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밤
비명과 신음, 탄식이 사방에 휩싸였다.
심지어 마야 귀족들조차 머리를 움켜쥐었다.
상식과 지성이 통하지 않는 시대.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일이 일어난다면 모두가 다 신화적 사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 모두 다 죽을 거야!”
“대체 어떻게 해야?”
누군가 소리쳤다.
자애롭게도 쿠쿨칸께선 모두가 집 안에 들어가 기도한다면 살려주신다 했었다.
― 오늘, 둥근 달의 빛을 받지 않는 자들은 종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니.
절름발이가 마지막으로 말한 문장.
그것들을 떠올린 마야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엄마들은 아이를 붙잡고 집으로 들어갔으며, 농사꾼들과 사냥꾼들도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지도 않은 채 거처로 피신했다.
대로변이 순식간에 꽉 막혔다.
엄청난 인파들에 압사당하는 사람들도 생겼고, 혼란을 틈타 도둑질을 일삼는 자들도 있었다.
아비규환.
말 한마디로 도시를 농락한 상민은 그저 미동도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다가온다.
단죄의 밤이.
* * *
눈 뜨고 코 베인 것처럼 대낮에 가장 신성한 신전을 침략당한 치첸 이트사.
아하우와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려 애썼다.
치첸 이트사의 아하우는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방의 도시에서 온 사잘들을 불러모았다.
딱히 그들의 지원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도시가 아직 건재하며, 지금 벌어진 사고는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들에게 주지시키려는 행동이었다.
통제가 불가능하다면 인질로 협박할 수도 있었고.
그곳에는 툴룸의 지도자, 즉 사잘(Sajal)도 자리해 있었다.
이 기묘한 사태가 일어난 후에 도착한 툴룸의 지도자는 고려군에 의해 패퇴한 부족의 전사들을 수습하고 치첸 이트사로 도망쳐 왔다.
구원을 청하러 온 듯하나, 이미 이곳도 한 차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직후.
그는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치첸 이트사의 아하우에게 툴룸에 일어난 일을 고할 수 있었다.
“이 멍청한 얼간이 같으니라고! 왜 게으름을 부리다 이제야 이 사실을 고한단 말이냐!”
게으름을 부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과도하게 조심스러웠을 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추격을 대비해 대로가 아닌 밀림을 헤치고 혼자 스스로의 그림자와 전투를 하며 온 툴룸의 사잘이 아하우의 노기에 거듭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네놈은 내가 나중에 단죄할 것이다!”
아하우는 냉막한 분위기가 감도는 주변 도시들의 사잘들을 바라보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적대적인 눈을 하고 있는 마야판의 사잘이 빈정대며 말했다.
“위대한 치첸 이트사가 저 한 줌의 외부인에게 쿠쿨칸의 신전을 침탈당했으니 신들께서 뭐라 생각하시겠습니까?”
“……말조심하시오, 마야판의 사잘이여.”
어림도 없지, 마야판의 사잘이 콧방귀를 뀌었다.
“아하우께선 신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쿠쿨칸의 눈.
가장 화려하고 큰 옥.
저지대 마야의 패권을 상징하는 신물을 논하는 모습에 아하우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 저 건방진!’
남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
그중 평소 가장 싫어하던 남의 불행이었으니 저리 실실 웃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몇 년간 치러진 두 도시 간의 대전쟁.
마야판이 패배한 후 항복의식을 치르면서 그들의 전 아하우와 수많은 귀족들이 치첸 이트사에서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깊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마야의 도시들은 수년간 답습해온 인신 공양 풍습과 공물로 인해 오로지 힘의 논리로만 외교를 해 온 경우가 많았다.
당연히 이 자리에 깊게 깔려 있는 불신의 외교, 치첸 이트사의 위기는 경쟁자들에게 기회나 다름없었다.
경쟁 도시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데려온 전사들을 가만히 뒤로 물렸다.
‘흥, 그 수가 얼마나 된다고 생색이냐.’
