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
추레한 몰골로 패잔병처럼 돌아온 조정군이 도성에 돌아왔다.
역병은 이미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성 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었다.
시체와 가옥을 태우는 것인지, 흰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오르고 고기 타는 냄새가 지독했다.
“도성은 답이 없다, 우린 안동으로 떠난다.”
그 광경을 본 동로군이 하선하지 않고 뱃머리를 돌려 떠났다.
존혁이 그들의 뒷모습에 침을 한 번 뱉었다.
말릴 순 없었다. 말리지도 않을 것이지만.
서문에 도달한 그가 고함을 질렀다.
“문을 열라!”
하지만 반응이 느렸다.
이윽고 누대 위에 임굉이 나타나 덜덜 떨며 그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역신을 가진 자들이다! 성문을 열지 말아라!”
조정군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볼 때, 뒤에서 일단의 소란이 일더니 임굉이 질질 끌려갔다.
이윽고 새로 나온 통정이 딱딱한 얼굴로 지시했다.
“중전께서 저들을 들이라 하셨다.”
일단의 소란은 어이없이 끝났다.
난 중 불타버린 보위도감 전각 대신 흥평궁의 정전 선경전에 장수들과 문신들이 모였다.
원래 이것이 정상이건만 모두가 어색해했다.
다만 아직도 비정상인 것은 남아 있으니.
“내 몸에 국본이 있으니, 조금이라도 이상한 징후를 보이는 자를 성 안에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중전은 펑퍼짐한 의복을 입고 용상의 빈 옥좌 뒤에 발을 치고(垂簾) 앉아 있었다.
이제는 제법 배가 부풀은 모양.
그녀는 상당한 여인이었다.
요염함과 아름다움만큼이나 강단이 있는 자기도 했다.
방금도 그의 아비가 군심을 흩뜨리자 대번에 처소에서 근신을 하게 한 것처럼.
그녀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인물을 포섭하고 결행하자, 고려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가 목숨을 잃었다.
비록 그의 신체에 문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일국의 별감이었던 자다.
하지만 그녀는 보란 듯이 그를 해치워 버리고는 빈 권좌에 올랐다.
왕온은 처소에서 나오지 않으니 모든 것은 오로지 중전의 입을 통해 전달될 뿐이었다.
조정은 외성과 내성을 엄히 단속하고 급히 징발한 곡식을 쌓아놓고 역병이 잠잠해질 때까지 버티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가지 않은 채로.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제 아무리 역신이라 하더라도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지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역적과 그 무리가 도성을 치면 어찌 합니까?”
한 무장이 물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오.”
존혁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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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장담은 이틀 만에 깨졌다.
상민은 건양성에 도달해 성 밖에 쫓겨난 자들을 둘러보았다.
물론 공성을 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자신과 아직 체력이 조금 남아있는 삼백 명의 병사들만 이 곳에 왔을 뿐.
공성무기도, 군사도 모두 충분치 않았다.
“형님, 성벽이 창양만큼 단단하진 않으나 높고 깁니다. 병사들은 많고 굶주리지 않았는데 어찌 이곳에 오신 겝니까.”
문경의 말에도 상민은 오랜만에 보는 도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예전에는 저 높이가 사뭇 높아 보였고, 속이 답답했고, 내심 두려웠는데.
“창칼로 성을 떨어뜨리려 온 것은 아니니까. 넌 빨리 가서 네 의자(義子)를 구하거라.”
“...예.”
상민은 문경과 헤어져 건양 성 남쪽 멀리, 화살과 투석이 닿지 않고 기마가 달려와도 한참을 돌격해야 할 거리에 막사를 세우고 큰 깃발을 꽂았다.
- 안서도호부사 장군 김상민
건양 성벽 위에서는 깃발을 보고 놀랐는지 소란스러웠다.
그 모습을 보며 병사들과 함께 천막을 설치하고 큰 솥을 걸어 죽을 끓였다.
풍요로운 물산을 바탕으로 전시에 철저한 배급제를 시행했던 창양은 전쟁을 치룬 이후에도 상당한 식량이 남아 있었다.
