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와 신원부
한밤중.
문경은 창양에서 상민 다음가는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연신 동동 굴렀다.
조지소에서 기다리니 이윽고 초대받은 손님이 다가왔다.
“부사께서 눈치 채신 것 같소?”
“오전에 말씀 드린다고 했잖아요.”
“어찌 반응을 하실지 몰라서...”
“그 분 성정상 화를 내실 것 같지는 않은데.”
문경은 아지의 손바닥을 쓰다듬었다.
조지소의 일도 고되어 손바닥이 거칠고 부르튼 곳이 있었다.
“내, 만약 허락을 받는다면 기필코 부사께 아뢰어 이 일을 그만두게 하겠소.”
하지만 그 말에 아지의 표정이 도리어 굳었다.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제가 하고 싶어 하는 일입니다.”
“이리 고된 일이 어찌 하고 싶은 일이란 말이오? 천한 일이라 손가락질하는 자들이 아직도 있다오.”
“어찌 이 일이 천하겠습니까? 종이는 사람들의 문에 발라져 비바람을 막고 여러 소소한 일에 쓰이기도 하며 또한 부사나 다른 나리들이 나랏일을 하시는 것에 쓰이는 물품입니다. 소첩이 천하다고 하셔도 되지만, 제 일과 종이를 그리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알겠소, 알겠소, 내 실언을 했으니, 사과하리다.”
그것보다.
문경은 슬그머니 웃었다.
“방금 소첩이라고 했지요?”
아지가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자신보다 조금 더 많은 여인인데 몹시 귀여워 보였다.
“밤이 늦었으니 서둘러 들어가야 합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읍시다.”
두 사람은 가만히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아지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소첩은 이미 한 번 결혼을 하였고 출신도 천하며 이제 꽤 커가는 자식도 있습니다. 장군께 허물이 될 까 두렵습니다.”
고려의 재혼이란 상당히 자유로웠지만 자식이 있는 것은 상당히 껄끄러운 문제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는 남성의 입장에서 의자(義子, 재혼 여성의 기존 자식)의 문제는 지극히 합리적인 고려사항이었으니까.
또한 가장 결정적으로 신분이 서로 다른 사람간의, 특히 향 소 부곡민들의 결혼은 관가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신분상으론 양민이지만 반 쯤 나라의 재산이나 다름없는 자들이 결혼하여 그 업을 버리거나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경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도리어 자식 걱정은 별로 하지 않았다.
상민의 최측근으로, 승현이 어떠한 일을 하고 있으며 형님에게 어떤 존재인지 눈치 채고 있었으니까.
이제 알아서 제 갈 길을 가겠지.
도리어 의자와 사이가 돈독해져서 나쁠 건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부사께 달려 있으니, 내일 당장 고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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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가 빠져나가고 뒤늦게 조지소의 건물을 둘러보는 척 하며 빠져나가는 문경이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절로 허리춤의 도집에 손이 갔지만 뽑지는 않았다.
익숙한 말이 들려왔기에.
“감각이 많이 무뎌졌구나.”
“......?”
벽돌 담 아래 상민이 피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다 보셨습니까?”
“그래.”
문경이 철푸덕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부사가 되더니, 나를 예우해 주려 존댓말을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쉬운 것이 있어 그리 했던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상민은 어차피 자신의 대답이야 정해져 있었지만 조금 더 동생을 놀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렁그렁하는 그의 두 눈에 자신의 연인도 떠오르며 마음이 약해졌다.
“일어나라 좀. 이 형이 누누이 네 신분에 맞는 품위를 지키라고 말했잖느냐.”
문경이 상민의 눈치를 살피더니 벌떡 일어났다.
“내가 양인의 혼사에 관여할 수 없는 노릇이니 너희들 마음대로 하거라.”
“예?”
“창양에서는 같은 고려인의 직급의 고하는 있을지언정 신분의 고하는 없다. 앞으로는 양인들 사이에 결혼을 함에 있어 굳이 허락받을 필요는 없다는 게야.”
