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63화 (63/653)

옥의 왕국(지도 첨부)

더위.

습함.

그리고 그로 인한 자연스러운 짜증.

물론 함대에 탄 선원들은 이번 항해에 결과에 상관없이 귀환하면 수당을 쏠쏠하게 챙겨주기로 했기 때문에 그 자신만큼은 성질이 뻗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민은 정말이지 이곳에 떨어진 후 유래가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났다.

‘괜히 나대가지고 내가 가게 만드네.’

자신의 목적은 명확했다.

북쪽 카리브해에 거점을 만들 섬을 찾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이 ‘남고려대륙’ 동해안을 따라 차근차근 올라가야 했다.

그래야 고려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인력자원을 덜 들이며 탐사할 수 있었으니까.

유럽에 비해서 훨씬 좋은 환경이다.

망망대해에서 언제든지 죽을 환경과 마주할 수 있었던 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단지 좌측에 대륙을 끼고 움직이면 되었으니까.

게다가 연죽곶에 도달한 뒤 북서부로 향하는 길은 카리브해 쪽으로 향하는 연안류를 탈 수 있어 북상하기 쉬웠다.

가는 길엔 딱히 별일은 없었다.

“고래입니다!”

검은 등을 가진 혹등고래를 만나 반가워하는 선원들이 있었던 정도.

옛 반도의 동해안에서도 보였던 고래는 이곳 대동양에서도 가끔 보이는 동물이다.

덩치에 비해 유순하고 친절해 길한 동물이라 여겨졌다.

* * *

대륙에 가까이 붙은 섬, 말발굽 모양이라 하여 마제도(馬蹄島)라 붙인 섬에 정박하여 조금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일지를 작성하는 동안,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온 주형은 그에게 크고 독특하게 생긴 과일을 은접시에 올려 건넸다.

밖에서 선원들이 가져온 과일인 모양.

그것을 받으며 상민이 말했다.

“거북열매(龜果, 귀과, nanas)?”

“예.”

거북열매.

드물게 순우리말로 붙인 이 과일의 생김새는 독특했다.

거북이 등껍질을 두른 단단한 껍질로 보호받는 과실, 머리에는 뾰족뾰족한 잎들이 나 있다.

물론 그에겐 익숙했다.

파인애플.

영미권을 제외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본래의 이름과 비슷한 아나나스(Ananas)라 부른다는 과일, 하지만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한국에서도 파인애플이 더 유명했다.

마찬가지로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선 나나스로 부른다지만 고려인들 사이에선 거북열매라 불리고 있었다.

“고맙군.”

예리한 소도로 능숙하게 그것을 잘라먹은 상민이 씩 웃었다.

칠백 년 전의 파인애플도 맛은 있었다.

“선원들은 꼬박꼬박 챙겨 먹는가?”

“물론입니다.”

거북열매는 약간 새콤한 맛이 있으나 대체적으론 당도가 높다. 선원들이 싫어할 리가 없었다.

‘정화의 대선단은 선실에서 콩나물을 길렀다지만. 대체 어떻게 수경재배를 할 만큼 맑은 물을 상시로 공급했다는 걸까.’

어찌 조금 믿겨지지는 않았다.

중국인 특유의 허풍이라는 생각이 조금은 들었다.

선내의 덥고 습하며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물도 빠르게 쉬었다.

마실 수는 있는데, 발아하는 과정에서 자꾸만 대두가 썩어버렸다.

그리고 맑은 물을 구하고 재빨리 수경재배를 시도해도 상당한 부피의 물을 요구하는 데다가 재배한 채소가 금방 썩기로는 두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으니 그 쉰 냄새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고려인으로서는 그냥 어디 정박해서 흔하게 널려 있는 거북열매를 따서 먹으면 끝.

괴혈병과 각기병은 적어도 이 근방을 항해할 때는 걱정 없는 질환 중 하나겠지.

‘질병에 대한 교육도 해놨으니.’

단 것이 입에 들어오자 짜증이 다소 가라앉았다.

상민은 선실에 비치된 독한 술병을 들어 보이며 주형에게 말했다.

“한잔하겠나?”

“통령께서 주시면 영광이지요.”

선내에서 음주는 필요악이다.

근무를 서지 않는 이상 긴 항해에 할 것이라곤 놀음패(화투와 비슷했다)와 술에 꼴은 채 선실에 처박혀서 자는 것밖에 없었으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기계부품은 아니라 달래줘야 하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그에게 술을 따라주려는 사이, 밖에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견시수가 뭔가 발견한 모양이군.”

