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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51화 (51/653)

통일(지도 첨부)

개천 25년(CE 1300)

고려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도성의 인구만 십만이 넘었다.

창강 하구, 아니 그보다 더 밑의 태황강(太黃江)에도 해문(海門)이라는 도시가 하나 세워져 크게 발전하였고, 서북쪽 비옥하고 넓은 대지에 광양(廣養)이라는 도시도 세워져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질 않았다.

적강과 창강이 나누어 지는 곳, 무역길의 중요 거점에는 고려 상인 가족과 치족 귀화인을 중심으로 양수(兩水)라는 도시가 건설되었고, 기존에 존재했던 교하와 금호에도 사람이 크게 늘었다.

소금길은 사실상 고려의 영토 안에 들어오며 그 안정성이 증가했고, 무역로 또한 양수에서 직접 해상으로 오가니 손실율이 많이 줄어들었다.

사망률은 그리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은 아니었으나, 출생률이 엄청나게 상승했다.

비옥하고 넓은 토지와 안정적인 기후, 발전하고 있는 농업.

오직 노동력만 있으면 가문을 부흥시키기 쉬운 시대였다.

사람들로서는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게다가 위생과 의학의 소소하지만 중요한 발전들은 거시적으로 볼 때 갓 태어난 영유아들이 허무하게 죽는 것을 상당히 많이 방지했다.

자연적인 인구의 증가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의 인구 유입도 상당했다.

강을 따라 서북쪽으로 도시가 세워지며 인구가 이동했고, 남쪽으로도 차츰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었다.

강족이라는 부족은 복속과 동화 과정이 거의 완료되어 더 이상 야지에서 찾기가 힘들어졌다.

이제는 역사책 속에서 짤막한 몇 마디 줄로 기록될 것이다.

그 외에도 적대적인 관계였던 야족과 남만 또한 대역병 이후 그 세가 크게 줄고 위협적이지 않게 되어 정복 전쟁을 통해 빠르게 복속되었고 무역로를 통해 들어온 치족과 산맥의 여러 부족들도 고려의 발달된 도시에 귀화를 청하고 눌러앉아 사는 경우도 많이 일어났다.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이 중요해지는 시대.

고려글(한글)과 고려어, 불교로 그들은 하나의 민족으로 융화되고 있지만, 그 시간을 길게 끌고 싶진 않았다.

상민은 강력한 동화정책을 꾀했다.

순혈주의자는 마라차 사건 이후 그 힘을 거의 잃었고 반발하는 자는 적었다.

8촌 이내의 결혼을 금지하며 고려 문화에 깊이 깔려 있던 근친혼을 사실상 제거했다.

또한 이민족과의 결혼을 장려하였다.

상민 자신도 앞장서서 이민족의 여인과 여러 번 결혼을 하고 자식들도 낳았으니 솔선수범한 셈.

성공적으로 귀화한 자들에겐 사성을 하여 충성심을 이끌어내었다.

출신으로 관직에 오르는 것을 제한하지 않았다.

실제로 능력이 있고 황상에 대한 충성심이 있으며, 고려 말을 잘한다면 그 누구든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황상의 총애를 받는 강족 출신 한림학사(翰林學士) 사유원(沙流原)이 그 예였다.

백 년 뒤에는 자신들이 무슨 부족 출신인지 알기 힘들게 하는 것이 상민의 목표였다.

새로운 시대, 여러 핏줄들이 섞이고 섞인 젊은이들은 그 기개와 야망을 품고 관직에 도전하였고, 사회 전반에 활기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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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대가 오면, 저무는 시대가 있기 마련.

이제 노병들이 되어 육체의 활력이 쇠한 옛 삼별초 전우들은 이제는 주름진 얼굴을 한 채, 가족들이 사는 광경을 바라보며 한 시대가 저물었음을 느끼고 있겠지.

벽돌집의 벽난로에는 조그마한 불이 타오르고.

따뜻한 그 집에는 손주들이 뛰어놀며 장난을 칠 것이다.

입가에는 감자 조각이 묻어 있어, 그것을 떼어주며 손주의 말랑말랑한 볼을 한 번 꼬집으면 손주는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다가도 할아비가 달래 무릎에 올리면 옛 고려의 땅은 어떠한 곳이었냐고 물을 테고.

주름진 노인은 가만히 웃으며 그 땅보다 이 땅이 더 낫다 대답하겠지.

옛 땅의 비극적인 왕조의 반역자들은 새 땅의 번성하는 왕조의 충신들이 되었다.

