입한 상태.

당장이라도 선상반란을 일으킬 듯한 흉흉한 내부 상황.

아직도 거센 바람과 심지어 더 좁아지는 강폭,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암초들.

그의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 빌어먹을 강은 왜 이렇게 길어?’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하루 종일 선수에서 하염없이 강을 바라보고 있던 병권이 어안이 벙벙한 채 소리를 질렀다.

“이 무슨?”

저물어가는 노을은 서쪽의 수평선 끝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

산맥도, 육지도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강의 끝에는, 새로운 바다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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