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9화 (39/653)

승천

연회는 무르익어갔다.

시범적으로 생산되고 있는 온갖 종류의 술들이 나와 무장들은 오랜만에 흠뻑 취했다.

안주로는 땅콩 이외에도 감자와 생선 튀김,

‘피쉬 앤 칩스라니. 맙소사.’

그나마 먹을 만한 영국 요리 하나를 뺏어온 것만 같아 미안했지만 미안하지 않았다.

소금만 뿌렸을 뿐인데 감자튀김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일단 튀기면 신발도 맛있어진다는 말대로 튀기는 행동 자체가 사기적인 것도 있었겠지.

하지만 감자 자체의 맛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미각 현지화 적응이 끝나서 그런 것일지도.

오랜만에 자신의 의형제와 같은 자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니 무거웠던 가슴의 짐이 조금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다들 이제 가정을 꾸렸구나.’

치기어린 옛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는 제각기 가정을 꾸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다가 복잡해졌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상민은 오늘 당직이라 갑주를 챙겨 입고 있는 연수에게 아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좋은 시간을 함께 나누지 못해 안타깝구나.”

연수는 으레 그러하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니 심려 마소서.”

“그래.”

“부사, 전령이 왔습니다.”

연수가 귀엣말을 하자, 상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어두운 곳으로 가 전령에게 두루마리를 건네받은 그는 봉인되어 있던 끈을 풀어 한참동안 읽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연회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모양.

상민은 이 평온함을 깨고 싶지 않아 별 일 아닌 척 했으나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아는 문경의 눈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크흠.”

문경이 주변을 둘러보며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취해 비틀거리고 부른 배를 두들기던 무장들이 그 눈치에 자세를 바로 했다.

부사는 아직 턱에 손을 괴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그런 그를 무장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조용하게 기다렸다.

겨울이라 밖이 살짝 추워 군데군데 설치된 화로에서 가끔 불꽃 튀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을 정리한 상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마당에 연회를 위해 둘러앉은 무장들이 참으로 많다.

가장 믿는 아우이자 명실공히 자신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문경.

무장 직급은 아직 낭장에 불과하지만 문무가 모두 뛰어나 문신계 판관(判官)의 직을 겸임하는 곽연수.

처음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심복으로 자신의 곁에서 잘 떨어지지 않을 정용길.

가벼운 언행이 많아 경박하다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원리원칙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기는 박량.

식탐이 많고 잘 투덜대지만 맡은 임무는 책임감 있게 해주는 사의까지.

자신이 이곳에 떨어지고 맨 땅에서 헤딩을 하는 것을 도와줘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공헌한 이들.

이들은 공기도 아니고 버튼 몇 번으로 클릭하여 만들 데이터 덩어리도 아니다.

훨씬 고차원적 개체였고, 살아 숨쉬며 자신과 똑같이 붉은 피를 흘리는 사람들.

몽골과 같이 싸워왔던 기억부터 포함하면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같이 눈물을 흘리고 같이 웃었는가.

자신은 이들을 형제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비단 장수들뿐만 아니라, 병사들까지도.

맨 처음 이곳에 떨어져 이 같은 상황에 마주했을 때,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별로 없었다.

혈혈단신으로 넘어와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던 게 4년 전, 올해에 들어서야 당면한 과제에서 눈을 돌려 다른 일들도 신경을 쓸 수 있을 여유가 생겼으니까.

이곳에서는 콘솔도 쓰지 못하고 세이브파일을 로딩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철인중의 철인 모드.

한 번의 잘못된 결정이 모두를 죽음으로 이끌 수 있었다.

자신은 가장 승리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그렇다면 불멸자로서 필멸자에게 할 수 있는 필패의 전략 중 하나를 써야겠지.

존ㄴ... 아니 존귀하게 버텨라.

존버하다 보면, 결국 저 자들은 세월의 흐름에 삭아 없어질 것이다.

타당한 말이었다.

삼별초의 무리들은 군인의 비중이 극단적으로 높은 단체였다.

세상 어느 국가와 단체가 인구수의 사분의 일이 넘는 자들을 정규군으로 유지하고 있단 말인가.

한 세대, 딱 한 세대만 지나면 이곳에 같이 떨어진 자들은 늙고 허약해질 것이고 추가로 징집된 군대들은 규모도 적을 뿐더러 실전경험이 일천한 햇병아리들이겠지.

그렇다면 그 때 이후로는 오로지 단체의 체급, 그것이 모든 승부를 판가름할 것이었다.