아하우는 비웃었지만 속으로 깨달았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도시가 유례없이 큰 시험대에 올랐다는 사실을.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이 위기를 수습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조언을 구할 대제사장은 인질로 잡혀 있었다.
‘협상….’
아하우는 그의 처분을 결정할 협상에 대해선 극도로 망설였다.
마야인 모두에게 신성모독을 저지른 자와 협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권위의 하락이 있을 것이었다.
저곳에는 쿠쿨칸을 위한 방이 있고 그분을 위한 왕좌가 있으며 그분의 눈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대제사장?
존귀한 자이긴 하나, 제사장은 새로 뽑으면 된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보통 맞아보지 않은 자가 자신감에 차 내릴 만한 결정을.
“오늘 밤 우리는 쿠쿨칸의 신전을 탈환할 것이다! 감히 저들이 성지를 더럽히기 전에 그대들이 나서서 되찾으리라!”
많은 전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오후의 그 이상한 광경을 목도했던 소수의 전사들만이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 * *
재규어의 왕좌.
붉은 주사(朱砂)로 칠해진 왕좌 우측의 팔걸이에 기대 있던 상민은 바다새의 부리에게 말했다.
“네가 해야만 할 일이 있다.”
자신이 숨겨놓은 스무 명의 별동대들에게 고려인 포로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
툴룸에서처럼 지하감옥은 별로 멀지 않은 거리에 위치해 있을 것이었다.
“마야인들이 대부분 집으로 도망갔으니 거리는 한산할 것이다. 어둠이 드리운다면 즉시 시행하도록.”
상민의 명을 받은 바다새의 부리가 절뚝이며 사라지자 그가 복잡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는 큼지막한 푸른 구슬이 들려 있었다.
“쿠쿨칸의 눈이라.”
대제사장으로 여겨지는 자는 덤으로 걸렸으나 원래 자신은 이 신물과 이 사원 자체를 인질로 삼으려 했었지.
아직까지 전령 비슷한 자들이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저들도 협상의 의사는 없다 봐도 무방했다.
딱히 이곳까지 오는데 무력시위를 하며 온 것도 아니니 자신들의 전력이 과소평가당한 것도 있겠고.
어찌 되었든 이곳은 곧 전쟁터로 돌변할 것이다.
치첸 이트사의 보물이 자신의 손안에 있는 이상 이들은 이 사원을 점령하기 위해 부나방처럼 달려들 것이었다.
그것을 짐작하는지 벽을 등지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청해군도 제각기 무구를 손질했다.
그들의 분위기는 복잡미묘했다.
앞으로 힘든 전투가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원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이 문명이 대체 얼마나 끔찍한 문명인지 알게 된 병사들은 인간으로서 가지는 근원적인 분노에 치를 떨고 있었다.
누구든지 수직으로 꽂혀 있는 3~4m의 길이의 거대한 장대에 수많은 사람 머리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면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그 건축물의 이름이 아마 촘판틀리라 했었지.
분노는 물론 전투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좋은 원동력이었지만 마냥 그리 행동해서 좋을 순 없었다.
하나라도 덜 다치는 것이 목표였다.
다행히도 귀한 인질을 잡을 수 있었으니 살아서 나갈 동기를 부여해줘야지.
계단에 철질려를 뿌려놓고 들어온 병사들까지 모든 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장연설을 할 타이밍이다.
정예군에게 해줄 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신 상민은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져 있는 엄청난 크기의 푸르고 투명한 옥을.
“이 옥은 너희들도 짐작할 수 있듯이 황상께 바친다면 하나의 도시를 능히 살 수 있을 정도로 값진 물건이다.”
그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온 청해 해군이 사람이라면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드러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자리에서 청해의 통령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이 보물을 황상께 바치고 얻은 재물들은 우리 모두 공정하게 나누어 가질 것이다. 본관의 몫은 챙기지 않을 것이니, 부디 내일 아침까지 버텨보자.”
콩키스타도르는 스스로의 탐욕에 화를 자초했지.
