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양공방전
을해년(乙亥, 1275년) 시월 닷새를 기해 교하에 모여 있던 중앙 토벌군은 창양으로 진격했다.
처음에는 출정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군세를 수습하고 재빨리 도성의 권력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무장들은 안서까지 가야 할 당위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연종의 강력한 요청으로 군세를 해산하지 않았다.
“역적 서로군지유 김상민은 사특하고 불충하나 가진 바 능력은 상당한 자입니다. 난을 진압하는 것에 피해가 별로 없었고 우리의 시간보다 놈의 시간이 더 귀한 상황이니 군사를 모은 김에 창양을 쳐야 합니다."
병법의 이치에 어긋나는 말은 아니었다.
또한 별감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는 것에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자가 신손과 연종의 동로군이었으니.
창양 원정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항병(降兵)까지 흡수한 동로군은 숫자로만 삼천.
북로군과 합쳐 원정군을 꾸리면 거의 오천에 육박한다.
하지만 평원에 가득한 군세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야인 노비로 이루어진 군은 고려인보다도 많았으니까.
모두 합치면 숫자만큼은 거의 만 천에 가까운 군세였다.
“안의 사정은 어떻더냐.”
땀을 흘리며 보고하는 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성벽은 견고하고 군량은 많으며 군사들은 정예하고 사기가 높습니다.”
“...알겠다 물러가라.”
존혁이 축객령을 내리자, 불현듯 신손이 도를 빼어들었다.
새로운 고려, 새로운 삼두정 하에서의 신손과 존혁, 그리고 임굉의 권력은 서로 비등했다.
존혁이 흠칫 놀라고, 그의 뒤에 있는 호위들이 제각기 도집에 손을 얹으려는 찰나 빛처럼 도가 휘둘러졌다.
- 커헉
간자들의 목이 나뒹굴고 한 박자 늦게 단면에서 분수처럼 피보라가 일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이 지유!”
그 중에는 머리가 영특하여 쓸 만한 자도 있었으니 존혁은 화를 내었다.
“한 번 배신한 놈들은 두 번 배신하기 쉽지.”
그의 뒤에 있는 연종이 고갯짓을 하자 병사들 몇 명이 그 시신을 수습했다.
“이이...”
존혁이 흥분하여 삿대질을 했다.
간자의 목숨 따위보다 자신의 안전 옆에서 한 마디 말도 없이 칼을 휘둘러대는 저 오만방자함이 그의 심기를 크게 건드렸다.
임굉이 염소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진정하시지요.”
지휘부에는 싸한 냉기가 흘렀다.
임굉은 자꾸 그 사이를 오가며 수습을 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봉합할 역량은 가지지 못했다.
을해년(乙亥, 1275년) 시월 아흐레.
토벌군은 드디어 창양성에 도달했다.
“대단하군.”
연종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적어도 이 장 높이의 벽돌성은 불과 건축을 시작한 지 삼 년 째라는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
물론 그 길이는 인구수에 걸맞게 상당히 작았다. 건양의 삼분의 일 정도 될까.
허나 공세를 취하는 입장에서 길이보다는 높이가 당장 까다롭다.
옛 삼한의 성벽 중에서는 이 장(丈, 1장 = 3m)의 길이보다 훨씬 높은 것도 있었으나, 깊은 해자와 견고한 옹성과 치성, 심지어 현안까지 갖춘 성벽은 오래 전부터 큰 규모의 공성전을 대비하기 위한 의도가 엿보였다.
야인을 상대하는 성 치고는 상당히 과분한 성이니.
주위에는 나무도 모두 잘라내어 운제나 투석기 등을 만들지 못하게 해 놓은 것도 악랄하다.
'역심을 진작 품고 있었구나.'
“창강으로 우회해 상륙을 하는 것은 불가해 보이는가?”
“아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장애물들이 많이 있어 어렵습니다. 또한 반적들이 배들을 많이 가져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정면 공성만이 정답인 것으로 보였다.
“역적 김상민은 들어라!”
본격적인 공성전에 앞서, 조정은 대의를 앞세우고 저들의 민심을 교란시키기 위해 사절을 파견했다.
“그대는 나라의 녹을 받는 장수로, 변방을 수호하며 고려를 지킬 의무가 있는 무장인데 역적 잔당들과 결탁하여 고려의 서쪽을 혼탁하게 하니, 평소 네 성정이 사특하고 음흉한 것을 그동안 몰래 숨겨 왔던 것이다.
네 죄가 하늘에 닿아 필히 멸망할 것이고 반드시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나 만약 네가 폐후와 잔당들의 수괴를 끌고 나와 상투를 풀고 헤쳐 엎드려 조아린다면, 네놈의 가족만은 죽지 않을 것이고, 또한 성 안의 백정들은 무사할 것이니 황상의 덕화를 존숭하여 너는 지금이라도 올바른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지휘부와 창양 남문 누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신손은 얼굴을 찡그렸다.
