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려 신대륙에 떨어지다-25화 (25/653)

뒷수습

그들을 보내니 온 몸을 휘감은 전장의 열기가 사라져갔다.

인생이란 참 얄궂다.

흔적이 빠르게 없어지게 시체들을 묻고 전장 뒷정리를 대강 하고 떠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 사이에 상민에겐 정말 큰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저기 대지에 묻힌 자들도 마찬가지.

자신이 날뛰어 혼자서 수십에 달하는 자들을 죽였음에도 사람을 죽인 죄책감은 의외로 그리 크지 않았다.

적응력이 작용하는 것인지. 이 시대의 기억 덕분인지.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씁쓸함이다.

거점을 건설할 때, 자신은 거점 방어에 대한 한 가지 규칙을 설정했다.

창양은 지금 막 알에서 부화한 병아리에 불과했다.

외부의 약한 자극에도 크게 위태로울.

창양 주변 지역을 크게 세 군데로 나누었다.

외곽 순찰로를 따라 멀리 관측도 힘들 곳에 위치한 곳을 무관심 지역.

관측이 가능한 거리에 위치한 곳을 관심 지역,

그리고 창양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곳을 위험 지역으로.

위험 지역은 이 광대한 땅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작았다.

눈으로 창양을 볼 수 있는 거리는 제한되어 있었고 드문드문 펼쳐진 수림도 시야를 방해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보았건 안 보았건 거리상으로 위험 지역에 들어온 자들, 그리고 예상 경로 상에 들어올 자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선제 공격하기로 했다.

극도의 잔혹하고 공격적인 전술이었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불확실성을 감내하기엔 창양이 너무 연약하다.

결국 원주민들에게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순 없겠지만 그 시점을 최대한 늦춰야 했다.

적어도 뿌린 씨앗을 몇 번 수확할 때까지라도.

자비란 없어야 했다.

아침 해가 떠오른 탓에 어제가 되어버린 첫 출정처럼.

결심하자마자 처음부터 어기다니, 작심삼일이란 말도 쓰지 못하겠구나.

자신이 실수했을까.

사사로운 감정에 저들을 다 풀어준 걸까.

저것이 훗날 우리에게 치명적인 칼날로 돌아오지 않을지.

‘......’

하지만 상민은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자신의 직감을 믿어야지.

어제는 분명 큰 기회였다.

다시 찾아올까 생각해봐도 의심스러운.

역설적으로 그들을 풀어준 것은 그들이 자신의 부족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알리게 함이다.

예상하건데 그들은 부족 전쟁에서 이미 수많은 남자들을 잃었다.

연약해진 부족은 다른 부족과 강제로 합병되고 흡수되겠지.

그것이 이 평야의 오래된 전통일지 몰랐다.

그러나 어제 본 소년의 눈동자에는 머리에 깃을 꽃은 부족들에 대한 분노가 아직 가득 차 있었다.

‘믿어야지. 단순하지만 만고불변의 진리를.’

공통의 적이 생긴다면 유대감은 증폭되기 마련이다.

또한 사람은 믿을 만한 곳이 생겼다고 판단하면 은연중에 그곳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해치지 못했던 또다른 단순한 이유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포로가 여성인 점이 잔혹한 결정을 내리기 힘들게 하였다.

상당히 이국적인 외모에 뿌리 깊은 야성이 깃들어 있어 고려인들의 미인상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강철 같은 심지를 지닌 병사들이라 해도 아녀자와 어린 아이를 죽이는 것은 매우 거리끼는 행동이었으니까.

하물며 그들 중 절반 정도가 독신인 처지라면 더욱 더.

‘아예 야만스럽게 납치혼을 거행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단체의 지도자가 되니 무거운 책임감에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 것 같다.

‘길게 보자. 길게. 네 안배를 믿어라.’

우호적인 현지 세력을 포섭하는 일은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했다.

상민은 문득 대열의 후미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잡은 포로들.

그리고 지금 쯤 자신들이 왔던 길을 걸어 돌아가고 있을 다른 무리들.

만약 깃을 꽃은 자들이 피지배자였고 풀어준 자들이 지배자였으면 아마 이 처지는 서로 뒤바뀌어 있었을 텐데.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백의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는 것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설픈 죄책감을 가지진 않았다.

그 감정은 기만이었다.

적어도 누구에게 악인이 될 것이면,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위선자는 되지 말자.

‘나를 원망하고 증오하더라도 살아남아라. 살아남는다면, 너희의 후손도 내 고려의 일원이 되겠지.’

그에게는 오직 자신이 다스리는 고려만이 중요했을 뿐.

다른 가치는 무의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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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햇살을 받으며 병사들은 포로들을 잡고 위풍도 당당하게 창양으로 돌아왔다.

가서 네 상관이 어떤 무용을 세웠는지 떠들어줘 제발.

개고생 했으면 좀 보상도 받자꾸나.

피곤함을 느끼며 상민이 처소로 걸어가는데, 달랑 오십 명의 전리품을 보고 있는 지숙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짐짝을 보는 듯한 시선이다.

“입이 늘어나면 식량 소모도 많아집니다.”

“알고 있다.”

“어찌 처분하실 요량이십니까.”

“이번 선단을 통해 건양으로 보낸다.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한 물품과 바꿔야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송아지 몇 마리라도 바꾸어 오면 좋겠는데.”

상민은 무덤덤하게 그리 말했다.

오십 명의 포로는 건양에 가면 그래도 팔리긴 하겠지.

