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9화 (59/653)

전쟁의 패러다임

야트막한 산을 끼고 지은 성.

도망쳐 온 이 땅은 사방이 평야인 아랫동네에 비해 고저차가 꽤 있었다.

그 지리적 우세함을 이용하여 지은 성벽은 제아무리 그것이 급조된 성벽이라 해도 상당한 방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저들이 만든 공성무기에 의해 곧 없어질 것이었고.

- 쿵

무거운 소리를 내며 날아온 돌덩이들은 성벽에 한 번 맞을 때마다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안 그래도 견고함과는 거리가 먼 성벽이다.

마른 흙벽이 갈라져 튀고, 그것을 허리숙여 피하는 병사를 보며 반군 대장 이제근이 소리를 질렀다.

“조금만 더 버텨라! 원군이 온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는 말과는 달리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상국의 지원은 대체 언제 오는가?’

약간 여유를 부리던 공성군의 행동이 갑자기 빨라졌다.

투석기를 만들고는 본격적인 공성 절차에 돌입한 동고려군들은 수많은 투피 노예병을 앞세워 돌격을 시도했다.

그리고 첫날에 거의 성벽이 떨어질 뻔 한 제근은 다음날이 되기 전 자신의 가솔들에게만 일러 짐을 싸게 해 도주할 준비를 마쳤었다.

그에겐 이 조그마한 곳의 안위와 휘하의 병사들보단 자신과 자신의 가문이 더 중요했다.

“그분은 틀림없이 오실 게야, 네 자리를 지키거라.”

오히려 이제근의 어머니 왕영이 더 대범한 모습을 보이며 성 안의 항전을 독려하자 제근의 행동으로 떨어진 사기가 다소 회복되었다.

“염병할!”

제근은 화를 내며 자신의 짐을 풀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늙은 어미를 버리고 갈 만큼 모질지는 못했기에.

“사흘, 딱 사흘만에 오지 않는다면, 어머니를 뫼시고 탈출하겠습니다.”

--

“뭐라?”

왕지는 전령이 가지고 온 소식을 듣고 몹시 당황했으나 애써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상상도 못한 정체.

서고려군은 만동강을 통해 마치 이곳을 제 집 마냥 위풍당당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왕지는 곧바로 안에 있는 놈들이 외세의 힘을 빌려 반역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나 당장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구의 방어시설은?”

전령은 고개를 조아렸다.

“적들이 괴상한 신무기를 이용해 진을 공격하는 것이 제가 본 마지막 장면입니다.”

전령은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그 방어시설의 최후는 굳이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신무기?”

그는 그 신무기를 자세하게 묘사하라 했으나, 전령의 말은 어딘가 횡설수설하는 면이 있었다.

불기둥이 어쩌고 천둥이 어쩌고 연기가 어쩌고.

공포심에 절여진 것 같은 모습에 제대로 된 정보라 파악할 수 없었던 왕지가 머리를 감싸쥐었다.

그의 머리도 복잡하게 얽히고 있었다.

”만동강 하구에 서고려군의 함선이 보였다 하니, 이곳까지 오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입니다.“

안승회의 말에 왕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평을 하고 공포에 떨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이틀, 이틀 동안 공세를 퍼붓고도 떨어지지 않는다면 물러나 전열을 재정돈해 저들을 맞이해야겠다.“

휘하 장수들이 서둘러 군막을 나가며 고함을 지르는 것을 들으며 왕지는 엄습해오는 불길함에 잠시 몸을 떨었다.

--

이제는 오히려 공성군이 다급한 상황.

필사의 공격을 감행한 그들은 다소 희생을 감수하고 강공을 거듭했다.

결국 요새의 성문과 방벽은 계속되는 투석기의 공격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마지막 공격이 나무를 뚫고 들어가며 둔탁하게 파열음을 내자 작지 않은 구멍이 보였다.

”돌격하라!“

여러 군데 구멍이 숭숭 뚫린 성벽을 타고 넘어간 동고려군은 닥치는 대로 적을 베어넘기기 시작했다.

안쪽은 이미 군기가 와해된 적병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승리가 눈앞에 있다! 모두 공격하라!”

그래도 제 목숨 소중한 것을 아는 이제근이 시가지에 수레와 장애물들을 쌓아 올려 결사로 항전하자 진압은 진전되지 못하고 교착되는 순간이 생겼다.

