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을 다루는 방법
그러나 정작 천명의 원군을 마련한 해진은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느낌이었다.
누구도 아닌 아버지가 친정을 나가는 상황인데. 그 능력이 대단하시나 걱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중앙군과 지방군 모두 북쪽에 나가 있어 가용할 정예병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를 물릴까? 혹은 도성 수비군을?
“아버지, 하지만 소자는 그래도 아버지가 전장에 나서는 것이 불안합니다. 훈련도는 낮으나 도성의 수비병력이라도 조금 떼어 낼 테니 조금 기다려 주신다면...”
상민은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황상은 꽤 긴 세월동안 전쟁을 겪은 이 아비를 너무 무르게 보는 것 같구려.”
“자식 된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똑같은 소리를 막내놈이 하더이다.”
“......”
해진은 무언가 눈치챈 듯 입을 다물고는 이윽고 피식 웃었다.
“그놈이 오는군요?”
그는 그제서야 다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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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은 방문객을 기다리며 아들과 최근 벌어진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통치는 잘 되고 있소?”
“...아버지가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해진은 매우 유능하고 카리스마 있는 군주였으나 인세에 도래한 미륵불이니, 동해의 용이니, 상제의 화신이니, 온갖 명칭으로 칭해지는 아버지와 비교할 수는 없었다.
“작년 말에 큰 일이 났다고 들었소.”
자신이 한창 청해를 개발하고 있을 때, 들은 소식으론 도성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했다.
피바람까진 아니지만.
“그래도 일말의 자비를 베푼 것은 잘한 일이오.”
여전히 충직함을 유지하고 있는 일부를 제외하곤 많은 공신들이 태조의 승천 이후 혹시나 옛날의 고사처럼 식읍을 가질 수 있을지 얕은 수작질을 부렸다.
- 그래! 식읍을 원한다면 마음껏 가져라! 다만 선제께서 힘들여 개척하신 이 땅은 불가하니 다른 땅을 주겠다!
해진이 더 무자비한 군주였고 심지어 그들과 추억, 즉 감정적 연결고리도 적었던 군주라는 것을 망각한 댓가는 비쌌다.
강제로 개척가가 된 자들은 강남 대평원(팜파스 대평원)이 아닌 저 남쪽 해안가를 따라 머나먼 연고도 없는 땅에 떨어져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항구도시들을 세워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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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두두두
그들이 해룡사에서 담화를 나누고 있을 때, 아련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땅이 들썩이는 것이 소규모의 무리는 아니다.
해문의 성문에서 번을 서던 병사 중 하나가 놀라서 달려왔다.
“해문 밖에 족히 천에 달하는 기마가 몰려오고 있습니다.”
해진과 상민은 씩 웃었다.
“왔군요.”
“마중을 나가시겠소?”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진과 상민은 나란히 말을 몰아 오히려 성문으로 달려나갔다.
성문 밖, 저 넓디 넓은 들에 상당한 기마의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장관이군.”
갈색 준마를 타고 온 선두의 남자.
햇빛에 탔는지 까무잡잡한 피부, 의복만 보았을 땐 적색으로 염색한 모피에, 타조 깃발로 장식된 괴상망측한 모자를 쓰고 있는 것이 여지없이 야인의 후예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쿵 소리를 내며 말에서 훌쩍 내리고는 무방비하게 열린 성문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흡사 뛰는 것 마냥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그 육중한 체격으로 상민에게 돌진했다.
- 쿵
“아버지!”
“...끄응.”
그가 야인들처럼 격의 없이 상민과 거칠게 포옹을 했다.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근육이 얼얼하네.
상민이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신장도 자신과 비슷하고 체격으로는 오히려 더 큰 막내는, 지 힘이 얼마나 센지 잘 모르고 있었다.
나이도 이십 대로 한창일 때니.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방금의 충격에 평생 동안 허리디스크를 호소할 것이었다.
“소자, 아버지가 부른다기에 달려나왔습니다.”
해강(解强), 서쪽의 민족 마푸체(Mapuche) 부족 롱코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자신의 일곱 아들들 중 가장 막내였다.
해강은 아버지에게 세 번 절하고 고개를 돌려 형을 보고는 왠지모르게 머뭇거렸다.
방금 자신에게 한 포옹이 다소 무례했다고 이제야 생각이 든 모양.
세상 무서운 것이 없어보이는 저 덩치의 호인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복형만 보면 무언가 두려움을 느끼는지 공손하게 굴었다.
“형님.”
