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예
대승을 거둔 서고려군과 반군은 왕지와 안승회를 포로로 잡고 개선했다.
도성에는 누가 봐도 끌려 나온 것으로 보이는 백성들이 꽃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표정이 안 좋은 이유는 패전국 특유의 모멸감 덕분이겠지.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들은 서고려군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심으로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던 분쟁이 끝나는 것 자체를 다행으로 여겼다.
군벌들은 왕지에 의해 이미 탈탈 털린 상태.
최후의 군벌 이제근이 모든 군권을 장악하는 것은 불과 몇 개월 걸리지 않았다.
왕지와 어린 태자 왕서에겐 카사바에서 추출한 독을 이용한 사약이 내려졌다.
둘이 그것을 들이켜 죽는 모습을 본 이제근이 희열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드디어 그가 보위에 오르는 순간이다.
왕씨는 드디어 그 명맥을 다했다.
왕지와 왕서, 태조의 11대손과 12대손의 죽음.
마침내 용손십이진의 고사가 현실로 된 것이다.
향남작제경(남쪽에 황제의 도시가 세워진다는 것)은 창양을 뜻하니 자신을 가리키는 바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십팔자위왕은 이루어졌다.
민심은 아직 흉흉하다.
근왕파는 아직 조금 남아있다.
사방에선 아직도 투피족들이 그들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다.
제근은 무시무시했던 상국의 군대에 잔뜩 겁먹었지만 오히려 안도하는 마음도 들었다.
자신이 조금 실책을 저질러도 황상께서 보살펴 주시리라.
그날 밤 연회가 열렸다.
“정녕 황제(皇弟)께서는 군무의 천재라 하실 수 있겠습니다!”
창양 숭무감에서 파견 나온 장수들이 해강을 칭송했다.
상민이야 한 발짝 물러나 있었고 제위를 물려주며 승천한 것으로 되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아는 이는 원정군에서도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그 공은 온전히 해강에게 넘어오게 되었다.
그는 둔한 신경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버지의 공을 뺏는 아들이 되기는 싫었는지 손사래를 쳤다.
“아니오, 이 모든 것이 선대제께서 총통위를 설립하시며 만드신 전술이니 가장 높이 칭송할 분은 오로지 선대제 폐하일 뿐이겠지요. 두 번째는 병사들을 조련하여 이 미흡한 아우에게 맡기신 형님 폐하의 은혜로움이니 미력한 나는 오로지 이곳까지 정병들을 무사히 데리고 온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과연. 겸손함까지, 정녕 제국의 홍복이시옵니다.”
숭무감은 황상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한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어, 그러한 겸양의 말에 더더욱 해강의 인덕과 형제의 우애를 칭송했다.
곧이어 오늘 일어난 전술에 대해 시끌벅적하게 토론이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해강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태원의 궁궐 후원을 거니는 상민을 찾아 그에게로 다가왔다.
* * *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해강은 아쉬운지 자꾸 말을 붙였다.
비슷한 덩치의 두 사람은 겉보기에는 형과 동생처럼 보이기도 했고, 같은 또래로 보이기도 했다.
“적어도 창양까진 같이 가시지요.”
“내 무엇 하러 거기까지 같이 가느냐. 할 일이 많다.”
이미 내려온 몸, 게다가 훌륭한 통치자의 치세에 자꾸만 간섭하는 것은 좋지 못했다.
아버지의 단호한 의지를 읽은 해강이 절로 시무룩해졌다.
“동쪽에서도 리체와 과트라체의 분쟁이 격화되고 있다 들었다.”
“예. 그러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창안하신 전술로 그들을 쉬이 격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총기병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병과이다. 그것만을 맹신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너는 또한 황상에게 여쭈어 중기병의 편성을 허락받아라.”
“…알겠습니다.”
완벽한 전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장의 상황은 유기적이니 지휘관은 항상 그것을 파악하고 흐름을 쫓아야 한다.
더 나은 전술은 오직 병기의 우수함에 달려 있으니 병기를 개선하고 새롭게 발명하는 것에 게을러져서는 아니 된다.
역시나 훈수충, 그 성격이 어디 갈쏘냐.
한동안 아버지의 잔소리를 듣던 해강의 어깨가 푹푹 떨어지자 상민이 드디어 잔소리를 그만두었다.
마침내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한 해강이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아버지, 이 땅의 초원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뜬금없는 말에 상민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
“초원 서쪽에서 해가 진다면, 다음 날 초원 동쪽에서 해가 뜨기 마련이라고요.”
자신은 저 비슷한 말을 옛날 미국 영화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
해강은 묵묵히 그를 쳐다보는 아비 앞에서 말했다.
