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33화 (33/653)

위생과 의학

매달 도호부와 도성을 오가는 정기선은 양 측의 물품을 싣고 왕래했다.

군량 지원은 끝났고 이제는 오히려 도호부가 식량이 넉넉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근래에는 식량을 가져다 다른 물건들로 바꾸어 왔다.

배를 제작하는 목수들은 전부 도성에 있었다.

당연한 소리였다.

군선으로 쓰일 수 있는 배를 만드는 장인이 국가의 전략적 보호인물로 지정되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그럼에도 본디 조운선으로 쓰였던 두 척의 배는 상민이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그는 이것들에 여러 가지 장난질을 쳤다.

어차피 기존의 일을 하고 있는 조운선은 따로 존재했다.

강가만 따라 다니며 시급하고 중요한 연락을 주고받을 것밖에 할 일이 없는 배라, 바다 파도에 대한 안정성이나 실릴 물자의 크기를 고려하지 않은 채 순전히 속도만 중시한 설계로 바꾸었다.

자신이 배를 만들지는 못해도 어디서 사진이나 게임에서 나온 내용 같은 것은 본 적이 있었으니.

돛의 크기를 크게 한 것은 물론 전면부에 삼각돛을 달아 역풍에도 어느 정도 나갈 수 있게 해 보기도 했고, 조운선 하단부 곡물 저장 공간을 개조하여 노(櫓)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른바 스칼로치오(Scaloccio)방식의 원시적 갤리 쾌속선.

저 멀리 어느 유명한 인성 터진 상인공화국이 쓰는 배와 아주 조금 비슷해지지 않았을까.

본디 노 하나당 사람 한 명, 혹은 두 명만 붙어 노를 젓는 방식에서 대형 노 하나에 사람 네다섯이 달라붙는 형식으로.

물 밑에서만 움직이는 전통 노 젓는 방식으로는 스칼로치오를 적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노의 위치도 조절하기도 했다.

엄청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고생을 사서 한 것도 아니었다.

기존의 숙련된 노병(櫓兵)에서 이제는 어느 정도 팔에 힘만 있는 노비들로도 배를 추진할 수 있게 바뀐 것이 컸다.

귀중한 양민들을 고되고 단순하며 반복적인 일만 하는 노질에 쓸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쓰다 보면 또 양인 사이에서 신량역천으로 분류될 것이 뻔했다.

팽창주의적 행보를 걷고 있는 고려의 사정상 노비는 충분한 수가 공급될 수 있다.

다만 같이 타는 배에 불안요소를 남겨두어서 좋을 것도 없었고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안도 필요했기에 노병들에게도 5년의 복무 이후 면천을 약속하여 그들의 민심을 달랬다.

이 배는 마개조로 언밸런스한 면이 좀 심해져서 잔잔한 라플라타 강 너머 바다로 가면 그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뭐 어때, 강에서의 이동이라는 기본 목적에는 정말 충실하다.

쾌속선은 역풍 때 세월아 네월아 밍기적 거렸던 예전 조운선보다 평균 거의 두세 배에 달하는 속도로 움직였다.

순풍을 받을 때엔 노를 쓰지 않아 속도는 비슷했지만, 역풍에 꼼짝 못했던 기존 배와는 비교하기도 미안했다.

이제는 선원들도 제법 삼각돛을 다룰 줄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 상황에선 여러 척은 만들기가 어렵겠군.’

이 배에만 노병 포함 거의 오십에 달하는 자들이 들어차 있으니 절로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날듯이 도착한 피라나호에서 내린 상민은 간단히 보고를 마치고 성화전에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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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마당에 의자를 꺼내 앉아 오후의 햇볕을 쬐고 있던 예가 놀라 일어났다.

“자기(自己)!”

그녀가 부부끼리 약속한 호칭으로 자신을 불렀다.

얼마나 좋은 호칭인가, 서로를 자신처럼 대한다는 표현.

현대적인 감성도 있고 말이야.

그녀의 놀란 얼굴에 이내 반가움의 파문이 번져나갔다.

체면도 잊은 채, 성큼성큼 뛰다시피 달려간 상민은 예를 잡고 번쩍 들어 올리려다가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배를 살피고는 얌전히 끌어안았다.