‘적병들이 한 치도 동요하지 않는구나.’
가만히 철태궁을 쥐고 거리를 가늠하려다, 상민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는 것을 보고 신손이 피식 웃었다.
‘제법.’
이윽고 저 누대에서 이상한 물건, 마치 소각(角) 같이 생긴 것을 들고 나온 상민이 고함을 질렀다.
어찌나 목청이 좋은지, 저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귓가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들렸다.
“주인을 물은 개가 목청이 참으로 크구나!"
이윽고 이어지는 욕설은 걸쭉하고 적나라하여 듣기에 참으로 민망했다.
상민은 승현에게서 수집한 소문들을 열심히 떠들었다.
누가 남색을 즐긴다느니, 여자에게 맞는 성벽이 있다느니.
미래에 가면 취향은 존중하는 게 맞겠지만 이 시대에서는 놀림거리가 분명했다.
음담패설로 저들의 권위에 흠집을 내고 끌어내린다.
군기는 엄중해야 하나, 엄중해야 할 사람이 희화화되면 좋은 것은 단 하나도 없지.
심리전에는 심리전으로.
한 번 말을 할 때마다 창양성에서 왁자하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심지어는 공성 측에서도 웃음을 참는 자들이 많았다.
수치스러운 내막이 강제로 까발려진 존혁은 이를 악물고 도로 성을 겨냥했다.
"모두 공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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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일 차로 야인출신 노병(奴兵)들이 물밀듯이 진군해왔다.
그 수는 징글징글하게 많아, 지평선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들 뒤에서 창칼로 협박하는 독전병을 쏘아 죽이고 싶었지만 화살 사거리 밖이라 참는 수밖에.
공성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없는 자들은 죽창과 사다리만으로 성벽을 공략하고, 오로지 충차만이 고려군들에 의해서 운용되고 있었다.
야인들에게 화살을 많이 낭비하지 말라 단단히 이르고는 구워놓은 벽돌을 던져 저들을 떨어뜨렸다.
당연하게도 갑주를 갖추어 입지 않은 반쯤 알몸의 노병들은 끓는 물과 투석, 간간히 쏘아지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니은 자 모양으로 설계된 옹성의 일차 관문이 뚫렸으나, 충차에게 아낌없이 쏘아지는 화살로 공성은 지지부진했다.
일차 공격은 간 보는 것에 목적이 있는지, 저들은 전력을 다해 공격해오진 않았다.
해자가 사분의 일 쯤 시신으로 찼다.
죽으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노병들의 원통한 눈빛이 누대에서 내려다보는 상민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둘째 날.
기세와 의욕은 좋았으나 공성이라는 것을 처음 해봐 얼타는 신병마냥 방황하는 강족병 칠백.
경험이 풍부한 천 오백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짓쳐들어오는 적들을 막고 있었으나 예비병력은 없었다.
밤새도록 소규모의 무리들이 사다리를 들고 끊임없이 사방에서 다가왔다.
잠을 못들게 하려는 모양.
그렇다 하더라도 신경 쓰이는 공격이 분명하기에.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상민이 수많은 곳을 직접 오가며 적들을 베었다.
심지어 밤에 적제만을 타고 단기 필마로 다가오는 적들을 몸소 처리하니 그 구역의 병사들은 몇 분이나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몸의 회복탄력성이 극도로 높아 이제는 잠까지 초월해버린 느낌이다.
그 모습을 본 문경이 기함하며 같이 합류하니 기병 오십 여 기가 밖을 휘저었다.
새벽 동이 뜰 때까지, 피칠갑을 한 채로 사방을 돌아다니니, 그 기세에 놀라 저들이 더 이상 야습을 보내지 않았다.
저 멀리, 전투의 피곤에 지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동로군 맹장 김인광이 극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네 이놈! 겁쟁이처럼 빼지 말고 나와 자웅을 겨루자!”
“새벽 내내 학습이라는 것을 모르는 병신들을 베어 넘겨 피곤한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듯하구나!”
성 안으로 돌아가려는 상민의 뒤에 무어라 욕설이 들리며 화살이 쏘아져 왔다.
저 똥말은 적제를 추격하지 못하겠지.
화살을 이리저리 피하고 쳐내며 등 뒤로 중지를 세웠다.
‘나 하나 뒤지면 모든게 끝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일기토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저 자는 일개 장수에 불과하고 자신은 사령관이다.
괜히 깝치다 모 영화에서처럼 돌이라도 걸려 넘어져 죽으면 가족까지 무사하지 못하겠지.
네놈의 목은 나중에 가져가마.
