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8화 (28/653)

부사(府使)

복면인들 개개인의 무력은 상당하였으나, 단 한 명도 뒤로 나아가지 못했다.

마지막 자의 목을 들어 순수하게 그 악력만으로 꺾어버린 통정은 어느덧 장내에 정리가 다 끝났음을 알고 도를 몇 번 털어 수납했다.

고려 최고의 무장 김통정.

주변에 매복해 적들을 맞이했던 좌별초의 무인들이 그를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저 사람이 그들의 전우라는 사실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앞에 무릎 꿇려져 있는 사람에게는 불행한 일이었고.

하늘을 바라보던 중손이 고개를 내렸다.

통정이 물러서자 그는 천천히 영희에게 다가갔다.

“노 지유.”

“별감.”

침묵이 좌중을 휩쓸었다.

“그대가 날 이렇게 만들었소.”

“이 땅과, 이 시대가 우리 모두를 바꿨지.”

한참 과거의 일을 더듬어가며 회상하던 영희의 눈동자가 이윽고 침잠하자 중손이 기다림을 끝내고 입을 열었다.

늙은 장수는 분노보다는 체념 가득한 눈길로 중손을 바라보더니 이윽고 피식 웃었다.

부질없구나.

모든 것을 걸었으면, 마땅히 이러한 일도 벌어질 것을 예상했어야 했다.

“별감, 그대도 그대의 끝을 생각해 놓는 것이 좋겠네.”

중손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희 등 뒤에서 무장이 도를 치켜들었다.

도감 안으로 들어온 중손은 털썩 주저앉았다.

핏물이 잔뜩 묻은 갑주를 대충 닦아낸 통정이 뒤이어 들어왔다.

그는 잠시 피곤에 쩐 자신의 상관을 바라봤다.

강건한 거인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어하고 있었다.

“눈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중손은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사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직접 나아가 저들을 맞이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이유가 컸다.

“다른 쪽은?”

“방금 전령이 와서 알리길 모두 정리가 끝났다 합니다.”

“왜 직접 와 보고하지 않고?”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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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독의 기원에 대해 학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 학설을 따른다.

일단 첫 번째, 아메리카에서 건너왔다는 학설.

구체적인 발생지로는 갈라파고스 제도의 에스파뇰라 섬을 꼽는 학자도 있긴 했다.

두 번째, 유럽에도 존재했다는 학설.

두 가설의 공통점은 결국 매독은 아메리카 대륙의 풍토병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상민은 전혀 몰랐다.

심지어 처음에는 무슨 질병인지 몰랐으니까.

그는 의사가 아니었다.

환부를 딱 보고 아 이거다! 라고 짐작을 내릴 수 있는 그러한 사람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저렇게 흉측하게 생긴 반점을 가진 병을 보고 어떻게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 없을까.

상민은 공포심이 들었다.

자신은 늙지 않고 아프지 않는단다.

하지만 그건 어디서 증명할 건데?

늙지 않는 것은 앞으로 몇 십 년은 더 살면서 주름살 개수를 체크하면 되는 것이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병치레를 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건강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머리로는 나 안 죽어! 외치고 있지만 가슴은 거부하는 상황.

하지만 호기심이 더 큰 것 같았다.

머리가 슬슬 꼬드기며 네 자신과 네 이성을 믿고 다가가라 말하고 있었다.

그래 다시 가서 관찰해 보자.

어떤 병일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수를 명령받은 병사가 뛰어간 후, 그는 다시 그 도를 들고 슬쩍슬쩍 관찰했다.

‘와 극혐이다.’

아직 온 몸에 퍼지진 않았으나 몸 이곳저곳엔 울긋불긋한 반점들이 보였다.

병사 몇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너는 가서 상황이 정리된 것을 보고해라. 또한 역도의 수괴가 역병을 앓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고도 전하고.”

안색이 새파래진 병사가 허겁지겁 달려갔고 궁금해 하던 눈치의 병사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장군, 위험합니다.”

상민이 살펴보는 것을 멈추지 않자 병사들이 말렸다.

하지 말라면 꼭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단 말이야.

갑자기 불로불사 트레잇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위험한 것은 알고 있는데. 정확히 무슨 병인지는 알아야지.

반점이라.

여러 가지 병들이 있을 수 있겠는데.

홍역, 천연두, 수두, 대상포진, 헤르페스 등 수많은 병명들이 떠올랐다.

앞의 두 개는 기각.

특히 천연두라면 건양은 이미 박살이 나 있을 것이다.

헤르페스는 확실히 아니야. 병 같지도 않은 질환이니까.

자신도 피곤하면 입술이 부르트는 1형 헤르페스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에 대해선 빠삭했다.

아시클로버는 필수품이다.

‘으, 존나 싫은데 보긴 해야겠고.’

도로 하의를 가르다 보니 그의 남근이 보였다.

역겨운 기분을 참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사후경직 전인지, 덜렁대는 그 물건이 힘없이 움직였다.

죽어가며 오줌을 싼 탓에 지린내가 났다.

