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계유년(癸酉, 1273년) 3월. 스무이레.
등불을 껐었다.
오로지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몸은 아름다웠다.
쑥쓰러워하는 예의 얼굴에 입맞춤을 하고 그는 침상에 누웠다.
나란히 누우니 발은 분명 같은 위치에 놓여 있는데 그녀의 머리는 자신의 명치정도 밖에 오지 않았다.
새삼 자신의 키가 원망스러웠지만 오히려 그 키의 간극만큼 그녀가 더 사랑스러웠다.
“부사.”
살결은 부드럽고 희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그 감촉은 세상 어떠한 비단도 그에 견줄 수 없었다.
두 번 다신 잊을 수 없는 그러한 온기.
영혼을 충족하는 따뜻함.
머리조차도 달콤한 설탕의 끈적임에 휩싸여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지유.”
몇 번을 거듭하여 하나가 된 그들이 지쳐 쉴 동안에도 서로의 귀에 속삭이며 장난을 칠 때 적어도 상민은 자신이 이 곳에 떨어지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한 감사의 마음을 품었지.
비익조와 연리지(比翼連理)마냥 그들은 따로 떨어질 수 없었다.
“형님!”
“...어, 어 그래, 용길아.”
하지만 이렇게 따로 떨어져 버렸네.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십니까? 아까부터 불렀습니다.”
“별 생각 안했다.”
“전주님입니까?”
상민은 대답을 회피했다.
용길은 혀를 찼다.
“그 심정이 안타까우나 시간 외에는 답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길지만 짧은 시간이었다.
난을 진압하고 정세가 안정되자 국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려 내에서 가장 권세가 높은 자들과 결혼을 하는 까닭인지, 그 규모와 질은 화려했다.
연종은 심지어 일주일간 연회를 열었다 한다.
수많은 무장들의 호의를 샀다고도 들었다.
일주일의 신혼기간은 빛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자신은 연회 같은 것은 쥐뿔도 신경 안썼다.
성화전 바깥으로 잘 나가지도 않았다.
등청조차 안했던 것 같다.
별감도 별로 신경 안 썼다.
그저 한 마리의 금수가 된 것 같았다.
‘와이프 보고 싶다.’
이렇게 초장거리 연애, 아니 결혼생활을 해 본적이 있어야 말이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붙잡고 늘어지는 예를 떼어내는 것은 심적으로 매우 힘들었다.
서신교류는 승현을 통해 여전히 할 것이고 자신도 적어도 반년에 한 번, 많으면 분기에 한 번은 도성으로 올라가 보고를 해야 했다.
그때까지 어떻게 참을 수 있을까.
또다시 우울한 현실에 침잠하기 전에 상민은 서둘러 생각의 키를 돌렸다.
갑판에서 하염없이 강가를 바라보는 일단의 무리들이 보였다.
갑주를 입은 병사들 혹은 배를 다루는 선원들이 아닌 영 어색한 사람들이었다.
정체는 다름 아닌 머ㅁ... 아니 스님들.
“스님께서는 항해가 편안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소승은 알고보니 배를 타는 걸 몹시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도착하면 저와 함께 새로운 절을 지을 곳을 탐방하도록 하지요.”
“부사께서 이리 챙겨주시니 소승은 감읍할 따름입니다.”
흥양사 주지 보성대사의 제자 해심(海心)은 특이한 인물이었다.
자청하여 창양으로 가고 싶어 하여 합류를 허락한 것 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쳤다.
그곳에도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교세를 확장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등 뒤에 몇 명의 동자승의 면모를 보니 그 독특한 사고방식을 알 수 있었다.
일곱 명의 동자승 중 세 명이 야인이었던 것이다.
절의 노비로 수여받은 아이들이 꽤 많았다 들었는데, 그 중 가장 영특하고 똑 부러진 애들을 면천하여 승려로 삼았다고 들었다.
상당히 진보적이란 말이야.
‘뭐 원주민들이 스님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여하튼 그 원주민 아이들이 머리를 빡빡 밀고 작은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참 기분이 이상했다.
상민 자신은 무신론자였지만,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없었다. 심적으로 위안을 얻을 종교는 동시대 사람들의 생활에 필수불가결 했다.
적어도 과학의 발전이 계몽을 이끌어내기 전까지는.