그 짧은 시간.

화공으로 저들을 모두 태워버릴 준비를 하던 왕지의 눈에 저 멀리 떨어진 만동강에 검은 점들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배.

이곳에서도 돛을 매단 기둥이 보일 정도의 배면 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그 옆 자그맣게 보이는 초마선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내리는 것이 보였다.

왕지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뒤섞인 고함을 지르며 들고 있던 불진을 패대기쳤다.

안승회는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사전에 정해진 대로 공성군을 물렸다.

이대로 진압을 강행한다면 이 중구난방인 전열로 저 강대한 적들을 맞이해야 할 지도 몰랐다.

”그만! 요새에서 물러나라!“

재상의 명령을 받은 전령들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명을 전파하자 다 잡은 물고기를 놓아주어야 하는 병사들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밍기적거리는 자들을 엄히 문책하여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안승회는 왕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왕지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원군 숫자를 헤아리다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병력도 노병 포함 거의 오천에 육박할진데 저들은 기껏 이천.

공성전과 방금의 전투로 엄청난 손실을 입은 성 내의 반적들은 사실상 세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숫자였기 때문에 이리저리 봐도 자신에게 수적 우위가 있었다.

왕지는 혹여 마지막 요소를 물었다.

”적장이 누군가?“

”해강이라고, 해민의 말자(末子)랍니다.“

”말자? 나이가 어떻게 된다더냐.“

”스물이 갓 넘었답니다.“

왕지는 피식 웃었다.

어린 놈이군.

제대로 된 전쟁을 겪지도 않은 새파란 애송이일 것이 분명하니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왕지는 다시 자신감을 찾았다.

지휘관이 두려움에 질려봤자 전투에는 오히려 폐가 된다.

천 명의 보병과 천 명의 기병.

보병은 나름대로 긴 창과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이 군기가 엄정해 보였으나, 기병은 대열이 흐트러진 것이 멀리서 보기에도 한심해 보였다.

왕지가 땅바닥에 떨어진 불진을 다시 건네받고는 그것으로 적들의 기마대를 가리켰다.

”전쟁이라는 것이 결국은 병사들의 양과 질, 그리고 지휘관의 훌륭함으로 결정되는 것인데, 저들에게 어찌 승산이 있겠는가!“

한눈에 봐도 정련된 찰갑이 아닌 개성넘치는 갑옷을 입은 서고려의 기마대는 국가의 체급에 비해 조금은 어설퍼 보였다.

오와 열을 맞추어 질서있게 행군하는 보병들 옆에 있어서 더 비교가 잘 되는 것도 있었고.

병사들도 그것을 바라봤는지 나름대로 평정심을 되찾았다.

왕지가 말한 세 가지 요인.

그 중 질은 잘 먹고 훈련을 더 잘한 서고려군들이 좋을지 몰라도 긴 항해와 낯선 환경에서 오는 피로감들은 그들의 사기마저 떨어뜨리고 있겠지.

공을 세울 냄새 하나는 잘 맡는 장군 모속방이 도를 움켜쥐며 호기롭게 나섰다.

”저놈들이 주제를 모르고 구태여 먼 거리를 배 타고 이 땅에 도착했으니, 수급만을 베어 가볍게 돌려보내는 것이 도리겠지요. 소장에게 선봉에 설 기회를 주시옵소서!“

왕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천의 기병을 주어 적의 기마대에 맞설 우익을 담당토록 하고 자신은 이천의 고려군과 이천의 노예병들로 주공을 구성했다.

동고려군은 다시금 견고하게 진형을 짜 거대한 벌판에서 서고려군들을 마주보게 되었다.

근데 저놈들 이상하다.

- 척척척

북인지 뭔지 이상한 박자에 맞추어 진군하는 서고려군은 편제가 상당히 많이 바뀌어 있었다.

한눈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맨 앞에 나온 자들은 후열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 뻔히 보였는데도 길이가 작은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고, 그 뒤에 상당히 독특한 철갑옷을 입고 있는 방패수, 그리고 장창병들이 보였다.

장창은 고려에서 쓰는 창보다 훨씬 길어 거의 반절은 더 길이가 증가한 듯 했다.

그리고 맨 뒤, 이상한 금속 통과 나무 수레같은 것을 끄는 자들이 보였다.