확실히 반점이 생식기에 집중되어 있었다.

매독으로 판단이 쏠렸다.

매독이라.

대한민국의 현대적인 군대에서도 은근히 자주 발생하는 성병이었다.

품행이 바르지 못한 자가 외부에서 한 번 그 병균을 가지고 들어오면 그 부대는 비상이 걸렸다.

걸린 대대의 대대장이 연대장에게 대판 깨지는 것을 봤다.

특정 시기에는 전염성도 몹시 강해져 성행위뿐만 아니라 식수와 음식물, 피부접촉으로도 충분히 감염될 수 있다. 덕분에 부대 하나가 통째로 격리되었지.

생활관 바로 옆 자리에 딱 붙어서 자는 것은 물론이고 세탁기와 건조기에서 섞인 팬티와 양말을 돌아가며 입기도 하는 군인들은 줄줄이 소세지로 순식간에 전염되기도 했다.

남중 남고 군대 트리를 탄 여자 손 한 번도 잡지 못한 인간들도 난생 처음 성병에 걸리고는 이름 모를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다.

사실 현대에서는 그리 위험한 병은 아니었다.

항생제에 꼼짝 못하는 병이라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인지하는 즉시 빠르게 병원에 가면 괜찮았다.

주사 한대를 맞고 극도의 쪽팔림과 함께 자신과 관계한 여자들에게 문자를 보내야 하는 것만 빼면 치사율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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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칵 뒤집힌 조정은 며칠동안이나 뒤숭숭했다.

밤새 일어난 난에 고려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 죽어버린 것이다.

문신들은 물론이고 무신들도 전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우별초의 동요는 생각보다 빠르게 잦아들었다.

일단 신손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우별초라고 해서 모두가 중손을 적대하는 인원은 아니었기에 중앙의 지시를 고분고분 받는 부대도 있었고.

이미 죽어버린 주인을 찾는 멍청한 자들은 진작에 다 죽었다.

이 사태를 어느 정도 예상한 인물들도 있었다.

별감과 노영희의 충돌은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둘의 성격 상 한 사람은 죽어야 끝이 날만 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 사태는 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졸지에 역병의 조사관으로 임명된 상민이 성철의 시신을 그리게 한 뒤 태워 버리고 그의 집으로 갔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수많은 재물들이 창고 안에 놓여 있었다.

'양아치같은 놈들...'

옛 고려에서 가져와 더 이상 구하기 힘든 자기와 아예 생산조차 불가능한 비단들, 귀중품들, 패물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곡식들까지.

상민은 그것들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이곳은 역병의 근원지이니 이 붉은 금을 넘어오는 자는 역병에 걸려도 탓하지 마라!”

주위에 폴리스 라인처럼 붉은 줄을 긋자 사람들이 아무도 넘어오지 않았다.

역병이라는 단어 앞에서 호기심이란 것은 공포심에게 두들겨 맞는 것이다.

승현 무리를 불러 조사가 진행 되는 중 조금씩 그 물품을 나르도록 하니 어느새 반 이상 꿀꺽 삼킬 수 있었다.

상민은 스스로를 청렴결백한 인물과는 거리가 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잘 되어야 창양도 잘 되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절반은 눈치가 보이니까 위에 자진납세하고 포상금을 받도록 하자.

태자가 죽고 목숨이 간당간당했던 의원들 몇을 이끌고 그곳에 기거하는 노비들과 시종들을 불러 모아 살펴보니, 야인 비자(婢子, 여자 노비) 중에서 과연 매독에 걸린 자가 있었다.

모든 야인들이 보균자는 아니었지만, 이 지역의 야인들에겐 익숙한 병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고려의 의서와 기록들을 아무리 찾아봐도 매독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건국 초창기에 잡혀와 이제는 고려 말을 얼추 듣고 말할 수 있게 된 야인 비자가 덜덜 떨면서 옷을 풀었다.

야지에서 맨 살을 내놓고 다니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며 살던 여인이다.

고려에 복속되어 옷을 입게 되더니 이제는 벗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는 것일까.

불과 이삼 년이 지났을 뿐인데.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더니.’

외간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별 감흥이 없었다.

고려는 꽤 개방적인 나라였으니까.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감염자의 증상을 본 그들이 서로 귓속말로 토론하는 것을 들으며 상민이 질문을 던졌다.

“너는 네 주인의 비첩(婢妾)이냐?”

“예...”

“네 주인에 대해 상세하게 말해 보거라.”

성철의 음행이야 저잣거리의 호사가들에게는 단골 술안주거리였다.

일찍이 고려에서 납치해온 백관의 처자들을 건드리기도 했고, 여염집 아낙네를 욕보이기도 했다.

또한 야인 비자들을 군공으로 얻거나 사서 품기도 했단다.

‘대단하신 인간이군.’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짐승이지만 이미 죽고 그 시신을 태워버린 인간에게 쓸 심력 따윈 없었다.