내정 하나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기 때문에 그 때 이후로 안서가 도성에 밀린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당장 태어나는 아이의 숫자만 단순히 비교해 봐도 이쪽이 압도적인 인구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시세는 그렇게 안온한 나날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도성에서 또다시 난이 일어났다.”

무장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별감이 적석에서 야인노비들이 벌인 큰 소요를 친히 진압하러 간 틈을 타 도성 안에서 일을 일으킨 자들이 있었다 한다."

고풍스러운 두루마리 두 개를 펼쳐 보인 상민이 왼쪽에 놓인 것을 집어 들었다.

“별감의 명령서다, 교하로 와 도성의 배신자들을 토벌하는 것에 일익을 하라고 명하는군.”

무장들은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상민의 말을 듣고 있었다.

“또한, 이것은 황명으로 작성된 칙서(勅書)이다. 을해년 9월 초를 기해 교하를 양쪽에서 합공하여 반적들을 토벌하라는 명이다.”

다른 하나의 두루마리가 오른 쪽에 놓였다.

무장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연수가 그들을 대표하여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합니까.”

상민은 두 개 모두를 집어 들더니 놓여있는 화로에 두루마리들을 던졌다.

무장들이 놀라 웅성대었다.

“이 잘 짜여진 극(劇)에 우리는 사냥개에 불과하다. 참여하는 순간 우리가 현생에서 마지막으로 볼 장면은 뜨거운 가마솥의 뚜껑이 되겠지.”

“......”

“우리는 싸워야 할 상대가 따로 있다. 반군도, 토벌군도 감히 그에 비할 수 없는 대적(大敵)이니 준비를 단단히 하거라.”

--

“윤서야.”

“예.”

“이것을 중전께 전할 수 있겠느냐?”

“...위험한 일이지만, 흥양사 주지를 통해서라면 어찌 전할 수는 있겠습니다.”

“그래, 부탁함세.”

부하를 떠나보낸 노장은 앞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흉수를 숨기고 있던 자들이 이리 능수능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니.

삼천의 경별초는 반군 삼천과 규모는 같았다.

금군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결국은 장수 일신의 능력에 의해 판가름이 날 것이다.

‘동로군이 움직이는 것은 보고받지 못했건만.’

자신의 실수였다.

북로군지유 유존혁이 요 근래에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미리 손을 쓰기 전, 생각보다 빨리 일을 거행했다.

어쩌면 적석에서의 난리도 저들에 의해 일어난 일일지도 몰랐다.

‘도성을 빼앗긴 이상, 아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황상의 명을 참칭할 수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고려의 대부분의 물자는 건양에서 생산되어 건양에서 운반된다.

도성으로부터 길이 고립된다면 군대는 말라죽고 마는 것이지.

‘방법은 오직 하나.’

말라죽기 전에, 다른 샘을 파는 것.

상민, 그 아이는 항상 자신의 능력 중 사 할은 숨기고 있었지.

창양의 잠재력은 별감에게 보고된 것보다도 훨씬 대단할 터.

삼천의 군세 정도는 먹일 군량을 댈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상민에게 이미 파발을 보내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웃음 지었다.

‘네가 자초한 일이지 않느냐.’

분명히 그는 사냥개를 들에 풀어 놓았다.

어떤 일이 생길지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지만 이는 결과론적으로 다행이다.

만약 왕예가 건양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상민으로선 교하를 공격하여 자신의 배후를 찌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 그에게서 지원을 기대할 수 있을까.

‘부질없도다.’

노장은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거기 아무도 없느냐?”

잠시간의 침묵 끝에 한 사내가 대답했다.

익숙한 목소리라 살짝 곤두세워졌던 신경이 풀렸다.

그가 찰갑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왔다.

“부르셨습니까.”

“물 한잔 가지고 오너라.”

“예.”

잠시 밖에 나간 그가 다시 들어왔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던 중손은 이내 허리춤을 파고드는 섬뜩한 칼날을 느꼈다.

한 번.

울컥, 마시던 물을 토했다.

두 번.

중손이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세 번.

제 자리에 주저앉은 노인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꺼져가는 것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는 형형한 눈빛을 한 채, 한 때 자신의 심복이라 여겼었던 자를 올려다보았다.

“순공이, 네놈이 어찌?”

“...별감께서 무신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마땅한 권리를 부정하시며 그 위상을 소홀히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도...도성의 소출은 증가하는데, 야...야인 노비들은 물론, 고...고려의 백성들은 굶어만 간다.”