그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고려에는 왕자의 난 같은 사건이 발생할 근본적인 이유가 없었기에 이복 형제들도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해진은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리고는 해강의 머릿기름이 묻은 손을 슬며시 등 뒤로 감춰 닦는 것이 웃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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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이 여러 이유로 몰락하여 흡수되자 고려가 해안가와 강가를 점유했고 나머지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것은 서쪽의 마푸체족이었다.
이들도 꽤 많은 숫자 그리고 다양한 부족을 자랑하는 원주민이었다.
처음에는 두 세력 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나 그리 크지 않았다.
아직 제위에 있던 시절, 마푸체가 유래없이 강하고 공격적이라 들은 상민은 악연의 고리가 형성되기 전에 대범하게도 소수의 인원들만 이끌고 넘어온 자들의 근거지로 가 근처에서 가장 큰 마푸체 롱코(Lonko, 부족장)를 회유하였다.
그들의 예법에 따라 식사를 하였으며 그들의 예법에 따라 많은 선물을 주었고 그들의 예법에 따라 그들의 가장 강력한 전사, 토키(Toki)와 일대일 주먹다짐을 벌였다.
떡이 되도록 쳐맞은 토키를 바닥에 내버려 두고 그들의 예법에 따라 롱코의 딸에게 청혼하니 그 지극정성에 감동한 건지 아니면 무예에 반한 건지 이 마초적인 부족은 그 자리에서 피의 맹세를 하고 혼인동맹을 맺었지.
안데스 서쪽 산맥 너머에 있는 순혈 마푸체족은 이 동쪽의 ‘변절자’ 마푸체들을 과트라체(Guatrache, 뚱뚱한 놈들)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고 자신들을 리체(Riche, 순수한 사람들)라 칭하며 서로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뚱뚱한 놈들이라.
미래에는 욕설이겠지만 굶주려 죽는 일이 빈번한 지금 시대에는 오히려 부러움의 표시일수도 있겠다.
고려 황제의 가랑이 밑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뜻이니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자.
과트라체들은 천성적인 유목민이며, 대단히 뛰어나고 억센 전사이기도 했다.
덩치도 고려인과 비슷하거나 더 큰 이들은 체격에 비해 다소 작은 과하마들을 요령있게 타고 다니며 아직 개간을 기다리고 있는 서남 평원을 제 집처럼 쏘다니고 있었다.
분명 구대륙에서 처음으로 들여온 말을 탄 적은 거의 수십 년에 불과할진데. 말을 다루는 것을 보면 아주 그냥 여진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들 중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자들을 뽑아 적제의 혈통이 이어지는 군마들을 주고 경기병 부대들을 조직하니 야인들 사이에서 이들의 악명이 자자했다.
고귀한 혈통, 타고난 완력과 남성성으로 과트라체의 롱코 토키(Lonko Toki, 족장 겸 대장군)의 자리에 오른 해강이 코를 훔치며 말했다.
“어머니는 잘 계십니까?”
“그래, 가는 길에 보자꾸나.”
후궁으로 들인 여인들 중 이미 타계한 한 명을 제외하곤 나머지 두 명은 아름다운 섬, 청해 거점에 위치한 자신의 저택에서 안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황상, 배가 조금 더 필요하겠소.”
군기가 엄정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보이는 경기병들은 제각기 시끄럽게 떠들며 해문 밖에서 소음공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도 저들이 기창을 들고 달려갈 때의 그 흉험함이란.
해진도 완전히 걱정을 놓은 듯 입을 열었다.
“배는 충분히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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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려의 황제, 왕지는 눈을 감았다.
골치아픈 놈들.
그는 투피족을 떠올리며 뇌까렸다.
‘미개한 것들, 쓸모도 없는 것들, 천하디 천한 것들.’
하지만 그가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태자 시절 옛 건양에 있을 적에는 왕지 자신도 노예병에 관해 상당히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서쪽 놈들의 정책을 보고 배울 것은 배워야 합니다. 그들을 허투루 소모하기보다는 동화하여 제국의 신민으로 삼으소서.”
그러나 그의 어머니이자 동고려의 섭정 황후는 반대했다.
극도의 순혈주의자인 황후는 의복도 입지 않는 미개한 짐승들이 심지어 도성 안에 들어와 허드렛일을 하는 것조차 불쾌하게, 그리고 두렵게 여겨 성 안에 통제령을 내렸다.
“옛 역적 배중손의 치세에도 들고 일어난 자들이오. 믿지 못하는 족속들이니 차라리 전쟁에서 화살이라도 한 발 낭비시키면 좋겠지요.”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노예병을 편성하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뭐 막을 힘이 없었던 것도 있었고.
