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7화 (27/653)

노영희의 난

“국본(國本, 태자)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어찌 국혼을 강행하는가!”

“폐하.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폐하께서 더욱 더 공고히 용손의 혈통을 안정시키셔야 하옵니다. 생로병사의 일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고 다만 수많은 의원들로 하여금 태자 전하의 미령(靡寧)을 호전토록 하고 있으니 분명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것입니다.”

생기가 빠져나간 왕온은 무신들의 강압에 이리저리 이끌리며 대혼(大婚)을 준비했다.

그 당일이 되자, 많은 인파들이 흥평궁 정전 선경전 앞의 광장에 모였다.

조선시대에선 가례(嘉禮)는 오례(五禮) 중에서도 가장 호화롭게 거행되는 왕실 예식이었다.

금혼령을 내리고 간택 절차를 통해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을 거쳐 왕비가 되는 것이다.

상민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 광경을 내심 기대했지만 실망스러웠다.

시대도 달랐고 규모도 사정상 작았으며 절차도 간소했다.

이미 정해진 대본을 읊기만 하면 되는 자리였으니까.

다만 몽고풍(蒙古風)의 영향을 안 받은 혼례를 봤다는 것에 의의를 뒀다.

귀비 임(任)씨의 혼례도 원플러스원 편의점 행사상품 마냥 같은 날에 하는 건 과연 예전에 있었던 일인지 궁금하긴 했다.

뭐 자신에게 나쁜 건 아니다. 빨리 할수록 자신의 결혼식이 가까워지니까.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고개를 돌리자 모두가 다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고 있는 가운데, 혼자서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사람이 보였다.

이제는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리려고 하는 장군.

예전 자신이 충돌했던 우별초의 총지유다.

‘꼴좋네.’

결혼사기를 당한 노인네는 화를 참지 못하고 푸들푸들 떨고 있는 모양이었다.

동궁에 누워 있는 태자는 심지어 아비의 국혼에도 참여치 못했다.

그것을 보니 그 병의 병세를 숨긴 중손이 대단했고, 그저 낙관적으로 바라보다 사태의 심각성을 지금 안 영희가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누굴 욕하랴. 지가 소문에 느리고 멍청한 걸 탓해야지.

심지어 태자비는 나이도 어린애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지만 분노의 화살은 결국 별감에게 향하게 되겠지.

기름을 부어 놓았으니 활활 잘 타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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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을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국 벌어질 일이 벌어졌다.

‘이런 젠장!’

적어도 몇 달은 미뤄진 혼약에 상민은 속으로 심한 욕을 내뱉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 죽는 건데.

태자는 이 땅에 온지 삼년을 버티지 못하고 훙서(薨逝)했다.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에 의거해 장례를 빠르게 치룬다 했지만 자신의 혼례가 언제 될 지는 아무도 몰랐다.

같은 꼴을 하고 있는 동서와 눈이 마주쳤다.

눈인사를 건네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종.

이신손의 차남이자, 죽은 형 대신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사람이다.

이목구비가 반듯하여 잘생기기까지 했다.

키는 자신이 훨씬 크다.

‘크흠.’

경박한 승리감을 조금 치워보자.

아비인 이신손이 성격이 급하고 난폭하여 그가 이끄는 부대에도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수습을 하여 봉합하는 것은 연종의 몫이랬다.

신손도 아들만큼은 극히 아끼는지 그의 말이라면 대부분 다 들어주었고.

또한 군정을 펼치는데 있어서도 공정함과 엄정함이 나름 있어 민심을 제법 챙길 줄도 알았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 자는 야망도 있는 편이다.

‘흉중에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 같다 했지.’

조정에는 조금 노망이 난 늙은 문신 한 명이 있었다.

점집, 아니 태사국의 수장인 안방열이라 하는 자인데, 그 자는 계속 이상한 말을 씨부려 대며 다른 사람들에게 헛된 망상을 불어넣고 있었다.

