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43화 (43/653)

즉위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사후세계도 잘 믿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은 성인의 앞에서 그 고귀함에 대해 전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교라.

자신의 가치관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보성은 간소한 장례법에 따라 화장되었다.

본디 고승은 다비식에 따라 길게 화장을 했으나, 그의 마지막 유언은 같이 고통 받았던 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태워주라 한 것이었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로 많은 양의 사리가 나왔다.

상민은 이 사리들로 해심이 주지로 있는 창양의 보덕사에 팔층 전탑을 세우고 전쟁, 두창에 희생된 이들과 고승의 불덕을 기렸다.

역병에 희생된 자, 그리고 전쟁에 희생된 자, 기근에 희생된 자.

이 중에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도성과 적석에서 야인 노비의 소요사태에 인명피해와 재물손괴를 입은 자들은 야인들 자체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을 대피시킬 때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준 것은 복속 강족들의 카누였다.

이 때의 일로 거친 감정들이 어느 정도 희석되어지는 것을 느꼈다.

또한 경전은 이 모든 분노를 오롯이 조정에 향하도록 선동하고 있었으니.

여러 노력으로 갈등은 서서히 봉합되어갔다.

희생자 모두를 기리는 불제가 끝이 나자, 신민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다.

시세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즈음.

신하들은 가장 손재주가 뛰어난 장인들을 모아 황금으로 옥새(玉璽)를 만들었다.

금새라고 해야겠지.

네모반듯한 도장 위, 용이 포효하는 모습은 고려의 어떤 어보(御寶)와 금인보다도 크고 화려했다.

그 의미도 마찬가지.

고려가 외왕내제를 칭했다 하나, 그동안은 상국으로 모시는 나라들에게 금인(金印)을 받고 내부적으로 슬그머니 옥새라 칭하고 썼던 것이다.

하지만 눈치를 볼 것도 없는 이곳에서는 으르렁대는 용이 날아갈 듯 꿈틀거리고 있는 금보는 명실공히 천자지새(天子之璽)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을 만든 장인이 무려 일주일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조각을 하다 완성되는 날 피를 토하고 몸져누웠다는 소문도 돌았다.

또한 이를 위해 수많은 창양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금을 모았다 전해지기도 했지.

무장 이문경과 곽연수를 필두로, 문신 김지숙이 함을 들고 열다섯 명의 문무신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부사 처소의 앞마당으로 가 꿇어 엎드리며 외쳤다.

“부디 천명을 받으소서!”

“덕이 없는 곳에 병이 돌았고, 조정은 간신들과 암군에 의해 농락당하는 처지이옵니다.”

“왕씨는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의종) 이후 이미 덕을 잃은 지 오래, 난신적자(亂臣賊子)들에 의해 국가의 종묘사직이 위태롭게 흔들리다 지난 북란(몽골의 난)때 그 기가 끝내 쇠하여 이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이곳에 떨어진 후, 온왕(溫王)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다만 천박한 여인의 치마폭에 휘둘려 덕이 있는 황후를 함부로 폐하고, 덕이 없는 요녀를 중전으로 삼으니, 이것은 천륜과 예법과 도의에 모두 어긋나는 것으로 사사롭게는 조강지처를 버리는 부덕함이오, 넓게는 신민의 안위를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신경 쓰지 않으니 이는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에 비견할 만합니다.”

“지난 전쟁은 오로지 고려인이 고려인을 죽이는 참극으로 부덕한 이들이 나라를 지키는 자들의 공로를 시샘하여 같은 백성끼리 창을 쥐어 주고 사지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본디 삼별초는....”

이 말을 하면서 지숙은 힐끔 옆의 무장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도 살아가면서 타협이라는 것을 배우긴 했으니.

“...의(義)로써 일어난 의군이니 그 도의 날에 같은 고려인의 피를 묻히게 한 것을 어찌 참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고려는 바람 앞의 촛불이옵니다. 동으로는 조정의 요신(妖臣)들, 남으로는 남만이, 북으로는 야족이 날뛰니 부디 천지신명이 진정한 천자께 내리는 부월(斧鉞)을 삼가 받드셔서 새로운 태묘(太廟)와 사직을 일으키시어 고려의 만백성을 지키는 아버지가 되어 주시옵소서!“

-

방 안에서 그들이 목 놓아 소리치는 것을 상민은 듣고만 있었다.

마음의 갈등이 생기고, 갑자기 즉위 직전에 현자타임이라도 와서 그러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애초에 제 발로 떠나온 자가 태반, 버림받은 자가 태반이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뻔 한 민심을 살필 이유도 없다.

상민 이외에 즉위를 하려고 하는 세력도 없었으며 옥좌는 침을 발라 놓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신의 침으로 범벅이 되었기에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아무도 앉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냥 동양적 관습에는 천자나 군주에 오르기 전 수없이 사양하는 풍습이 있어서 그랬다.

