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5화 (55/653)

청해

개천 35년(1310) 11월 24일. 동해안 어딘가.

대동양(大東洋)

고려 동쪽의 넓은 바다를 일컫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서양이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국에선 대동양이라 부르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대양으로 호기심 많거나 운 나쁜 어부들이 그 곳에 나섰다가 끝내 소식을 접할 수 없었다는 일화도 들려온다.

물론 기나긴 항해를 버틸 수만 있다면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대지가 모험가들을 반겨주겠지만 상민 자신은 그런 망망대해를 항해할 생각은 아직 없었다.

자칫하면 그 악명높은 무풍 무해류 지대에 갇혀 말라죽긴 싫었으니까.

좌측에 육지를 끼고 항해하는 다섯 척의 함대는 현 진로의 반대 방향, 즉 창양 쪽으로 흐르는 동해안의 해류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가는 길은 험난해도 오는 길은 조금 더 빠르겠지.

- 삐그덕

배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아, 가끔 이렇게 고요할 때 나지막하게 기지개를 핀다.

고래 뱃속에 들어있는 기분도 가끔 날 정도.

기함 새벽호의 선장실은 선미루(배의 후미)에 위치하여 넓고 아늑했다.

항해에 필요한 도구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 보기에도 편안했다.

자신이 여정을 떠나리라는 것은 의외로 첫째 해준이 제일 먼저 눈치챘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여러 가지 기구들을 선물로 주었지.

귀한 나무와 금으로 고풍스럽게 장식된 질 좋은 망원경은 유리정이 깨끗하여 먼 거리까지 자세히 보였다.

손바닥만한 상자에 올려져 있는 침은 항상 남쪽을 가리킨다.

지남침이라기도 했다지.

본디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라 꼽히는 나침반의 첫 모습은 현대사람들이 아는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자기를 띈 침을 물에 띄워 놓고 봐야 하는 부침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들이 준 것은 건식으로 나침반의 지침면 위에 회전 침을 올려놓는 형태였다.

단순하고 조그마한 발전이지만 항해하는 입장에선 상당히 쓰기 편해진게 분명했다.

육분의는 천체를 통해 삼각측량으로 위치를 파악하는 기구인데 손에 익지도 않았고 아직은 오차가 꽤 커 믿음직하지가 않았다.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만 있다면...

욕심부리지 말자.

여튼 장남이 준 귀하고, 귀한 것보다도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바라보면 기분이 썩 좋았다.

적막하다.

계속해서 지도를 바라봐도 상황이 크게 바뀌는 일은 없다.

자신이 좋아했던 옛 해적 영화에선 바다는 모험이 가득한 신비의 세상처럼 묘사되었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과 공간의 방이기도 했다.

완전 좋아.

상민은 탁상에 다리를 올리고 하품을 했다.

- 똑똑

“계십니까?”

문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고려 선원 특유의 푸른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옷 품이 일반 사람들과는 달라 치렁치렁하지 않았다.

물에 빠져도 수영하기 편하게 생겼다.

이 배의 항해사 겸 조타수, 윤주형(尹珠炯)은 남해안 끝까지 다다라 원해도를 발견했던 선원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탐사대에서 가장 젊었던 그는 지금은 관록있는 항해사로 성장했다.

선단 내에서 자신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대충이라 함은 황가의 일원 정도로 안다는 뜻이다.

“선장님!”

“무슨 일인가?”

전문적 지식이 아직 미흡한 상민이라 많은 부분을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

성격이 유들유들하고 뻔뻔한 면이 있어 자신의 정체가 지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격의없이 굴었다.

물론 뭐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저런 성격도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어 부하들과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윤활유같은 면모가 있지.

“제가 말씀드린 섬이 거의 가까이 와 갑니다.”

“그래?”

상민은 반색하며 나갔다.

해가 지려면 조금 시간이 남았다.

갑판의 그늘에서 쉬고 있던 선원들이 육지에 대한 기대감에 은근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뜨뜻하게 달궈진 갑판 위에 비릿한 소금내를 맡으며 품 안에서 망원경을 꺼낸 상민이 섬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위치는 안정적이야.”

“정박합니까?”

“아니, 일단 조금 둘러보지.”

이 섬, 자신이 청해(靑海, Florianópolis)라 명명한 곳은 남북으로 무척이나 넓었다.

거의 삼십 킬로미터는 더 될 법한 이 섬은 육지와 가장 가까이 있는 부분은 오백여미터 정도.

여러모로 진도를 떠올리게 하는 섬이었다.

그 안쪽, 대양의 너울성 파도가 배를 상하게 할 수 없는 곳에 정박을 한 상민은 그 모래사장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탄성을 내질렀다.

꿈속에서나 볼 법한 광경.

새하얀 모래와 잔잔한 파도, 끼룩대는 갈매기, 그림같이 생긴 야자나무.

덥지 않게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와 아름다운 수림과 초목들.