셋째 날.
해자가 거의 다 차간다.
노병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아보였다.
이제는 고려 출신의 정예들의 공격만이 남았으니.
그 말인 즉, 다음 번 공격은 정말 매섭게 짓쳐들어온다는 것이지.
어디서 구해왔는지, 저들이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옹성이 걸리적거리는지 운제를 만들고 있는 모양.
투석기 같은 것도 살짝 보이는 듯 했다.
만드는 날짜는 이틀, 혹은 사흘 안에 완성될 것 같았다.
병졸들도 눈에 띄게 불안해했다.
다섯 째 날.
정신이 없다.
분명 졸린 것은 아닌데, 머리가 녹아버릴 듯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쉴 새 없이 뿜어지는 아드레날린이 이제는 역치를 넘었는지 전투에 임하는 고양감마저 들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베고 또 죽이고, 쏘고 떨어뜨리고 던지고.
전투의 난이도는 급상승했다.
사실상 움직이는 허수아비 수준의 야인 노병들과 나흘을 싸운 뒤 중앙군과 싸우니 그 전투의 격이 달랐다.
정말로 어떻게 싸웠는지 모르겠다.
무아지경 속 사다리를 올라타 옹성을 점령한 적들을 베어 넘기다 눈을 들었을 때, 해자는 시신으로 가득 찬 것을 넘어 지면보다 높게 쌓여 있는 곳도 있었다.
저들이 다시 물러갔다.
- 푸후
부관이 가져다 준 물로 입을 헹궈 비릿한 핏물을 뱉어내고는 누각의 계단에 주저앉았다.
시발.
영화와 드라마로만 보았던 웅장한 장면은 없고 다만 그냥 좆같은 삶의 현장이 있을 뿐.
자신도 구름 위를 걷는 듯 한 피곤함이 있는데, 일반 병졸들은 어떠할까.
투구 끈을 풀고 그 짧은 공격과 공격의 틈에서 잠들어 버린 병사.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연신 무구를 점검하는 병사.
너무 힘이 드는지 주먹밥과 감자를 입에 넣다가 토해버리는 병사.
내가 조금만 더 먼저 준비를 했더라면.
연수가 와 조용히 속삭였다.
“지유, 화살이 다 떨어져갑니다.”
“성민들이 만들고 있는 대나무 화살은 얼마나 되느냐.”
“그 수는 제법 많습니다만 화살촉이 부족하여.”
“진퇴양난이구나.”
“죄송합니다.”
“그대가 죄송할 것이 뭔가.”
상민은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래... 사상자는?”
“강병 오백이 사망했고 서로군과 경별초는 이백이 죽고 백 오십이 전투가 불가한 상황입니다.”
벌써 삼분의 일이 넘게 잃었다.
물론 저들은 오천에 달하는 숫자가 상했기에 교환비 자체는 압도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남아있는 것은 오직 정예병 뿐인데.
연수는 지휘관용 식사를 내밀었다.
병사들과 같은 밥을 먹기에는 자신이 밤새도록 소모할 칼로리의 양이 부족했으니.
사양 말고 먹도록 하자.
장조림인지 뭔지, 짭짜름한 고기와 흰 밥이 넘어가니 그제야 조금 기운이 차려졌다.
땅콩 한 대접을 나누어 먹으며 연수가 물었다.
“...얼마나 버텨야 하는 것입니까.”
상민은 하늘을 보았다.
오늘의 해가 지면 또다시 저들은 야습에 나서겠지.
자신도 이미 한계에 달했다.
그래서 내뱉는 말은 연수에게가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조금만 더.”
팔 보호구가 찢겨 사라진 찰갑을 챙겨 입고 그는 주인보다는 아직 쌩쌩해 보이는 금빛 말 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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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째 날.
아침 새벽부터 저들이 공격했다.
꽤 견고하게 만들어진 운제가 여섯 개나 다가왔으며 저 멀리 투석구 세 기에서도 돌이 쏘아졌다.
창양의 전축 성벽은 아직은 그렇게 견고하지 못해, 한 번 돌을 직격당하면 그 부위가 한 입 베어먹은 사과처럼 부서져 내렸다.
상민은 드디어 감추어 두었던 병기를 꺼내었다.
어찌 보면 건설용 녹로와 비슷하게 생겼다.
여태 자신의 괴상한 주문에도 잘 따라주었던 창양의 목수들이 그 크기와 규모에 난색을 표했던 무기.
트레뷰셋(Trebuchet).
동양에선 몽골이 남송을 칠 때, 양양포위전에서 처음으로 활약한 이 투석기는 아랍에서 건너왔다 하여 회회포(回回砲)라고도 불렸다.
송과 고려의 투석기도 상당히 발전되어 있었지만, 그것은 인력과 탄성력으로 쏘는 방식에 더 가까웠다.