지금은 몽골 덕분에 쥐어 터지고 있겠지만 유럽에 사는 사람들이 괜히 신께서 원하신다(Deus Vult)라는 말 한 마디에 레반트로 쳐들어간 게 아니다.
시기도 고려 말 불교의 폐단이 벌어지기 전이었고, 장소도 지금 고려에는 사찰이 단 하나만 존재하고 있는 상황. 불교의 폐단보다는 도리어 그 명맥을 걱정하는 것이 필요할지 몰랐다.
적절한 관리와 감독이 있고, 또 너무 빈궁하지 않게 적당히 먹고 살만한 것을 제공하면 그 순수함을 유지하며 신민들의 영적인 외로움을 달래고 또한 원주민들을 복속하는 데 엄청난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신권은 자신의 지도력 아래 있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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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습니까.”
창양의 나루, 상민이 이름짓기 귀찮아서 여의나루라 붙인 곳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다.
“이게 다 뭐냐.”
앞에 서 있는 문경에게 묻자 그가 코를 긁적이며 웃었다.
“부사(府使)의 영전을 감축드리는 자들이옵니다.”
신의군, 아니 이제는 서로군이 군례를 취하며 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감축 드리옵니다!”
“이 무슨 귀찮은 짓을...”
“제가 시켜서 한 것은 아닙니다.”
조직원들 사열을 받는 마피아 보스도 아니고.
자신의 인기가 나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 전투에서 앞장서 싸운 것도 그랬고, 이번에도 신의군과 계속 대립각을 세웠던 노영희를 처단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문득 그들을 보니 눈 안 깊숙한 곳에 정체모를 열망이 있었다.
영문을 몰라 함께 마중 나온 지숙을 바라보니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할 일이 바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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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을 긴 강의 사람들이라 불렀다.
본래부터 하나의 부족이었던 그들은 두 강을 끼고 상당히 넓게 분포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며 서쪽과 동쪽의 무리들로 나뉘어 대립하기도 했다.
남쪽의 동물 기름을 먹는 자들, 혹은 머리에 큰 깃을 꽂는 자들과도 대립하였고, 저 큰 산맥부근에 사는 자들이 내려와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물론 그들도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도 했다.
본디 수렵 채집민족의 생계는 자연이 정해주는 것이라 그때그때의 가뭄과 홍수, 비 및 자연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유랑하며 살기 때문에 다른 부족과의 충돌은 피치 못할 운명이었다.
소년은 그렇게 대단한 위치에 놓인 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의 부족은 사회적 계층이 크게 분화되지 않았다.
가장 강한 전사와 가장 현명한 이가 존경을 받았고 나머지 부족원들은 대부분 평등했다.
겁쟁이들과 어리석은 이들과 흉측한 자들을 제외하고.
그는 가장 현명한 이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위대하신 분과 교감을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꿈을 통해 계시를 받은 아버지는 말했다.
-망자의 신이시자 또한 살아있는 자의 신인 소이추(Soychu)께서 계시를 내리셨다.
위대한 전사의 창에 의해 포악한 짐승이 찔려 죽었으니, 이는 곧 우리의 승리를 예견한 것이다!
부족의 위대한 전사, 재규어의 발톱은 그 말을 듣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출정을 선언했다.
그는 자신에게 승리밖에 없다 생각하고 있었으며 실제로도 그럴 만한 업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수많은 전쟁에서도 그 용맹무쌍함으로 패배하지 않았으며 위기의 순간에도 적들을 죽이고 돌아왔다.
그래서 소년이 불길한 징조를 보았을 때도 차마 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사실, 그러한 연유로 그들의 부족이 먼저 남쪽을 공격했던 것이 맞았다.
하지만 머리에 큰 깃을 꽃은 자들의 방어는 상당했고 그들은 오히려 반격당하여 부족의 남자 전사들을 모두 잃고 도망쳐야 했다.
재규어의 발톱이 피를 흘리며 돌아올 때, 부족은 경악하며 도망을 시작했지만 추적자들의 발이 더 빨랐다.
마치 사냥감이 제 발로 스스로의 둥지를 보여준 것과 같이 그들 부족의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잡혀버렸다.
아버지와 전사가 죽고 원로들도 죽었으니 그들 부족의 운명은 이제 끝이 난 것이다.