일말의 희망을 안고 나간 둘은, 저 멀리 한 척의 익숙한 배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주먹을 쥐었다.

다행스러웠다.

이 항해가 곧 끝날 수도 있다는 의미.

그들도 자신들을 발견했는지 서둘러 이곳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그들의 갑판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뭐야.’

꼬질꼬질한 선원들.

알고보니 그들은 항명의 항명을 한 선원들이었다.

길어지는 항해와 본국의 명을 거스르는 것에 불만을 표한 선원들을 죄다 한 배에 몰아넣고 식량을 뺏은 후 본국으로 귀환시키는 처사.

사실상 상민의 함대가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바다를 떠도는 유령선이 될지, 원주민들의 창에 배가 뚫려 죽어갈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구원받은 사실에 펑펑 울고 있었다.

“오 부처님이시여! 천지신명이시여!”

자신의 배 갑판에서 연신 다른 선원들을 껴안던 그들.

책임자를 불러 물어보았다.

갑판장 출신의 그는 얼굴에 피곤함과 굶주림이 가득했으나 그보다 더 큰 분개를 숨기지 못하고 그들의 행선지를 고자질했다.

“그대들의 항명죄는 지워주겠다.”

애초에 제독과 선장들이 잘못 판단한 것이니 이들의 항명은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넉넉하게 싸 온 식량을 떼어 준 뒤 길잡이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본국으로 보낸 상민은 길잡이에게 그들의 항로를 듣고는 입을 벌렸다.

가면 안의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주형은 상민이 경악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깟 옥이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거기까지 가는 것이냐.

상민은 아무 말 없이 그의 항로를 계산하여 손가락을 더듬거리며 뻗었다.

그 끝이 위치한 곳은.

거북열매를 찔러 먹느라 끝이 끈적해진 소도를 쿵 하고 탁자에 찍어버린 상민이 미간을 움켜쥐었다.

인류사 최악의 문명들 중 하나로 꼽힐 만한 문명들이 번성했던 곳.

메소아메리카.

* * *

고려 본토 출신 송병권(宋秉權)은 촉망받는 뱃사람이었다.

옛 남쪽의 끝에 도달했던 함대의 일원이기도 했으며, 노련한 뱃사람이라 많은 탐사선에 올라 멀리까지 간 사람 중 하나였다.

이제는 상관이 된 윤주형의 동료였기도 했다.

그 마지막 사실은 그에게 항상 자격지심으로 작용했다.

자신의 생각엔 스스로가 더 나은 항해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주형이 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자가 되었단 말인가.

심지어는 가장 최근에 출판된 ‘항해론’도 자신에게 집필의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유명한 책에 실린 뱃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영광을 맞이했다.

‘탐험가는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청해의 대학에서 항해사를 꿈꾸는 자들에겐 자신의 이름 따위는 어느 순간부터 잊혀져 있겠지.

그는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물론 자신도 가끔은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조연이었다.

본래 이 일에 내정된 자가 임무수행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정말 하늘이 내려 주신 기회로 청해의 북부 탐사함대를 이끄는 제독이 된 그는 약속된 지점에서 돌아오지 않고 더욱 북쪽으로 향했다.

주연이 될 기회.

물론 처음에는 멀리 갈 생각이 없었다.

‘통령께선 이 바다에 수많은 섬이 있다 하셨지.’

어찌 그 사실을 알고 계시는진 모르겠지만.

청해의 관습으로 인해 섬에는 그 발견자의 명을 딴 도시가 세워지기 마련.

병권은 첫 번째 섬에 깃발을 꽂으며 역사 안에 영원히 남을 생각을 꿈꿨다.

사실 그 목표는 거의 이룬 셈이었을지도 몰랐다.

첫 번째 섬에 상륙하고 주변을 둘러보다 익숙한 원주민과 조우했다.

“투피족이다! 모두 죽여라!”

투피어를 많이 접한 통역은 살짝 미묘하게 다른 것을 눈치챈 것 같지만 어찌 되었든 비슷한 자들.

뱃사람들에게는 악연으로 묶인 자들이다.

원주민 숫자도 많지 않아 전투는 손쉽게 끝났다.

무기의 차이도 컸지만 전술의 차이도 컸다.

