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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8화 (38/653)

새로운 작물들

옛날 옛적 안데스 산맥, 세상의 배꼽이라고 불리우는 그 곳에 한 왕국이 있었다.

페루 남부, 볼리비아 서부와 칠레 북부를 영향권으로 넣었던 그 왕국은 찬란한 성세를 자랑했었다.

그 이름은 티와나쿠(Tiahuanaco/Tiwanaku).

태양의 왕국이자, 후대 이곳에서 번성할 장엄한 문명들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가 이 땅에 도달하기 전, 그 태양의 불은 꺼지고야 말았다.

가뭄이라는 재앙 앞에서 그들은 무력하게 멸망했다.

그러나 위대한 문명은 어떻게 해서든 후세에게 족적을 남기기 마련.

그 거인의 시체 아래에서 다른 문명들의 싹이 틔워졌다.

티와나쿠 동시대 북쪽에서 와리(Wari) 제국이 한번 떠올랐다 사그라졌고

남쪽에서 아이마라(Aymara)족의 부족왕국들이 성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작은 도시의 부족에 불과하지만, 먼 훗날 위대한 사파 잉카에 의해 타완틴수유(Tawantinsuyu)로 불릴 쿠스코(Cusco) 왕국이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 중 현재 아이마라 왕국들의 세력은 넓고 강했다.

티와나쿠의 후손을 자처하는 그들은 본거지인 티티카카 호수에서 떨쳐 일어났다.

위대한 열 두 부족들은 서로 반목하고 화합하면서 차츰 영토를 넓혔다.

주변의 부족들을 침공하여 흡수하면서.

북쪽으로는 와리 제국의 후예들을 압박하고 남쪽으로는 아타카마와 다른 군소 부족들을 내몰았다.

피치 못할 이유는 있었다.

콜라오(Qullaw, Altiplano) 고원에 살아가는 부족들은 만성적인 가뭄에 시달렸다.

특히 남쪽 고원은 더욱더.

남동쪽의 한 부족, 그들 스스로를 치차 부족이라 칭하는 자들은 강대한 부족들이 있는 북부 고원을 뚫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래의 저 미개한 야만인들과 교류를 한다?

아직까지도 부족장을 선출하지도 않는 야만인들과 어떻게 교역을 하겠나.

건조한 땅의 부족(Chaco)들은 그 땅만큼이나 성정도 고약하여 말로 무언가를 이루기보다는 창으로 찔러 죽이고 빼앗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그들 자체도 식량이 부족하여 풍요로운 남쪽을 약탈하는 무리들인데.

올해 가뭄은 혹독했다.

부족원들은 굶주리고 쓰러져갔다.

열 두 부족 중 가장 나약하여 가장 남쪽에 위치한 치차 부족은 살아남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조그맣게 계단식으로 농업을 해왔어도 올해는 도저히 답이 없는 상황.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가려 해도 다른 강대한 부족들이 길을 막고 있으니 이를 어쩐다.

그러던 와중에, 소식이 들려왔다.

저 풍요로운 남쪽에, 거대한 문명이 들어섰단다.

그 문명은 말도 못할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워 감히 바라볼 수가 없을 정도라 하였다.

따라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야심이 있는 치차 부족의 부족장이 라마와 알파카로 이루어진 캐러밴을 이끌고 그 먼 거리를 남하하여 그들의 땅으로 간 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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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길을 운용하며 안서도호부는 수많은 적대관계가 생겼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금이 나는 호수라 해서 금호(金湖)라 이름 붙인 곳에까지 가기 위해선 일단 창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야 했다.

그 후 살짝 북상하여 넓은 본류가 동쪽으로 한번 굽이치는 곳에서, 그곳이 아닌 지류(Salado River)로 방향을 튼다.

지류는 그 크기가 그리 작지는 않았지만 창강 본류와 비교할 수 없었다.

그 지류는 어찌 보면 경계선과 같았다.

윗 고원에 사는 자들이 아래에 오기 위해 넘어야 할 강이었으니까.

공교롭게도 그 강은 영구적인 강이라 볼 수 없었다.

매년 가뭄이 들면 그 작은 지류는 말라비틀어져 흔적조차 찾기 힘들게 변했다.

그리고 그 때, 그 야(椰)족들이 내려오는 것이지.

