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창양에는 여러 임시 기구들이 있었다.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造紙署)
철제 병기들과 그 기술을 다루는 기기서(畿器署)
목재 도구들과 건축을 담당하는 토목서(土木署)
정식으로 품계가 있는 관원들이 담당하지 않았다.
순전히 실무자뿐이다.
양민이지만 천하게 여겨지는 자들도 있었고 심지어 여자도 있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자신의 행랑어멈으로 있다가 지금은 조지서의 반쯤 수장이 되어 있는 아지가 그럴 것이고.
장인들은 그 곳에 근무하며 도호부로부터 적당한 양의 봉급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근무 이외의 시간에 만든 것들은 민간에 팔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그 중 농업 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과정을 관리 감독하는 권농서(勸農署)는 장인들이라기엔 조금 성질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사람이! 그게 아니라!”
“자꾸 말 꼬리 잡지 말어. 에잉!”
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마치 탑골공원에서 별것도 아닌 주제로 말싸움을 하는 것처럼 서로 고함을 질러대었다.
자신이 낸 문제를 누가 옳은 말을 하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더 목소리가 크냐로 해결하고 있는 모양.
그 옆에서 김지숙의 장자, 김인근(金仁瑾)이 그 내용을 기록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되어 가고 있나?”
불쑥, 거구의 무장이 권농서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 한바탕 상투를 잡아대던 노인들이 합죽이가 되었다.
그중에는 예전 신의군 둔전을 경작하다 몇 번 말을 주고받은 노인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토끼눈을 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전혀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하지만 겉모습과는 다르게 농경사회에서 어르신들의 지혜를 우습게 볼 순 없었다.
없겠지?
“흐음.”
잡담을 하다 선생님에게 걸린 애들도 아니고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를 느끼며 상민이 인근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장의 문서가 잡혔다.
양은 그래도 꽤 많았다.
- 연 강수량이 고려에 비해 매우 골고루 내리고 또한 연 기후가 무척 온순하며 변동의 폭이 작다.
- 겨울 기온은 물이 얼 때까지 내려가지 않고 작물들은 냉해를 입지 않는다.
- 메뚜기 떼와 쥐들, 오리와 새떼들이 주요 관심사항...
이곳에 온지 이제 삼년 차다.
데이터가 신뢰성을 가지기엔 무리가 있어도 대충은 어찌 돌아갈 지 알 수 있었다.
상민은 필기되어있는 문서를 들고 읽으며 밖으로 나섰다.
인근이 졸졸 따라왔다.
문서에는 여러 농업 용어들이 적혀 있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고등학교 국사책에 나오는 시비법에 대한 설명으로 고려시대에는 녹비 퇴비법이 발달하고 조선 전기에는 밑거름과 덧거름이 발달했다고.
기억하기로는 녹비와 퇴비는 거름의 종류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녹비법이란 콩과 작물을 수확하지 않고 갈아엎어 비료로 쓰는 것이고 퇴비는 흔히 생각하는 거름, 두엄을 만들어 쓰는 것이다.
그 두엄에는 가축의 변이나 혹은 인분이 들어갈 수도 있겠고, 풀, 짚, 쌀겨 등이 들어가기도 한다지.
밑거름과 덧거름은 거름을 주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밑거름은 그 거름을 파종 전 밭갈이할 때 한 번, 그리고 덧거름은 단어답게 중간에 한 번 더 준다는 소리였다.
국사책에서 배운 것처럼 어떠한 시대의 구분도 명확하게 단정 지을 순 없었다.
심지어 한 노인은 이앙법의 개념에 대해 알고 있기도 했다.
인근이 그것을 받아 적은 내용을 보여주었다.
“이앙법이라 하셨습니까? 아주 예전에 말씀하신 못자리의 모를 옮겨 심는 건 옛 고려 삼남의 농민들 중 일부는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맞다. 하지만 관개수로가 없으니 불가능한 소리다.”
인근은 딱 고등학교 수험생 정도의 나이였다.