원래 이런 것은 은근히 옆에서 부추겨야 폼이 살아나는 법.

이성계도 답을 내리지 않고 방콕하고 있다 배극렴이 하다못해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서 옥새를 건네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했지.

자신도, 저들도 모두 알고 있다.

경전은 속삭이듯 말했었지.

- 소신이 몸이 요즘 좀 허해서, 닷새 버티기가 힘듭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허하기는 무슨.

애초에 닷새씩이나 그럴 생각도 없었다.

- 대충 사흘 쯤 하거라. 밥도 조금씩 먹으면서.

- 예이.

- 문 경첩이 약하니 차려거든 살살 차라 그래라. 그거 수선하는 것도 다 품이야 품.

- ......

그리고 삼일 째 되었을 때, 굉장히 마지못한 표정을 연기하며 상민이 정문으로 나왔다.

신하들이 그 모습을 보고 모두 꿇어앉았다.

그 뒤로, 소문을 들었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가 망설이는 손으로 목함을 드니 모두가 하나 되어 외쳤다.

“황상 폐하 만세!”

“만세!”

이 외침은 마치 메아리처럼, 뒤에 구름처럼 운집한 하급 무장들과 관리들, 그리고 백성들에게까지 퍼져나가고 있었다.

꽤 무거운 목함을 들고 조심스럽게 다시금 처소에 돌아와 보니, 어느새 마당에 왕예가 나와 있었다.

그녀는 흰 삼베옷에, 흰 천으로 된 몽수를 쓰고 돗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언제 준비한 거람.

자신도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사전에 어떠한 이야기도 없었으니까.

어젯밤만 해도 잘 잤던 것 같은데.

마치 죄인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고개를 숙인 그녀가 목함을 들고 멀뚱한 얼굴로 쳐다보는 상민의 앞에서 조아렸다.

삼일동안 왕온을 씹고 뜯고 즐기고 있었던 신하들도 입을 꾹 다물었다.

미묘하다.

한창 욕을 했던 현 왕의 딸이자, 주군의 아내이며, 심지어 금슬도 좋고, 앞으로 왕이 될 태자의 어머니다.

신하들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이내 몇 명의 신하들이 그녀가 아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당혹해 했다.

“저...전하.”

예는 한 마디 말도 대꾸하지 않았다.

“전 고려의 용주(庸主) 온의 딸, 천첩 왕예가 감히 황상께 아룁니다. 전조(前祖)가 덕이 없음은 명민하신 충신들에 의해 이미 명명백백히 고해진 바, 같은 핏줄로 천첩은 감히 그 못나고 부끄러운 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천명의 존귀함과 상서로움은 오로지 황상에게 깃들어 있으니, 소녀의 덕이 없음을 헤아리시고 다만 폐서인시켜 이 나라의 기틀을 잡으소서.”

상민은 비로소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왕의 딸 신분으로 부친의 권위를 부정함으로 남편의 권위와 정당성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핏줄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말.

예도 사람이기에 자신의 정당성이 부정되어야만 하는 현실에서 다른 후궁을 들인다면 아들 준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자신은 그녀를 버릴 생각이 전혀, 정말 단 한치도 없었지만 역사는 그동안 수많은 개막장 사례들을 들며 인간의 감정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증명해오곤 했다.

그리하여 지금 자신을 폐서인하라는 말은 자신을 살려달라는,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는 애원이었다.

상민은 도를 뽑았다.

흉측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무장들이 놀라 제지하려 하고, 신하들이 대경하여 엎드릴 때, 상민이 그 도를 마당의 바닥에 꽂았다.

단단하게 다져진 땅에 무려 한 자(尺)이나 들어간 도.

“지금 이후로 감히 황후의 핏줄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는 자는, 이 도에 허리가 갈려 반으로 죽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홑몸도 아니신데, 어찌 이러시는 게요.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탁상에 길다란 함이 놓여 있었다.

궁금증을 담아 바라보니 예가 빙그레 미소 짓더니 그것을 열게 시켰다.

그곳에는 면복 한 벌과, 열두 개의 구슬 끈이 달린 면류관, 그리고 화려한 허리띠가 있었다.

“소첩와 궁인들이 힘써 만든 십이장복(十二章服)이옵니다.”

상민은 감탄했다.

견(絹)이 아니라, 모(毛)로 짜여진 면복(冕服)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

“예전에 주상께서 알파카라는 동물이 있다 알려주셨지요, 치족들과 교류하며 그 털이 옷을 만들기에 몹시 좋다고 들어 이리 만들어 보았습니다.”

조금 더워보이는데.

“비단이 없어 아쉽구려.”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관습과 물건을 주상께서 만들어 나가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상민은 씩 웃었다.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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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양에는 천단(天壇)과 태묘, 그리고 사직이 세워졌다.