고려가 다시 세워졌음에도 고려는 곧 망할 것이라, 용손의 혈통은 끊길 것이라 예언했으며, 남쪽에 황제의 수도가 세워질 것이라고도, 그리고 이씨(李氏)가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도 했다.

상민은 앞의 두 개는 몰라도 뒤의 말은 상당히 듣기에 거슬렸다.

이씨로 개명해야 하나.

별감도 이를 좋지 않게 여겨 옥에 가두려 했으나 나중에 신손이 따로 거두었다.

요즘은 영 조용하지만 그것이 좋은 의미는 아닐 수도 있었다.

왜 그 입만 나불대는 자를 거두었겠나.

‘도참설로 휘하 장수들과 민심을 어찌 끌어올리는 수작이겠지.’

경전이 따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상민은 그 속셈을 얼추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놈은 어찌 보면 자신과 상당히 비슷한 놈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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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일단의 무리들이 움직였다.

칼을 찬 무인들은 검은 복면을 쓰고 건양 어느 한 곳에 모였다.

그 옆 죽여 놓은 순찰대는 이미 이들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증표였다.

노영희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복면인들의 앞에서 그 숫자를 점검했다.

오직 믿을만한 자들만 선별하여 모였으니 그 수는 백을 넘지 않았다.

‘속전속결이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기가 중요했다.

상이 끝나기 전에 거사를 치루는 것이 좋았다.

지금 모두는 죽은 태자에 대한 애도를 하며 경계를 느슨히 하고 있었다.

다시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아예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무력하게 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배은망덕한 놈.’

자신의 부하였던 중손은 이제는 자신의 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다.

배알이 뒤틀리긴 했지만 그것에 대해 원망을 할 만큼 속이 좁은 인간은 아니었다.

자신 대신 봉기를 한 공을 무시하진 않았다.

다만 갈수록 하는 행동이 괘씸했다.

무릇 아랫것들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적절한 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별감은 오로지 강공, 계속되는 압박만 넣을 뿐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그리고 이번 태자비 사건.

그는 자신의 딸이 이제 겨우 월경을 하는 나이가 지났어도 태자비의 자리에 권리를 행사했다.

‘딱 한 번, 딱 한 번이라도 씨를 받으면 되었던 것이거늘!’

그렇다면 자신은 추후 고려의 천자가 될 사람을 끼고 무상의 권세를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그 한 번의 기회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의 딸을 태자비에 옹립하는 결정 자체는 자신이 내렸다.

하지만 그 환후를 그에게 숨기고 결정을 내리는 것에 수작질을 부린 것은 저놈이었다.

교접을 할 체력 걱정은 커녕 생사를 달리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군의 세력과 다른 것을 종합하여 고려하면 자신은 분명한 열세였다.

때문에 저기 서쪽과 동쪽의 무리들처럼 지방에 가 자신의 거점을 만드는 것도 생각을 해 보았지만.

단 한사람만 죽으면 고려를 움켜쥘 수 있는 것인데.

내가 왜 그리해야 하는 것이냐.

이 모든 것은 나에게도 허락될 수 있었던 권력 아니었더냐.

그의 생각은 어딘가 부산스러운 자신의 아들에 의해 끊겼다.

그는 나지막하지만 화가 잔뜩 난 소리로 외쳤다.

“네놈 뭐 하는 것이야!”

군기를 점검하며 날카로운 살기를 내뿜는 자신의 수족들을 보다 자신의 곁에서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꿈지럭대는 인간을 바라보니 한숨과 싫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아버지.”

“쓸모없는 놈 같으니라고. 내 오늘 밤이 몹시 중요하니 자꾸만 거슬리게 했다간 큰 경을 칠 줄 알거라.”

계속 사타구니를 긁던 성철이 화들짝 놀라 자세를 바로 했다.

