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용왕
꿈을 꾼 적이 있다.
나중에 뒤주에 너를 가두고, 물 한 방울 주지 않고 널 말려 죽이는 그런 꿈을.
훨씬 더 미래엔 21세기의 북한처럼 생긴 교실 앞에 자신의 사진이 걸려 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하루 종일 자신의 말과 자신의 행동을 암기하며 그 위대함을 찬양하는 광경을.
그 디스토피아적 비극의 광경을.
상민은 아들과 함께 넓은 벌판에서 한참동안 말을 달리자 서서히 그 악몽이 희석되는 것을 느꼈다.
가는 길, 정면의 지평선에선 흐릿하게 해가 떠오를 징조가 보였다.
해문.
적제가 저 세상으로 떠난 자리와는 정 반대편.
적제의 후손을 타고 온 상민이 고삐를 당겨 말을 세웠다.
그곳에는 조선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벽돌로 감싸진 조선소엔 생전 처음 보는 배들이 다섯 척 정박해 있었다.
자못 거대한 크기는 기존의 선박, 초마선(漕運船, 조운선)과 그것을 개조한 쾌속선이 상대적으로 아담해 보이는 배였다.
그동안 고려의 배 크기는 남쪽 해안선을 따라 탐험을 하며 먼 거리를 갈 수 있게 조금씩 크기가 켜졌다.
조수간만의 차가 한반도에 비해 그리 크지 않으니 배 바닥 뾰족한 모양의 첨저선(尖底船) 선박들이 활발히 개발되었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려보면 조운선의 크기는 수가 적은 가장 큰 선박이 길이 20m, 너비 7m 정도의 아담한 배였다.
하지만 한 해가 거듭될수록 상민의 요구에 크기가 커져, 이 체급까지 온 것이다.
가장 큰 앞의 범선은 길이와 너비가 그에 두 배, 두 배 반에 달했다.
높이도 상당히 높아 옆의 조운선에서 기어오르려면 밧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당금의 고려는 활발한 육지 팽창에 매몰되어 해양의 중요성을 오로지 혼자만 알고 있고 혼자만 지시하는 상황이었다.
지리적 특성상 풍요로운 땅들이 사방에 널려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해양으로의 팽창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특히 항로를 수집하는 것이 몹시 중요했다.
항로는 곧 해양 전통이고 해양 전통이 있는 나라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올 것이니까.
꼬박꼬박 나라의 재정을 부어가며 부흥시킨 조선업을 통해 고려는 먼바다로 나아갈 가장 첫걸음을 떼었다.
“이 배가 대체 무엇입니까?”
해진은 또다시 놀란 눈초리였다.
하룻밤 동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딱히 피곤한 기색이 없는 것을 보니 다행이다.
“먼 바다까지 갈 수 있는 배다. 다 완성되었으니 이름만 붙이면 될 것인데, 네가 붙이겠느냐?”
“...그렇다면 소자는 여명(黎明)이라 이름붙이겠습니다.”
“새벽이라. 느낌이 좋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선의 이름을 정했다.
새벽호는 역풍에도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는 삼각돛과 많이 발전한 기존의 사각돛을 함께 사용해 오로지 바람만을 이용해 나아갈 수 있는 범선의 이름 그대로의 시조가 되었다.
돛대는 총 세 개.
초창기 함급이라 층수는 가장 낮은 부분이 삼층, 선수는 사층이며 선미는 사층 반에 달했다.
아까 보았던 총통위의 구리 대포들이 갑판에 실려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짐을 나르는 광경이 보였다.
상민은 평복을 입었지만 그래도 추밀원에서 파견나온 관리책임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어찌 되고 있는가?”
“경험많고 충직하며 성정이 온순한 자들을 선별하여 선원들로 채웠습니다. 하명하신 물품들은 전부 집어넣었고 식량과 포탄, 화약도 넉넉히 있습니다.”
“음.”
상민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뒤따라오는 아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마치 물 한잔 부탁하는 것 마냥 평온하게 말하며.
“네가 보위에 오르거라.”
"......?"
잠시 자신이 말을 잘못 들었나 고심하던 황자가 갑자기 넙죽 엎드렸다.
