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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7화 (57/653)

전통놀이

상민은 거리의 정보가 요약되어 그려진 지도를 들고 거침없이 길을 걸었다.

날이 늦어 거리엔 사람들이 없다.

세상이 흉흉하여 밖에선 난폭한 일들이 일어나니 집 안에 있는 것이 안전한 모양.

그는 목적지에 도착해서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붉은 벽돌 담장과 푸른 기와집.

전형적인 권세가다.

상민은 바깥 문을 두어번 두드렸다.

- 똑똑

“게 누구 없느냐!”

나지막한 고함에 삐거덕거리는 문이 열리더니 한 비쩍마른 늙은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뉘시오?”

상민이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네 주인에게 서쪽에서 친척이 찾아왔다 이르거라.”

노인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성질을 내려다, 그의 옷과 행색이 그래도 무언가 귀해보이는 것이 있어 얼굴을 씰룩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서쪽에서 왔다고 저렇게 대놓고 말해도 됩니까?”

주형이 다소 초조해하며 말했다.

상민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래야 알아듣겠지.”

이윽고 문이 다시금 삐걱이며 열렸다.

이번엔 얼굴만이 아닌, 몸 전체를 내보인 늙은이가 다소 쭈볏거리며 그를 안내했다.

“들어오시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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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지나자 꽤 커다란 공터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꽤나 흉흉한 기세의 병사들이 제각기 무기를 쥐고 있었다.

‘가병(家兵)들.’

나름대로 전투를 치러 본 티가 났지만, 정예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가진 기세를 숨기지 못하고 있다. 전투기술만 어느 정도 배운 잡병의 한계겠지.

그들이 제각기 통일되지 않는 무구들을 쥐고 상민과 선원들을 감쌌고, 그 앞에선 자신의 아들뻘 되는 서른 중반의 남성이 와서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들이 당당히 서쪽에서 왔다고 하는 간자(間者)더냐?”

“서쪽에서 온 것은 맞지만, 뒤의 내용은 조금 틀린 듯하군.”

상민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 꿀꺽

옆의 주형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사방은 적대적이었다.

“내가 네놈의 그 태도에 감탄이라도 하랴?”

간덩이가 단단히 부었구나. 내 널 고신하여 그 크기를 알아봐야겠다.

흉악한 소리를 지껄이며 그 남성이 도를 쥐고 다가오자 선원들은 사색이 되었다.

‘안되겠어, 나중에 특수 훈련이라도 시켜야지.’

그 한심한 모습에 상민은 내심 혀를 찼다.

뱃사람들이 말이야, 조금은 대범해야지.

일촉즉발의 사태.

도화선에 불이라도 붙은 듯 타들어가던 폭탄은 단 한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제근, 그만두거라!”

단호한 목소리의 주인은 그도 낯이 익은 사람이다.

곱게 늙은 듯한 예순 중반의 여인.

그 얼굴과 그 목소리에서 상민은 어렴풋한 그리움을 잠시지간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그는 조용하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처형(妻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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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영은 자신의 아들에게 가병들을 전부 물리게 한 다음 상민을 안채로 인도했다.

- 달칵

문을 닫고서야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존귀하신 분을 뵙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존귀하신 분께 거짓을 고할 수는 없지요. 평안하지는 못했습니다.”

상민은 으흠, 헛기침만 했다.

왕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염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그렇듯 경외심과 일말의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꽤나 철면피인 자신이지만, 옛 친척이 이리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것에는 다소 어색했다.

“소문이 진짜였군요.”

“무슨 소문을 말입니까?”

“제부께서 용의 현신이라는 것이.”

왕영은 말하고 나서 아차하며 입을 가렸다.

“송구하옵니다. 제 입이 방정맞아 호칭을...”

“괜찮습니다. 이미 야인의 몸이 되었으니.”

상민은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다만, 제 정체에 대해선 함구해주시길 원합니다.”

“예, 명심하겠어요.”

둘은 한동안 내온 차를 마셨다.

“향이 독특합니다.”

“비타타 잎 차입니다.”

명칭은 조금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고구마잎차라.

망설이던 왕영이 그에게 물어보았다.

“예는... 잘 갔지요?”

그녀가 거의 삼십 년 넘게 보지 못했던 동생의 최후를 물어볼 때, 상민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왕영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럼 되었습니다. 사람이란 이 나이가 되면 결국에는 죽음을 겪기 마련이지요.”

평균 연령 백세시대를 거의 코 앞에 맞이하던 시대에서 온 상민은 조금 허망한 미소를 지었다.

왕영은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었다.

“그동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외부가 통일전쟁 이후 동고려에 잠입하여 활동을 했다지만, 내부에 깊숙하게 침투하기엔 여건이 조금 좋지가 않았다.

