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지도를 펴놓고 현 고려의 강역을 논해보자.
이미 우루과이 일대는 도성의 영향력이 꽤 많이 닿는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외곽지역은 아직도 부풀어 오른 공갈빵 수준의 인구밀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야인들을 거의 다 토벌해 강제로 복속시켰다는 점, 혹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고려의 강역이라 칭할 수 있겠지.
현대처럼 철책선을 박고 GP, GOP를 운용하는 시대는 아니니까.
건양의 인구수는 안서도호부처럼 신원부 제도를 쓰는 것도 아니라서 확실치 않았다.
대충 짐작해보자면 이제 거의 육만, 칠만에 달한다는 정도.
야인 노비의 숫자가 이제는 거의 삼분의 일을 넘은 수준이다.
기존 고려인 노비의 숫자까지 포함하면 이미 심각할 정도의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준이었다.
난리라도 벌어지면 좋겠는데.
물론 노비들이 칠천에 달하는 전투기계들을 이길 수는 없어 보이긴 했지만.
중앙의 소요는 지방 세력에게 더할나위 없는 기회니까.
다시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수도와 동떨어져 마치 섬처럼 고립된 안서도호부는 사방이 위험지대라 할 수 있었다.
충돌이 계속 일어나는 남만과의 접경선, 천연 해자로 삼은 강, 그리고 그 북쪽의 습지.
습지를 개간하려면 산업혁명 시대는 지나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남만을 토벌하는 것도 그 경제적 효용성이 크지 않았다.
아무리 연중 강수량이 고르게 분포해도 가뭄이 안 오는 것은 아니라 수원지로 삼을 만한 강을 끼고 있는 것이 바람직했다.
남쪽에는 자잘자잘한 하천들이 있었을 뿐, 믿음직스러운 큰 강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아갈 곳은 오직 하나였다.
도호부는 이제 강족이라 불리는 복속 부족이 정식으로 편입됨에 따라 그들의 길안내를 받아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수운을 통한 물류와 병력의 이동, 농업의 효율성 모두를 충족하는 방향이었다.
길게 뻗은 농지는 어느 순간 멈추었다.
너무 멀어지면 유사시 거점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그 경계의 끄트머리에서 조그마한 교역이 벌어졌다.
대저, 이 강족이란 종족들은 일단의 무리를 이루고 있었더라도 기후 상황에 따라 서로 쪼개져 지내는 일이 흔했다.
아주 예전에는 강 동쪽의 부족들, 즉 지금 도성에서 한창 채찍질을 당하고 있을 무리들과도 같은 부족에 속해 있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사이가 극도로 나빠 서로 창칼을 겨누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랐다.
팜파스 대평원에 어울리는 곡식이 전래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타거나 노동력으로 삼을 만한 가축이 없어서 그런 걸까.
무슨 이유든 아직 원시 부족의 사회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그런건지 그들 사이 언어의 분화는 크게 일어나지 않은 듯 했다.
야인 출신 동자승 하나를 통역 삼아 의사소통을 해 보니 꽤 괜찮았다.
덕분에 이제는 불제자가 아닌 관원 취급을 받는 동자승은 절에 있는 시간보다 상민과 관청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말이 은근히 단순하구나.'
사회가 복잡해지지 않아서 그런지, 이들이 쓰는 어휘는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덕분에 이제는 야인 무리들의 말을 기록하여 해석하는 사전이 얼추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
복속한 자들과 같은 강족에 속한, 사이가 좋았던 씨족들이 교역에 참여했다.
그들은 힘과 문명에서 현저히 밀린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도호부의 권역을 존중해 주어 동쪽으로 잘 넘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교역을 할 때만 빼고.
‘차라리 복속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 너희들한테도 좋을 텐데.’
눈앞의 탐스러운 인력들을 바라보던 상민이 입맛을 다셨다.
그들은 상민의 무위를 전해 들었는지 자신의 앞에선 공경하는 태도를 취하고는 있지만 순순히 밑으로 기어들어올 생각은 없어보였다.
물론 세상일이란 모르는 법.
상민은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씩, 조금씩. 가랑비에 옷 젖듯이.'
언뜻 보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서로 복식과 풍습이 다른 자들이 이렇게 마주 보고 교역을 하는 모양이.
교역 자체는 상민이 지금 이렇게 참관하기 전에 이미 몇 번이나 이루어졌었다.
몇 번 싸울 뻔 하기도 했고, 꽤 다사다난했다 들었지.
그래도 지금 이렇게 정기적인 교역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자신은 오랜만에 교역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독하러 왔다.