“부상 폐하! 그 무슨 말씀을!”
“놀란척 하지 말거라.”
그는 장성한 아들을 일으켜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가 큰 놈이지만 자신에 미치지 못했다.
“군주란 자리는 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을 것이다. 비단 영토를 정복하고 신민들을 많이 낳아 기르는 것이 군주가 할 일의 전부는 아니니. 미래를 예언하고 대처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며, 학문과 지식이 잘 자리잡게 이끌어야 하는 것도 그 자리에 필요한 덕목이다."
자신의 말을 통해 진심을 느낀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완전무결한 군주 그 자체, 눈부신 행정능력과 강력한 지도력의 아버지는 솔직히 보고 배울 후손들에게는 상당히 가혹한 우상이었다.
”허나 소자는 그것에 관하여는 실로 무지합니다.“
”그렇다면 현명한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되는 것이지.“
”아버지께서 소자를 도와주실 수 있잖습니까.“
”어찌 제국이 오직 단 한 사람에 의해서만 움직이길 바라느냐.“
상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집단이니, 실로 사특한 사교와 다름없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해진이 한숨을 쉬었다.
복잡한 마음이 들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소자와 소자의 아이들이 부족한 것을 어찌 채우리까."
”내가 널, 그리고 네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모두 신경쓰겠지만, 양지에서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다. 단지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뿐이지.“
평생을 외로움에 떨어갈 군주가 가끔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
그리고 꾸짖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것만 하더라도. 군주가 고독함과 편협함, 타성에 젖어 나라를 말아먹는 것을 막을 수 있겠지.
해진의 얼굴에는 서서히 결의가 떠올랐다.
그래, 그 모습이 더 보기 좋구나.
"네 형과 네 아우를 사랑하라."
"그리하겠습니다."
"배움에 부끄러워하지 말거라."
"그리하겠습니다."
"너그럽고 관대하며, 침착하고 근면해라."
"그리하겠습니다."
"그래, 그거면 되었다."
상민은 품 속에서 반지를 꺼내어 아들에게 주었다.
“황상, 나는 동해의 용이 되어 이 나라를 수호할 것이오. 그러니 황상께서도 이 나라의 군주된 자로 이 나라를 지켜주시오.”
그토록 원하던 옥새를 가지게 된 순간임에도 아들은 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 아버지.”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구려."
적재가 완료된 것인지 부둣가는 갑자기 한산해졌다.
그 길을 따라가며 새벽호에 다다른 상민이 배에 오르기 전 등 뒤까지 따라온 아들에게 말했다.
지금 떠나시는 겝니까? 이 자리에서 바로? 아무에게도 알리지도 않고?
마치 그리 말하는 듯 아들의 표정은 제법 당혹스러웠다.
“기억하시오, 황상.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숨쉬는 한 제국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반면 상민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말했다.
”허나, 명심하시오, 황상. 이 아비는 이미 한 번 창업한 몸이란 것을.”
만약 해야 한다면,
두 번째도 그리 어렵진 않을게요.
--
태조(太祖) 해민은 어느 날 갑자기 승천하셨다.
신민들은 해문에서 마지막으로 선대제의 성신을 뵈온 즉, 선대제께서 마침내 태후께서 떠나실적 당신이 기원한 곳, 동해의 바다로 돌아가셨다 여겼다.
고려의 2대 황제로 즉위한 해진은 그 자리에 큰 사찰을 세워 해룡사(海龍寺)라 명명했다.
매년 이때마다 황가의 인원들이 이곳에 나아가 불공을 드리게 한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
즉위식이 끝나고 해진은 다소 복잡한 마음으로 텅 빈 정전의 옥좌에 앉았다.
항상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이 자리는, 닿을 수 없는 곳이라 내심 포기하는 마음도 들었었다.
부상께선 옥새와 황좌를 단 한번의 미련이 담기지 않은 눈으로 건네어 주고는 저 바다의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셨지.
기억하는 신민들은 사라질 것이고 이 일화는 전설이 되어 남을 것이다.
해진은 그토록 원하던 제위에 갑자기 오르게 되어보니 이 자리가 참으로 딱딱하고 차가운 것을 새삼 느꼈다.