경전, 승현보다도 나이는 두어살 많았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애긴 애였다.
요즘 들어 어린애들만 상대하는 느낌이다.
그것이 딱히 아쉽진 않았다.
지숙의 경우가 특이한 것이고, 예전 그 문신들이 사는 거리에서 느꼈듯 이 시대 대부분의 먹물 묻은 인간들은 자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체로 동시대의 사고방식에 꽉 막힌 사람을 데리고 계몽을 시키느니 어릴 적부터 자신의 영향을 불어 넣는 게 나을지도.
마치 교수님 수업시간에 필기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처럼 계속 질문을 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특하게 느껴지는 것은 과외 선생의 경험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그들은 걸어서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넓게 펼쳐진 황금빛 평야.
가을이 되어 추수만을 기다리는 벼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넓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배가 절로 불렀다.
보리는 아니지만 맥주 광고라도 찍으면 딱이겠네.
논들은 제각기 동일한 길이의 끈으로 측량하여 네모반듯하게 크기를 맞추었고 이를 공식적으로 한 마지기로 정했다.
눈대중으로 보면 대충 이백 평정도 되는 느낌이다.
“첫 번째 논부터 보자.”
영현천에 맞붙어 관개수로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논 앞에 목재 말뚝이 박혀 있었다.
이곳 하나만 생산량 비교를 위해 이앙법을 적용했나 보구나.
그곳에 글자가 음각되어 있는 목판이 달려 있었는데 시험 논의 특징과 적용된 재배법, 시비법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추수가 끝나 봐야 알 겁니다.”
“그래도 대충 보니 어떤 논이 잘 자랐는지 딱 보이는구나.”
나머지 물이 없는 논들, 그리고 각기 다른 실험을 하고 있는 밭들, 비료의 구성 성분을 달리해서 몇 개로 나누어 썩히는 곳까지 꽤 많은 구역을 둘러보았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곳에 오니 생각지 못한 것들이 걸렸다.
연중 강우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어 쌀을 재배하는데 최적의 조건이지만, 수경법을 쓰기에는 껄끄러운 면이 있었다.
한 번 숨을 죽일 혹독한 겨울이 없어 모기가 제정신이 아니다.
물까지 담아놓은 논을 이곳저곳에 확장해 놓은 상태로 브라질 쪽에서 열대성 말라리아라도 넘어오면 그냥 떼죽음 아닐까.
계속 건경법을 개량하여 쓰는 것이 좋을 듯 했다.
아예 밭농사를 중요시하는 방법도 있겠고.
밀은 정말 이 땅에선 자신이 최고의 작물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 쑥쑥 자라고 있었다.
‘밀을 제분하는 것도 결국은 다 노동력인데. 사의가 어느 정도까지 갈 수 있을지.'
“오늘 하루 수고가 많았다.”
“부사께서도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하루 종일 같이 고생한 인근에게 격려를 하니 반사적인 대답 이후 그가 약간 머뭇거리며 물었다.
“부사나리,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예기(禮記)의 월령(月令)에서 이르기를 기곡의 곡식은 오로지 상제(上帝)께 달린 것이라 배웠는데 이러한 것들이 다 의미가 있습니까?”
뒷골이 땡겼다.
인근에게 화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시대가 답답할 뿐.
“기곡의 곡식이 하늘에 달린 것은 맞는 말이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는 그저 외부의 변수를 최대한 통제하고 실험하여 산출되는 구체적인 수치를 비교해 결국 가능한 한 최상의 결과만을 도출해 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 중요한 일입니까?”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전부라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은 기껏 대학교 교양과목으로만 동양철학에 대해 공부한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이곳에 와서 확실하게 경험한 것이 있었다.
미신이 뭐 같이 많은 것.
사고실험을 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방구석에 앉아 명상하며 개인의 주관적 경험만으로 우주의 이치에 대해 논하는 자들. 대표적으로 주희가 있겠지.