‘어리석은 놈이로다.’

대기병의 공격은 강하고 견고할테지만, 창이 무겁고 둔해 전열이 붕괴 된 이후 근접전에서 그리 좋지 못했다.

또한 결정적으로 궁병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의 열대 날씨는 고약하여 자신들도 궁병의 운용이 꽤나 제한적이었으나 그래도 지금은 하늘은 맑다못해 쨍쨍한 상황.

급작스럽게 들이치는 비구름이 오기 전에 자신이 먼저 화력을 투사하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조금만 더...!’

화살의 사정거리에 이를 때까지 나아간 주공은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적의 주공을 바라보았다.

”저것들이 대체 뭘 하려고...!“

- 콰앙

갑자기 적의 후미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뭉게뭉게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분명히 자신들의 공격에 의해 벌어진 일은 아닐 테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아군의 기병대를 찾았으나, 곧이어 바로 앞에서 벌어진 참사에 다시 눈을 돌려야만 했다.

- 으아악!

바로 앞 대지의 붉은 흙들이 동시에 거칠게 튀었다.

전열에 서 있는 수많은 병사들의 갑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박히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목과 사지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자들이 보였다.

울컥이며 복부에서 피를 뿜어내는 병사는 원망섞인 눈을 하고 천천히 고통을 느끼며 죽어갔다.

붉은 대지는 그보다 더 붉은 피를 머금기 시작했다.

선두에서 먼저 화살을 쏘려 나아갔던 궁병 대열이 큰 피해를 입었다.

왕지는 이를 악물었다.

그 굉음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도 전장을 보는 눈은 어느 정도 있는 자였으니.

‘원거리 무기에 다수를 살상할 수 있는 무기.’

빠른 판단에 왕지는 오히려 돌격을 독촉했다.

”이곳에 있다간 저것의 공격에 당할 뿐이다! 공격하라! 저들의 대열에 파고들어야만 너희들이 살 것이다!“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돌격할 때도, 다행스럽게도 폭음은 다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적들의 선두에 선 자들이 작은 막대기를 들었다.

몹시 긴 창에 비해서 짧다는 것이지, 저것의 길이도 객관적으로는 꽤 긴 모양인데.

단창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이 그 창을 겨누자 그 끄트머리에서도 아까와 비슷한, 더 작고 날카로운 폭음이 들렸다.

- 타타탕

그 굉음을 시작으로, 몹시 요란스러운 콩 볶는 소리같은 소음이 그 막대기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순간 앞열의 병사들이 가슴과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 크헉

턱을 맞은 병사는 날아간 하관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전열을 흐트러트리고 죽었으며, 병사들은 연속되는 굉음과 함께 곁에서 죽어 나자빠지는 전우들을 보며 순식간에 엄청난 공포에 빠졌다.

”침착하라!“

그것은 왕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나, 경험이 많은 지휘관답게 그렇게 많은 손실이 일거에 발생하진 않았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번 것은 아까에 비해 요란스럽지만 실속은 없는 공격이다! 방패를 앞세워 저들의 공격을 막아라!“

물론 그 나무 방패는 화승총도 막지 못하는 주제에 플린트락 머스킷을 막을 리 만무했고 터져나가는 목재의 파편 너머로 신음성은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지 잠시의 공백.

왕지는 이를 악물고 진격명령을 내렸다.

미지의 무기에 대한 분석은 나중에 해도 될 일. 지금은 어서 저들과 닿아 수적인 우위를 점하는 수 밖에.

결국 어찌어찌 전열은 앞에 당도했으니 곧 백병전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래, 그래야만 하는데.

옛 고려에서는 잘 쓰지 않은 장창방진이 뉘여지자 순식간에 적들의 전열은 날카로운 도산검림으로 바뀌었다.

연기를 내뿜는 단창들을 쏘던 자들은 이미 뒤로 물러난 모양.

진형에 휩쓸려 나아간 선두들은 뒤에서 미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창날의 파도에 몸을 꿰였고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깃덩어리로 화했다.

‘빌어먹을!’

그러나 동고려 군도 나름대로 원주민들과 많은 분쟁을 겪은 자들.

창 끝에 걸린 시체가 장창의 예리함을 덮는 사이, 그 순간에 용감한 자들 몇 명이 허리를 숙이고 장창들 밑을 파고들었다.

