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양으로(수정됨)
건양에서 배가 왔다.
추가 식량 천 섬과 노비를 팔아 챙긴 송아지 여섯 마리가 내려왔다.
난민들은 더 오지 않았다.
조정에서 막은 모양이다.
사실 다행이긴 했다. 이곳도 지금은 여유가 없었으니까.
오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도 있었다.
상민은 부대의 지휘권을 가장 믿음직스러운 문경에게 맡기고 연수와 지숙에게 그를 보좌토록 했다.
자신은 용길과 사의 등과 함께 건양으로 돌아가는 배 위에 올랐다.
어느덧 끝나가는 항해.
상민은 배 위에서 몇 번이나 읽어 이제는 약간 너덜거리기까지 하는 편지를 다시 꺼내보았다.
인편으로 배달된 편지묶음은 귀한 종이 위에 상민에게 너무나 익숙한 글자로 써 있었다.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은 아마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의 나열이겠지.
물론 단어와 필체, 그리고 맞춤법은 많이 틀리고 어색했지만 그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었다.
딸이 있다면 초등학교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이 이럴 거 같은데.
한글을 그것도 자신과 만날 때만 틈틈이 배운지 겨우 몇 달 밖에 되지 않는 사람이니 그런 것도 있겠지만, 외지에서 편지를 받으니 처음에는 그냥 행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재차 편지를 다시 읽어 내려가는 상민의 얼굴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편지 서두의 사랑스럽지만 남에게 보여주긴 부끄러운 부분은 따로 빼내어 소중히 간직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
왕예가 자신에게 애써 알려주려고 하는 궁내의 소식들.
- 이월 열 하룻날이었어요.
중궁(中宮)에 주인이 내정되고 몇 주가 지났을까요?
중전이 되실 분께서는 착하신 분이에요.
별감과는 그 성정이 조금은 다른 분이지요.
궁인들에게서 들리는 소문도 좋더랍니다.
저번에 언니와 저를 불러 차를 마셨는데,
...
-
부상 폐하의 국혼 이후 오라버니는 더욱 환후가 나빠졌다 들었어요.
동궁의 경비가 매우 엄중해져서 저도 출입을 못해요.
친한 궁인에게 물어보니 여러 약을 써 봤지만 차도가 없다 해요.
태자비를 보지도 못하고 국혼이 언제 진행될 지도 기약이 없어요.
당신이 말한 것처럼 그 병이 주변으로 퍼지는 것 같지는 않아요.
내정된 태자비께선 나이가 어려 아직 돌아가는 상황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이제 겨우 열 살은 넘었을까요.
정인보다 단 것을 더 좋아할 나이일 텐데.
오라버니도 불쌍하고, 태자비 전하도 안타까워요.
...
-
언니의 부마에는 우승선의 자제 연종이라는 사람이 내정되었어요.
예전 물망에 올랐던 후보가 우별초 지유 노영희(盧永禧)의 자제 노성철(盧星哲)이라 하던데,
언니는 그 사람을 피했다는 사실 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듣기로는 그렇게 행실이... 좋지 않다 해요.
...
-
아버지의 귀비로 내정된 사람도 멀리서 보았어요.
근데 그 분은 좀...
이렇게 말하는 날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아버지가 걱정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에요.
......
-
당연하게도 예가 보위도감이나 고려의 현재 정세를 상세하게 알 그런 위치에 놓여있지는 않았다.
궁궐의 떠도는 이야기들, 그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주관적으로 써서 보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것은 정세 판단에 참으로 중요한 데이터였다.
‘결국 별감이 태자비 자리를 내려놨군.’
덥석 그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물은 것은 영희다.
하지만 지금은 속았다고 생각하겠지.
편지를 더 읽어 내려가던 상민은 문득 고개를 들어 배 갑판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물고기를 잡는 사의를 향해 물었다.
자신의 다른 무장들은 전부 창양에 남아 있었다.
“상서우승(尙書右丞) 임굉의 여식에 대해 들어 봤나?”
대나무 낚싯대를 들어올린 사의가 끊어진 줄을 보고 인상을 쓰며 말했다.
“중랑장께서도 들어 보셨지 않습니까? 이가 놈이 그렇게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는 고려 제일의 미녀 아니오?”
“아, 문경이 말한 여인이 그 여인이란 말인가?”
“맞긴 맞소. 소문으로는 이번 국혼에 황실과 이어질 거라 들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이 되었구나.”
“어허, 여럿 사내 베갯잇을 적시겠수.”
사의는 마치 자신은 상관없다는 양 끌끌 웃었다.
역시 저 놈은 여자보다는 먹을 것에 더 집착하는 놈이다.
대신 주변에 그 둘의 말을 듣던 병졸들이 제각기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용길이 까지도.
믿었던 부하마저 그리 행동하자 상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허 참. 아이돌이 따로 없네.’
좋아하는 연예인의 결혼발표를 들은 것 마냥 시무룩해진 병졸들이 안쓰럽다.
빨리 결혼이라도 시켜 줘야지.
다시금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우는 사의에게서 시선을 떼고 편지를 전달해 준 전달자의 모습을 보았다.
“너는 나를 처음 보는 아이렸다?”
“예. 그러하옵니다.”
상민은 피식 웃었다.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아이다.
잘 먹고 잘 자라고 있는지 체격도 꽤 컸다.
어떤 도시라도 누군가는 죽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고아가 되며, 누군가는 거지가 되겠지.
승현은 이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사소한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조직을 만들었다.
마치 무협지에서 나오는 개방과도 비슷하게.