이제는 다소 불룩하게 튀어나온 아내의 아랫배를 조심해가며.

눈물이 다 났다.

혈혈단신으로 떨어진 대한민국의 서른 살 청년은 이 세계로 떨어진 지 삼년 만에 첫 자식을 가지게 된 것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려 한참을 끌어안고 있으려니 예가 당혹해하며 말했다.

“안에, 안에 들어가서 해요. 남세스러워.”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행동한 상민은 뒤늦게 주변 인물들을 살폈다.

궁인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무렴, 상전이 금슬이 좋다는 게 허물은 아니지.

침상에서 그녀의 배에 귀를 대며 한참을 그렇게 듣고 있었다.

아직은 배가 그리 부풀지는 않았으나 태아의 심장박동소리는 지금도 어렴풋하게 들렸다.

“원래 맥이 이리 빨리 뛰오?”

“그렇다고 해요.”

이제 3개월.

기간을 세어보니 딱 허니문 베이비다.

어쩜 이렇게 운도 좋을까.

“아들이래요.”

예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태의가?”

자신은 솔직히 말해서 딸이든 아들이든 아무 상관없었다.

아들이면 조금 징그럽기도 할 것 같았고.

물론 전근대사회에서 대를 이을 아들은 상상 이상으로 중요하니 예의 뿌듯함이 이해는 되었다.

오랜만에 보는 남편 앞이라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예는 웃고 떠들다가 어느 순간 자신에게 기대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동안 그 모습을 쳐다보다 침상에 뉘여 이불을 덮어주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심란하다.

역설적으로 엄청난 행복만큼의 두려움을 서서히 가지게 되었다.

중세 사회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다.

임산부는 산욕열이라는 난관을 넘어야만 생존할 수 있었고.

아이 또한 어린 나이에 어이없게 죽어 1년 안에 사망하는 숫자가 열에 셋은 되었다.

돌잔치가 왜 잔치가 되었는지 이제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구나.

물론 왕실의 여인이니 상당한 보살핌을 받겠지만, 아버지 될 입장에서 손만 빨고 있을 순 없지.

상민은 영금을 불렀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오자, 상민은 가지고 온 보따리를 내밀었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두부처럼 생긴 살구색 물건들은 그것만큼 물렁하지는 않았다.

물건을 두 손으로 받아든 영금이 궁금해 하는 어조로 말했다.

“비누라는 것이다. 제조하는 것이 품이 많이 들고 비싸 넉넉하게 챙겨오지는 못했다. 다만 전주를 모시는 데에는 충분한 양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으니 아낌없이 쓰거라.”

상민은 손을 씻는 법과 비누의 용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일견 평온했으나 그 속에 담긴 절박함을 읽은 영금도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에 한참이나 되뇌이는 모습이 보였다.

비누의 생산은 무척 쉬운 일이다.

콩깍지나 뽕나무, 짚 등을 태워 우려낸 잿물은 먼 옛날부터 세탁물질로 이용되어 왔으며, 단지 그것에 기름을 부어 섞기만 하면 완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으레 그렇듯 경제성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영금에게 준 것은 콩기름으로 만든 비누로 조그마한 양을 만드는 것에 상당한 콩을 압착하여 소모했다.

동물 지방도 그 이상으로 귀하니 대량생산은 어림도 없었다.

모두에게 목욕용으로 나누어 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 이야기였다.

다만, 임신한 자가 있을 때, 도호부에서 비누 하나를 하사하여 산모의 건강한 출산을 돕는 정도는 가능한 부분이지.

출산 시 위생을 조금만 더 신경 써도 나라 전체적으로 볼 때는 큰 변화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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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과 위생이라.

며칠 동안 해후를 즐기고 새로운 화두를 안고 돌아온 상민은 새삼 더러운 환경에 놓인 창양 사람들을 바라봤다.

비가 오면 질퍽거리는 도로, 어디선가 은은히 풍겨오는 변 냄새. 위생 관념 없이 지저분한 사람들.

‘그래도 유럽인들 마냥 위층에서 대충 똥을 투척하는 혐성은 없는 게 다행인 셈인가.’

다행인 것은 퇴비법이 정리되고 인분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꽤 많은 양의 인분을 두엄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똥의 자원화가 이뤄낸 쾌거라 할 수 있겠지.