”옳지!“

왕지는 무릎을 치려다 그 나름대로 용감한 자가 엎드린 자세로 적병에게 단도를 들이밀 때 맨 앞 방패수의 손도끼에 머리가 쪼개져 시체로 변하는 것을 보고 비명 섞인 탄식을 내질렀다.

”젠장!“

힘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보병 진형과 진형의 맞부딪힘은 순식간에 끝나는 영화 속 명장면이 아니다.

땀내나는 지루함의 현장.

욕설과 고함이 오가는 짜증의 현장.

죽어가는 이가 지린 똥오줌은 그보다도 더 진한 피냄새에 가려졌다.

서고려군의 방진은 견고하나 원체 무거워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모양이다.

이 순간, 저들의 표정에는 답답함이 아닌, 인내심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왕지는 그 모습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그에 화답하듯 또 공포스러운 순간이 찾아왔다.

- 타앙

다시 시작된 폭음.

은근히 여유가 있는지 아예 후방으로 가지 않고 3열에 있던 총병들이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적 창병 사이에서 쏘아지는 폭음에 일시지간 동고려군의 선두가 또다시 모진 수모를 겪었다.

나아가지 못하는 아군과 일방적으로 강요당하는 손실.

중군은 분명 수렁에 빠져 있었다.

--

잘 정돈된 창병진에 뛰어드는 기병대는 잘 없다.

예로부터 기병의 적은 기병이라 했었지.

모속방, 그의 임무는 적 기병의 주살에 있었다.

그 후 저 굉음을 뿜어낸 둔탁한 통들을 관리하는 병사들을 죽이면 될 것이니.

모속방은 도를 휘두르며 휘하의 군사들을 몰고 적 기병대에 달려들었다.

”애송이같은 놈들!“

분명히 야인들로 구성된 기병대다.

고려인이라기엔 너무 이색적인 얼굴과 생김새, 그리고 덩치.

하지만 분명히 고려인인데 덩치가 저들보다 큰 놈이 준마를 타고 달려오는 것을 보자 모속방이 눈을 빛냈다.

‘저 자가 해강인 모양이다.’

서고려 황제의 아우.

저자를 잡는다면 분명히 큰 전훈을 세우는 것이고 전후 협상의 과정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으렷다.

모속방이 이끄는 기병은 고려의 전통적인 경기병이다.

다소 좋지 않은 국내 사정으로 인해 중기병은 어림도 없었고 경기병을 편성할 수 밖에 없었던 동고려였으나, 그래도 기병의 명맥만큼은 아직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고전적인 전술, 즉 활로 타격한 후 붙어 근접전을 유도하는 방식의 공격을 시도했다.

”이럇!“

그러기 위해선 저들에게 접근한 후.

”쏴라!“

말 위에서 등자에 체중을 싣고 불안하게 저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야 했다.

그러나 이 옛 북방의 기마민족에 대항하여 성립된 전술은 시대와 시기적 한계로 기병들 자체의 궁술 실력이 형편없이 떨어진 것을 감안하지 못했다.

게다가 궁술 자체도 숙달되기 몹시 어려운 무예였다.

승마술 역시 마찬가지.

거대한 들판에서 어느 순간부터 폭발적으로 불어난 가축들, 특히 말을 어릴적부터 키워 온 젊은 과트라체들은 오히려 동고려의 기병들보다 승마술이 더 뛰어났다.

동고려 궁기병들이 쏜 화살은 당연하게도 맞은 자들보다 빗맞은 자들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맞은 자들도 멀쩡히 달려오고 있었다.

모속방의 눈에 저 괴상한 갑옷에 박힌 화살이 말을 탄 기수에 의해 덜렁대는 것이 보였다.

그 옆 앞섶을 풀어해친 자를 보니 옷 뒤로 무언가 촘촘히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원간섭기 이후 몽골에 의해 중원과 조선에서 주류로 떠오른 두정갑은 지금 이 순간에선 참으로 낯선 갑옷이었다.

동고려 기병대의 사소한 실책은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궁술과 기마술이 모두 뛰어나 화살로 조금의 피해를 더 누적시켰다 하더라도.

애초에 궁기병은 새로운 전술의 패러다임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무력화될 존재였으니.