- 쿨럭

간간히 나오는 헛기침이 자꾸만 그의 말을 방해했다.

끓는 목소리로 마침내 문장을 완성시켰다.

“그렇다면 누가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냐.”

그 자는 다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의 최측근이 배신하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 그 놈이 옳았던 것이구나.

이 고려는 썩어빠졌구나.

썩은 나무의 가지를 잘라 새로운 땅에 심는다 하더라도, 그 가지에서 꽃이 피겠느냐.

그리고 그 사실을 도성에서 천리나 떨어진 곳에 있는 자가 알아차릴 동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자신은 무엇을 했는가.

북적들을 향했어야 할 칼은 또다시 고려의 백성을 쥐어짜고 있었다.

본질은 변하지 않으니.

그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비수가 폐를 건드린 탓인지 웃음 끝에 피가 터져 나왔다.

조금씩 물에 빠지는 기분.

차오르는 피에 그는 질식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무엇이 그리 웃긴지, 그는 자꾸만 실소를 흘리며 피를 뱉었다.

‘너무 늦게 알았다.’

그가 살리고자 했던 나라는, 긍지를 지키며 항전하는 나라였지만 그것이 만백성을 배불리 먹이는 나라의 의미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부여잡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껍데기에 불과했다.

노장은 서쪽을 바라보았다.

‘내 사냥개가 되겠다고 했었지.’

큰 사냥개라 다루기 힘들 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거죽 속에 흑색과 노란 줄무늬를 숨기고 있었던 것을 자신 이외에 누가 알았겠는가.

죽어가는 와중에도 계속하여 중손이 웃자, 순공이 당혹해 했다.

“...내 웃는 이유를 네 어찌 알리오.”

이제는 딱히 내 문제도 아니니.

속 편한 소리를 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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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뇌부가 무너져 순식간에 와해된 반군.

그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잔당들은 고려의 서쪽 끝, 창양으로 향했다.

일견 장엄하고 비장하게 보이는 광경.

보여지는 것이 어떠하든, 상민에게는 외통수가 따로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나루터 앞에 떠 있는 수많은 함선들.

천오백에 달하는 군세.

저것들이 이곳을 공격하러 온 것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겠지만.

“부사, 부디 저희를 받아주십시오!”

그들의 대표로 나와 있던 중랑장 조시적이 땅에 절뚝이며 내려와 머리를 찧으며 그리 말했다.

갑주는 적들의 것인지, 자신의 것인지 이미 혈흔이 명백했다.

상민은 배들을 바라보았다.

몸 성한 자들이 그리 많지 않아보였다.

무구와 갑주조차 없는 자들도 많았다.

“......”

이들은 전력외다.

무리가 거의 천오백에 육박한다 하더라도 다친 심신을 추스르고 무구를 새롭게 받아 정비하는 것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맨 땅에서 시작한 창양의 야금술이라 아직은 옛 개성 고려는 물론이고 고려 출신 장인들의 기술이 집중되었던 적석의 장인들보다 뒤떨어지니, 만든 무구조차 믿을 만 하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들을 받지 말까.

되돌아가라 겁박한 후 조정의 권위에 조아린다면.

고개를 저었다.

별감을 잃고 손쉽게 제압당한 반군은 당연하게도 저들의 세력에 흠집 하나 잘 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 세력이 마지막으로 향할 곳은 자신이 분명했다.

‘아직 내 군세가 회복될 시간이 필요한데.’

그리고 그 순간, 몽수를 뒤집어 쓴 여인 한 명이 배에서 내렸다.

그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보는 순간 상민은 아차 싶었다.

마지막,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지는 순간.

‘음흉한 노인네, 죽어서까지 나를.’

불과 반 년 사이 얼굴이 반쪽이 되어버린 중전, 아니 이제는 폐서인되어 폐후 배씨라 불러야 하는 여인은 붉어진 눈시울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별감께서 전하라 하신 편지입니다.”

그 옆에 그녀를 호위하던 중랑장 김윤서가 편지를 건냈다.

- 언제까지 망설일 것이냐.

썩은 고목을 단번에 자르려면, 도끼질 한 번이면 충분한 것을.

“그 도끼질이 고려를 상하게 한다 하더라도 말입니까.”

독심술이라도 배운 모양, 서신에는 한 문장이 더 쓰여 있었다.

- 고려는 고목이 아닌 씨앗이니. 도끼로 그 작은 씨앗을 해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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