가뭄이 들어 강이 말라붙고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남쪽을 약탈하는 것은 마치 연례행사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족이 죽어버린 사건도 있어 상민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군 이백에 더해 강족병 이백을 징집하여 직접 북쪽을 정벌하기도 했었다.

반면 의외의 우호적인 관계도 생겼다.

사의의 말대로 약속된 시간에 물건을 가지고 금호(金湖)에 도착하여 보니 한 부족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이 땅에 떨어져, 이 시대 이 대륙의 사람들의 수준에 극히 실망하고 있던 상민에게 그들의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스스로를 위대한 왕국의 후손이라고 칭한 이 무리들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다변적인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명이 특출나게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의복이라도 갖춰 입은 것이 어디야.

모직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자들을 바라보던 그가 통역에게 고개를 돌렸다.

“잉카?”

그들은 알아듣는 기색이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중 아래 땅의 언어를 할 수 있는 자가 있어 앞으로 나왔다.

“위대한 태양 왕국의 후예들이자, 드높은 산맥과 드넓은 세상의 언어, 루나 시미(Runa Simi)를 쓰는 자들이랍니다.”

어딜 가나 태양을 숭배하는 것은 비슷하구만.

두 명의 통역을 통해 두 명의 지도자가 서로 말을 나누었다.

이렇게 격이 높은 부족장과 말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다.

“고려의 영토에 온 것을 환영하오, 낮선 이여.”

환대의 언어에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것도 전 인류의 관습적 행동 아닐까.

“이곳, 금호까지 오는 길이 험난하지 않았소?”

이제는 환속하여 머리가 자라 풍성충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동자승 출신 통역이 열심히 번역했다.

“붉은 강(필코마요, Pillkumayu)을 따라 내려오면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길이가 길지언정 일정이 그리 험하지는 않았답니다.”

“그 강은 가뭄 때 말라 비틀어지지 않는가?”

“대지의 신의 가호를 받아, 쉽게 메마르지 않는답니다.”

“그렇군.”

젊은 부족장이 덧붙였다.

“그리고 예전에, 고려가 잔인하고도 야만스러운 야자나무 부족들을 토벌해 놓은 덕분에 붉은 강의 치안이 좋았답니다.”

그가 짐짓 공치사를 했다.

야(椰)족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 지긋지긋한 놈들.

하지만 약간의 의문이 들었다.

자신들이 그들을 북동쪽으로 쫓아낸 것은 맞으나 토벌이라고 칭할 수는 없었다.

기껏 수백 명 죽인 것이 전부였는데.

그것이 강의 치안에 영향을 미친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서로의 영역에서 가져온 물품들을 팔았다.

고려는 그들에게 보존 식량과 도자기, 생필품과 장식품 등을 팔았고,

그들은 고려에게 알파카와 라마, 비쿠냐 등 온갖 짐승들의 털과 그들의 작물, 금과 은, 그리고 보석들을 팔았다.

“저 말린 마히즈(Mahiz, Maize, 옥수수)의 종자라는 것은 팔지 않는다던가?”

“세 자매의 씨앗은 신성하여 외부인에게 줄 수 없답니다.”

“세 자매는 또 뭐야.”

뭐가 되었든 그들이 신성한 곡식을 팔지 않겠다는 말에 약간 빈정이 상했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니들도 그거 안 팔면 우리도 안 팔아.

그들이 검고 단단한 것, 철기를 팔아 달라 요청했을 때, 상민은 그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쌀도, 밀도, 보리도, 감자도 있어 옥수수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겠다만.’

너희들은 이 철기를 몹시 필요로 하겠지.

안절부절 못하는 부족장을 보며 상민이 씩 웃었다.

아쉬운 놈이 곧 손을 내밀지어다.

아직 서로를 믿지 못해 조금씩만 이루어지는 교역이지만 이를 통해 고려에 들어온 작물들은 많았다.

퀴노아(Quinoa, Kinuwa)

애호박과 비슷하게 생긴 주키니(Zucchini),

그리고 먼저 받았던 감자까지.

교역이 서로에게 꽤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치(治)족과 안서도호부 두 집단은 서로 평화의 약속을 했다.