“아버지, 언젠간 아버지를 제외한 자식들 저와 형님을 포함한 형제들도 죽기 마련입니다.”
그래.
그래, 사랑스러운 내 아들들아.
상민은 또 한 번 찾아올 절망의 파도 앞에서 비탄 섞인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나 해강은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찾아오는 인연을 피하지는 마십시오.”
그의 눈에는 초원을 뛰노는 말의 생동감과, 역동성이 가득한 싱그러움이 보였다.
“아직 다가오지 않는 미래의 일을 지레 걱정하며 피하는 것은 아버지와 같은 위대한 전사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해강이 어색하게 코를 훔치며 진심을 말하는 것에서 상민은 슬쩍 웃었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다행이구나.
첫째도, 둘째도, 막내도.
자식 농사는 참으로 잘 지었다.
“알았다. 잘 지내거라.”
“예.”
* * *
태원 어딘가.
깊은 지하 비밀감옥은 물이 뚝 뚝 떨어지는 습한 환경에, 이름 모를 다리 많은 벌레들이 사방을 기어다니는 끔찍한 환경을 자랑했다.
그곳을 횃불 하나에 의지해 걸어가는 늙은 여인, 왕영은 이윽고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해 두꺼운 철문의 창을 열었다.
그 안에선 지독한 냄새와 함께 한 노인이 다리에 구속구를 차고 앉아 있었다.
온몸에는 더러운 이물이 묻어있다.
한때는 고귀했던 신분이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총기 넘치던 자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상대를 경쟁자로 지정하고 심적으로 무너져 갔다.
연속된 실패와 그릇된 판단.
결국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이리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 모습은 전혀 경건하지도, 엄숙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추하기만 할 뿐.
“흐흐흐”
실성한 듯 웃는 노인은 열린 창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아내를 잠시 끔뻑이며 쳐다보다 이윽고 거칠게 달려들었다.
물론 발목을 잡는 족쇄에 저지당했지만.
족쇄에 살이 쓸려 다시금 바닥이 붉게 물드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연종은 으르렁거리며 왕영에게 침을 뱉었다.
왕영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고풍스런 옷 소매로 그것을 닦아내었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당신의 첫째 아들은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손자까지요.
그녀의 말에 연종은 순간 격노하여 두꺼운 문을 두들겼으나 손에 상처를 입는 것 외엔 달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제근이가 왕위에 올랐지요.”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피로 물든 주먹의 힘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참 단순한 사람.
참 멍청한 사람.
“드디어….”
평생의 숙원, 가문의 왕조를 여는 것에 성공한 연종이 제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씨를 받은 왕지는 사실을 알려준 후에도 성을 바꾸는 것을 완고하게 거부했고, 오히려 그동안 자신을 도와주던 친아버지를 과감하게 숙청했다.
연인 황후 임씨와 함께 반정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끝내는 수포로 돌아가 결국은 이런 처지가 되었다.
자신이 이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아들 제근은 영원히 모를 게지.
연종이 철저하게 숨긴 사실은 오히려 그에게 화살로 돌아왔다.
하지만 연종은 이 모진 옥생활에도 숙원이 마침내 달성된 것을 듣고 저렇게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오히려 다행일지 몰랐다.
그의 성씨가 국성이 되었으니까.
다른 면으로 대단한 인간이다.
“그래도, 그래도 내 아들이 지고한 자리에 올랐구나.”
연종은 더러운 팔뚝으로 눈물을 닦으며 침상에 앉았다.
그를 지탱하는 것은 오직 하나, 가문의 숙원일 뿐이었으니.
그것을 달성한 이후 노인은 갑자기 마음이 풀렸는지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왕영은 한 줄기 감정도 남아있지 않는 냉막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아내와 붙어먹은 남편.
그의 몸에 붙어있는 저 진흙과 변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저 몸 안에 붙어있다.
이윽고 그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커져 끝내는 연종조차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왕영은 그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말을 던졌다.
“과연 제근이….”
연종의 눈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당신의 아들일까요?”
― 쾅쾅쾅
― 으아아
닫힌 철창 사이로 금속 문을 두들기는 소리, 그리고 분노와 절망감이 뒤섞인 외침을 뒤로하고 왕영은 후련하게 웃으며 계단을 올랐다.
* * *
왕으로 즉위한 이제근은 배를 타고 원정군과 함께 귀환하여 창양에 와 해진을 만났다.
번국이 황제국에게 하는 예법, 다섯 번 절하고 세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의식(오배삼고지례(五拜三叩之禮))을 행함으로써 동고려의 황제국이라는 명칭은 역사 속으로 소멸했다.
“일어나시오.”
마지막 조아림에서 해진은 직접 옥좌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며 일으켜 세웠다.