소소한 문제는 있었다.

예를 들면, 한 사람 몸에서 나온 기생충이 다른 사람 몸으로 들어가기 쉬워진다는 정도.

짐승 똥도 물론 기생충이 있겠지만 사람 똥에서 사람으로 기생충이 옮겨가는 것보다 훨씬 적었다.

물론 거름을 '잘' 발효시키면 그런 문제는 없다고 하지만.

'잘의 기준은 뭐고, 어떻게 알 건데. 현미경도 없는 시절에.'

솔직한 말로 기생충 문제는 채소든 뭐든 잘 익혀먹는 습관을 들이면 끝이다.

그래도 완벽한 똥 통제는 되지 못해 간단한 하수도 시설이라도 만들고 싶었는데 지금의 토목능력, 인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수준의 난이도였다.

‘로마, 당신들은 대체...’

규모가 조금 더 커지고 벽돌건축기술이 더 발달하면 생각해보자.

5층 감시탑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거리의 한 사람이 요강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나가다 무엇에 발이 걸렸는지 철퍽 엎어졌다.

요강 안에 든 똥물인지, 뭔지 튀며 주변 사람들이 기겁하는 것이 보였다.

엎어진 똥물에 옷 앞섬을 다 적신 자가 일어나며 울상을 지었다.

역겨움이 더 클까, 쪽팔림이 더 클까.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지, 하지만 가서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엎어진 자가 서둘러 창강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조선이 고려보다 분명 더 발전한 시대는 맞으나 조선에 비해 고려가 가지는 강점도 꽤 많았다.

그중 하나는 바로 목욕문화가 발전되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일과가 끝나면 창강에 가서 몸을 씻는다.

심지어는 남녀 혼욕의 문화도 살짝 엿볼 수 있었다.

조상님들이 안좋게 변한 것은 죄다 조선 시기였구만.

조선 1패 적립.

공중목욕탕이라도 만들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관리 잘못하면 역병의 근원지로 사람들에게 널리널리 퍼트릴 시설에 불과했다.

알아서 강가에서, 혹은 집에서 물을 받아놓고 씻도록 장려하는 것이 낫겠지.

그렇다면 의학과 위생의 발전을 위해 네놈이 하는 일은 뭔데?

책상 앞에 앉아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처럼 월급 루팡만 하는 자라고 보면 섭하다.

자신은 만약 들킨다면 상당히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부담이 될 수 있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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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도시와 모든 단체에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하다.

창양에서도 마찬가지라 사형수 한 명의 교형(絞刑)이 집행되었다.

죄목은 살인과 절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증좌와 증언으로 형이 확정된 그는 교수대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조금 이상할 지도 모른다.

가장 빈번한 사형 방식인 참형과 교형을 살펴보면, 참형은 살인과 반역 등 죄목이 엄중한 자에게, 교형은 강상죄나 군율위반죄 등 참형보다는 온건한 자에게 집행되었다.

살인과 절도라면 마땅히 참형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었으나, 저 자는 그저 혀를 빼물고 밧줄에 목졸려 죽어있을 뿐이다.

목이 떨어지는 끔찍한 현장(이라기보단 축제에 가깝다)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아쉬워하며 제각기 시신에 침을 뱉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그 시신은 하루 뒤 사라졌다.

불교식 화장법을 통해 한줌의 재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죽은 자는 남들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곱게 죽었을지 몰랐겠지만, 그 시신의 안식은 포기해야 했다.

몇 명의 사람을 거쳐 비밀리에 옮겨진 시신은 한 미치광이 과학자... 아니 의원 심일석(沈壹晳)에게 돌아갔다.

미친 것도 아니고, 불법도 아니었다.

창양 외곽에 마련된 비밀 벽돌집에서는 음흉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지만, 적어도 관의 허락은 맡은 상태.

심지어 그 주변에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몇 명의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기도 했다.

그 벽돌집 안에서 일석은 주변의 제자들을 바라봤다.

시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어 처음에는 두려움과 거부감에 벌벌 떨던 어린 소년들은 이제는 서로 잡담을 나누며 해부 과정을 참관하고 있었다.

“조용!”