누군가 그에게 다가왔다.
조정을 쇄신할 적 자리를 내놓고 물러난 전 추밀원사 서승현에 뒤이어 추밀원사(樞密院使)로 임명된 새로운 자.
자신이 신임하는 이였다.
“폐하, 선대제께서 남겨두신 유훈이 있사옵니다.”
해진은 반색했다.
“그래? 이 곳에서 읽겠다.”
“그것이...”
신임 추밀원사는 다소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 그러느냐?”
“조금... 양이 많아 편전에 두었사온데.”
해진은 갑자기 몰려드는 불안에 몸을 떨었다.
얼마나 양이 많길래?
편전으로 이동한 그는 눈 앞에 쌓여진 책의 산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익숙하다.
설마 예전 모후의 상 이후 대전에서 작성하신 것들이 전부 저것들인가?
”선대제께서 남기신 이것들은...“
추밀원사는 더듬거리며 맨 위에 올려져 있는 종이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훈요 128권이라 합니다.“
”백...이십팔 권?“
조도 아니고 권?
권?
"예, 너무 많아 혼자 할 생각은 말고 후대의 다른 후손들에게도 짬처리를 하라 적혀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저도 모르겠나이다."
"......"
”전부 주석까지 달아놓으셔서 이해하기는 쉽다고 쓰여 있사온데... 군주와 후계자가 아닌 남들에게는 웬만하면 보여주지 말라 적힌 것도 많이 있습니다.“
신하한테도 떠넘기지 말라는 뜻.
한 권의 책을 뽑아보니 서론부터 결론까지 공백없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훈수광 그 자체.
아버지는 이것들을 적으면서 대체 무슨 표정을 지으셨을까.
경제, 군무, 외무, 지리, 역사, 농업, 과학, 정치 등등.
어찌보면 백여권에 달하는 군주들의 참고서라 볼 수도 있겠지.
얼빠진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던 해진이 갑자기 크흠, 헛기침을 하며 뒷짐을 지었다.
읽기야 다 읽겠지만 즉위한 첫날부터 읽기엔 참 고역스러운 양이다.
”모름지기 사람이 가장 영특한 때는 어릴 적이다. 짐은 이미 나이가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을 바라보는 처지이니, 일단 태자와 황자들을 불러 이것들을 읽게 해야겠다.“
”태자께서 읽으실지는...“
못 읽어내고 배우지 못한다면, 이 옥좌에 앉지 못하겠지.
잠시 자신의 아들들을 떠올린 해진이 문득 인상을 썼다.
”선제께서 짐에게 이 자리를 양위하셨으니, 응당 짐도 아름다운 선례를 좇을 것이다. 용상은 황족 중 오로지 짐이 지정한 능력있는 후계가 오를 것이니 이를 토대로 제국승계법을 제정하도록 하라.“
황제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재창업.
마지막 그 칼날같은 말은 일견 자식들에게 경고하는 의미가 강했지만, 부디 자신의 손에 그런 비극을 저지르지 말도록 해달라는 마음도 함께 읽혔다.
옥좌에 앉은 자는 항상 경계해야 했다.
황가에서 전해질 태상황의 마지막 유훈은 어찌보면 천장 위에 매달린 검과도 같았다.
허리띠를 풀고 주지육림에 빠져 통치를 문란하게 한다면 당장에라도 끊어져 머리에 박힐 그런 얇은 끈에 매달린.
해진도 그 이치를 알기에 마음을 다잡았다.
“추밀원사.”
“하명하시옵소서, 폐하.”
“선대제께선 어디로 가셨나.”
“북동쪽 해안을 따라 가셨나이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순간에서야 갑자기 사무치는 망운지정에 얼굴을 감싸쥐었다.
“정보총국에 일러 제4국을 만들라 하거라.”
“...어떻게 만들라 명령을 내리나이까?”
“짐에게도 보고할 필요가 없는 업무적으로는 초월적이고 초법적인 국을. 앞으로 즉위할 황제를 제외한 일반 신민들에게는 그 존재가 전혀 눈치챌 수 없도록 한없이 비밀스러운 곳을.”