오방제과 천제에게 절을 하고, 자신이 태조라 선조가 없으니 고려의 근본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었다.

조선 단군, 부여 모수왕(慕漱王)과 고구려 동명성왕(東明聖王), 발해 고왕(高王)과 전조의 태조(太祖)에게도 한잔씩 따라주었다.

‘좁아터진 집구석, 아니 한반도 탈출했다고, 밉상이라 여기지 마시고 좀 도와주십쇼.’

나라라는 것이 영토가 아니라 사람에 의해 정의되는 것 아닙니까.

'왕건님, 그래도 제 아들은 당신 DNA 조금은 있습니다. 너무 화내진 마십쇼.'

후배 된 자가 선배들에게 흠향(歆饗)하라 술을 바치는 의식이 끝이 나고, 문무백관들의 축하를 받으며 관아, 이제는 연경궁(延慶宮)이라 불리는 궁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법궁을 제대로 건설하기 전 까지 정궁으로써 기능을 할 것이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르고 맑았다.

따스한 햇살, 면복이 살짝 덥다.

모직물이라 그런가.

정면에 보이는 것은 이번에 새로 부랴부랴 증축한 연경궁의 정전 천경전(天景殿).

일부러 계단을 높이 지은 까닭에 후줄근한 주변과 달리 나름대로 위엄차 보였다.

면복과 면류관을 쓰고 예의 손을 잡고 대소신료들 사이를 걸어 계단을 올랐다.

가장 높은 곳에서 축하를 받으려니, 기분이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이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 드디어 뭘 본격적으로 해볼 자리에 올랐다.

눈치도 보지 않고, 세금이나 조공도 바치지 않을.

자신은 그동안 운명처럼 이 순간을 위해 그렇게 태어났을지도 몰랐다.

과거로부터 받은 자격지심은, 이제는 버려야 할 때.

병자년(丙子, 1276) 일월 초하루

안서도호부사 겸 서로군지유 겸 장군 김상민은 신하들과 백성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한반도의 국사(國史)나, 중원의 사례에서도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한 경우였다.

전조의 왕이 살아 있는 경우였고(심지어 한반도를 생각하면 두 명이나),

전조의 핏줄이 태자로 봉해질 자식에게 이어지고 있는 경우였으며,

거느린 백성은 모두 합하여 삼사 만 정도였으니.

상민은 국명을 바꾸지 않았다.

프랑스는 프랑스고

로마는 로마다.

고려도 고려고.

이 폼나는 국명을 굳이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약간의 억지를 부렸다.

“나라를 바꿔 치울 때마다 국명을 가는 것은 어찌 보면 옛 고려의 서쪽에 있던 자칭 중원 오랑캐들의 풍습에 불과하다. 고려는 예로부터 해(解)씨에서 고(高)씨로, 고씨에서 대(大)씨로, 대씨에서 다시 왕(王)씨로 이어져 내려오는 유구한 전통을 지니는 나라이니 고려라는 말은 단순한 국명을 넘어 역사와 전통과 대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문득 상민은 앞선 왕들의 성이 하나같이 폼이 난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성인 김씨도 어찌 보면 국성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자신의 이름을 정할 때 가장 흔한 성을 때려 박은 게 분명하기에 이입이 전혀 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다.

왕씨를 제외한 근본 중에서 하나 고르기로 했으니, 이왕 고를 거 가장 앞선 것을 고르자.

성은 해(解)씨로, 휘(諱, 이름)는 민(旻)으로 자(字)는 그대로 강휘(强輝), 호(號)는 세원(世元)으로.

별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가 왕의 휘나 자를 틱틱 부르는가. 나중에 죽으면 묘호로 불리겠지.

‘근데 안 죽으면 어째.’

왕예는 정식으로 황후, 중전의 자리에 올랐고, 준도 태자의 위를 받았다.

내전과 동궁이 모두 없으니 한동안 변화되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동쪽을 바라보았다.

동쪽에 있는 저 인간들은 모두 뒷골을 부여잡고 있겠지.

상민은 그것을 상상하다 피식 웃었다.

저들의 시대는 이제 저물 것이다. 장담해도 좋다.

이빨이 빠진 것도 모자라 아예 턱이 박살난 상태였으니까.

그보다 더 동쪽에 자신 스스로를 잠룡으로 알고 있는 안동도호부의 연종이 있겠지만, 자신은 그것에도 별 신경쓰지 않았다.

잠룡은 무슨, 토룡이라고도 하기 아깝다.

자신이 신경쓰고 있는 것은.

조금 더 동쪽.

그리고 훨씬 더 북쪽.

다가올 폭풍의 발원지.

그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이 제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 자신만큼은 전혀 웃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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