”거창!“

엄한 흙바닥에 화살을 낭비한 동고려 기병들이 돌격용 창을 쥐고 달려들자, 야인 기병대는 패퇴하는 것 마냥 순식간에 좌우로 산개했다.

”이 겁쟁이들 같으니!“

그러나 흩어진 자들의 표정엔 오직 살육에 대한 기대감만 보일 뿐.

그것을 가까이서 보게 된 동고려 기병대는 애석하게도 아직 닿지 않는 자신의 창 끝을 휘적거리며 과트라체 기병대가 안장 오른쪽에서 이상한 짧은 막대기를 뽑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지근거리에서의 총격.

앞선 동고려의 어설픈 화살의 화망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집약적이고 강력한 총은 이 순간 근거리에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 타타탕

”허억!“

순식간에 뿜어지는 총탄 세례에 어안이 벙벙한 듯 기병대 몇이 자신의 붉게 물들어가는 가슴팍을 바라보다가 허공에 헛손질하며 낙마했다.

낙마한 자들은 뒤에 달려오는 동료의 말에 밟혀 죽었고, 급작스럽게 뭉게진 전열에 기병대의 사기가 크게 무너졌다.

”말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모속방은 비명과 같은 부하의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앞발을 치켜든 자신의 말을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엄청난 피해를 입은 자들이 전열을 정비하려 해도 순간 말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로 눈 앞에서 들은 폭음과 매캐한 화약의 향기에 말들이 놀라 날뛰었으며, 기수는 그것을 다독이다 과트라체 기병대가 안장 왼쪽에서 뽑아 든 다른 단총의 표적지가 되어버렸다.

돌파력을 잃은 동고려의 기병대는 다시금 후방에서 여유롭게 장전한 뒤 다시 달려드는 과트라체 기병대의 사냥감이 되었다.

- 으하하!

해강은 꿀벌들을 만난 말벌들처럼 열심히 총을 쏘며 사냥을 하는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버지는 자신이 나가 일대일로 무예를 자랑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특히 이 기병전술을 알려주면서 더더욱.

‘네놈은 이 아비조차 넘지 못하면서 무슨 무예를 자랑하려 하느냐!’

해강은 투덜대었다.

비교 잣대가 너무 엄격한 것 아닙니까.

”이 놈이 장수였던 모양이구나.“

해강은 온몸에 총탄을 맞고 쓰러진 적장의 수급을 베어 창 끝에 올린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잔존병들을 항복시켰다.

--

전장이 마무리가 되어갔다.

아군의 손실은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극히 미미했다.

반면 적은 거의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살아남은 자들도 성치는 않아 보였다.

옛 통일전쟁이 거의 무혈로 끝났던 것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전쟁이야말로 진정한 두 나라간의 전쟁이었겠지.

그러나 결과는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최소한의 호위만 대동한 상민은 야트막한 언덕에서 미동도 없이 냉정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리에 대한 감흥은 딱히 없었다.

이미 자신이 안배한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온 이상 질래야 질 수조차 없는 전투였다.

심지어 자신은 첩보를 통해 이곳의 날씨까지 파악하여 건기를 틈타 시간을 맞추어 온 것이다.

상민은 쿵쿵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전장에 나가 적들을 앞장서서 주살하는 행위는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 마치 익스트림 스포츠에서의 고양감을 떠오르게 했다.

한 번 그것에 맛들리면 헤어나오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

그러나 자신이 강력한 장군이라도 이제는 그 강력함을 전장에서 뽐낼 필요는 없다.

아니, 이제 지휘관이라면 그래서는 안된다.

마침내 무력의 시대가 아닌 화약의 시대가 도래했다.

제아무리 항우와 리처드라도 총병으로 이루어진 전열에 뛰어들 순 없었다.

그랬다간 그 잘난 역발산기개세는 저승에서 자랑해야 할테니.

자신이 이곳에서 세계 최초로 꺼낸 총창방진(銃槍方陣),

총기병(銃騎兵) 사격전술,

그리고 대포.

다른 말로 부른다면 훗날 나타날 테르시오(Tercio),

카라콜(Caracole),

그리고 컬버린(Culverin).

적의 전술을 완벽히 카운터치며 고려사에 길이 회자될 대승을 거둔 상민은 안장 위에서 한 시대가 저무는 것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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