문경이 함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주먹을 꽉 쥐는 게 보였다.
“다만, 아지는 조지소의 일을 꾸준히 맡아주어야겠다.”
“...예.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굳이 말 안 해도 그리 할 듯합니다.
문경은 뭐라 작게 궁시렁 거렸다.
잘 들리진 않았다.
상민은 피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헤드락을 걸었다.
다른 커플들의 애정행각을 부러워하는 기러기 남편의 원혼을 담아.
“알고 보니 연상 타입이었구나.”
질질 끌려가는 문경이 컥컥대었다.
“커헉, 여...연상은 또 뭐고 타...타입은 또 뭡니까.”
“조용히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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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과의 대화가 있기 전에 상민은 이미 신분제를 개편했었다.
도호부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일단 서로군 소속의 군인들이 있을 것이고, 이들은 도호부의 핵심 세력이었다.
특별대우가 마땅히 필요한 자들이다.
하는 일도 많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있었고.
도호부는 그들에게 군인전을 내리고, 매달 봉급을 따로 챙겨주기도 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상민의 가장 큰 지지 세력으로 콩으로 팥죽을 쑨다고 해도 믿을 자들이었다.
그리고 일반 백정들과 향, 소, 부곡민 출신들.
이제는 모두 백정이라 불리겠지.
도호부의 근간이자, 허리계층이다.
수는 약간 적었으나 앞으로 제일 많아질 계층이기도 했고.
공전이 삼사년 뒤에 완전히 자리 잡히면 외곽부터 서서히 민전을 주어 개간을 장려케 하는 것도 좋겠지.
지금부터 경자유전의 기풍을 자리 잡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야인들.
야인들 또한 두 종류로 나뉘었는데 자발적으로 복속되어 결혼을 한 야인들과 전쟁을 치룬 뒤 강제로 복속되어 노비로 된 야인들이 있었다.
전자와 후자는 천지차이다.
복속야인들은 후대를 받았다.
양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벼슬도 받은 사람이 있었다.
마치 자발적으로 복속된 여진족에게 고려가 벼슬을 주었던 것처럼.
소년 족장(자신이 아니라고 설명해도)은 무산계 9품의 군윤(軍尹)직을 수여받았다.
이 자를 통해 복속된 야인의 여론을 조절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번의 추수를 겪고 마음의 안정을 얻은 고려 도호부는 야인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야인은 중립적인 위치, 혹은 적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남쪽의 머리에 깃을 꼽은 자, 이제는 공식적으로 남만(南蠻, Querandi)이라 불리는 자들은 고려에 복속된 부족과의 관계도 있었고 도호부의 주요한 적으로 바뀌었다.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고 소소한 포로들도 잡아 챙겼다.
이제는 저들도 고려와 안서도호부의 존재를 알아차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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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침, 상민은 관청에 들러 일의 진행상황을 확인하고 있었다.
상민은 상당한 노력을 들여 도호부 백성 모두에게 강력한 신분 확인법을 실시했다.
심리적 저항감만 없다면 사람의 수도 적고 굉장히 효율적인 인력관리가 가능토록 하는 제도.
‘사실 호패라는 건 원나라에서 온 것이거든요.’
신원부(身元符)라 이름붙인 이것은 창양에서 처음 실시되어 도호부에서 인구를 쉽게 관리하고 그 동향과 앞으로의 정책을 펼침에 있어 참고할 자료가 되었다.
근처에 자생하는 나무나 대나무(Guadua)를 잘라 한 부는 도호부에서, 한 부는 개인이 소지하게 한 후 의무 패용을 명했다.
양인으로 규정 된 사람들은 사사로이 그 신분을 강등시킬 수 없게 보장했다.
기근이나 굶주림이 있어도 자신의 양인신분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겨 스스로 노비화 되는 일을 방지하고자.
또한 방첩의 기능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오는 정기선을 통해, 음흉한 노인네는 신분을 속인 몇 명의 간자들을 심어 보냈다.