“네놈이 일 처리를 똑바로 해야 한다. 보위도감을 침과 동시에 바로 우별초의 전 군을 이끌고 나에게로 합류하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성철이 나름대로 씩씩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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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달은 그믐달이다.

달의 운세는 좋았다.

어두운 밤거리에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목적지는 한 곳.

이 늦은 밤에도 환히 불을 밝히고 있는 건양에서 제일 높은 건물.

그곳을 따라가다 보면 필히 그 권력을 쥘 수 있겠지.

반쯤은 뛰는 것처럼 복면인들은 속도를 높였다.

가벼운 갑주만을 받쳐 입은 덕에 기동이 빨라 어느덧 문고리의 문양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졌다.

번을 서고 있던 자가 경호성을 지르며 다급하게 고함을 치려했다.

-쐐액

멀리서 파공성이 들리며 경비는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와아아!

보위도감의 건물이 가까워지자 그들이 드디어 함성을 지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란을 눈치 챘는지, 아니면 단순히 잠에 들지 못했는지 넓은 마당에 중손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이 소란에도 마냥 버드나무의 잎을 쓰다듬을 뿐이다.

그 광경을 보고 주춤거린 우별초의 병력들.

분명 주위에는 단 한 사람만 있을 뿐인데, 그 분위기는 실로 압도적이었다.

“배가 놈의 목을 베어 가져온다면 내 후하게 사례하리라!”

분위기를 깨려 노영희가 고함을 질렀다.

그 동안 별감 뒤에 서 있던 무장이 앞으로 한 걸음 나오며 말했다.

“늙은이가 탐욕이 지나쳐, 수하들을 사지로 이끄는구나.”

영희가 당황하여 그를 손가락질했다.

네가 등장할 시간이 아닌 것인데 대체 어째서?

“네... 네놈이 왜 여기에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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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은 우별초의 병력들을 깨우고 긴급히 무장들을 소집했다.

“고려에게 큰 화가 닥쳤으니 그대들은 일어나 무장을 갖추어라!”

꿈속에서 끌려나온 무장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대충 챙겨 입고 성철의 뒤를 따랐다.

그 수가 급격히 불어나 수백이 되었을 때, 일단의 군세들이 그들을 감쌌다.

중무장을 한 자들.

이미 이 사건을 예견한 듯 준비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자들은 보기에도 지금 잠에서 깬 사람들의 무장 상태와는 질이 달랐다.

그 선두에 체격에 비해 다소 작은 말을 타고 있는 한 무장.

상민이 고함을 질렀다.

“들으시오! 역적 노영희는 밤중에 보위도감을 범하려 군세를 일으켰으나 머지않아 진압되었소.”

진압은 뭐 한창 진행중이겠지만 알아서 하겠지.

자신들의 상관이 하루 아침에 역적이 되었다는 것을 그 누가 쉽게 믿겠는가.

사실 별감은 그래서 자신을 이곳으로 일부러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영악한 늙은이.

“그것을 어찌 믿소이까?”

“믿든 말든 자유지만, 지금 그대들이 무장을 하여 이동하는 것을 막는 건 내 임무이니 이를 따르도록 하시오!”

좌중의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노영희의 장자 성철을 믿을 것인가 저 자를 믿을 것인가.

우별초 중 신의군과 갈등을 유발한 자는 이미 동쪽으로 가 있겠지만 이곳에 있는 자들도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닐 듯 싶다.

“저놈이, 저놈이 별감을 해하려는 게야! 저놈이 역적이다!”

그래서 성철이 좌중을 선동하기 시작했을 때, 군심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신의군 놈들이 드디어 일을 벌이는 것이다! 저 자들이 별감을 해하고 우리들을 숙청하려는 게야!”

데리고 온 자들이 그를 따라 인파에 숨어 하나 둘 씩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는데.’

