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창
중손의 마지막 서신.
그 안에는 노인의 통찰력이 담겨 있었다.
자신이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그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계획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서신은 지금 자신의 고민을 꿰뚫는 혜안이 서려 있었다.
몇 번에 걸쳐 서신을 읽은 상민은 이윽고 문경과 의원 심일석을 불렀다.
“몸은 다 회복되었는가.”
“예, 소장은 건강합니다.”
문경이 짐짓 과장스레 두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외견상 병의 잔재는 잘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구나.”
“부사께서 걱정하셨던 것보다 적은 숫자만이 병마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그리 두려워 하셨던 겝니까.”
“난 내가 아끼는 자들이 상하는 것 자체가 싫다.”
문경이 머쓱하니 머리를 긁고는 말했다.
“그 역병의 흉험함을 비할 때, 부사께서 하신 행동은 정녕 고려를 구하신 행동입니다.”
상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심 의원.”
“예. 부사.”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생겼는데 감당 가능한가?”
“......”
일석은 황망한 얼굴로 저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두(人頭)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창양에서는 그동안 부사의 공덕과 전주 전하의 솔선수범함이 있었기에 저항이 적었으나, 저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도성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껏 해왔던 것을 널리 퍼트려 저들을 설득해야 한다. 내 최대한 지원해 주지.”
“...명을 받들겠습니다.”
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상민이 다시금 문경을 바라봤다.
그 시선의 갈등을 읽은 문경이 고개를 숙였다.
“...수감된 간자(間者)들을 모두 데려오라.”
문경이 명을 받고 떠나는 사이, 상민은 일석이 준 푸른 자기병을 바라봤다.
인류사 최악의 병 중 하나로 꼽히는 천연두의 바이러스가 담긴 자기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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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은 이 신대륙에 천연두는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다.
신대륙의 원주민들이 스페인인들에게 딸려 들어온 천연두와 홍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상당히 유명한 이야기.
따라서 천연두 바이러스가 고려인들에 의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바이러스는 대체 어디서 퍼졌는지 북방의 경계를 괴롭히던 야(椰)족을 절멸시키고 있었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때마침 창양에는 한 번 괴질이 돌았었다.
관과 민의 경각심이 극에 달한 상태.
북쪽에서 두창에 걸린 상태로 포로로 잡힌 야족들과 접촉한 병사들은 격리되었고, 상민은 그들 중 삼 할이 무력하게 죽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의 희생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전염병을 보고받은 그 때, 상민은 소를 관리하는 자에게 달려갔었다.
“혹시, 젖이나 하복부에 두창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소가 있느냐?
그는 일석이 그린 두창의 외견을 묘사한 종이를 펄럭이며 다그쳤었다.
관리인은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당혹스러워 했었지.
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없는 우두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승현에게 건양의 태복시에도 그러한 소가 있는지 알아보라 시켰으나 오직 부정의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젠장.’
이 땅에선 우두를 이용한 종두법을 실시할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이 인수공통감염병이 유럽의 풍토병이라는 사실을 상민은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사태에 절망만 해서는 뭐라도 해결할 수 없다.
남은 비책은 오직 한 가지.
더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오히려 더 경제적이고 빠르게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인두법은 종두에 비해 치사율이 높다.
애초에 천연두에 걸린 자의 고름과 딱지에서 약화된 바이러스라 하더라도 그것의 기본적인 성질이 바뀌진 않았다.
정확한 치사율을 알지는 못했으나 사망자가 없다시피 한 종두법을 비교할 수 없는 노릇.
물론 그래도 강행해야 했다.
특히나 복속 야인들이 많아지고 있는 현 시점에선 더욱더.
수많은 실험을 끝내고, 시행할 세밀한 방침까지 모두 정해놓고 상민은 인두법을 시행했다.
그 때 당시 심리적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창양의 민심이 이렇게까지 동요되는 것은 그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그 날 밤, 자신의 팔을 베고 있던 예가 침상에서 말했다.
“인두법이라고 했지요? 저도 받을려구요.”