그러나 현지 세력의 비호가 필요했을때, 그녀의 도움으로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녀가 그 말을 한 뒤, 문 밖에 크게 소리쳐 불렀다.

“제근이는 들어오거라!”

아직까지 잔뜩 기분이 상해보이는 그는 꾸깃한 얼굴을 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이가 서른이 넘는데 단순한 놈이로고.

“존귀하신 분께 저지른 실례에 용서를 구하거라!”

“어머니!”

“어서!”

이렇게까지 단호한 노모를 처음 본 자식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사죄드립니다.”

거울로 니 표정이라도 좀 보라고 하려다가 관대한 마음으로 참았다.

“괜찮소.”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그가 아직 희미한 적대감과 의문이 뒤섞인 눈을 하고 물었다.

왕영이 말리려 했으나, 상민이 먼저 대답했다.

“서고려의 사절이자 당신의 친척이요.”

왕영의 아들 이제근(李齊勤)은 이연종의 아들이며, 자신에게는 처조카가 되었다.

물론 그리 말하진 않고, 단지 사촌의 관계라고만 말했지.

“...그래서?”

“이 분께서 너에게 돌아갈 마땅한 자리를 되찾아 주실 거란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그가 자신을 쳐다보았다.

“이 사람, 아니 이 분이 저를 보위에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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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려의 왕 왕지는 성품이 잔혹했으나 단호합니다.

그 밑 재상 안승회는 그러한 주군을 모시며 국정을 돌보는데, 수가 빠르고 재지가 있어 실로 동쪽의 근심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명군의 기준은 무엇일까.

상민은 덕성이 깊은 왕만이 명군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패도도 왕도도 결국은 자국을 부강하게 하는것이 목적이다.

왕지는 어머니를 유폐하고, 끝내는 위험한 섬에 유배시켜 죽게 했을 정도로 무자비한 통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백성을 먹고 입히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투피(鬪皮)라 불리는 주변 야인들과의 전쟁 후, 그들을 잔혹하게 착취하는 것도 고려인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고 있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러한 면에서 그는 동고려인들에게는 명군이라 불릴 수 있겠지.

유폐된 태후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재상 안승회가 태후를 죽이라 강력하게 주장했을 때, 그것에 응해 스스로 살모지자(殺母之子)의 굴레를 썼음에도 민심은 옛날보다 오히려 더 좋았다.

이에 탄력을 받아 군부를 숙청하기 시작한 것은 근래의 일로, 벌써 삼분지 일의 세력이 와해되었다.

‘군주로서의 자질이 뛰어난 자다.’

하지만 자국의 부강함은 상대적인 지표였다.

지금과 같은 형세를 볼 때는 더욱 더.

본국의 국력을 신장시켜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 한 방법이라면 잠재적 적국, 혹은 위험국의 국력을 소진시켜 약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이었다.

사도와 정도.

자신은 통치자로써 정도를 지향했으나 사도에 대한 것에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혐성질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며 가성비 좋은 계책이다.

왕지는 출신 상 서고려에 대해 강경일로의 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오래도록 싸운 나라에 좋은 군주가 있는 것은 언제든지 불안요소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게다가 반대파가 자신들에게 숙이고 그늘에 들어오길 청하는 경우인데.

자신은 굳이 이 먼 땅까지 와 새살림을 차린 자들을 복속시킬 생각은 없었다.

악연은 지난날의 이야기.

전쟁을 겪은 자들은 이미 다 죽거나 늙었고, 결국 승리자가 된 서고려 백성들의 감정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었다.

복속하기엔 거리로 인한 행정적 낭비가 너무 컸다.

그러나 알아서 번국이 되길 원하고 있는데 이를 어떤 군주가 마다하겠는가.

본국의 지원은 이미 기정사실이고.

남은 것은 이 나라가 자신의 주제를 알고 마땅한 자리로 돌아가는 거지.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악연은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었다.

제근은 굴욕적인 조항에 화를 냈으나 한참 뒤에는 이에 서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까보다는 사뭇 공손하다.

갑자기 눈 앞에 옥좌가 어른거리는 모양.

“상국(上國)의 원군이 도착하는 예정일이 어찌됩니까?”

“적어도 네 달은 걸릴 것이요.”

“...알겠습니다.”

제근은 야음을 틈타 가솔들을 이끌고 도성에서 나가 자신의 농경지에 지어진 저택으로 향했다.

이씨 가문이 비록 옛 가주 연종의 시절보다 크게 쇠퇴했다 하더라도, 동고려의 시조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이다.

썩어도 준치인 양 마지막 티끌까지 끌어모으고 왕지에게 반감을 품은 군벌들을 회유하니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

왕지도 이를 눈치채 그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마침 사방에서 야인들이 준동해 일시지간 가용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았다.