눈부신 백사장과 푸르고 맑은 바다가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는 이 섬은 컴퓨터 바탕화면에나 어울릴 듯한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지리적 입지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육지와는 바다로 분리되어있어 카누를 타고 와야 할 야인들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낼 수 있는 반면에, 그렇다고 너무 멀지는 않아 단절될 곳도 아니다.

섬 자체의 환경도 좋아 어느 정도 자급자족 할 수 있을 풍요로운 섬이었다.

“주형, 자네가 말한 대로 정말 최고의 지역이군.”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육지와의 거리가 가까운 곳에 방어용 포대를 지으면 괜찮은 저지력을 보이겠지.

상민은 섬을 어떻게 개발해야 잘 개발했다 소문이 날지 머리를 굴렸다.

‘알고보니 천성이 개척가였나.’

제1거점, 청해의 대략적인 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그는 앞으로의 지침을 생각했다.

상민은 동고려가 어디로 튀었는지 알고 있었다.

처음에만 놀랐을 뿐 대충 예상은 갔으니까.

유럽의 개척자들은 이곳에 도시를 세울 때, 제일 먼저 항구로써 기능할 수 있는 요지를 선호했다.

각종 물품들이 본국에서 건너올 것이고 현지의 상황이 악화된다면 항구에서 배를 타고 도망갈 수도 있었으니까.

함선을 정박할 작은 만이나 석주가 있으면 더욱 좋았겠지.

하지만 도망간 동쪽 놈들은 해양으로의 교류를 딱히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것이었다. 오히려 배를 타고 쫓아올 자신들을 경계하며 내륙으로 들어갈 가능성도 있었다.

육지로 걸어갈 거리는 분명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농업용수로 사용할 큰 강의 유무일 것인데.

통일전쟁 이후 정찰대와 대외국(對外局)의 요원들을 보내 알아보니 과연 동북쪽으로 꽤 떨어진 곳에 도시를 세웠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거리로 따지면 상당히 먼 길.

상민은 보급기지가 대충 완성된 청해에 배 두 척을 배분하여 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게 한 후 항해를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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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섬, 사도(蛇島, Ilha da Queimada Grande)

보고서에 짤막하게 적힌 곳.

동고려의 도시로 가는 길, 좌측 해안을 끼고 북상하다 본토와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첫 번째 섬을 말한다.

섬의 크기는 매우 작다.

떠나온 청해도의 가장 긴 길이가 거의 40km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섬이라면, 이곳은 겨우 1km도 되지 않은 자그마한 섬이다.

짧은 동서의 폭은 200m정도인 구간도 있을 정도로 작은 섬.

보고서에 적혀있는 바로는.

“이름답게 온갖 종류의 독사들이 득시글거리는 섬이라더군.”

“...대체 왜 이곳으로 항해하라 하셨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대에게 내리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하게.”

상민은 씩 웃었다.

배는 천천히 섬으로 다가갔다.

상민은 얕은 물에 풀쩍 뛰어내렸다.

얕다고 생각했는데, 허리까지 차버리는 물.

“아니, 선장님. 뱀이 선장님만 어떻게 피해간답니까? 독사라셨잖습니까. 독사!”

물리면 꼼짝없이 죽습니다.

배 위에서 주형이 고함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상민은 암석 해안에서 옷을 털었다.

물기를 대충 말리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 쉬익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있던 뱀 한 마리가 고개를 치켜들더니 그를 노려봤다.

샛노란 색의 머리가 뾰족한 뱀.

독특하게 생겼다.

일 미터도 채 되지 않을 작은 뱀이지만, 보통 작은 뱀들의 독이 무서운 법이지.

그는 상민이 다가가자 경계하는 듯 노려보더니 이내 찔끔하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상민은 천천히 섬을 걸었다.

빼곡히 우거진 수림은 그늘져 발밑의 뱀들의 위장을 도와주었다.

무심결에 밟으려는 곳에 있던 뱀이 신경질을 내듯 머리를 치켜들며 위협하다 그를 보더니 투덜대며 자리를 옮겼다.

단 한 마리도 그를 물지 않았다.

신비하게도 동물들은 독으로 그에게 어떠한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 마냥 오히려 살짝 두려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긴 한데.’

물리지 않는다고 뱀이 딱히 귀여운 동물은 아니라 상민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섬 전체를 뒤져봐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상민은 오직 감으로 그녀의 흔적을 찾아나섰다.

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갈 곳은 한 곳 뿐이었으니까.

섬의 맨 북쪽.

자신을 내버려 두고 떠나간 아들과 배들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백골이 하나 놓여 있었다.

- 츠츠츠

그 백골 근처에 있던 노란 뱀들이 서둘러 달아난다.

상민은 천천히 그 백골을 살펴보았다.

나무에 기대 앉은 그 백골은 그동안 바람에 풍화되지는 않았는지 외견상 상당히 양호해보였다.

물론 세월이 세월인지라 그 신상을 예측하기 힘들었지만.

일단은 골격을 보아 할 때, 여성의 체구일 것이다.