그들의 실수를 기억해야 했다.
“예!”
청해군은 상민의 말을 듣곤 우렁차게 대답했다.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의 재물, 포로를 구하고 살아남아 돌아갈 수만 있다면 더없이 행복한 결말 아닌가.
“평생 동안 술자리에서 말할 것이 생겼구만.”
긴장과 분노 대신 슬며시 자신감이 피어오르는지 넉살 좋은 한 병사의 말에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화약낭의 화약들을 능숙하게 소분했다.
줄어든 갑주와 무구들만큼 늘어난 화약은 그들의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었다.
“이들도 결국 야만스러운 종족일 뿐이다. 수많은 원주민들과 전투를 해 온 우릴 이길 수 없어.”
고참의 말에 병사들이 모두 호응했다.
* * *
상민과 본대가 한바탕 큰 소란을 끌고 사원을 점거하고 있을 때, 별동대는 어두운 도시의 밤거리를 쏘다녔다.
겁에 질린 자들은 허름한 가옥이나 건물 안으로 모두 들어갔고, 심지어는 도시 밖으로 달아난 자들도 많았다.
“쉿!”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마침 저 멀리 왕궁에서 수많은 전사들이 몰려왔다.
― 와아아아!
수많은 원주민 전사들이 함성을 내지르고 어딘가로 달려갔다.
하지만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도시의 그림자 사이로 숨은 고려인들을 발견하진 못했다.
진행 방향을 읽은 병사들이 우려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저들이 본대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명령 받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몰려가는 전사의 인파는 어마어마했지만 그들은 달리 할 수 있는 것들이 없었다.
총기와 화약도 모두 본대에 줘버렸는데.
― 삐이이
별동대 한 명이 활을 꺼내 효시를 쏘았다.
효시 소리가 나자 저 멀리에서도 그에 화답하듯 독특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새소리가 들린 곳에 도착하니, 과연 익숙한 얼굴의 원주민이 보였다.
“여긴가?”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지하감옥에 가두기에는 사람의 수가 너무 많았는지 모두가 지상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경계가 엄청나군.”
시설은 뭐 대단치 않았다.
기다란 대나무에 목 올가미가 걸린 포로들 사이로 치첸 이트사의 전사들이 왔다 갔다 한다.
제법 잘 지어진 원주민 수준의 수용소.
지키고 있는 전사의 수가 제법 많았다.
‘하지만 포로들의 수는 더 많지.’
보름달이 밝은 밤.
엄폐하기 위해 허리까지 오는 풀숲을 기어간 병사들이 얼기설기 노끈으로 묶어 놓은 담장을 자르고 침투했다.
그리고는 건장해 보이는 원주민들을 골라 몰래 풀어주었다.
풀려난 포로들이 다소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들을 쳐다보았으나, 이윽고 공통의 적을 인지했는지 두 눈이 활활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제각기 몽둥이와 창을 쥐고 나가면, 다른 곳으로 이동해 풀어주는 것을 반복했다.
마야판의 전사들이 해방되자 소란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그런데….
“적대적인 원주민과 풀어준 원주민을 어떻게 구분하지?”
“입과 귀에 달린 장식 모양으로 비교한답니다.”
“그걸 이 난리 통에 어떻게 봐!”
이트사의 전사들도 이상을 알아차렸는지 사방에서 전투 소리들이 들렸다.
별동대는 전쟁터를 피해 다니며 외곽을 돌다 드디어 익숙한 동포들의 얼굴을 만났다.
“구하러 와주셨군요!”
밉상인 쪽으로 익숙하다.
선원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그들을 껴안으려고 했지만, 청해군의 반응은 냉담했다.
심지어 병권을 풀어주기가 무섭게 한 병사가 그의 복부에 강력한 주먹을 날렸다.
― 커헉
“니 때문에 우리가 무슨 고생을 한 건지.”
먹은 것이 없어도 자꾸 속을 게워내는 병권을 바라보던 병사들이 그래도 지시에 따라 선원들을 챙겼다.
