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여인
잔치가 파하고 객들은 모두 물러간 지 오래.
“길몽이는?”
“자러 갔어요.”
준이는 유모와 영금이 부부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건넛방으로 건너가 재우는 모양.
예는 슬며시 주변을 돌아보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상민의 겉옷을 열었다.
대범하게 웃으며 다가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하지만 목 뒤에 깍지를 끼는 그 포즈가 자유투 하려는 농구선수도 아니고 괴상했다.
상민이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었다.
“안 불편해?”
“불편해요.”
키가 큰 그가 더 불편했다.
그는 번쩍 들어 올려 그녀를 안았다.
예가 기분 좋게 웃었다.
결혼한 지 일 년이 되었는데 성격이 상당히 적극적으로 바뀌었단 말이야.
이것이 유부녀의 위엄인가, 어머니의 위엄인가.
뭐가 되었든, 항상 자신이 더 애가 달아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 그대로 충격이 크지 않게 그녀를 침상에 던지고 그는 황급히 옷을 풀었다.
여왕님처럼 침상에서 한 손에 머리를 괴고 다리를 꼬며 요망한 포즈를 취하려던 예가 기습적으로 덮쳐지는 무게에 기분 좋은 비명을 내질렀다.
-
“그래서, 창양으로 가도 된다 하더라고.”
부부사이가 내밀해지면서, 사석에서 상민은 말을 반쯤 놓고 있었고, 예 또한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뭐가?”
“제가 평소에 얼마나 중전께 잘했으면 별감이 그런 결단을 내리셨을까요.”
“......”
약간 어이가 없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그것이 결정에 꽤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결정을 내릴 때, 현대인만큼 그리 이성적이지가 못했다.
“일주일 내로 갈 거야. 준비해요.”
“알았어요.”
이제 붙어 지낸다는 사실이 기꺼웠는지, 그녀의 얼굴엔 활짝 웃음꽃이 폈다.
“가서는, 이렇게 으리으리한 전각도 없을 테고, 시종을 드는 궁인들도 많지 않을 건데 괜찮겠어요?”
“네. 무엇이 더 중한데.”
예는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파묻었다.
개량 고급 비누에 꽃을 섞은 것이 효과가 좋았다.
그녀의 머릿결에 코를 박은 그가 웅얼거렸다.
“그리고...”
결혼 전부터 따진다면 함께한 세월만 거의 삼년.
서로를 알기에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자신의 남편이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면 바보가 따로 없겠지.
예는 일부러 저러는지 자꾸만 뭐라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남편의 말을 듣지는 못했으나 이해할 수 있었다.
'난 결정을 내렸어요.'
그 때 당신이 물은 그 질문에 대한 결정을.
그녀는 굳이 말을 하진 않았다.
--
상서우승 임굉은 그의 딸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태에 크게 격노했다.
“아무리, 아무리 별감이라고 하셔도 이 참람된 일을 벌이신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소이다!”
정방의 여론은 갈렸지만 그 비율은 상당하게 차이가 났다.
객관적으로도 잘못한 별감의 죄도 있었지만, 또한 그만큼이나 경우가 없이 행동했던 귀비의 소행도 마찬가지.
도긴개긴이다.
하물며 그들 정방은 위치와 편제상 보위도감에 속해 있는데.
일부 문신은 심지어 그들 자신의 주군이 황상이 아닌, 별감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많았다.
등청하기 전에는 개성에 있을 왕정의 충신을 자처했던 자들이 이제는 권력의 개가 되어 기어 다니는 꼴을 보라지.
하지만 임굉도 평소에는 별감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자가 아니었던가.
지금 와서 제 여식의 훈육을 잘못한 자신의 죄를 탓하기는커녕 오히려 저리 화를 내는 것이 좋게 보이진 않았다.
문신들은 자신들에게 화가 튈까 종종걸음으로 흩어졌다.
“이 쓰레기 같은 놈!”
임굉이 공공연하게 불만을 제기하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은 중손은, 크게 성을 내고는 그를 한림원(翰林院)의 학사승지(學士承旨)로 임명했다.
종에서 정으로 품계 상으로는 오히려 한 단계 올랐으나, 현 무신 치세의 한림원은 하는 일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임굉은 이를 갈았다.
--
갑술년(甲戌, 1274년) 십이월 열나흘.
방을 빼야 하는 입장에서, 여러 뒷정리를 하는 것도 오늘로써 끝이다.
나름대로 왕녀의 입장에서 챙겨갈 물품들이 많았다.
하루 종일 이삿짐을 싼 궁인들과, 그것을 감독한 예, 그리고 하루 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않는 아들 모두 깊은 잠에 들었다.
오직 불면증에 시달리는 상민만 하염없이 후원을 거닐 뿐.
달은 보름달과 비슷해졌다.
남반구라도 보름에 달이 커지는 것은 똑같구나.
다만 초승달과 그믐달의 생김새가 서로 반대인 것이 신기했다.
고민이 많았다.