대놓고 안찰사(按察使)를 보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내밀한 사항을 알아보려는 모양.
신원부가 없는 자들이 관청을 기웃거리자 병사들 몇 명이 크게 혼을 내어 쫓아 보냈다는 보고가 들려왔다.
‘다행이군.’
안찰사는 오기 전에 경전을 통해 연락을 미리 받을 수 있으니 그에 따라 대비를 하면 된다.
이곳으로 온 후에 한 번도 감찰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온다고 해도 제까짓 게 조선의 관찰사도 아니고.
‘5품 따리가 와서 뭘 하겠냐마는.’
아직은 이곳에 그렇게 많은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상민은 정기선에 동봉된 아내의 편지를 뜯었다.
경건한 시간.
그리고는 읽다가 불현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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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의 상을 치룬 왕온은 성격이 급속히 바뀌었다.
주로 안 좋은 쪽으로.
“차라리 네 년들이 아들이었다면 이 나라가 이런 꼴은 되지 않았을 텐데!”
아끼는 두 딸에게 하리라곤 생각지 않은 폭언.
생물학적으로 엄밀히 따진다면 왕온의 책임이 성염색체 상 100퍼일 텐데.
“썩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으니!”
자매는 조용히 뒷걸음질 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 쨍그랑
무언가를 던졌는지 장지문 넘어 큰 소리가 들려왔다.
본디 왕온은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으나 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랫것들에게 인정이 많았고 매사에 조심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 떨어져 마지막 남은 왕씨들 중 하나가 되니, 혈통에 대한 집착이 심해지며 성격이 급변했다.
그리고 그것은 태자가 죽으며 대가 끊길 지경이 되자 마치 광기와도 같아져 주변 사람들이 도무지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두 딸에게 심한 폭언을 하는 것도 그 맥락에서 해석을 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해석과 이해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 말이 듣는 입장에서 덜 괴로우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영은 나와서 충격에 흐느꼈고, 예는 그러한 누이를 부축하여 자신의 처소로 데려왔다.
눈물을 흘리는 영을 토닥이던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아비에 대한 사랑과 오라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으나, 그것은 서서히 현실의 시간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미 오라비는 작년부터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은연중에는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성격이 바뀌는 것은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과연 평생 본 아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심해지고 있었다.
무신들이 권력을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고 왕온은 그것은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참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백 년에 걸쳐 내려온 위대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혈통을 끊기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딸들이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어느날 꿈에서 왕온은 큰 대호(大虎)를 보았다.
장소는 익숙한 흥평궁.
성화전 지붕 위에서 거의 집채만 한 호랑이가 용틀임을 했다.
대호가 갑자기 두 장은 뛰어올라 자신의 곁에 서 있던 태자를 물고 그 숨통을 끊어놓았다.
목을 뜯고 꿀꺽 삼켰다.
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았지만, 왕온은 그 위압감에 눌려 어떠한 행동도 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소변을 지리며 벌벌 떨 뿐이었다.
그 범은 아직도 배가 고픈지 태자를 다 먹고 뒤이어 왕온을 응시했다.
마치 그 추태를 비웃는 듯한 표정.
그는 단지 울면서 범이 아가리를 열고 자신을 삼키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 전에도 밤마다 이와 비슷한 악몽을 보며 깨어났던 왕온은 후사에 대한 미련을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그는 태자의 상중에도 중전의 처소를 들렀는데, 상중이라는 이유로 합궁을 반대하는 그녀에게 화를 내었던 적도 있었다.
결국 귀비의 처소에 들렀다는 소리도 있었지.
이미 미운 털이 찍혀버린 중전은 소박을 맞았고, 안 그래도 고려 제일의 미녀 중 하나라 꼽히는 귀비는 어느덧 왕온의 품속에 안겨 위로의 소리를 속살거리고 있었다.
온은 욕정에 차 귀비를 품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미인의 품에 있다 한들, 자신의 신체가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여인을 품기는 불가능한 법.
온은 또다시 절망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