“이자들은….”
임무를 완수한 별동대가 대강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가려는데, 바다새의 부리가 매우 놀라더니 저 멀리 있는 원주민들을 가리켰다.
“왜 그러나.”
이번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듯 그가 자꾸만 손동작을 취해 보였다.
“데려가야 한다고?”
청해군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주변이 한창 난리다.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도 모르고, 저 풀어준 부족이 자신들에게 마냥 친절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고.
빨리 튀고 싶은데.
“받은 작전엔 그런 명령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바다새의 부리가 열심히 몸동작을 취해 보였다.
“우리를 도와준다고?”
잡혀 온 선원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반대했다.
그들은 툴룸의 전사들이 누군지 아는 눈치였다.
“저들은 우리를 납치한 인간들이오!”
“죽이기는커녕 같이 데려가자고? 이 미개한 원주민 놈이!”
바다새의 부리에게 발길질을 하려는 선원을 제지한 별동대의 대장이 잠시 고민하다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통령께선 최대한 이자와 협조하라 하셨지.”
원주민 놈들을 신뢰해서는 안 되었지만, 통령의 안목은 신뢰해야만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희들은 발언권 자체가 없다.
한 번 더 병권을 발로 찬 별동대의 대장이 부하들과 선원을 이끌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 * *
개천 42년(CE1317) 3월 15일
치첸 이트사의 전사들은 멀리서 활을 쏘고 창을 던졌다.
하지만 상대는 널찍하고 평평한 숲과 평원을 뛰어다니는 헐벗은 주변 부족이 아니었다.
무려 지상으로부터 30m 위에 자리 잡은 견고한 방진.
중력을 거스르며 쏘아진 투사체들은 이내 힘을 잃고 방패에 막혀 조그마한 흠집만을 내고 떨어졌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일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 으악!
계단에 잔뜩 깔아놓은 날카로운 철질려에 그들이 비명을 질렀다.
변변한 신발도 없는 자들이다.
밍기적대며 올라가지 못하는 자들을 질책하듯 위에서 불벼락이 떨어졌다.
― 타타탕
마야인들에겐 최초로 선보인 화약 무기.
이미 고려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무기가 되어버린 화기는 실제적 능력보다도 심리적 공포심을 훨씬 크게 자극했다.
원주민들은 귀를 막았다.
소리도 소리지만 매캐한 흰 연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총병 또한 앞이 보이지 않겠지만 어차피 물 반 고기 반이다.
대충 쏘면 알아서 죽어가니 기계적으로 장전하고 밑을 향해 쏘면 되었다.
계단에 깔린 따끔한 가시에 발을 헛디뎌 죽어간 자들의 희생 덕에 그들은 오직 중앙계단만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우르르 몰려 올라갔다.
반쯤 뛰듯이 올라간 그들.
하지만 철질려를 깔아놓지 않은 곳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 커헉
가슴팍을 걷어찬 거대한 인영.
그 힘이 실로 엄청나 일격에 늑골이 부서진 원주민이 폐가 찔렸는지 피를 한바탕 쏟으며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 무게에 올라오던 다른 자들이 넘어갔다.
인영이 섬뜩한 눈을 빛내며 오히려 계단을 내려갔다.
한 걸음.
치고 베고 자르고 도륙한다.
극도로 민감해진 감각이 이 미끌거리고 아슬아슬한 계단 사이에서도 완벽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금빛 비늘의 재규어의 앞에서 전사들은 공포에 잠식되었다.
밑에서 그 광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 나머지 올라오려는 파도는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날카로운 칼날 앞에서 숫제 오줌을 지린 그들이 가슴팍이나 목이 길게 잘려져 쓰러졌다.
자신이 화기의 도래와 냉병기의 끝자락을 유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속으로는 못내 아쉬워했던 상민은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오랜만에 즐기고 있었다.
‘모순적이군.’
무인으로서의 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운명.
그것을 부정하진 못했다.