반면 이 트레뷰셋은 무게추를 이용하여 추의 크기만 키운다면 무지막지한 크기의 돌을 쏠 수 있는 거포였다.
덩치도 확연히 더 컸는데, 더 크고 아름다운 만큼 더 크고 아름다운 돌을 쏠 수 있다는 것이지.
두 방식 모두 일장일단이 있었다.
인력식 투석기는 야전에서 빨리 만들어 빨리 쓸 수 있었지만 이 투석기는 창양에서 만드는 것만 거의 한 달은 걸렸다.
조금 더 숙달해도 적어도 보름.
심지어 자재도 훨씬 많이 들어가 여러모로 시간이 필요한 무기였다.
이 시기 고려에선 자신과 장인들이 기본적인 지식만으로 처음 시행착오를 해 가며 만든 만큼 내구성이 믿을만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 성능 하나만큼은 기똥찼다.
성 밖에는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여러 가지 색을 칠한 벽돌을 일정 구역에 띠처럼 둘러 사거리를 확인할 수 있게 해 놓은 표식이 있었다.
그것을 기준 삼아 좌표와 색깔만 알려준다면 정밀한 공격도 가능했다.
이렇게.
- 쿠웅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벽돌 덩어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건 여유롭게 아군의 성벽을 겨냥하고 있던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투석기에 떨어져 내렸다.
초탄명중이라, 운도 좋다.
박살이 난 잔해 사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핏물이 낭자하게 흐르는 것이 보였다.
상민이 선보인 투석기의 위력에 여태 승기를 잡아간다 생각을 해 내심 기고만장하던 조정 토벌군이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운제를 공격할 수는 없었지만, 적의 투석기들을 적나라하게 박살내는 것은 사기적 측면에서 상당했다.
- 와아!
육 일 동안이나 시달려온 병사들도 그때 그 순간만큼은 환호를 지르며 적병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성곽 위에서 발사된 거대한 쇠뇌가 운제를 박살낼 때도.
그러나 정작 상민은 웃을 수 없었다.
자신은 가진 패를 모두 꺼냈다.
투석기는 상당히 강한 무기지만, 수성의 입장에서는 그 효용에 한계가 있다.
이렇게 적의 투석기를 맞상대하는 대포병사격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 빼곡하게 몰려오는 적병들을 쓸어담는 무기는 아니었다.
사기진작을 위해 한 번 더 쏘려 했지만, 과연 내구도가 말썽이다. 장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일곱 번째 날.
이제는 몸과 마음 모두 한계에 도달했을 때.
그들의 군영이 철수하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이 그것을 확인하더니,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아직 경계를 늦추지 마라! 교대로 눈을 붙이되 제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라!”
추격은 사실상 힘들었다.
그럴만한 기병도 없었고 체력도 한계에 달했고, 저것이 저들의 계략이 아니라는 장담도 없었기에.
상민도 긴장이 풀리는지 실없는 소리를 하며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중에 영화감독이라도 하면 공성전 고증 하나는 곧잘 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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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존혁이 탁상을 내리쳤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공격을 더 했으면 함락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운명의 날.
공교롭게도 역병이 돌았다.
군영에 역병이 도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지만, 하필이면 그 것이 악명 높은 두창이라니.
시기가 시기라 더 이상 공격을 강행할 수는 없었다.
연종의 아비, 신손 또한 두창에 걸려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 상태.
지휘부는 공포에 빠졌다.
임굉, 그 늙은이는 제일 먼저 강으로 달려가 도성으로 가는 배를 잡아탔다 한다.
그런 꼴불견의 모습에 군의 기강은 바닥으로 쳐 박혔고 전투의 지속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매사에 침착하던 연종 또한 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이 분노와 이 고통과 이 두려움은 왜 하필 자신들에게만.
'혹시 저들이 퍼트린 것이 아닌가?'
그럴 리는 없었다.
창양에 역병이 돌았다는 소리도 못 들어보았고.
어찌 역신을 겪고도 저리 많은 사람이 생존할 수 있단 말인가.
불현듯 연종은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말했다.
“두창은 적아를 가리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이곳에서 후퇴를 해야 하나, 저들에게도 선물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연종은 비열하게 웃었다.
“두창에 걸린 자들을 섞어 경별초의 잔당들 사이에 껴 저들에게 투항토록 하십시오. 군심이 흔들렸던 항병들이니 저들은 냉큼 그들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을해년(乙亥, 1275년) 시월 열엿새.
창양 공방전은 수성 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조정군은 팔천을 잃거나 버리고 오직 삼천의 군세만을 수습한 뒤 도망가야 했다.
고려출신 조정군 대부분의 사망자는 전투가 아닌 역병으로 죽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