약 반년간의 전투교육을 필수적으로 이수하게 한 뒤로 선원들의 개개인의 근접전투능력과 전술은 크게 향상되었지.

이런 잡스러운 원주민들과 싸워 질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았다.

병권은 시신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그 추장의 목에 걸린 보석을 발견했다.

그의 눈에 영롱한 청옥이 보였다.

가죽끈을 뜯어내고 찬찬히 살펴보니 상당한 상등품의 흠결 없는 청옥이다.

‘이 조그마한 무리의 추장이… 이 정도 품질의 비취(翡翠) 목걸이를 가지고 있다?’

이 부족은 동예의 근처 원주민, 즉 투피족과 같은 말을 공유하고 외견도 비스무리해 같은 족으로 분류되는 자들.

언어의 교류에는 딱히 문제가 없었다.

투피어를 할 줄 아는 동예 출신 통역이 제독의 닦달에 살아남은 원주민을 끌고 와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것들을 어디서 가져 왔는가?”

“북…… 북서 쪽에서… 이 땅으로 쫓겨온 사람들이 가져왔다 합니다. 아주 먼 왕국… 옥으로 가득한 왕국… 무시무시한 왕국…?”

통역이 꽤 더듬거렸다.

말의 어휘가 꽤 다른 모양.

여러 단편적인 단어들 중 병권의 귀에 들어온 것은 옥으로 가득한 왕국 단 하나였다.

‘옥으로 가득한 왕국?’

하늘이 준 기회였다.

동양에서 최고의 보석 중 하나로 꼽히는 옥은 이 대륙에서는 쉬이 발견할 수 없는 광석 중 하나였다.

옛 중원인들의 옥 사랑은 유별났지만, 고려에서도 그 가치는 절대 낮지 않았다.

특히 옥새(玉璽)라는 표현에도 알 수 있듯이 특출난 옥은 금보다 더 큰, 정말이지 엄청난 권위를 상징했다.

대대로 금관과 귀걸이, 비녀, 기타 수백 가지 장신구들에 쓰이는 보석이기도 했고.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옥을 황제에게 진상한다면,

자신은 어쩌면 어마어마한 자리에 올라가거나 막대한 금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병권은 온몸을 잠식하기 시작한 탐욕을 물리치지 못했다.

일신의 선동하는 재주는 있는 편.

그는 선원들을 불러모아 일장연설을 하며 이 인생 한 방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역설했다. 뱃사람 특유의 한탕주의가 자극되니 수많은 선원들이 그에 호응했다.

물론 예외는 있기 마련.

멍청한 놈들과 겁쟁이 같은 놈들은 죄다 한 배에 태운 뒤 식량을 빼앗고 밑으로 내려보냈다.

병권은 이미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시큰둥하게 쫓겨 떠나는 함선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살아남겠지.

아님 말고.

붙잡은 원주민 놈은, 투피족과는 확실히 달랐다.

언어도 살짝 달랐고 그들이 가지지 못한 꽤 대단한 항해기술을 가지고 있는 모양.

카누 한 척으로 이 넓은 바다를 쏘다니는 이 종족은 지네들 스스로 칼리나(Kalina)라고 불렀다.

바다에서도 용케 방위를 잡는 그 칼리나인 한 명을 끌고 얼마간 더 항해를 하니, 곧 거대한 반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칼리나 인이 자꾸만 비명 같은 소리를 내었다.

“더 이상 가면 안 된답니다.”

“대체 왜?”

“그자들은 자비…? 자비가 없고 흉폭하며 야만스럽답니다.”

“니들도 충분히 흉폭하고 야만스럽다고 해.”

니들도 식인종이잖아.

뭘 새삼스럽게.

겁에 질린 칼리나인이 자꾸만 경고했으나 병권은 그것을 한 귀로 흘리며 저 멀리 울창한 열대우림의 해변 사이에 거대한 길이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마침내 고대 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

숲에 일정한 방향으로 나 있는 길.

나름대로 의복을 입은 인간들.

해안가에 어설프게나마 지어진 집들.

그리고 저 멀리 어렴풋하게 보이는 굉장히 특이하게 생긴 건축물들.

그것들은 높은 나무들 위에 보일 만큼 거대한 건축물이었다.

병권은 망원경을 내려놓고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가 옥의 땅을 발견한 첫 번째 사람이 된 것이야!”

옥이 넘쳐 흐르는 대지.

그는 분명히 영광의 이름을 남길 수 있고, 거대한 돈을 쥘 수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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