최근에는 그 아비에게 큰 소리를 들어 행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했지만 언제부터 기원하여 퍼진 병인지는 몰랐다.

예전에 관계한 고려인들도 걸렸을 수도 있고.

피부접촉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성관계가 아닌 경로로 걸린 자들도 있겠고.

그래도 일단은 그 소문의 끄트머리를 추적해 보균자와 감염자들을 많이 찾아내었다.

백 퍼센트라고 확신은 불가능했다.

이미 죽어버린 자들도 있었다.

“자연치유가 될 때 까지 저들을 한 곳에 격리하는 것이 좋겠네. 증상이 심한 자들은 따로 분리하고.”

“예.”

의원들은 대답했다.

무려 일주일간 그들을 달달 볶아 정말 아주 기본중의 기본들을 가르쳤다.

현대인이라면 상식으로 알 것들.

환부를 되도록 만지지 말라, 손을 씻어라, 철제 칼과 침은 좀 불로 소독해라, 입 좀 막아라 등등.

위생관념이라도 탑재해야 뭐가 좀 되지.

잔소리를 한 사발 먹은 의원들은 안 그래도 언제든지 태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인지, 상민에게 거의 구십 도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역병의 사기(邪氣)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구강과 비강뿐만 아니라 단순한 접촉으로도 언제든지 퍼질 우려가 있다. 또한 잔존한 사기가 의복이나 도구에 깃들어 있을 수 있지. 한 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말라.”

“명심 하겠나이다.”

자신의 명을 받아 수급을 취하다 피가 튄 불쌍한 병사가 우울한 얼굴로 격리장소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옷 겉에 묻고 바로 벗으라 했지만 혹시 전염이 될 수 있었기에.

나머지 자들도 순순히 격리구역으로 들어갔다.

병이 더 심해지면 고통을 줄여 줄 수도 있었다.

결국 지금 이 시대에 자연치유가 되지 않는다면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까.

생각하자면 이 병이 이 땅, 그리고 원주민들에게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면 지금 고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기존의 풍토병을 근절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도 가끔 퍼지는 병인데.

상민은 매독이라는 질병의 위험성보다도 고려시대의 허술한 의료와 방역체계를 손봐야 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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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쨍쨍하여 서늘한 바람에도 살짝 땀이 났다.

보위도감 삼중 누각의 맨 위층에는 삼별초의 중랑장급 이상 무장들이 전부 집결해 있었다.

이렇게 또 전체회의에 참가하는 것은 오랜만이군.

그곳에 나아가 정성스레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처럼 역병의 상세한 설명과 현황, 그리고 조치를 보고한 상민이 군례를 취하고 물러났다.

“그것이 그리 무서운 병인가?”

“다른 흉악한 역병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 번 걸린 자가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알겠다.”

깔끔한 보고, 적절한 상납금, 후속조처까지 꽤 마음에 든 모양.

중손은 손짓으로 저 옆에 서 있는 문신 하나를 불렀다.

다른 무장들은 별감의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인사 발표날에 긴장하는 것은 저쪽이나 이쪽이나 다 똑같은 게로구만.

첫 타자는 자신인 것 같았다.

중손은 일어나며 상민에게 말했다.

“앞으로 나오라.”

별감의 뒤에 서 있던 이부 일을 맡은 정방의 문신이 다가와 죽간을 펼치고 낭독했다.

“신의군 중랑장 김상민을 장군(將軍), 산계는 중무장군(中武將軍), 직책은 안서도호부사(安西都護府使) 겸 서로군지유(西路軍指諭)로 임명한다.”

창양의 일천 군사와 그 군정을 통솔하는 자리에, 그리고 이제는 진정한 장군의 자리에 오른 상민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었다.

주변 장수들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승진하고 있는 상민을 보며 감탄하고 부러워할지언정 그리 아니꼽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노영희의 난에 공을 세운 것은 분명하니까.

“그대는 고려의 창과 방패가 되어 외방에서 야적들을 물리쳐 국경을 수호하라.”

‘드디어...’

턱을 내밀고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지만 감개가 무량했다.

손발이 다 떨릴 정도.

중랑장으로 승진한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기뻤다.

이제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올랐다.

옛 고려에 존재하였던 일반적인 도호부와는 달리 지금은 국초의 상당히 특수하고 위급한 상황이었고 중앙과의 거리와 여건을 고려하여 독자적인 정책과 영역내의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선조치후보고의 체계는 여전했으나 이제는 보고할 거리도 많이 줄어든 셈.

자신이 이끄는 군대는 신의군 소속에서 이제는 서로군으로 바뀌었고 별감과 중앙 무장들이 이끄는 경별초(京別抄)와 적석 이북을 관리하는 북로군(北路軍), 동쪽 안동도호부에 자리한 동로군(東路軍), 통정이 이끄는 황실 금군(禁軍)과 함께 자체 지휘권을 가진 군대가 되었다.

물론 그 규모의 비율은 연대와 사단, 그 이상으로 차이가 났지만.

적어도 지금은 발걸음을 크게 내딛었다는 것을 자축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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