“우리가 비록 시작이 좋지 못했으나, 지금부턴 좋은 세월을 같이 보낼 수 있기 마련이오. 그대와 짐은 옅게나마 전조의 피가 같이 흐르고 있으니, 짐은 그대를 신하로서가 아니라 또한 아우로서 대우할 것이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해진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만찬으로 치욕스러운 관습을 치른 그를 위무했다.
만찬 덕분인지 든든한 뒷배를 얻었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제근의 표정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해진은 공식적으로 동고려의 멸망을 선언하였으며, 그 땅에 새로운 이씨 왕조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국명은 내부의 토론 결과 옛 고씨 고려 때 존속하였던 동남쪽의 동예(東濊)의 국명을 하사하였고, 제근은 이를 별문제 없이 받아들였다.
동예의 국가 편제와 호칭은 제후국의 편제로 고려보다 한 단계씩 낮아졌으며 영토 또한 남쪽으로는 뻗어 나갈 수 없게 서로 확약을 지었다.
“창수(창강)의 지류는 모두 상국의 것임을 따르겠나이다.”
제근은 동예의 팽창정책을 북진으로 삼았다.
오랜만에 안정을 찾은 동예는 천천히 내란과 전란의 후유증을 수습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상민은 청해로 가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전인미답의 휴양지처럼 생겼던 이 거점은 맨땅에 조그마한 항구밖에 없었지만 동고려 멸망 이후 이리저리 많은 유민들이 몰려들어 자신도 놀랄 정도로 유례없이 그 규모가 증가하기 시작해 나중에는 수도를 제외한 제국의 4대 도시에 들어갈 정도로 급격히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이 아름다운 휴양지가 이 시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던 자신은 또 팔을 걷어붙이고 세밀하게 심시티를 해야 했다.
덕분에 빼어난 해변과 날씨 그리고 여러 자연환경은 아름다운 항구, 질서와 균형 있게 조성된 시가지와 함께 조화를 갖추게 되었고 청해는 제국 면류관의 가장 아름다운 옥구슬이라 칭해지게 되었지.
당연하게도 이러한 발전의 배경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드디어 찾아온 평화로 인해 무역이 매우 성행했다.
무역은 두 나라 간의 부족한 점을 서로 메꿀 수 있는 큰 기회였다.
자신이 훈요 128권에 세 권을 할당하며 강조한 무역은 두 국가가 서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다.
대학 생활 내내 경제학도로서 배웠던 전공책의 내용을 조금 까먹었으나 경제학의 기본적 개념을 모를 리가 만무했다.
비교우위와 절대우위.
동예에서 만든 면포는 고려에서 상당히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 땅의 목화, 즉 육지면이라 붙인 목화 자체는 고려의 강남 대평원과 건양 평야에서도 자라긴 했으나 열대기후에는 무척이나 잘 자랐다.
물론 약간 찝찝한 면은 있다.
목화 자체가 굉장히 노동집약적인 작물이기 때문에 품이 많이 들었고 동예는 그 노동력을 잡아 온 투피족을 ‘플랜테이션’ 농법으로 착취하며 목화를 생산했다.
‘…….’
딱히 바람직한 노동환경은 아니었고 인권적 문제도 있었지만, 저게 그나마, 진짜 그나마 자비로운 처사였다.
제근은 처음엔 관습적 식인에 대한 혐오감에 그 투피족을 모조리 절멸시켜 땅에 파묻으려 했었으니까.
내정간섭까지 할 이유는 없었던 상민은 그의 선택을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남의 나라다.
고려는 자신, 태조의 유훈 아래에서 원주민들과 강력한 동화정책을 하고 있었지만 저곳은 아니었다.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 이득은 고려도 누리고 있었으니.
고려의 경우, 거대한 곡창지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곡물들은 매년 고구마와 카사바만을 붙잡고 불규칙한 기근으로 인한 굶주림과 싸워야 했던 동예인들에게 한 줄기 희망과 같았다.
식량뿐만 아니라 이제는 철기, 유리, 도기, 목공품, 종이, 염료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려가 절대적 우위를 지니고 있었기에 여러 물품 또한 동예로 수출되었다.
‘동예는 순전히 면포 셔틀이네.’
그 중간지대에 위치한 청해는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을 공식적으로 담당하게 되었으며 수입의 일 할을 고려의 재부에, 다른 일 할을 황실에 가져다 바쳤다.
해진은 아버지가 만든 도시이자 황실의 돈줄인 청해에 공식적으로 정치적 자치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야인과 해적에 관한 자체적인 방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일정한 숫자의 병사들을 보유하는 것을 허락했다.
제국 최초의 자유도시로서의 태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