동시대 이 대륙에서 선사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부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흡수당하고 저들의 일원이 되어 살아갈 것이었다.
그 과정에 죽는 자들이 엄청 많겠지만 그 또한 운명이겠지.
하지만 진정한 전사는 따로 있었다.
남쪽 머리에 깃털을 꽂은 자들이 자신들을 끌고 갈 때 한 존재가 그들을 습격했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짐승에 거대한 무기, 그리고 검게 물든 비늘을 입고 있는 그 자는 자신의 부족을 정벌한 강인한 부족을 마치 죽은 짐승의 살점을 발라내는 것처럼 손쉽게 죽였다.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 자는 정말로 소이추의 현신이 아닐까?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
위대한 분께서 계시를 내리셨지만 아버지가 그것을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단연코 한 번도 이러한 자비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의 힘에 모두가 공포에 질렸지만 풀려난 이후에는 모두가 그를 동경했다.
여성들도 모두.
소년은 단도를 가지고 있었다.
어피로 쌓인 도집은 수수하지만 고풍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이 도를 모두에게 보여주자, 부족의 남은 자들은 그 화려함과 그 날카로움에 모두 엎드렸다.
단도로 위대하신 분께 올릴 짐승의 목을 베니, 피가 솟구쳐 올랐다.
여러 번 썰어야 했던 돌칼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예리함.
소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당장에라도 혹독한 자연과 가차 없는 부족들에게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자에게 굴종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누이들, 자신의 어머니들, 후손들을 지킬 수 있다.
이곳에 온 후 해가 일곱 번 뜨고 졌다.
그분이 노할까 감히 허락도 없이 가까이 가지는 못했다.
다만 여기서 기다린다면, 필히 대답을 주시리라 믿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부름에 소이추께서 응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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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양에는 꽃가루가 휘날렸다.
- 와아아!
단순한 개선식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 여긴다면 당신은 그 세심한 관찰력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환호를 하고 있었지만, 특히 많은 남정네들이 고개를 빼고 그들을 살펴보았다.
이미 결혼을 한 자들은 등짝을 한 대 맞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혼인 남성들은 신분의 차이와는 상관없이 모두 휘파람을 불었다.
여인들은 거의 모두 헐벗고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온 병사 하나가 고려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모시로 짠 천을 옆에 걸어가고 있는 여인에게 덮었다.
그리고는 그 여자를 쳐다보는 자들에게 화를 내었다.
예전 건양에서 굴비처럼 끌려가는 야인노비들과는 정 반대의 광경이다.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벌써부터 난리도 아니군.”
선두에 서서 말을 타고 가는 상민의 말에 듣고있던 지숙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뒤에 반쯤 부족의 우두머리 취급을 받고 있는 소년이 걸어가고 있었다.
해심의 동자승 한 명이 더듬거리며 통역을 하는 것이 보였다.
"이런 것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다."
소년은 뉘앙스를 눈치챘는지 다시 풀이 죽어 보였다.
약간 미안하지만, 그래도 험담을 번역해 들려주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솔직한 말로, 현대인의 입장에서 저들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부드럽게 말하면 야성의 특징이 너무 강했고, 조금 직설적으로 말하면 남자같이 늠름하게 생겼다.
진짜로.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볼 때, 고려의 일반적인 여염집 아낙들의 외모도 자신만의 미인상과는 아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니.
그들이 아직은 수렵민족임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정주민족에 들어서면 신체 구조도 서서히 바뀌는 것이 사실이니까.
또한 고려인과 결혼하여 혼혈이 된다면 그 특징이 다른 것으로 발현될 수 있었다.
문득 우측에 서 있는 문경에게 물었다.
“너는 관심가는 여인도 없냐?”
문경이 그의 눈치를 보다 조그맣게 없다고 중얼거렸다.
어떤 놈이 그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믿겠니.
자신의 아끼는 동생의 표정을 수상하게 바라보던 상민이 굳이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리고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지숙에게 말했다.
“김 판관(判官)은 내가 건양에서 데려온 몇 명의 의원들로 하여금 저들에게 혹여 병이 있는지 검사하라 이르시오.”
“예?”
“그들이 알 것이외다.”
지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많은 인원을 창양으로 들이는 것에 그는 반대하지 않았다.
아마 창양의 농사일을 살펴보는게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