백골 근처에 떨어져 있는 채 썩지 않은 비단 조각들, 그리고 비녀와 장신구들은 그녀가 높은 지위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나이가 꽤 들었을 법한.

그는 비단 조각을 집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고려의 마지막 비단을 걸친 여인.

설화는 사실이다.

동고려의 태후는 노년에 아들에게 버려져 이 외딴 섬, 지구 상에서 가장 위험한 섬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보시오. 결국 이리 될 것을.”

인간적으로는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 인간이었으나 이리 죽으니 무언가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입 안을 맴돌았다.

후회는 넘치도록 했겠지.

다른 말은 하지 말도록 하자.

그는 가지고 온 삽으로 한동안 땅을 팠다.

-

얼마 뒤 다시 배로 돌아온 상민이 또 젖은 옷에 투덜대고 있자 주형이 다가와 말했다.

“실로 하늘이 도왔습니다. 제가 가까이서 망원경으로 보았는데 과연 뱀들이 많더군요.”

“그래.”

상민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주형이 당장이라도 불을 피울 듯 굴었다.

“저 섬에 불을 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왜?”

“독사가 많다고 하셨잖습니까.”

“......”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자연환경의 보존과 생물학적 다양성의 이로움을 알려주기란 어려운 법.

그는 어차피 고립된 섬이라는 점과 불교의 불살을 들먹이며 만류하고는 뱀섬을 떠났다.

나중에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고려의 관광업에 큰 도움이 될 지도 몰랐다.

물론 돌아다니진 못하고 멀리서 구경만 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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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섬에서 벌어진 일을 뒤로 하고 그들은 항해를 계속했다.

거의 왔던 거리만큼이나 더 가서야 무언가 흔적이 보였다.

망원경으로 보니 조그마한 배들이 꽤 넓은 강 하구에서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익숙한 외형.

고려의 어선들이다.

드디어 도착이라는 생각에 탄식인지 신음성인지 모를 소리들이 선원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이 여명급 함선이 더욱 커지고 효율적으로 개조된다면 훨씬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을 것이었다.

대항해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조금 더 강인해져야 한단다.

‘그게 바로 해양 전통이지.’

사실 이 거리도 만만치 않았다.

적어도 창양과 건양을 다섯 번 이상 왕복해야 하는 거리는 되는 것 같은데.

물론 동쪽 놈들은 옛 고려의 가장 동쪽에 있는 안양에서 출발했기에 실제 거리는 더 짧았다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상민은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까지 해안선을 따라 관찰했던 강들은 대부분 유량이 적고 강폭이 좁았다.

여태껏 꽤 좋은 입지를 가진 곳이 있음에도 둥지를 틀기 주저한 것이 이해가 될 정도.

이번 강은 그래도 상당히 넓었다.

광하와 창강과 견주지는 못하겠지만 내륙으로 충분히 배들이 오고 갈 정도의 너비였다.

주변에는 그래도 개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논밭이 넓게 자리한 것이 보였다.

“배를 멈춰라.”

너무 가까이 가면 근처의 어선에 이 한 덩치 하는 배들이 보일 수도 있을 수도.

상민의 명령에 돛들을 접게 한 주형이 타륜에서 손을 떼지 않고 물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상민은 빙그레 웃고는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들어가 봐야지.”

“제정ㅅ.... 아니, 진심이십니까?”

주형은 펄쩍 뛰었다.

전쟁이 벌어진 지 불과 팔 년밖에 흐르지 않았다.

팔 년.

전쟁을 겪은 세대가 대부분이라는 소리다.

물론 그것이 전면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수도가 털린 전쟁이라고 하더라도.

서고려의 황족인 사람이 저 동쪽 놈들의 도시를 들락날락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보나마나 바로 하옥당하고 심하면 죽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자신은 조정으로부터 말리지 못한 책임을 묻게 될 것이고 다시는 해문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해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자식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고,

어여쁜 아내는 재가하여 다른 남정네랑 살갑게...

상민은 시시각각 절망회로를 굴리고 있는 주형을 내버려두고 선장실 안에 들어가 구석에서 함을 꺼내었다.

‘오랜만에 입는군.’

아주 먼 옛날, 자신이 낭장일 때 입은 하급 장교용 찰갑은 관리를 꼼꼼하게 한 덕인지 그리 녹이 슬지 않아 쓸만했다.

서고려의 군 복식은 수십년 동안 몇 번의 개량을 통해 이전과 꽤 많이 달라졌지만 동고려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

지금 이 찰갑은 어찌 보면 동고려의 갑옷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계급마다 갑주의 모양이 세밀하게 구분된 것은 아니지만, 아 이 정도 입는 놈이면 대충 낭장급은 되겠다 하는 것은 있었다.

찰갑을 차려입고 나온 자신의 모습을 본 주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계획하고 있으셨군요.”

상민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빙글빙글 웃었다.

“나는 갈 예정인데, 그대도 따라올텐가?”

주형은 내밀어진 병졸 갑옷을 바라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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