후에, 후손들에 의해 태종(太宗)이라 불릴 사내는 단단하게 말했다.
“이름은 여의(如意)국.
부디, 바다의 용께서 그 보주를 쥐시고 꿈꾸시는 목표를 무조건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말이다.”
--
동해의 용왕.
아니, 판도충은 바다를 바라봤다.
뱃멀미는 이제 전혀 하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침 발라 놓아야 할 땅은 많다.
시간은 많으나, 짧다.
짬처리는 성공적이었다.
훈수는 무려 백여 권에 달하는 분량으로 던져주었으니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가끔 애가 막장이다 싶으면 대충 반정해서 대충 똑똑한 놈 시키고 다시 나가면 된다.
정 아니면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다시금 짧은 시간이나마 호국경이라도 되면 되고.
당장은 이 휴가를 좀 누리자.
색칠놀이도 좀 하고.
“어디로 갑니까?”
고풍스러운 옷을 입고 화려한 건을 쓴 상민은 손에 든 지도에 얼굴을 거의 묻을 듯이 숙이고 있었다.
고려에서 가장 큰 배를 만들었으나, 그 위에 오른 것은 단지 젊은, 그리고 신분이 매우 높은 듯한 청년이니.
경력이 많은 선원들은 다소 불안한 눈빛으로 새 선장을 쳐다보았다.
황제의 얼굴은 그렇게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니다.
신의군 시절부터 알던 자들은 이미 많이 늙어 죽었으니 신분이 고귀해 평상시엔 구중궁궐의 안에만 박혀 있는 사람이라 당연한 소리기도 했다.
아는 사람은 신료들과 추밀원의 인물들, 정보총국의 요원들 정도.
그러므로 자신이 칠십이 넘는 노괴였고, 어제까지만 해도 자황포에 오사고모(烏紗高帽)를 썼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못하겠지.
상민은 씨익 웃었다.
재밌는 상황이다.
드넓은 바다는 위험천만한 곳으로 자신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병에는 걸리지 않겠지만 굶주려 죽을 수도 있었고. 폭풍에 익사할 수도 있었으며, 선상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지.
‘군주로서 죽는 것과, 야인으로서 죽는 것은 다르니까.’
시스템을 만들고 나름대로 아름답게 퇴장을 한 그가 다소 무책임한 소리를 하며 기지개를 폈다.
항해의 기술이야 천천히 배워가면 되는 것이고.
초보 선장은 맏아들이 발명한 육분의(六分儀)와 질 좋은 망원경, 그리고 지도를 손에 쥐고 말했다.
일단 첫 번째는.
“도망친 녀석들의 꽁무니를 쫓으러 북동쪽으로 간다.”
남쪽의 항로는 대륙의 밑부분을 돌지는 못했으나 얼추 밝혀져 있는 상황.
동쪽으로 나아가자.
그 위로, 아직 세상에 깨어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땅으로.
그곳에는 자신의 식도락을 충족해 줄 작물들도 있을 것이고 사람들이 유용하게 쓸 작물들도 있을 것이며 감자와 같이 굶주림에서 해결을 해 줄 작물도 있을 것이고, 병에서 낫게 할 작물도 있을 것이다.
신비의 문명도 있을 것이고, 더없이 잔혹한 문명도 있겠지.
그는 옷 속에서 목에 걸려 있는 반지를 꺼냈다.
금으로 되어 보석으로 장식된 고풍스러운 이 반지는 왕예와 자신의 결혼반지였다.
자신의 것은 아들에게, 아내의 것은 자신이 가져왔다.
크기가 맞지 않아 끼지는 못하겠지만.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그가 반지에 입을 맞춘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건양에서 나올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꽤 한참 전의 일인데.
그 때에는 뒤로 조그마한 소선들이 오리마냥 졸졸 뒤따랐었지.
하지만 이 카락급, 아니 여명급 함선들의 숫자는 다섯 척 밖에 되지 않아 훨씬 적었지만 크기는 훨씬 커 장엄함은 이쪽이 더 나았다.
창업을 하러 떠난 자는 이제 제국을 수성하기 위해 떠난다.
저 탐욕스러운 자들이 도착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참으로 많다.
수평선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출항하라!”
가자 북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