산맥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 중 가장 약한 부족과, 산 아래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의 일개 장수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장대한 무역로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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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이 매섭다.

“이게 고려를 구할 작물입니까?”

“......”

순수하게 학문적으로 궁금해서 묻는 지숙과는 달리 소금길을 오가며 직접 고생을 한 사의는 빈정거렸다.

“이 아우 불알보다도 더 작을 것 같수만.”

상민은 어이가 없어 화를 내려고 해도 감자 크기가 커지는 일은 없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감자씨앗으로 심어서 그래. 계속 종자개량 해서 큰 게 나오면 그 알을 잘라 심으면 될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 하겠습니다.”

“오로지 시간만이 답이라는 것이지.”

그래도 자신이 없는 사이에 제각기 열심히 일을 해 준 무장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자신의 품으로 안전히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상민은 따스한 겨울이 오기를 기다려 큰 연회를 열었다.

새로운 작물들로 새로운 음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고려의 밥상은 이전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초창기, 이곳에 막 떨어졌을 때 그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보자.

밍밍한 김치의 초창기 버전, 즉 무와 배추를 절인 것에 대충 텁텁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곡물이 섞인 밥, 간장 종지. 가난함과 불교적 채식주의의 환상적인 궁합은 세상에 고기가 없다면 콱 죽어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육식파인 상민을 서서히 말려죽이고 있었다.

다행이도 이 땅에서 가축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목축업의 부흥기.

소와 말이 새끼를 치기도 했고, 도성에서 사오기도 했고, 심지어 몰래 빼돌리기까지 해 그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감히 귀중한 몸이셔서 먹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만만한 것은 자그맣고, 고기를 얻기 위해 기르는 가축들.

대표적으로 닭과 돼지가 있겠지.

그것들에 이번에 무역으로 얻어온 짐승이 하나 더 생겼다.

“이걸 뭐라 부른다 하였습니까?”

“꾸이였나?”

“꾸이?”

현대인에겐 한번쯤 보았을 동물, 기니피그였다.

이놈 참 물건이다.

예전 물쥐를 한번 먹고 그 외견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지 않게 된 상민은 쇠꼬치에 관통당해 빙글빙글 구워지는 기니피그, 아니 꾸이의 귀여웠던 얼굴에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난 돼지도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열심히 잘 먹고 살았어.

그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꾸이의 귀여운 외모만큼이나 고기도 맛이 좋았다.

고기를 다 먹고 상민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퍼질까봐 한 템포 늦게 내어 오라고 한 음식.

칼국수(切麵)였다.

밀의 비중이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진 고려였고, 게다가 수차를 통한 제분 기술이 발달하면서 밀가루 국수는 고려의 서민들에게도 빠르게 퍼져나갔다.

예전에는 밀을 잘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기에 밀가루 음식 자체가 꽤 고급 음식으로 분류되었지.

괜히 메밀을 넣어서 만든 국수들이 성행한 것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 메밀국수가 별미로 꼽히는 것과는 달리 메밀은 분명한 구황작물이니까.

반면 지금은 아예 달랐다.

일반 백정들도 하얀 국수를 먹는 것이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칼국수에는 이번에 들여온 감자 그리고 주키니가 애호박 대신 송송 썰려 들어가 있었다.

전분으로 약간 걸쭉해진 맛이 예전의 밍밍한 칼국수보다 훨씬 좋았다.

칼국수까지 해치운 무장들이 제각기 앞에 놓인 그릇에 손을 뻗었다.

후식으로는 역시 견과류지.

엄밀히 따지면 뭐 협과라고 한 것 같기도 했는데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소금이 뿌려진 땅콩은 고소하고 짭짤하여 금방금방 사라졌다.

땅콩은 무역으로 안데스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팜파스와 이 대륙에 넓게 분포했던 것 같다.

이 땅콩이라는 것은 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콩과 같이 기르는 토지의 비옥도를 올려주었다.

이미 고려는 콩을 가지고 있었는데 과연 농업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볼 수는 있을까.

콩과 비슷하면 콩을 쓰면 되니까.

하지만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바로 땅콩이 콩에 비해 지방의 비율이 높다는 것.

임산부들에게만 주는 것을 넘어 더 많은 비누를 생산하고 싶어 하는 도호부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다.

‘제각기 몸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것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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