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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2화 (52/653)

불멸

작제건설화(作帝建說話).

옛날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작제건은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다가 기묘한 모험 끝에 서해 용왕의 딸 저민의(翥旻義)와 결혼을 하여 칠보와 돼지를 얻고 돌아왔다.

부부는 네 형제를 가졌고, 훗날 맏손자 왕건은 삼한을 통일하고 고려를 창업한다.

정권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불어넣기 위해 만들어진 설화이니만큼 작위적인 성격이 강했다.

유리명왕 설화에서 한 스푼, 매몽설화에서 한 스푼, 거타지 설화에서 두 스푼 떠서 만든 설화는 그 신빙성이 어찌되었든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왕씨는 대대로 서해 용왕의 자손, 용손(龍孫)이라 불렸고 겨드랑이에 털 대신 비늘이 달려 있다 했다.

참고로 왕예의 겨드랑이에는 별 것 없었다.

있으면 따가워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했겠지.

여하튼 경전도 옛 경우에서 비슷한 모티브를 떠올렸는지, 상민 자신을 동해 용왕의 후손이라 하며 억지로 가문의 뿌리를 조작하고 있었다.

황실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하는 걸 보니 충신이 따로 없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것이 또 신민들에게 먹히는 모습을 보니 그게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직 비합리의 시대라는 것이 체감이 확 되었다.

마라차 사건을 통해 신기를 보이며 역적들을 처단하고,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니 황제의 권위는 더 드높아졌다.

심지어는 민간에선 자신의 모습을 본 따 만든 불상이 공공연하게 돌아다니고 있단다.

자신을 궁예마냥 미륵이라 칭한 적도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 민간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셈.

그것을 보고받은 상민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에 경전을 불러 그런 짓을 그만두라 명령했지만, 이 신흥 종교는 순식간에 뻗어나가고 있었다.

기분이 전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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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35년(CE 1310).

남들이 다 늙어가는 정전.

이제는 완연히 장년, 혹은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신들, 그리고 메워진 관료공백들.

건국 후 삼십 오년이 지나니 관료제는 이제 자리를 잡았고 원활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열 살 가까이 많았던 지숙은 이제 일흔 셋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지숙이 업무보고 시작에 앞서 앵무새처럼 매일 아침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하는 소리를 중얼대었다.

“폐하, 소신의 사직을....”

“윤허하지 아니한다.”

“......”

노인학대의 현장.

자신의 아비가 일흔이 넘는 세월까지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자식들의 입장은 참 애가 탈 것이다.

“폐하, 상서령은 아직 정정하오니 상서령의 직무가 과중하다면 중서령의 직무에는 충분하다 생각하옵니다.”

장남, 상서좌복야 김인근의 말에 지숙이 화를 내려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차남 외부상서 김인연의 얼굴을 보고 뒷목을 쥐었다.

딱히 그건 아닌가보군.

잠시 왁자하게 웃음이 터진 정전.

숨을 고르고 재부상서 양온규가 자신의 차례에 입을 열었다.

벽란도 상인의 후손인데, 재물과 산수에 무척이나 밝아 업무를 잘 하는 대신이었다.

“성상께서 국초부터 선포하신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정책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사옵니다. 또한...”

조선 건국 직후의 과전법은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지는 토지개혁이었으나 기존의 대지주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한 것이었고 정도전 등이 제시한 계구수전(計口授田)보다 온건했다.

반면 지금 고려는 달랐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독특했다.

토지에 대한 이해관계가 아예 없는 땅에 도착하여 처음부터 엄격한 경자유전의 원리를 적용한 덕에 자영농 육성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었다.

세습의 여지가 있는 수조권 분급을 아예 철폐했고 관리는 나라에서 봉록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

대지주의 성장과 그에 따른 소작농의 증가를 막기 위해 개인이 경작할 수 있는 땅 이상 보유하고 살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자식을 많이 낳아 경작할 땅을 많이 확보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정 토지를 얻고 싶으면, 사방에 널리고 널린 땅을 개간하면 된다.

개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그 땅에 한하여 당사자 포함 3대에 걸친 소유권한을 주니 이를 악물고 바깥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물론 3대가 지난 이후에는 여지없이 민간에 팔아야 했다.

공신에게 하사한 토지도 사전의 개념이라, 수여받은 세대가 지난다면 경작할 일정 양을 제외하고는 모두 민간에 팔아야 했다.

팔지 않으면 세율이 증가하다 몰수 될 수도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절 또한 사사로이 전답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헌금에 의존토록 하였다.

부족한 부분은 재무부의 보조금에 의지하니, 돈줄이 있는 이상 신권을 통제하기 쉬웠다.

내장전(內莊田)도 모두 없앤 상황, 반발이 있어도 찍어누를 명분은 충분했다.

토지세는 옛 고려의 태조 왕건이 취민유도를 내세워 주장했던 십분의 일보다도 많아 오분의 일에 달했다.