사태를 예견하여 무장을 하고 대기했지만 충돌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자신이 이끄는 병졸들이면 모를까 이 자들은 통정의 휘하에 있던 애들이다.

그래도 친한 전우들이라 상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젠장, 원주민들이랑 싸우는 거랑 차원이 다를 텐데.’

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리들, 그리고 저들 모두가 정규군이며 정예병이다.

어설프게 끝날 일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좌별초 병력도 좀 섞어서 데려오는 건데.

그들은 아마 별감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겠지.

타고 있는 군마도 아쉬웠다.

적제였다면 자신의 전투능력치의 30퍼센트를 책임져 줄 수 있을 것인데.

하지만 그 놈은 아마 창양의 지 집에서 네 명의 와이프와 화려한 신혼 생활을 보내고 있을 것이었다.

말보다 못한 주인이라니.

그 순간, 갑자기 파공성이 들려왔다.

자신과 가까이 들린 것은 아니었으나 반사적으로 머리를 숙인 상민은 활을 쏜 자가 누군지 찾으려다가, 군중 속에서 난 비명에 고개를 돌렸다.

성철의 목에 박혀 있는 화살은 거의 그 꽁지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고들었다.

저 멀리 말을 타고 나타난 신손이 얹은 활의 시위를 천천히 놓고 있었다.

썩 좋아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파른 언덕 위에서 왕을 위해 돌격하는 흰 마법사와 기병대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영화의 한 순간 처럼 대치하고 있던 우별초의 일부가 다른 별초들과 거리를 벌렸다.

신손을 따르는 자들은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기다려 그에게 군례를 취했다.

“구태여 싸울 필요는 없다.”

그는 시크하게 한 마디를 남긴 채 고함을 질렀다.

“다들 들어가서 다시 자라!”

어처구니 없는 말에 상민이 무어라 할 찰나 그 뒤에서 연종이 웃으며 나타났다.

“오랜만이오. 동서.”

“이런 곳에서 보니 반갑소이다.”

“우리끼리 싸워 봤자 웃을 사람은 따로 있지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연종은 말을 몰아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대부분의 우별초들은 이 어이없이 끝나는 상황에 당혹해하긴 했지만 신손과 그의 낭별장들에게 이끌려 자신의 처소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영희를 따르고 있는 자들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저 자들은?”

“내가 처리할 테니 그대는 저 전공을 챙기는 것이 좋겠소.”

"내가 죽인 것도 아닌데?"

"토벌대에 뒤늦게 합류해서 그대의 활 솜씨를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구려."

능글맞은 말이었다.

눈앞에서 신손과 그 아들이 우별초를 모두 꺼억하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 상민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래도 서로 피를 흘리는 것 보다야 훨씬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기위안을 하며 상민은 성철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어이없는 죽음.

천박한 행실로 유명한 그 자는 이토록 허무하게 삼도천을 건넜다.

퉁퉁한 신체.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 들고가기 편하게 만들어주자.

"어억!"

그 역적놈의 수급을 자르게 명령한 상민은 목을 자르던 병사가 놀라 소리치는 것을 듣고 말에서 내려 다가갔다.

“왜 그러느냐.”

목 한두번 잘라본 놈이 아닐 터인데.

"저... 저!"

병사는 꼭 몹쓸 것을 본 것 마냥 성철의 시체를 손가락질했다.

무언가 수상함을 느낀 상민은 병사가 떨군 도를 들고 슬쩍 시신의 상의를 건드렸다.

성철의 몸에 난 이상한 반점들.

그것은 마치 꽃무니처럼 상반신에 조금씩 피어 있었다.

등골에 소름이 내달렸다.

“너, 옷에 피가 묻었느냐?”

“예, 예, 묻었습니다.”

상민은 황급하게 말했다.

“당장 도를 내려놓고 달려가 몸을 씻어라. 이왕이면 누구와도 만나지 말고, 소영강으로 가서 씻는 것도 좋겠다.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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