노인네가 무슨 심보인지 온정을 베풀어 가족들을 해방시켰지만, 그것이 여전히 변방에서 날뛸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진 않았다.
여덟, 아홉 배의 군사적 우위.
그것은 여전히 명백했다.
심기를 다스렸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다.
눈을 감고 호흡을 하는데 문이 삐걱이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궁인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의 전각은 메인 출입구가 있었고, 그 뒤 뒷문이 있었다.
뒷문은 흥평궁에 근무하는 궁인들과 비밀리에 방문하길 원하는 자들이 다니는 곳으로 외부가 아닌 궁 내부로 연결되어 있어 호위가 필요하지도, 배치되지도 않았다.
여성들이 기거하는 전각은 더더욱.
지금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손님은 앞서 말한 두 가지 유형 중 분명히 후자에 속하겠지.
보기 힘든 고풍스런 비단옷과 화려한 장신구.
그리고 그것보다 돋보이는 미모.
흔히 옛 미인들의 상이 현대적인 미인과 다르더라도 본질은 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면이 있었다.
백옥같이 흰 피부, 또렷한 이목구비 등등.
추녀가 미인으로 둔갑하고 미인이 추녀로 둔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귀비 임씨는 현대로 떨어져도 인기가 충분히 많을 상이었다.
그리고 몸짓 하나 하나에 서린 극도의 요염함.
귀비로 내정되자 수많은 고려 사내들의 베갯잇을 적셨다는 미녀.
또한 근래에 벌어진 일로 다소 수척해진 얼굴이 눈에 띄었다.
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그 오만하고 싸가지 없는 표정보다 지금 이 순간 마치 한 떨기 비련의 꽃처럼 행세하는 것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야심한 시각에 귀비께서 어찌 이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상민은 말을 했으나, 눈길을 돌릴 수는 없었다.
사극덕후의 입장에선 그저 신기했다.
작정하고 입고 온 듯, 이토록 돋보이고 요염한 고려의 복식은 솔직히 처음이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내 왕예도 검소한 면이 있어 옷이 이토록 화려하진 않았다.
은은한 붉은색이 감도는 비단에 수놓은 금색 실과, 올린 머리에 꽃은 장식들, 그리고 수많은 장신구들.
그 사치스러움을 모두 수용하는 것도 재주긴 재주였다.
근데 불과 일주일 전의 견의(絹衣)사건 때, 입던 옷, 장신구 죄다 압류당한 것 아니었던가.
꿍쳐놓은 것이 있었나보구나.
상민은 그 사치스러움에 고개를 저었다.
대단도 하셔라.
“전주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귀비는 문득 궁금한 듯, 그러나 전혀 궁금해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척 했다.
“부사의 아이는 어디에 있지요?”
“제 자식은 처소 안에서 곤히 자고 있을 것입니다.”
“성화전주께서도?”
내명부(內命婦)의 위계 상 중전 다음의 최상위에 있는 귀비라도 외명부(外命婦)의 최고 서열인 공주(公主)를 함부로 칭할 순 없었다.
“예.”
주변은 조용했다.
모두가 지쳐 잠든 것도 있었고 사색을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상민의 성격을 알고 있는 터라 궁인들은 급하거나 중한 일이 아니면 오지 않겠지.
자객 걱정도 그 앞에서는 딱히 필요가 없다.
귀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의 끝자락에서 부러움의 잔재를 느꼈다면 혼자만의 착각일까.
“경사를 축하드려요 부사.”
“...감사합니다.”
기계적으로 슬쩍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곤 다시 드는데, 그녀가 조금 거슬릴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흠칫 놀라 뒤로 얼굴을 뺐다. 하지만 귀비는 오히려 슬며시 더 다가와 빤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문득 자신의 귀를 어루만졌다.
이 사람 뭐야 대체.
내민 것이 칼날이었으면 눈앞의 여자의 목은 바로 떨어졌을 것인데, 단순히 가녀리고 흰 손목에 불과했으니.
어이가 없어 온 몸의 근육이 팽팽히 곤두서 있음에도 반응 할 수 없었다.
“부사께선 귀걸이를 하지 않으시는군요.”
고려시대의 귀걸이는 이 시대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대표적으로 착용하는 장신구였다.
“무장에게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라 생각하여 패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무장들께서도 패용하시고 계신데 어찌 그러하십니까.”
“전장에 임하는 자가 굳이 약점을 하나 더 만들 이유가 있겠습니까.”
조심스럽게, 그러나 노골적으로 그녀의 손길이 구멍이 뚫리지 않은 귓불과 턱선, 턱선과 목, 그리고 목에서 다시금 어깨로 살며시 훑었다.
그 기운이 실로 색기가 넘쳐, 순간 현기증이 날정도.
상민은 그녀의 팔목을 잡아 가슴으로 가려는 그녀의 손을 저지했다.
“무슨 짓을 하고 계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은은한 노기에 그녀가 피식 웃었다.
“눈치가 없는 건지, 애를 태우는 건지.”
“실례지만, 밤이 늦었으니 돌아가 보심이 좋을 것으로 아룁니다.”