일견 가혹해 보이는 세금이나 인두세의 성격을 띈 공납과 군역을 모두 철폐하며 올린 세금이라 오히려 체감적인 세율은 상당히 낮았다.

재정건전성과 사회건전성은 역대 한반도 왕조를 통틀어서 가장 좋은 상황이다.

상민은 활발히 토의가 오가는 정전 안을 살펴보았다.

황상의 앞이라고 할 말 안하는 자들은 아니다.

예의를 지키며 의견을 자유롭게 하는 기풍.

시스템은 이미 구축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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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참이 파하고 모두가 나갈 때, 상민은 지숙을 후원의 정자로 따로 불렀다.

나이가 일흔이 넘는 노신을 예우하여 궤장(几杖)을 준 까닭에 황상의 앞에서도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는 지숙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랜만의 군신은 맑은 햇살 아래 술상을 펴 놓고 자연을 음미했다.

이곳 삼 층 전각에서는 아래의 연못이 절경이었다.

고이지 않게 수로를 파 놓은 연못 안에 여러 물고기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연못이 참 맑사옵니다.”

“그렇지요?”

수십가지의 물고기가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살아간다.

상민은 그것들을 보다 문득 한 물고기를 가리켰다.

괴상하게 생긴 물고기었는데 어찌 보면 전생에 먹었던 곰장어 혹은 뱀장어같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그 독특한 성질은 다른 물고기들과 상당히 달랐다.

“상서령, 경은 이 물고기를 아시오?.”

“폐어(肺魚, Lepidosiren paradoxa)라고 들었습니다.”

“맞소이다. 그렇다면 그리 부르는 연유는 알고 계시오?”

노인은 자못 궁금해하는 눈빛을 띄었다.

“소신은 그것까진 알지 못하나이다.”

상민은 안주 한 점을 먹고 청주 한 잔을 들이키곤 입을 열었다.

“저 폐어란 것들은 비가 오지 않은 건기에는 진흙 속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잔답디다. 거의 삼 사년을 말이오. 그리고 나서 드디어 우기가 올 때 일어나 활동하는 것이라오.”

지숙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물고기이니 참으로 뜻깊습니다.”

그 모습을 보던 상민은 짓궂게 웃었다.

“그 때가 과연 좋은 때일지. 죽을 때일지는 저놈들도 모른다오. 창강의 벽돌공들이 벽돌을 만들다 항상 접하게 되는 물고기라하니.”

허어, 신음성인지, 감탄성인지 모를 추임새가 들렸다.

“재수가 없으면 가마에서 구워지는 것이옵니까?”

“그런 셈이지요, 재미있지 않소이까?”

노인과 청년은 몇 차례나 웃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궁인들도 무슨 말인지는 몰랐으나 화기애애한 모습에 빙긋 미소지었다.

그들은 한동안 웃고 잠시 말이 없었다.

어심과 신심은 그 침묵에도 몇 차례 교류했다.

“폐하. 소신이 긴 세월동안 성상을 모시며 깨달은 것이 있사옵니다.”

“그게 무엇이오?”

지숙은 빙긋 웃었다.

“성상께선 항상 이 늙은이의 앞에서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으셨지요.

성상께선 단지 범인(凡人)에 불과하다, 특별한 자가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소신은 그 성의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성상께서 그리 남길 원하신다면 그리하시면 됩니다.”

“......”

“성상께선 저 폐어가 아니옵니다. 고려 또한 저 폐어가 아니옵니다.”

상민은 다시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짐이 이 영역을 떠난다면, 그러하다면 이 고려는 어찌 되는 것이오?”

“살아남겠지요.”

지숙의 눈은 진중했다.

“성상께서 그리 만드신 제국이니, 그리 될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고달플지언정, 살아남을 것입니다.”

상민은 탁 소리를 내며 술잔을 다소 거칠게 내려놓았다.

“상서령, 상서령은 훗날 제국과 이 땅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소이다. 자칫하면 가마에서 구워지는 신세가 될 수 있는 것을!”

지숙은 슬그머니 웃었다.

“상께서 떠나신다 하시더라도, 제국을 항상 성려(聖慮, 우려)하심에 한 안정(眼精, 눈)과 한 이부(耳部, 귀)로는 제국을 계속 보고 들으시겠지요. 만약 제국에 위기가 닥쳐온다면 성상께서 어찌 가만히 계시겠나이까.”

"영원히 제국에 의해 부려먹히라?"

"계림(鷄林, 신라)의 김법민(金法敏, 문무왕)또한 동해의 용이 되어 계림을 영원히 수호했다 합니다. 소신은 그것을 단지 옛 설화로만 여겼었으나."

"짐의 경우를 보고 아닐 수도 있겠다, 그리 생각하오?"

"고려에 만파식적(萬波息笛)이 필요하다면, 그리 해 주소서."

어차피 상께선 어느 순간부터 항상 떠나실 준비를 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노인의 눈 앞에서 상민은 반박할 수 없었다.