물론 아직 구성원들이 대부분 어린 아이들에 불과하여 전투력을 기대할 순 없었다.
차라리 정보단체라 보는 것이 맞겠지.
거지 및 고아들의 왕초가 된 승현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행랑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로의 관계를 홍보하고 다녀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자신은 그 ‘보육원’을 그냥 멀리서 후원해주기만 하면 되었다.
정과 밥에 굶주린 애들이다.
잘 먹이고 잘 키우면 나중에 커서 보은을 할.
“잘 전달해 주어 고맙구나.”
“아니옵니다.”
직접 자신을 만날 정도의 아이면 승현이 꽤 신뢰하는 애겠지.
상민의 생각은 배가 건양의 노전포에 정박하며 끝을 고했다.
국혼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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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돌아온 건양은 꽤 많이 발전해 있었다.
막장스러운 중앙 정치상황을 따로 떼어 보면 확실히 보위도감을 장악한 중손이 정방을 운영하여 문신들의 정치 참여를 허락하자 행정이 다소 안정화가 되어보였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고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곧잘 들려왔다.
좌표평면상에서 건양의 성장은 창양만큼은 아니더라도 분명히 우상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보위도감의 삼층 건물에서 마당의 버드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던 중손이 보고를 하러 막 들어온 상민에게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수고가 많았다.”
“보살펴 주신 덕분입니다.”
실제로 약속했던 지원은 거의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제 안정화가 더 된다면 조세를 거두어 중앙에 줄 때까지 지원은 없을 것이다.
적층구조의 누각.
조선시대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건축물은 그 위세를 자랑하듯 건양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다.
왕궁을 포함해서.
평탄한 지형에서 그나마 고지대에 세워 사실상 건양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꽤 멋있었다.
“국혼 준비가 바쁜 모양입니다.”
“네 녀석도 이제는 결혼을 하는구나.”
상민은 머쓱하니 웃었다.
“듣거라.”
“말씀하소서.”
“내가 군제를 개편하려 하는 건 아느냐.”
“별감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인데 어찌 소장이 모르겠습니까.”
“혼례 이후에 너도 이제는 장군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개편이 완료된다면 정식으로 안서(安西)의 도호부사(都護府使)에 올릴 게야.”
상민은 그저 고개를 숙여보였다.
“보위도감에 와서 관제개편에 대한 신의군의 여론을 좀 모아야겠다.”
“김통정 대장군은 반대합니까?”
“내키지 않는 부분이 여럿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런 자리들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알겠습니다.”
삼층 누각에서 내려오자 정방의 문신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중에는 자신에게 침을 뱉으려고 했던 문신도 있어 그가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손을 들어 화답했다.
별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을 지나쳐 가다보니, 이제 조금 키가 커진 익숙한 소년이 목간을 나르는 것을 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공자는 무슨 일을 하시오?”
짐짓 처음 만나는 양 그렇게 말을 하니 소년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부(吏部)의 주사(主事)직에 있는 임(林)가라 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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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은 퇴청 후 상민의 집으로 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몰래 따라 붙는 자가 없는 지 조심을 하며 걷는 것이 한 편의 첩보영화를 찍는 것 같았다.
“네 말대로 내가 널 찾게 되었군.”
“장군께선 중앙의 일에 밝지 않으시니 제가 등청을 하게 된다면 필히 찾으실 거라 생각했을 뿐입니다.”
상민은 헛웃음을 지었다.
경전은 중앙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들을 알려주었다.
기억력이 대단한 친구다.
어느 정도까지 신용을 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중앙권력의 향방에 대한 것들이 감이 잡히긴 했다.
“저번에 암말 여러 마리를 사라고 하며 지숙을 내게 보낸 것도 너로구나.”
그는 쑥스럽다는 듯 웃었다.
“제 외숙부 되십니다.”
“너는 왜 오지 않고?”
“소생은 복잡하게 돌아가는 중앙의 일이 더 흥미가 있기에 남고 싶었습니다.”
위험한 것을 즐기는 성격인가 봐.
“문신들은 다 자리를 잘 잡았고?”
“몇 명은 끝내 조정에 종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다만 그들도 이제는 스스로의 땅을 일구어야 할 것입니다.”
“잘 되었군.”
자신의 말이 먹히긴 한 모양.
상민은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똑똑한 놈이다.
21세기에 태어났으면 매일매일 야자를 째고 같이 피시방에 가는 공범일지라도 수능 다음날 망친 친구들 옆에서 가증스럽게 웃으며 가채점 점수를 자랑할 놈 같았다.
“일거리는 많고 사람은 극도로 부족하니 너도 왔으면 하는데...”
희번득거리는 상민의 눈초리를 어색하게 피한 경전이 말을 얼버무렸다.
“조정의 업무도 많고, 또한 제가 이곳에 남아 있는 편이 더...”
“되었다, 농이다.”
두 사람은 몇 번 크게 웃었다.
“네 생각에는 별감의 치세가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으냐?”
“권불십년이라 한다지만 이번 군제개혁을 성공한다면 능히 그 절반은 갈 수 있다 생각합니다.”
“그래?”
“그것은 별감 개인의 능력에서 기원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 경쟁자들의 능력과 상황, 그리고 성정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크옵니다.”
나머지 두 파벌들, 아니 자신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의 파벌의 우두머리를 싸잡아 말하는 그의 신랄한 태도에 상민이 머쓱하게 바라봤다.
“장군을 감히 언급함이 아닙니다.”
“크흠.”
상민은 헛기침을 했다.
경전은 생각을 하더니 한 마디를 더 내뱉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한 사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누구인가?”
“장군의 동서 될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