그것은 상민만이 해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거친 손들이 모아 해낸 것이리라.

그 자긍심과 그 뿌듯함을 당사자가 아니면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수많은 적들과 싸워온 용사들도 필연적이며 가장 강력한 적인 세월에 차츰 스러지고 낡아가고 결국은 죽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들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은 채 가족들의 시선 안에서 웃음을 띄고 스러지는 것이니.

그것은 어쩌면 아름다운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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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이 떠나보낸 첫 번째 인연은, 사람이 아니었다.

야밤에 태복시의 관리인이 달려와 말했다.

“폐하, 적제가 하루종일 우는 것이 심상치가 않사옵니다.”

그 말을 듣고 마굿간에 가보니, 과연 적제가 큰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주변에는 수십이 가뿐히 넘는 그의 자식들이 불안에 떨고 있었다.

천성이 정력이 넘쳐, 한혈마의 피가 끊길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

고려에서부터 건너온 한혈마(汗血馬), 적제의 나이는 벌써 사십이 넘었는데 아직도 정정해 보였다.

따라서 그 자식 중에 아비보다 더 뛰어난 말이 있어도 상민은 굳이 그 말을 쓰지 않았다.

가장 최근의 남만 복속 전쟁에도 적제를 타고 갔다 왔지.

겉보기에만 그랬었나.

“왜 또 우냐.”

자신이 다가가자 앞발을 들고 우는 것을 멈춘 적제는 가만히 자신의 손길을 음미하다 그의 손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달리고 싶으냐?”

말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상민은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안장과 등자를 꺼내 위에 올리고는 무작정 달려나갔다.

등 뒤로 호위 대상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 문경이 불경하게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어쩌면 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순간을 적제와 함께하고 싶었다.

적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렸다.

남서쪽으로, 고려의 항구도시인 해문으로.

광양과 함께 고려의 두 번째 도시 자리를 놓고 다툴 정도로 번화한 해문은, 고려 수군들과 어부들이 많았다.

성문의 검문에도 응하지 않고 내달린 한 마리 준마와 사람은 바닷가, 아니 강가가 보이는 곳까지 쉬지않고 달렸다.

“......”

마치 내리라는 듯 투레질을 하니 상민이 씁쓸하게 웃었다.

“투덜거리지 않아도 내릴 생각이었다.”

상민이 내리자, 적제는 철퍼덕 주저 앉았다.

말이 이렇게 쉬는 것은 드문 일이다.

“네 흥에 어울려 이리 달렸으나, 네 나이와는 이제 맞지 않는구나.”

적제는 콧방귀를 끼며 앞발에 머리를 대고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어선이 오가며 활기가 넘친다.

국가의 체급 차이로 해상패권 또한 서고려로 넘어온상태.

육로와 해로 모두 서고려가 잠식해 나가자, 저 멀리에 있는 동고려의 수도 건양은 이제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다.

“폐하.”

“김 대장군.”

대장군 김윤서는 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고려 대도시 해문의 군사책임자이며, 수군까지 담당하고 있는 자.

별감의 심복이며, 항장 출신이지만 나머지 두 명과는 다르게 충성심이 대단한 자였고 또한 옛 상관의 딸과 결혼한 자이기도 했다.

천성적으로도 믿음직한 면이 있었지만 폐후 배씨의 재가를 허하며 윤서와 이어주자, 그는 그 후로 자신에게 견마지로를 다했지.

조시적이 흉계를 꾸미고, 연루되지 않은 항장들이 그 사태 이후 불똥이 튀어 처벌을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불안에 떠는 때에 그들을 수습하여 다시 충성심을 북돋기도 했다.

“소동을 일으켜 미안하구나.”

성문에서 바람처럼 내달린 침입자에 대한 보고는 윤서에게도 올라갔을 것이다.

사소한 사건에서 통찰력이 좋다.

“아니옵니다. 어찌 소장이 황상의 잠행을 꺼리겠나이까.”

“딱히 잠행을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이 녀석이 이곳에 오고 싶어하는 듯 해서.”

윤서는 그 말에 적제를 바라보았다.

새액 새액, 말의 숨소리는 다른 자가 갈기를 쓰다듬어도 변동이 없었다.

“참으로 명마입니다.”

“많은 일을 같이 해 왔었지.”

상민은 피식 웃었다.

“그대의 시간도 귀할 것이고, 짐은 지금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돌아가 보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대명을 따르겠나이다.”