그녀는 뚱딴지같은 말을 했다.
“부사께서는 한낱 변방의 한직이 아닌 도성에서 지고한 권세를 누리고 싶지 않으신지요?”
“......?”
“천하를 쥐시겠느냐 이 말입니다.”
“감히 제가 천하를 논한다는 것이 불경하나, 소신의 짧은 소견으로는 천하는 잡으려고 한다고 해서 잡히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그녀는 문득 어느 방향을 바라보았다.
짐작하자면 대전이 있는 방향일 것이다.
“저는 지난 수개월간 각고의 노력을 다 했어요. 예언대로 용손의 혈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제는 가진 향낭이 다 떨어져 갈 정도였지요.”
남은 것은 이제 이 하나밖에 없지만요, 그녀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녀는 평온하지만 어딘가 갈증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에요. 부사.”
“무슨 소리십니까.”
그녀는 마치 아는 사람 고양이가 최근에 중성화 수술을 했다고 말하는 것 마냥 엄청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황상은 후사를 볼 수 없는 몸이에요.”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할까 궁금해 잠자코 듣고 있던 상민이 그로서는 드물게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웃는 듯 화내는 듯, 입을 씰룩이며 기묘한 표정을 지은 그가 애써 신색을 회복하고 입을 떼었다.
“불충한 말씀을 하실 요량이시면 당장 나가십쇼.”
그리고 그 축객령에 자극받은 듯 귀비는 더욱 미친 소리를 지껄였다.
이번에는 표정관리가 아예 실패했다.
“그대와 내가 관계하여 자식을 본다면 그 아이가 이 고려의 천자로 오를 수 있다는 소립니다. 부사.”
입이 떡 벌어졌다.
사례가 들린 것처럼, 기침을 하니, 저 여자가 피식 웃는 것이 보였다.
뜬금없는 전개에 뒷골이 멍했다.
예전의 게임, 유로피안 킹즈에서나 볼 수 있었던 막장극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대상으로.
대체 왜?
매력 트레잇 덕분인가?
아니 지금 같은 경우에는 때문이라고 말해야겠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몇 번 반복하다 겨우 입 밖에 발성했다.
“이 무슨...”
“난 부사에게 처음 온 것이고, 아무에게나 이런 제안을 할 정도의 신분은 아니에요.”
고려의 개방적인 성문화에 정신이 다 아찔했다.
또한 이런 제의를 할 정도의 대범함을 가진 여인이 풍기는 그 짙은 향내가 남성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대의 정을 받는 것은 저와 오직 그대만이 알 수 있는 사실이니 천하의 그 누구도 친부가 누구인지 모르겠지요?”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
그리고 이런 비밀은 언젠가 구설수에 올라.
자신의 목을 향하는 칼날로 바뀌겠지.
그 칼날을 저 여자가 휘두를 수도 있었다.
상민은 미친 소리를 계속 듣다보니 어이가 없어서 문득 대꾸했다.
“내가 이 길로 별감께 가 이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불경하고 망측한 사실을 알리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을 것이라 여겨 이곳에 온 거에요.”
“함부로 남의 마음을 속단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무상의 권력을 누리고 있는 별감.
그의 정치적 경쟁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 개념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그 자신이 아닐까.
중앙과 지방의 미묘한 관계.
남만과의 계속된 마찰에도 단 한 번도 원군을 주지 않았던(사실 청하지도 않았지만) 관계.
또한 반쯤은 인질로 사로잡힌 왕예까지.
물론 그녀의 판단은 대부분 맞다.
그와 중손이 아주 찰나지간의 감정적 교류를 나누었다지만,
그 노장의 목을 베어 뒷수습이 가능하고 마침내 권력을 찬탈할 기회가 있다면 상민은 망설이지 않겠지.
“그리고 절 죽여 입막음 하실 겝니까?”
“내가 그리 악독한 여자로 보이나요? 이리 내 치부와 약점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있는 중인데?"
이 여인은 자신의 정자만을 원한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새로운 천자의 태후로써, 나는 그대에게 고려의 별감의 자리를 제의할 수 있어요. 우리 둘은 낮에는 고려의 최고 권력자들로, 밤에는 기나긴 밤을 함께하는 연인으로 지내겠지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노골적인 욕망이 보였다.
“저는 이미 혼약을 한 자입니다.”
“그것이 그리 중요합니까? 그대가 움켜쥘 천하보다?”
권력.
그 노출된 약점을 자극한 그녀가 굳어버린 상민의 반응이 예상 안의 상황이었다는 듯 웃으며 다시 손길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옷을 헤집고 들어가 가슴팍의 맨살에 닿자, 순간 오싹할 정도의 전류가 흘렀다.
“성화전주는 아름다워요. 그리고 착한 여인이지요. 그대의 집에서 계속 그대를 기다릴 만한.”
그녀가 자신의 근육 그 위를 쓰다듬었다.
천천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아래로 향하는 손길.
“나는 욕심이 그리 많지 않은 여인이니, 어느 정도는 양보해 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