상민은 군영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낚시꾼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성 밖에 내쫒긴 사람들이 수군거리다 천천히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수천에 달하는 인원들.
죽어가는 자와 죽어갈 자들은 병환을 몸에 이고도 먹고 살기 위해서 걸어오고 있다.
걸음 걸이도 비틀비틀 불안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것은 자신이 뿌린 씨앗의 결과이다.
그가 이 도성에 직접적으로 두창을 뿌린 것은 아니지만, 그의 선택의 결과로 이곳까지 두창이 번진 것은 확실했다.
그래서 도저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관할 수 없었다.
이미 늦었기에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였다.
일손이 부족하여 상민도 직접 배식을 나섰다.
자신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인지, 얼굴에 수포가 난 초로의 여인 한 명이 덜덜 떨었다.
너무 떨어서 나무 그릇의 죽이 다 넘쳐 땅에 떨어질 지경.
그녀를 진정하려고 물었다.
“무엇이 그리 두려워 떠는 건가?”
“조... 조정에서 장...장군이 몹시 흉험하고 포...포악하다 하였기에...”
“뭐, 머리가 세 개에 흉측한 뿔과 수염도 달렸고 여염집 처녀를 겁간하고 아이의 피를 마신다 하던가?”
그녀가 흠칫 놀랐다.
아무래도 뭐 전설속에나 나오는 요괴로 묘사했구나 싶었다.
상민은 실소하며 대꾸했다.
“그래 지금은 어떠하지?”
여인의 굳은 얼굴이 조금씩 펴졌다.
그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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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었다.
“부사께서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라 하신 것을 들었지 않았나.”
이제는 머리가 굵어져 누가 봐도 헌헌한 청년처럼 보이는 승현이 다소 조급하게 말했다.
그의 주군이 시선을 끌어 순찰이 늦게 오는 것 같았지만 언제 이곳에 들이닥칠지 몰랐다.
승현의 옆에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내는 그 말에도 미동이 없었다.
“빨리 밧줄을 몸에 묶고 내려가. 시간이 별로 없다!”
경전은 그저 우두커니 지평선을 바라보다 계속되는 재촉에 오히려 손을 들어 올려 제지했다.
부사가 가끔씩 흥얼거리는 노래가 귀에 아른거렸다.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드라마인지 뭔지에서 나왔던 노래라 했다.
“잠시만.”
붓과 먹이 없어 경전은 새끼손까락의 살을 거세게 깨물어 피를 내고는 일필휘지로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네 휘하 가운데 노래를 잘하는 애들이 있다고 했지?”
“또 뭘 시키려고! 역병이 퍼져 소란스러운 틈을 타 지금 당장 다 나가야 한단 말이야! ”
“복잡한 것은 아니다. 다만 중요해서 그래.”
“으으... 그럼 내가 할 테니 굼뜬 네놈이 먼저 나가 있어라.”
승현은 거칠게 그 종이를 빼앗아 인파 속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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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행궁 높이 걸린 보름아래
가락소리 흥겨워 춤추는데
북적놈들 말발굽에 밟힌 주검
단장지애 우는 소리 구슬프네.
건양 성벽 굳게 닫힌 그믐아래
역병 돌아 썩는 냄새 지독한데
피죽까지 몇 번이고 뺏어놓고
내성 곡창 쥐 떼만 배부르네.
부모는 북적에 밟혀 죽고
자식들은 역병에 썩어가니
삼백 년 고통 속에 살아가다
새 땅에 나라 세워 무엇하나.
구슬픈 운율은 그보다 더 시린 가사와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귀와 입에 오르내렸다.
도성 성벽 안에서 밖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 안이라고 보호받는 것도 아니고 잘 먹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저 멀리 도리어 성 밖에서 밥 짓는 연기가 높이 솟고 있다.
천하의 역적이라 칭한 자는 저리 사람들을 보살피는데 그 대단하신 조정과 황실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남아있는 수수 한 톨 마저 빼앗아 가는 것?