스승의 말에 소년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 자가, 비록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하나, 우리는 그 시신의 영면을 방해하고 있는 중이다. 적어도 일말의 예의는 갖추도록 하라!”

소년들의 자세가 다시금 꼿꼿해지는 것을 바라본 일석이 다시 소도를 놀렸다.

‘대단하신 분이다.’

몇 구를 해부한 덕에 이제는 꽤 많이 알게 되었으나 해부란 것이 하면 할수록 알아가는 것이 많았다.

상민의 도발에 첫 번째 해부를 경험한 날, 일석은 밤에 잠에 들지 못했다.

망자를 모욕했다는 사실에 두려워서?

아니,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이 부정되어.

부사는 예전 건양에서 처음 본 사람이었다.

위생과 관련하여 의원들에게 일장연설을 했지.

그 개념이 없는 의원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죽기는 싫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명령에 따랐었다.

일석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불러 인체 장기 기관의 위치는 어디있고 크기는 어떠하며 기능은 무엇인가 물어볼 때 일석은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상민은 사람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그러고도 네놈이 의원이냐? 사람의 몸에 대한 이해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저들에게 침을 꽂고 약을 처방하며 다니는?”

조소하며 빈정대는 것은 정도를 심하게 넘기 시작했다.

그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듣기도, 말하기도 힘든 이상한 말도 곁들여 가며.

들은 말 그대로 옮겨보자면 바이러스니, 곰팡이니, 균이니, 호르몬이니.

“나는 이것들을 단지 겉으로 들어 본 것이 전부나, 그래도 의원이라고 하는 네놈들보다야 더 잘 알고 있지.”

“말씀하신 것들 또한 증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잖습니까!”

자존심을 살살 긁은 덕분에 일석이 큰 소리를 한번 내고는 이내 자신의 행동에 아연실색하자 상민이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 의원이라면 그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지.”

드디어, 예스맨 대신에 개념과 자존심이라는 것이 있는 놈이 나타났구만.

그는 건양의 으슥한 곳으로 자신을 인도하며 말했다.

기억 상 그 때 그곳도 외딴 집이었던 것 같은데.

질질 끌려가는 일석은 오늘 부로 자신의 생이 마감되는 것인가, 내심 포기하기도 했다.

“나는 지긋지긋하네, 경혈이니, 경락이니, 기(氣)니, 비과학적 기전으로 만물을 설명하려는 그대와 같은 자들이 말이야. 역병에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다만 병을 전파하는 숙주 노릇이나 하지. 내 고려에 미신은 필요 없어.”

죽을 운명은 아닌 듯 했다.

방문의 고리를 잡은 부사가 그의 손을 묶은 끈을 풀어주었다.

슬쩍 보이는 틈에, 한 인영이 넓적한 탁상 위에 누워있었다

“네가 증거를 원한다 했으니 선택권을 주겠다. 진실에 도달할 수 있으나 네가 여태껏 배워왔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길과, 다시 되돌아가 심신의 안정을 얻지만 진실과는 멀어질 길을.”

본능적인 거부감은 생각 외로 작았다.

일석은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자신의 업에 자존심이 있던 사람.

당연히 선택한 길은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일석은 예전 기억을 더듬는 와중에도 손을 쉬지 않았다.

시신은 급속도로 부패하며, 해부를 하여 그 내밀한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는 시간제한이 있다.

뇌, 안구, 목, 심장, 폐, 간, 대장과 소장 등 주요 장기를 거쳐 생식기까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손으로 빠르게 해부하고, 빠르게 기록한다.

문득 일석은 피식 웃었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길을 따라 이곳 창양으로 온 것은 후회가 되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국 의학의 정도(正道)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 했었지.

그보다 더 숭고하고 존엄한 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옛 관습과 규율에 얽매이지 마라. 단지 네 무지에 부끄러워해라.’

이제는 눈이 뜨이고 있었다.

자신은 우물 밖으로 튀어나온 개구리와 같은 존재였다.

더 넓은 세상을 드디어 자각한.

온 몸에 피를 묻히고 심장을 쥐며 은근하게 웃고 있는 일석의 모습을 보던 세 명의 제자가 놀라 까무러칠 뻔한 것 빼곤 오늘도 보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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