신성시되는 수백년 전 옛 선인들의 말씀.
또한 맺고 끊음이 똑바른 것이 없었고 모든 것이 물에 물 탄 것처럼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경향 등등.
자신이 비록 문돌이라지만, 그래도 Ceteris Paribus의 개념에 가장 익숙한 경제학도였으니.
상민은 인근에게 과학적 사고방식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 과학적 방법론의 대략적인 개념에 대해 가르쳤다.
가설이란 무엇이며 실험과 귀납적 관찰에 대해서.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통제변수에 관하여.
질문의 주제는 인근의 사고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튀었으나 상민은 화를 내지 않고 자세히 대답해 주었다.
인근의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그는 머릿속에 자신이 집어넣은 생각들이 핑핑 도는지, 계속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정리하다 갑자기 낙담하며 말했다.
“소생은 감히 그 생각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네 잘못은 아니다.
상민은 어딘가 쓸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인근은 꿋꿋이 자신과 나누었던 대담들을 적어 내렸다.
“굳이 그것까지 적어야 쓰겠느냐?”
“소생의 짧은 생각으로는 지금 권농감의 일 보다도 부사께서 말씀하신 몇 마디가 더 중요하다 생각되어 그리 했습니다. 용서하여 주소서.”
“용서는. 화난 것 아니니 네 뜻대로 하거라. 다만 농서의 일이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서 이름을 무엇으로 하겠다고?”
“일단 전농집록(傳農輯錄)이라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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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양에는 새로운 주거환경에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었다.
벽돌로 지은 집들인데, 옛 고려에서는 흔치 않은 건축물이기도 했다.
초옥이든 기와집이든 나무기둥에 흙벽으로 짓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는데, 이리 바뀌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옛 고려에서는 산지가 흔해 화강암 등 단단한 암석들을 구할 수 있는 채석장, 그리고 목재를 수급할 수 있는 수림이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이곳은 그야말로 넓디넓은 평야.
채석장도 노천에서 땅으로 파고들어가야 하는 곳이 몇 군데 있을 뿐 돌을 구하기 쉽지 않았다.
나무를 구하기에도 쉽지 않고 땔감과 다른 도구들을 만들다 보니 나무가 귀했다.
두 번째는 빌어 쳐먹을 흰개미.
이 미친 개미는 이 땅에 왜 이리 많은지 아주 학을 떼게 만들었다.
목재기둥을 틈틈이 갉아먹어 건축물에 피해를 입히는 사례는 수도 건양에서도 수시로 들리는 것들 중 하나였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창양에선 대부분의 건물들이 목재를 쓰지 않고 짓도록 권고했다.
창강 건너편 습지에서 진흙을 퍼와 구워보니 상당히 좋은 벽돌들이 만들어졌다.
강 하구의 퇴적섬에도 진흙이 많았으며 짚과 다른 재료들을 넣어 강도를 세게 하기도 했다.
이젠 이러한 조금 독특한 모양의 집도 고려의 가옥이라 분류되겠지.
또한 가옥의 구조도 독특했다.
한반도에선 해가 동쪽에서 떠 남쪽을 거쳐 가는 까닭에 가옥들이 남향으로 지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그와 반대로 북향으로 짓지 않으면 집이 추울 뿐만 아니라 곰팡이들이 기승을 부린다.
아무 생각 없이 남향으로 지어놓았던 건양의 일부 건물들은 개보수 작업을 통해 다시 북향으로 바꿨다 한다.
동궁은 남향으로 지어놓고 바꾸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걸까.
오늘 밤은 유독 불면증이 심하다.
부사가 된 이후로도 별로 바뀌지 않은 소박한 처소.
작은 등불에 의지해 야근을 하던 상민은 마당에서 들리는 소리에 분합문을 열어 살폈다.
“이 시간에 어디 가시는 게요?”
“별 거 아닙니다, 조지소에 무언가 놔두고 온 것이 있어서...”
“밤 길 조심하시구려.”
아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밖으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