“굶어 죽나, 두창에 죽나,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나는 차라리 역신과 마주하리다!”
“어차피 저 치들도, 우리도 죽을 목숨인데 차라리 밖에 나가 먹고 죽겠다!”
성난 인파의 파도가 성문을 열고 밖으로 쏟아져나갔다.
당황한 조정군이 서둘러 소란을 진정시켜 보았지만 나간 자들이 되돌아오지는 않았다.
“화...화살을 쏴라!”
“그만!”
성벽 위에서 한 별장이 저들의 등에 화살을 쏘라 명령했지만, 도가 그를 가로막았다.
금군대장 김통정은 그의 활을 뺏어들고는 줄을 끊었다.
“미친 놈들, 백성의 등에 활을 겨누어? 그러고도 네놈들이 고려의 무장들이냐?”
한바탕 꾸지람을 하고 열린 문으로 나가는 자들을 막지 말라 하니 사람들의 인파가 점점 더 많아졌다.
통정은 잠시지간 중손을 떠올렸다.
‘이 꼴을 보려 그리 처절하게 권좌를 놓지 못했던 게요?’
문득 누군가 익숙한 얼굴들이 두건을 쓰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헛웃음을 흘린 통정이 문득 자신의 부관을 불러 말했다.
"금군 중 가정을 꾸리지 않은 자가 얼마나 되는가?"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 삼분지 일 정도일겁니다."
“금군 모두에게 성 밖으로 나아가 옛 신의군 전우들과 합류할 기회를 주겠다 말하게. 가족도 대동할 수 있다고.”
“장군, 위험하신 선택입니다.”
“저 광경을 보라, 이것이 지금 고려의 현실이니. 정 낭장, 자네도 마찬가지야.”
“하오시면 장군께서는 왜 나가지 않으십니까.”
통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나도 옛 시대의 사람이라 시대에 따라가기가 어렵구나. 또한 누군가는 저 불쌍하신 분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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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오자 오히려 상민이 당황했다.
아니 많아도 너무 많다.
지금도 수천이 되는 규모인데. 방금 나온 사람들의 규모는 그보다 적지 않았다.
자신은 두창에 걸린 자들을 구하러 온 것이지만, 병들고 곪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나보다.
“경전, 네 행동의 파장이 너무 크다. 내가 이들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나?”
경전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천명이 기거하는 것은 옥새와 핏줄이 아니라 바로 저들입니다. 대업을 이루시기 위해서는 다소 무리를 하시더라도 지금 저들을 모두 끌어 안으셔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마침 눈을 돌렸는데 놀라울 정도로 좋아진 시야로 내성 누대 위에 한 여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납게 일그러져 있으리라는 것 정도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잠시지간 서로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 흩어졌다.
그래, 너도, 나도, 누구의 밑에서 있을 성격은 아니잖아.
그녀는 사라졌고, 상민은 결정을 내렸다.
“지금 나오는 사람은 두창에 대부분 걸리지 않은 자들이라 언제 감염될 지 모른다. 이곳에 함께 둘 수도 없고. 빠르게 인두를 접종하는 것이 좋으니 차라리 가지고 온 조운선들에 태워 먼저 창양에 보내라. 선박 크기가 커 위 아래층 빼곡하게 태우면 가능할 것이다.”
“형님, 그러면 우리가 도주할 방법이 없습니다!”
“내 말은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으니 큰 일이 벌어져도 언제든지 나 하나 몸을 뺄 수는 있다. 너가 먼저 이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거라.”
“하오시면!”
“그만, 논쟁할 시간이 없어, 저들이 병사를 끌고 나와 난민들을 도륙하기 전에 모두 태워야 한다.”
단호하게 말하며 먼저 그들을 태워 떠나보내곤 상민은 홀로 남겨진 이들을 돌봤다.
돌본다 하더라도 역병으로 죽는 자들을 모두 살릴 수는 없는 노릇.
단지 그곳에 서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봐줄 뿐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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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시신을 묻어 줄 여유도 없어 들판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가득했다.