상민은 오함마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그녀를 느릿하게 돌아봤다.
“창양의 군민들이 자기의 말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는 그 수밖에 없어. 내 결정이니 말리지 마요.”
“......”
어떠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푸른 결의가 담긴 왕족의 눈은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한참을 대답하지 못한 상민이 끝내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준이는?”
“유모와 시비를 붙여 내실 깊은 곳에 붉은 줄을 치고 왕래를 끊으면 되어요.”
그는 그 아름다운 눈을 한동안 마주볼 수 없었다.
예가 살포시 웃었다.
저 작은 체구 어디에서 저런 용기가 나오는 것인가.
“괜찮아요.”
입술 끝까지 나온 불허의 말은 결국 되삼켜졌다.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네 아내는 소중하지만 남의 아내와 남의 남편은 소중하지 않단 말이냐.
그게 군주를 꿈꾸는 사람의 자질이냐.
수많은 상념이 얽히고설켜 복잡해진 마음을 뒤로 하고 그는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으니.
그래서 결국 농한기의 날을 골라 인두법이 실시되었지.
예전 한국에 있을 때에도, 격리라는 것은 그리 낮선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당시 질병의 확산과 격리에 대한 기사를 유심히 봐 놨기에 망정이다.
기본 현대 의학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하고 미개한 시대라 하더라도 이러한 인두를 시행하는 것에 몇 가지 장점은 있었다. 복잡하고 다원적이며 민주적인 현대 사회와는 달리 농업 및 수공업 정도의 간단한 사회, 극도로 권위적인 명령체계는 나름대로 엄격한 격리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남은 것은 오로지 민심.
심리적 저항을 없애기 위해, 상민과 그리고 왕예가 관아 앞 광장에서 천막을 치고 먼저 인두를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상당히 충격적이지만 효과적인 행동이었다.
“참말로, 부사 내외께서 먼저 받으시는구만.”
“인두란 것을 받으면, 정녕 역신이 몸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이람서?”
“작은 역신이 큰 역신대신 들어오신다 하던디요?”
"역신이 한 번 들어오면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는 소리는 들어봤는데..."
“작은 역신은 안 아픈가?”
“며칠 열 오르고, 종기가 좀 나다 다시 들어간다더라고.”
“그래도 전하까지 저리 직접 받으시는데, 위험하진 않겠지?”
군중들은 아직도 반쯤 의심과 두려움이 섞인 눈초리로 보고 있었으나, 심리적 저항감은 상당히 흐려졌다.
그래서 걱정하고 나중에 받겠다고 내심 꺼릴지언정 그것이 소요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건장하며 명령에 잘 복종하는 자들, 즉 서로군들이 먼저 시범적으로 받았고, 지정된 구역에서 모두 격리되었다.
미리 식량을 배분한 넓은 들판 이격 거리를 준수하여 지은 군영에서 몇 주에 걸쳐 가벼운 두창을 앓고 살아난 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첫 번째 인두였음에도 사망 비율은 백분의 일에서 백분의 이정도.
그 정도면 안타까운 죽음이었을지언정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큰 역신이 몸에 들어오면 삼분지 일,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
기근과 겹치면 걸린 모두가 죽는 일도 허다했다.
또한 어찌어찌 살아남았더라도 후유증으로 크게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은 것은 후유증이라고 하기에는 귀여운 수준.
소문이 퍼지자 군중들은 제각기 망설이면서도 받기를 원했다.
다행히도 예는 무사했다.
열이 꽤 많이 올랐으나 정성으로 간호한 덕에 이내 건강하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 아름다운 얼굴도 상하지 않았다.
자신?
분명 이 육신의 기억에서도 한 번도 두창을 앓은 적이 없다 했는데.
어떠한 증상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여 몇 번이나 딱지를 코로 마셨건만.
‘불노불사라...’
시간과 병마는 진실로 자신을 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고려인들의 사망 비율은 거의 백 명당 세 명 정도로 수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에게 다가온 일석이 놀라움이 가득 담긴 어조로 그리 보고했다.