윤서는 황상의 사색에 실례가 되지 않게 물러나고는 병졸들로 하여금 멀리서 호위토록 하였다.

주변은 조용했다.

잔잔한 파도가 다가와 부서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무심결에 갈기를 쓰다듬으니,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마지막 전쟁은 같이 해 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힐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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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27년(CE1302)

통일전쟁이 발발했다.

드디어 상민이 손꼽아 기다려온 때가 왔다.

군량을 댈 백성에 비해 과도할 정도로 많은 군인들이 있었던 옛 삼별초 사람들은 이미 늙어 무기를 제대로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이제 국가와 국가간의 전쟁에서는 오로지 체급만이 중요하게 된 것이었다.

교하 거점을 통해 상륙한 서고려 군에 의해 파죽지세로 밀린 동고려는 철기, 투석기, 병사들의 수와 질, 장군과 장교의 수와 질, 군사의 운용에 관련된 모든 것에서 열세를 드러내며 순식간에 밀렸다.

심지어 전쟁 시점 백성들의 숫자도 절반에 불과했으니 가망이 없었다.

교하에서 건양까지 도달하는 것은 현대적 거리로는 거의 이백 킬로미터나 될 정도로 멀었으나 정말 땅에서 행군하는 속도와 비슷했다.

중전 임씨와 그 아들 왕지는 진작 안동도호부로 도망갔고 오직 왕온과 몇 명의 전조의 충신들만이 남아 항전하고 있었다.

웃기는 일이야.

보통은 분조를 만들면 그 반대가 아닐까 했다.

그래도 건양성 자체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았는지 매우 견고하게 지어져, 투석기, 트레뷰셋의 공격에도 꽤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야밤에 소란이 일더니 칼을 무척이나 잘 쓰는 고려인 노비가 보초들을 베고 성문을 열어 서고려군을 들여보냈다.

높은 성벽에 의지하던 수비군은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나중에 그 노비를 불러 추궁하니, 그가 엎드려 울며 대답했다.

“소인의 아비는 오래 전 죽은 장군 김통정입니다. 옛날 성상께서 이곳의 백성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실 때, 백성들의 난을 진압하지 못했다는 죄목과 휘하의 부하들을 통솔하지 못한 죄목으로 크게 벌을 받고 그때 받은 압슬형의 상처로 인해 돌아가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그 병사를 위로하고 면천하여 토지를 내리고 후손들은 평온하게 살게 배려해 주었다.

많은 백성들이 동쪽으로 끌려가고 오직 공성전 후의 적막함과 피폐함이 가득한 성내는 죽음이 떠돌고 있었다.

군민이 합심하여 막아냈던 예전 창양의 수성전과는 전혀 달랐다.

주작대로를 통해 흥평궁으로 가보니, 왕온이 정전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완연한 노인이 된 그는 예상 외로 오래 생존하고 있었다.

의외로군.

“사위 오셨소.”

상민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왕온은 의외로 썩 기분이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딸의 얼굴을 보고 싶소이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망이오.”

“...남은 여생은 서쪽에서 평온하게 보내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이다.”

원정에 참여한 아들 해진이 자신의 외조부를 연행하여 나갔다.

-

텅 빈 용상과 텅 빈 궁궐들.

알뜰하게도 싸 가져 가셨구만.

치미는 허망함에 상민이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원정을 시작한 김에, 삭초제근을 해야 겠다.”

상민은 칼끝을 안동도호부로 돌렸으나, 파견한 척후의 보고에 말문이 막혔다.

안동도호부도 버린 그들은 더욱 동북쪽으로 향해 나아간 것.

안양도 이미 잿더미가 되었단다.

‘이 인간들은 불리하면 런하는 게 습관이 되었나.’

떠난 사실은 알게되었지만 그 종착지가 어딜지는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알 리가 만무했다.

조정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동서는 예전부터 미리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을지도.

“폐하, 원정을 계속 하옵니까?”

“아니.”

그곳까지 갈 수야 있겠지만, 보급로가 극도로 길어지고 피로해질 것이다.

저들도 자신들과 대적하며 항해기술이 조금은 발전했으니 어디까지 갈지 순전히 궁금하기만 했다.

가서 대자연과 싸우라지.

건양은 빈 껍데기였지만, 빈 껍데기가 아니었다.

사만의 삼별초 함대가 와 처음으로 건설한 도시였고, 유산이었으며, 역사의 흔적이다.

왕권과 권위의 상징이었기도 했고.

건양이 옥새가 아니면, 무엇이 옥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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