성 안 역병이 잠잠해진 모양인지 자신을 죽일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는지 도성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둥글게 에워싸고는 머뭇거릴 뿐이었다.
겁쟁이 같은 놈들.
“왜, 이들처럼 두창에 걸릴까 두렵나?”
그들은 제각기 활을 가지고 있었다.
적제를 빠르게 타고 간다면, 혼자는 어찌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모조리 죽여버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병사들이 그를 보며 흠칫거렸다.
창양성 공성전에 참여한 자들인가.
상민의 고절한 무위를 직접 본 자들은 감히 활을 들어 쏘기도 저어했다.
하지만 범도 사람과 같이 붉은 피가 흐르는데.
혹여 수백의 화살을 동시에 쏜다면.
괴물을 사냥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병사들이 떨리는 손으로 활을 쥘 때.
그 순간 수많은 병자들이 일어났다.
거동이 불편한 자들.
누워 하루하루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자들.
얼굴이 곰보 투성이라 흉측하게 변해버린 자들.
그들 모두가 그의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어떤 자들은 서 있는 것도 어설프다.
저들은 활을 쏘면 쏘는 데로 죽어 나자빠질 허수아비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인해의 벽 앞에, 병사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숭고함은 칼보다 강하다.
기묘한 대치가 이루어지는 곳, 상민은 그 한 가운데서 천천히 걸었다.
늙고 병든 행렬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를 따랐다.
누군가는 수레에 실려 나아가다 절명하여 고개를 떨어뜨린다.
그 짧은 거리에 벌써 수십이 죽었다.
어떻게 소영강까지 나아가니, 당연하게도 배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다.
젠장, 뗏목들이라도 있으면...
하지만 적들은 이제는 더 낭비할 시간이 없는 모양.
각오를 다졌는지, 아니면 엄한 명령이라도 받았는지 그들이 강가에 도착하고 나서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그 때 병자들 사이에서 승복을 입은 한 중년인이 나왔다.
온 얼굴이 화농으로 뒤덮인 자.
하지만 몸에 서린 서기는 선명하여 알아볼 수 있었다.
보성대사는 병사들 앞에 일정 거리를 두고 서 합장했다.
병사들이 절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날 정도로 대사의 얼굴은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소승과 여기 있는 자들은 곧 죽을 운명인데, 어찌 이 고깃덩어리에 화살을 낭비하고 살심을 쏟아 업을 해하려 하십니까.”
대사의 불덕이 대단한지, 그 불덕보다도 대단한 두창의 공포에 다시금 물들었는지 병졸들이 그 은은한 미소 앞에서 또다시 하염없이 물러났다.
저들이 언제까지 저리 물러나 있을까.
대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 상민은 그 얼굴과 환후를 보고 내심 놀랐다.
저 정도면 거동하기도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일텐데.
그럼에도 보성은 거동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제자를 통해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부사께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잘 따르고 실천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해심, 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인가.
"해심 스님이 절 너무 과분하게 평가한 것 같습니다."
"내 그 아이의 성정을 잘 알아요. 입 바른 소리를 할 애가 아니지요."
보성은 잠시 서쪽을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무거운 듯 그리고 간절히 바라는 듯, 보성의 말 끝이 약간 떨렸다.
"또한 새로운 하늘을 열 자격이 있다, 그리 말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역적이니, 불충을 운운하지는 않았다.
다만 의문이 들어 물어보았다.
"...제가 정녕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답니까?"
해심은 자신을 그래도 꽤 오래 본 사람이었다.
다만 자신은 이 죽어가는 고승에게 또 다시 확인받고 싶었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부모의 격려와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
보성은 마치 모두 이해한다는 듯 빙긋 미소 짓고는 손바닥을 펴 상민의 등 뒤를 가리켰다.
“자격은, 당사자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지요.”
그의 손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자 강 멀리 빼곡히 작은 점들이 보였다.
고려인의 어선과 야인들의 카누가 몰려들고 있었다.
"세상이 판단하는 것이라 합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