무역 책임자로 임명된 사의가 나서서 무어라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먹을 것에 한해선 참 믿을만한 놈이란 말이야.
그들이 먼저 물건을 꺼내놓는 것이 보였다.
일단 힘세고 아쉽지 않는 놈이 선제시를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표피{豹皮, 표범(재규어) 가죽} 몇 장과 다른 동물들의 가죽.
가죽은 항상 수요가 있지.
특히나 야생 대형 고양잇과의 가죽은 고금을 막론하고 상당히 가치가 높았다.
'이제는 못본다고 생각하니 한반도의 빅 떼껄룩이 그립구만.'
큰일날 생각을 하던 상민이 고개를 흔들었다.
표범가죽이 섞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고려인들이 챙겨온 것만큼의 가치를 가지진 못했다.
사의가 가공된 보존식품들을 내놓았다.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준 것도 있었고, 굳이 이 시대의 형편없는 도정기술에 섞인 볍씨를 주어 그들이 농경사회에 진입하는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는 명목도 있었다.
대부분은 미숫가루, 찐쌀이고 말린 떡도 있었다.
찐쌀이라 함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보존식품으로 뭐 수확한 쌀을 찐 후에 도정을 한다던데 그 광경을 직접 보진 않았다.
맛은 물론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수렵채집인에겐 가장 중요한 것이 항시적인 식량의 확보였다.
그러한 면에서 저들은 서서히 고려에 종속되어가고 있었다.
저들을 보라.
이제는 자신들의 음식을 풍요로운 자연에서 찾기보다는 이제는 고려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주로 채집하고 있으니.
이것들이 가랑비로 그들의 옷에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섬거리며 무언가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사의가 그것을 받아들더니 그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자신에게 다가와 건넸다.
노란색이 섞인 모래들.
“사금이로군.”
“저번에 거래한 것만큼 좋은 품질은 아닙니다.”
“그래도 동 부피의 곡식보다야 훨씬 가치가 있지.”
“어떻게 할깝쇼.”
“네가 알아서 하거라. 이번 건 높은 값을 주고 사기엔 조금 아까운 것 같기도 하고.”
사의는 씩 웃었다.
“이 정도면 한 통으로 되겠지요.”
그 음흉한 표정이 마치 미드에서나 볼 법한 좋은 품질의 코카인을 거래하는 마약상과 닮았다.
사의가 고갯짓을 했다.
뒤에 있던 힘 센 병사 하나가 끙끙거리며 가져온 통을 내려놓았다.
“자, 너희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을 가져와 봤느니라. 독한 놈을 골라 가져왔으니 만족스러울 것이다.”
나무 통 안에서 은은한 알코올의 냄새가 피어올랐다.
야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놈들의 제사장(샤먼)이란 것들은 환각 상태에서 접신을 하는 풍습이 있다 한다.
보통은 스스로 자해를 하거나 이상한 것을 태워 유독가스를 들이킨 상태에서 환각상태를 맛보는 데, 몸이 축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 술은 그것과는 다르지.
안전하게 극락까지 모시는 꽃가마가 따로 없을 것이다.
표정들이 절로 헤벌쭉 벌어졌다.
그들은 소중하게 통을 받고 표정이 풀린 채로 연신 쑥덕거리다가, 이윽고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 이거?”
맥주통을 운반한 동물.
노새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길이 선망의 시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저리 큰 통을 나를 정도면 얼마나 힘이 셀까 궁금한 모양.
상민은 잠시 고민했다.
그래, 어차피 노새 정도는 전략물자도 아닐 테고.
자가 번식도 못하니까.
“아, 이건 좀 비싸다. 표피나 사금을 더 내놓아보던가.”
그래도 도성에서 비싸게 주고 사온 것들인데.
유통 마진까지 고려하면 사금으로도 꽤 받아야 할법 했다.
그들은 가죽과 사금이 다 떨어졌는지 한참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윽고 부족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그 끝에는 늙은 야인이 앉아 있었다
시선을 담담히 받던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나 직접 상민에게 다가왔다.
통역 동자승이 더듬거리며 해석해 주었다.
“위대한, 전사, 직접, 말씀, 드리길, 원합니다.”
“그래라.”
상민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가 다가와 가죽 주머니를 펼치는 순간, 상민은 크게 놀라 소리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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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성대한 연회를 준비하라는 말에 사의와 일부 병사들이 활을 들고 나가 사냥감을 구해왔다.