생각보다 사망률이 저조하다.
평소 창양 군민들의 영양 상태가 상당히 높았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야인 출신들은?”
“섭생(攝生)을 잘 했던 복속 강족들은 다섯 명, 그렇지 아니한 자들, 그리고 야인 노비들은 일곱 명에서 아홉 명 정도로 높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로구나.”
“두창에 걸린 야족들이 거의 떼몰살을 당한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에 비하면 이 정도 비율은...”
“알고 있다. 책망하는 것은 아니다. 그대는 정말 최선을 다해 주었어.”
“황공하옵니다.”
“심 의원, 그래도 언행을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
무심결에 단어 선택을 잘못한 일석이 머리를 조아렸다.
“예...”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상민이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내 그대의 이름을 꼭 사서에 적어주마.”
“어찌 적으시렵니까.”
“천하에서 가장 먼저 인두를 실시한 고금 제일의 명의라 말이다.”
“이것은 모두 부사께서 소생에게 알려주신 것이 아니옵니까. 제 어찌 감히...”
“나는 머리에 든 것을 그대에게 말해준 것뿐이다. 손수 그대 자신에게 먼저 실험하고 환자를 돌보며 이 대업의 기초를 닦은 그대의 지분을 과소평가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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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공격.
21세기의 도덕적 기준으로는 분명 끔찍하고 잔혹하며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공격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 시대의 살고 있는 그로선 그런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생화학 공격은 역사에도 꽤 자주 보였던 전술이다.
몽골군이 흑해부근에서 공성을 할 때 페스트 균이 묻은 의복을 성 안으로 던진 것은 유명하니까.
도덕적 문제를 접어두면 가장 먼저 대두될 사항은 그 무기가 과연 통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
즉 표적에 대한 것 이외에도 다른 무고한 자들, 혹은 공격을 하는 자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인가.
일단 창양은 인두를 실시한 이후, 두창의 공포에선 해방되었다.
하지만 도성의 백성들은 아니다.
자신의 피와 머리가 서서히 차가워지고 있다 하더라도 애먼 사람들이 끔찍한 병, 그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는 취미는 없었다.
따라서 조정의 군세가 이곳을 향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상민은 도리어 슬그머니 웃었다.
무고한 피해자가 없겠구나.
창양에 심어져 있던 간자들을 풀어준 상민이 그들이 성 밖으로 달려가는 것을 누대에서 바라봤다.
저 끝에는 도성의 군세가 다가오고 있겠지.
“저들이 제 무덤 속으로 들어오는구나.”
태연한 어조와 신색, 문경은 또 한 번 감탄했다.
“과연 형님입니다. 수천 대군을 앞에 두고 망설임이 없으시다니요.”
“우리의 야금술이 뒤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성곽은 그렇지 않지.”
토성 내성 밖, 유형거와 거중기, 녹로를 이용해 지은 전축(磚築) 성곽은 이미 창양을 빈틈없이 방어하고 있었다.
심지어 창강 변에도 강으로부터의 상륙을 저지할 낮은 성벽이 쌓여 있었으니.
장인들의 창의력을 격려해 만든 수성 무기들도 내부에서 밖을 겨냥하고 있었다.
곡창들은 곡식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화공을 대비하여 물과 진흙을 뿌릴 수 있게 조치를 해 놓았다.
“경별초의 병사들은 어떻게 되고 있느냐.”
“지금 가능한 인원들로 새로이 편성했지만 령(領, 1000명)의 절반이 전부입니다.”
급히 충원한 강족병 칠백 명까지 다 합치면 대충 이천 이백 명.
병법의 이치에 공성을 논하는 자는 수성의 세 배를 가져야 한다 했지만 도성으로 오고 있는 군세는 자신의 세 배가 훌쩍 넘었다.
그래도 성 밖 너른 평원을 오연히 바라보고 있는 상민의 얼굴에선 그늘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제장들과 병사들은 그러한 지휘관을 보며 창대를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