자신도 도덕적인 인간은 아닌 것이다.
수많은 자들을 도륙하며 아흔한 칸의 계단 중 무려 절반 이상을 내려온 상민이 마침내 시신 더미의 끝에 도달했다.
가장 높은 곳으로 손을 들어 신전을 경배하는 듯한 포즈로 죽어있는 전사.
두개골이 부서진 것을 보니 낙사한 것 같았다.
‘아, 내가 아까 후려친 놈이 얘인 것 같기도 하고.’
사방의 계단 밑에도 엄청난 수의 시신이 쌓였다.
철질려들은 이미 누군가의 시신 속으로 파고들었는지 효과가 떨어진 모양.
상민은 다시 냉정을 되찾고는 꼭대기로 돌아왔다.
밤은 길었다.
새벽이 되려면 아직 서너 시간은 더 남아 있으려나.
“그놈을 꺼내 와라.”
두 번째 공격.
사원 주변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두 번째 부대의 전사들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한 첫 번째 전사들의 시신들을 보며 두려움에 떨면서도 계단을 올랐다.
물컹물컹한 시신들의 언덕을 밟으며 체감상으로 다소 낮아진 신전의 방벽에 도달할 수 있었던 그들은 방패벽 바로 앞까지 어찌 도착할 순 있었으나, 곧이어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가만히 있어!”
대제사장은 줄에 꽁꽁 묶여 청해군 손에 거칠게 다뤄졌다.
그는 찔러 들어오는 흑요석 창날이 자신을 해칠 뻔하자 히스테릭한 비명을 내질렀다.
신의 대리인을 죽일 뻔한 전사는 기겁하며 몸을 비틀어 겨우 창날을 치웠으나 덕분에 청해군의 발길질에 떨어져 저 먼 밑바닥에서 다시 올라와야 했다.
물론 머리부터 떨어져 그럴 수 있진 않겠지.
그리고 방진 안쪽에서 다시 총부리가 밖으로 튀어나왔고 쿠쿨칸의 도살자들은 총성과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안쪽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금빛 비늘의 맹수가 터벅터벅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전사들의 염원과는 반대로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괴물….’
[단죄의 밤, 사가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불렀다.
그날 밤 동안 마야인들은 공포에 잠겨 밖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날카로운 폭음과 비명 소리, 신음 소리, 이상한 것이 타는듯한 냄새.
쿠쿨칸의 사원에서는 마치 인세의 종말에 다다른 것마냥 끔찍한 소리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 횃불 없이도 주변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날이 밝아오자 상민은 도집에 도를 수납하고는 피에 젖은 머리를 훔쳤다.
쥐어짜 보니 손바닥에 뚝뚝 피가 한가득이다.
손가락 사이로 떨어진 핏방울은 바닥의 피 웅덩이에 모여 긴 물줄기를 이루었다.
계단의 굴곡마다 놓여져 있는 전사들의 시신.
그 밑에는 마치 끈적한 피가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단 하룻밤 사이에 청해군 백 명은 무려 천칠백육십 명의 치첸 이트사 전사를 사살했다.
* * *
다음 날 아침.
밝은 여명의 빛에 드러난 도시는 실로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공포심이 귀족들의 머리를 지배했다.
눈앞의 광경을 본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가득 쌓여있는 시체가 야트막한 언덕을 형성하여 신전의 경사를 가리고 있지 않은가.
시체들이 흘린 피는 평소 그들 부족이 의식을 치를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이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어찌… 저리 끔찍한 짓을….”
그들로서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행위였지만 청해군이 저지른 학살은 실로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마야판과의 전쟁에선 양측 모두 겨우 수백 명의 사상자만 생겨났을 뿐인데.
반면 저곳은….
시체의 산을 본 아하우가 마침내 고개를 떨구었다.
“저들에게 사절을 보내라.”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무력의 앞에서 그는 결국 무릎을 꿇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붉게 물든 신전의 계단으로 그 존재가 내려오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