그것들의 털과 가죽을 벗기고 모닥불에 굽고 있으려니 마치 캠핑장에 온 것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다른 병사들은 제각기 술통을 늘어놓고 야인들에게 한 잔씩 권하고 있었다.
큰 고기 한 점을 쥔 대취한 야인 하나가 모닥불에서 흥겹게 춤을 춘다.
오랜만에 풍족하게 먹을 수 있어 기쁜 모양이다.
비틀거리며 춤을 추는 꼴이 우스워서 고려인들 몇이 크게 웃더니 몇 명이 허리춤을 푸르고 그에게 합류했다.
누군가 노래를 하자 제각기 왁자지껄하게 따라 불렀다.
고려의 노래를 접할 수 있는 감격스러운 광경이지만, 듣는 입장에선 그저 소음공해.
상민은 저절로 찡그려지는 인상을 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부러 친근하게 대하라 명을 내린 상태였지만 이미 고려인들이 야인 여인들과 결혼을 한 시점에서 장강족, 혹은 이민족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적대감은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다행이군.'
그는 다시 노인과 마주보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대들은 모두 바다에서 오지 않았다고 했지?”
“그렇다, 합니다.”
“그럼 저 평원에 소금광산이 있는 모양이로군?”
“소금? 광산?”
“소금이라 함은 그대들이 건넨 이 하얗고 투명한 알갱이를 말하는 것이고 광산은...”
손짓 발짓을 동원해가며 어떻게 의사소통을 시도하자 노인이 통역을 통해 대답했다.
“산, 무척 높다, 우린 산 못 간다. 그곳엔 강한, 사람들 있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었던 곳에서, 소금, 채취한다.”
염호(鹽湖)를 말하는 것인가.
상민은 다시금 주머니의 소금을 찍어 입에 넣어 보았다.
씁쓸하지가 않다.
간수가 많이 빠진 모양.
질도 좋았고 지금 고려의 자염보다야 훨씬 더 값싸게 구할 수 있는 소금일 듯싶었다.
게다가 그것들이 죄다 안동도호부에서 건양을 거쳐 이곳으로 오고 있는 현실인데.
도성과 경제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소금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냐고?
처음 상민도 별 생각이 없었다.
역사적으로 소금이 몹시 귀하다는 것은 책으로 배웠다.
인간과 기르는 가축이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 정도.
하지만 현대인에게 그 소중함이 피부로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집안에는 항상 소금이 있었으며, 마트에 가 봐도 소금은 달랑 몇 천 원 할 뿐이다.
반면 이 시대의 소금은 기껏 자염(煮鹽)과 그리고 암염(巖鹽)으로만 충당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암염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였으니 고려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자염이겠지.
심지어 자염도 품과 땔감이 너무 많이 들어 몹시 큰 비용이 들었다.
작은 금이라는 이름이 허언이 아닐 정도.
심지어 현 고려에서는 그 희소성이 더더욱 증가했다.
정기선에 실어 나르는 소금을 사기 위해 얼마나 몸을 비틀었던가.
가장 흔한 바닷물을 이용한 자염전도 현 고려에선 동원쯤에나 가야 볼 수 있는 상황.
건양과 교하 모두 민물, 라플라타 강의 하구에 접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만약 노인의 말대로 염호에서 암염 채취가 가능하다면 이보다 희소식은 없었다.
“그곳까지 얼마나 걸리지?”
노인은 대충 걸어서 왕복 한 달은 걸린다고 대답했다.
머릿속으로 계산해 봐도 너무나도 먼 거리.
말을 타고 가 봐도 속도는 제한적이다. 어차피 소금을 싣고 올 노새들과 같이 행동해야 하니까.
고려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지는 아무도 모를 기나긴 세월이다.
‘하청은 이럴 때 하라고 있는 거지.’
그는 노인에게 제안했다.
그대들이 지속적으로 창양에 소금을 공급해 줄 수 있다면 우리도 지속적으로 너희들에게 먹을 것과 술, 가축들과 생필품을 주겠노라고.
노인은 잠시 생각했다.
어떠한 결단을 내릴까.
어차피 너희들은 유랑하는 민족인데, 방향을 그 쪽으로 잡아달라는 거야.
충분히 들어줄 수 있잖아?
노인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민은 주먹을 꽉 쥐었다.
터져나오려는 광소에 입꼬리가 절로 씰룩였다.
드디어.
드디어 하나의 퍼즐이 완성되었다.
앞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거래를 유지해야 했지만.
시작이 절반이다.
창업으로 가는 첫 번째 열쇠.
이 소금길을 걸어나가다 보면 자신의 독립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