“역사 이래, 짐과 같은 자는 존재하지 않았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해서도 안된다 생각하오.”

“그것 또한 맞사옵니다.”

상민은 자신의 말에 동의를 하는 노신에게 괜한 심술을 부렸다.

“눈 앞에서 참 망측한 말에 동의를 하는구려.”

지숙은 별 표정의 변화가 없다.

“제가 폐하를 존경하는 까닭은 항상 일관된 정책의 방향성이었습니다. 제국의 만민을 위해 모든 포석을 깔고 계셨지 않습니까.”

그는 자신의 통치철학을 이해하고 있었다.

“구태한 옛 땅의 학문과 불씨(지숙은 불교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의 미몽으로부터 벗어날 사상을 인도하시고, 또한 합리와 이성에 의해 통치하는 제국을 만드셨습니다.

국자감과 한림원에선 폐하께서 남기신 불비불문의 명 아래 수많은 사상이 범람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지식들을 받아들임에 있어 거리낌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숙은 업무에 있어서는 다소 강박적인 청렴결백함과 완고한 면모가 있었지만 지식을 받아들임에 있어선 참으로 사고적 유연함이 뛰어났다.

”하오나 만약 폐하께서 불멸의 통치자로 남으신다면, 그 포석의 절반은 깨질 것이며 나머지 절반은 그 색깔이 백에서 흑으로 변할 것이옵니다.”

그렇지. 그럴 것이다.

그것이 상민이 제일 우려하는 바였다.

세월이 지나가고 부모는 나이가 들어가고, 자식들은 장성했다.

상민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자기주도적 교육방침을 통해, 태자는 완전히 제위에 대한 흥미를 잃고 순수학문에 열중이고.

차남 해진이 제위에 대한 갈증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동해용왕의 혈통을 타고났다 일컬어지는 당금의 황제 해민.

그리고 전조의 혈통과 아비의 혈통 모두를 물려받은 '쌍용지손(雙龍之孫)'의 황자들.

자식들의 육신의 세월이 자신의 육신의 세월을 지나쳐 갈 때, 그는 느꼈다.

이것은 비극의 시작이라는 것을.

권좌에 대한 욕심은 그에 오르지 못한 자에게는 정말 엄청난 갈증이니까.

상민은 물론 대응할 수 있었다.

아들이 아무리 날뛰어 봤자 자신은 이 고려의 창업군주이며 위대한 장군이고, 강한 전사였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건재한 상황에서 아들의 아비였으며, 천륜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해진이 아무리 제위를 갈망한다 하나, 정도를 아는 아이였기에 반기를 들진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천년만년 자신이 제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가 재미있게 했던 게임의 황제같은 엔딩을 맞이할 것인가?

자신 자식들을 죽이고 황금 옥좌에 위리안치되어 영원히 고통을 겪는?

자신은 초인이 아니고, 성스러운 자도 아니었다.

뒤에서 금빛 후광이 비추는 사람도 아니고, 엄청난 초자연적 에너지를 가진 자도 아니었다.

선택받은 자(Chosen One)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는 자에 불과했다.

유명한 축구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일반인(Normal One)일 뿐.

그저 늙지 않을 뿐.

상민은 두려웠다.

제국에 대한 책임감이 자신을 좀먹어 자신이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어떻게 바뀌어 나갈지.

신민들이 자신을 숭배하고, 그 숭배의 방향이 어떠한 곳으로 뻗어나갈지.

자식들이 자신에 대해 반기를 들 때 마다 그 자식들의 피로 목욕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가 쌓아 올린 모든 합리와 지성의 토대가, 자신이라는 불합리한 존재의 생존으로 인해 어떻게 변질될 것인지.

한 번.

오직 한 번 선을 넘는다면 다시금 자신은 지금 자신의 이성으로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제국 또한, 비틀린 군주에 의해 비틀린 사상과 신념을 가진 신민들이 있는 나라가 되겠지.

그 끔찍한 광경을 상상하는 자신의 표정이 어떠하였을까.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들대며 일어난 그가 몸을 지탱하던 지팡이 마저 땅에 내려놓고 크게 절했다.

“성상 폐하.”

“...상서령.”

“천한 소신이 감히 성심을 짐작할 수도 없사옵니다. 또한 영원 속에 살아가셔야 할 성궁을 헤아릴 수도 없사옵고 미래를 보시는 성려 또한 알 수 없나이다.

허나 이 늙은이의 눈으로 하나 보이는 것이 있사옵니다.

그것은 너무나 망측한 말이고, 너무나 불충한 말이오나 소신, 죽음을 각오하고 성상께 아뢰나이다.”

“...말씀하시오.”

“불멸의 육신을 가지신 성상께선, 제위에 남아계신다면 필멸의 운명을 지니실 것입니다.”

“......”

“부디 제위를 양위하시고, 역사와 핏줄 속에서 불멸의 통치자로 기억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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