동고려는 또 전통놀이가 되어버린 내전을 시작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개천 36년(1311) 2월 19일.

“아버지.”

약속된 장소, 해문의 해룡사에서 만난 부자는 서로 포옹했다.

아들을 본 것은 좋으나 시간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흘러진다 느끼고 있는 상민은 영 어색했다.

“딱히 긴 시간이 흐르진 않은 것 같다만.”

진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의 뒤에 얌전하게 서 있는 열 두 살의 태자는 황상이 그리 따스하게 웃는 것을 처음보는지 다소 당혹스런 얼굴을 했다.

매번 엄하고 성질만 내는 것 같던 황상인데.

그 귀여운 표정에 상민이 껄껄 웃었다.

“그래. 권이는 잘 있었느냐.”

“예, 할아버지.”

놀랍게도 태자 권(勸)은, 해진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해진은 형 해준의 막내, 즉 조카의 비범함을 눈여겨보고 그를 태자로 올렸다.

해준은 별로 탐탁치 않아했지만 딱히 반대도 하지 않았고.

원래 계승 서열에 있던 두 아들들은 격렬하게 반대했었다.

- 네놈들은 훈요 128권 중 몇 권이나 읽고 그리 행동하는 것이냐!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 끔찍한 책을 전부 보고 질문에 대답하라고요?

그것은 학대입니다, 학대! 세상 누가 그 책을 다 보고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그들의 사촌은 128권을 전부 보고 몇 페이지에 뭐가 적혀있는지 아는 괴물이었다.

그래서 궁색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 세상의 지혜가 책에만 있지는 않는 법입니다. 아버지께서도...!

정곡을 찔린 해진이 격하게 분노했다.

- 그럼 세상의 지혜가 네놈들처럼 주지육림에 있는 것이냐?

자신은 무예와 병법을 갈고닦았지, 아들들처럼 하루종일 술을 마시고 여색을 탐하진 않았다.

노발대발한 해진은 반항하는 친아들들을 자신이 만든 귀양섬, 원해도에 쳐박아버렸다.

최소한의 개척민들과 함께.

조금 너무한 처사가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상민 개인적으론 뒤주에 넣어버리는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고 있었다.

조카를 태자에 삼은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전례가 있는 행동이긴 했다.

물론 장성한 두 자식을 모두 내치고 한 행동이지만, 해진은 그간 강력한 황권을 휘두르며 허리가 두툼해지고 콧대가 높아진 공신들을 두들겨 패고 있었던 터라 모두가 쉬쉬할 수밖에 없었다.

해진이 자신의 조카를 흘깃 쳐다보고는 그동안 벌어졌던 일에 대해 서둘러 변명을 시작했다.

“아버지, 실은...”

“황상이 결정한 일이오, 굳이 나에게 동의와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소이다.”

자신은 이 사건을 내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진이 머리를 긁었다.

상민은 화제를 돌렸다.

다른 급한 문제가 있었다.

“내 소식을 들었어요. 지금 당장 동쪽에 파병이 불가하다 하셨다 하던데.”

“예, 아버지.”

해진은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북서쪽에서 야인들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북서쪽이라 하면.”

치족의 영역이다.

하지만 알기로는 아주 최근까지 서로의 관계는 아주 좋았다.

“심지어 최근까지 치족은 치렀던 모든 정복전쟁에서 승리하지 않았나?”

그 기세가 무서워서 상민은 이 평화의 순간에도 내심 치족을 어떻게 견제할 방법을 찾고 있었기도 했었다.

“북쪽에서 치족에 의해 패퇴한 자들을 꼬박꼬박 흡수한 부족이 있는 모양입니다.”

상민은 투덜거렸다.

“위급한 일은 동시에 벌어지기 마련이군.”

해진이 잠시 고민했다.

“아버지, 동쪽의 일이 더 급한 듯하니, 총통위에서 만든 총기를 가진 이백 여명의 총병들을 포함해 천의 군세를 파견할 수는 있습니다.”

동고려의 내전은 한창 진행중이었지만 머지않아 왕지가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입하지 않으면 꽤 빠른 시간 내로.

“천 명이라.”

어중간한 병력이다.

동고려는 예전부터 노예병과를 운용하는 터라, 뻥튀기된 오합지졸이지만 병사의 수가 조금 많았다.

상민은 잠시 생각을 하다 물었다.

“총병의 숙련도는 어떻게 되오?”

“군기는 원래부터 정예한 자들이었고, 고려는 초석에 있어 그동안 부족함이 없었으니, 사격술 또한 모두 뛰어납니다.”

뛰어나다라.

“황상이 장담하시는 거라면 믿을만 하지요.”

상민은 씩 웃었다.

“천명, 천명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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