왕지가 이곳에 와서 자신이 직접 나라를 세우고 관리할 때 그는 주변의 투피 부족과 몇 번 작은 전투를 치러야 했다.
사납고 인근의 지리에 밝아 고려인의 피해가 계속 누적되었다.
기존의 노예병은 사기도 낮고 반항심도 세어 부족 토벌 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식량만 축내는 밥버러지들이 따로 없다.
그냥 서쪽처럼 귀화시켜 아국의 인력으로 쓰는 것이 옳은 판단일지도 몰랐다.
‘천박하지만 서쪽 놈들의 행태를 본받아 보자.’
왕지는 재상 안승회의 건의에 따라 계속된 분쟁을 그만두고 부족들을 회유하고 포로들을 되돌려 받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 사절은 보름 뒤에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 그에게 믿지 못할 소리를 했다.
그가 덜덜 떨며 고했던 순간이 기억에 남았다.
“폐하! 아국의 포로가 모두...”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참담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어찌 되었단 말이냐, 말을 해 보거라!”
“...뜯어먹혔다 합니다.”
식인 행위.
동고려는 발칵 뒤집혔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군사들을 모두 죽이는 것은 솔직한 말로 자주 일어났으며 이해할 수도 있었다.
유목민들이란 미개하여 정주민처럼 인력의 귀함을 체감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식량도 그리 많지 않기에 포로들을 죄다 죽이는 경우도 빈번했다.
나중에는 끌려가 부려먹는 경우가 더 흔해졌지만.
하지만 죽이고 나서 시신을 뜯어먹는다?
말로 할 수 없는 야만적인 폭거이고, 미개함의 극치였다.
그들이 극한의 기아에 몰려 식인을 한 것도 아니고, 모여앉아 순전히 즐기며 뜯어먹었다는데 이는 이해의 범주를 넘는 행위였다.
옛 건양 주변의 부족들이나, 저기 서고려 옆의 부족들도 식인 행위를 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맙소사.”
사찰의 승려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이 불교 신자인 고려의 백성들은 모두 경악했다.
무장들과 병사들도 극도로 분노하여 도성에는 흉흉한 기색이 감돌았다.
다소 외지에서 개간을 시도하던 백성들도 모두 두려워 떨며 태원으로 돌아오니 개척이 매우 미진했다.
원주민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던 재상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 정복에 찬성했다.
그는 분노하여 여러 번 친정을 나갔다.
최근에는 그 부족들이 전부 연합해 들고 일어나기도 했지만 결국 기나긴 투피족과의 전투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들이 아무리 호전적이고 심지어 이제는 조악하지만 초기 철기를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싸워서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사건이 터져버렸지.
‘미개한 식인 야만인들을 정복하고 있는 사이에 반란을 일으켜?’
그는 분노했으나 시기상 오히려 다행스러운 점이 있었다.
끌고 온 노예들을 앞세워 저들의 거점으로 진격하니 제법 저항이 거셌다.
수많은 시체 더미를 밟으며 차근차근 나아가 하나씩 정벌하니 장군 모속방이 그를 칭송했다.
“폐하께선 정녕 군재가 탁월하시니 옛 고려의 명장들도 가히 비견할 바가 아닙니다!”
최근의 실책으로 안승회의 권력이 흔들리자 여지없이 다른 자가 아첨을 떤다.
아첨이라는 것은 비범한 부동심을 자랑하지 않는 한 항상 효과가 있었지.
목책과 토성을 높이 쌓아 마치 성처럼 보이는 마지막 거점을 눈앞에 두고도 왕지는 약간은 긴장이 풀어져 외쳤다.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부패한 군벌들은 말린 식량더미를 놓게 쌓아올리고 있지만, 이 열대의 기후에서는 그것들도 쉽사리 부패하기 마련이다.
물길도 막았으니 지하수로만 의존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었다.
재상 안승회가 약간 다급한 듯 말했다.
“폐하, 시간은 폐하의 편이오나 장시간에 이어진 정벌에 백정들이 괴로워하고 있사옵니다. 서쪽 놈들에게서 배운 병기를 활용하셔서 저들을 빨리 정벌하여 민심을 달래소서.”
왕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상이 그것들을 만들어 보시오.”
안승회는 읍하며 물러난 뒤, 목수들을 불러 작업에 착수했다.
괴상망측한 투석기(트레뷰셋)에 호되게 당한 기억이 있는 동고려는 엄청난 재물과 인적 자원을 투자하여 그 설계도와 비슷하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보름 동안의 시간을 투자하여 그것들을 만들자, 확실히 성 안의 군심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