송아지 몇 마리로 퉁친다 해도 그들에겐 큰 이득이다.

지숙이 화제를 돌렸다.

“병졸들이 사냥하여 가지고 온 새가 참으로 이상하게 생겼습니다.”

“아 타조 말인가?”

오는 길에 잡은 큰 새는 타조와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상민의 눈에는 타조 그 자체였다.

털을 뽑아보니 깃펜으로 쓰기 딱 좋았다.

안 그래도 붓으로 세필을 쓰기 힘들었는데 나뭇가지에 고정시켜 만들어 볼까?

먹도 부족해서 만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교로 만든단다.

아교는 결국 또 가축, 특히 소가 부족하여 많이 만들 수 없었고.

연필을 만들기에는 주변에 흑연 광산이 보이지도 않았고.

한번 물꼬를 튼 생각은 갑자기 확 노선을 틀었다.

피로가 살짝 날아갔다.

“김 녹사(綠事), 혹시 조지소(造紙署)에 대한 것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아시오?”

“아, 마침 그 여인이 대해 보고할 것이 있다 했습니다.”

창양 북쪽을 흐르는 강은 너무나 당연하게 창강(蒼江)으로 불리고 있었다.

창양의 동쪽에 창강으로 들어가는 지류인 작은 하천이 있었는데 이를 영현천이라 불렀다.

그 근처 성에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곳에 작은 크기의 밭이 있었다.

한 무리의 여인들이 그곳에 모여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상민이 그들에게 가 물었다.

“어찌 진척은 잘 되어 가는가?”

아낙네들 대표로 있는 상민의 행랑어멈 아지는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져온 닥나무와 황촉규(黃蜀葵, 닥풀)은 잘 자라고 있습니다.”

과연 밭을 보니 자그마한 식물들이 푸르게 잘 자라고 있었다.

지숙이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영락없는 문신이다.

“이것들만 잘 자라 종이를 만드는 것이 수월해 진다면 더 이상 이 무거운 목간과 죽간을 들고 다니지 않게 되겠습니다.”

상민은 그 말에 공감했다.

고려는 여러 품질 좋은 종이로 유명했지만 이곳 남미에 떨어진 후 문명은 쇠퇴했다.

무슨 춘추전국시대마냥 목간(木簡)과 죽간(竹簡)을 쓰다니.

그것들을 종이처럼 읽으려니 은근히 팔이 저렸다.

들고 다니면서 판서하기도 힘들고.

보관하기에는 부피가 너무 크고.

가끔 교육열이 강한 학부모가 자녀들을 독촉하는 뻔한 레퍼토리로 옛 성현들이 책을 수레째로 읽었다는 것을 드는데, 팩트였지만 비유가 잘못되었다.

수레째 담긴 목간에 적힌 정보량은 장담컨데, 대학교 전공 원서 한 권만 못할 것이다.

역시 문명의 발전은 종이의 개발에 의해서 촉진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단 말이야.

우드칩을 이용한 종이의 대량생산까지는 아득히 멀고 험한 여정이 남아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느리게 생산하는 전통 한지라도 몹시 귀중했다.

문명이 퇴화하려는 것을 간신히 붙잡은 상민은 궁금했다.

‘그나저나 건양에 있던 지소 인원들은 거의 다 날 따라온 것 같은데, 그 쪽 사람들은 뭘 어찌 하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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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민의 생각과는 다르게 고려는 종이 ‘따위’와 같은 사소한 문제에는 별로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몇 몇 장수들이 빈 보위도감에서 중손은 보고를 받고 있었다.

“창양은 빠르게 안정화가 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보위도감의 외방(外方)회의에서 창양의 명목상 책임자인 통정이 머쓱해하며 그리 말했다.

실질적 책임자인 상민이 나가서 다 하고 있을 뿐, 그는 오히려 중손보다도 돌아가는 상황을 더 몰랐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이라 하니.”

중손은 끌끌 웃었다.

대단한 녀석이다.

약간의 거부감마저 들 정도.

반면, 동원을 지나 동쪽 깊숙이 간 우별초는 석호로 흘러들어가는 강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이들의 적응 속도는 형편없었다.

그래도 의외의 수확은 있었다.

“동원에서 실종되었던 병자들의 흔적이 발견 되었다라...”

“어디로 갔다 합니까?”

중손은 기억을 더듬었다.

동원을 떠나올 때, 병자들을 남기고 온 적이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서쪽에 건양이 세워지고 다시금 그들이 있어야 할 곳에 와 보니 외적의 침입이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꽂힌 화살과 부러진 창들.

하지만 전투의 흔적과는 다르게 시신은 다섯 구를 제외하곤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거의 백 명의 인원이었는데 이상할 노릇이다.

물론 살아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없었다.

그래도 같이 고려에서 넘어온 자들인데 죽은 자들의 시신이라도 수습해서 장례를 치러 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번 기회에 동원 동쪽으로 보내는 군대에 일러 혹시 주변을 둘러보라 했는데 뜬금없이 북동쪽 방향에서 그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북동쪽으로 갔다 한다. 대체 그들이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었는가가 의문이군.”

“야인들의 포로로 잡힌 겁니까?”

그럴 법 했다.

전투의 흔적도 있었으니.

중손은 혀를 찼다.

“좋은 꼴은 보지 못하겠구나.”

척후를 더 편성해 그들의 행적을 쫓을 수는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고려는 과확장의 시기에 놓여 있었고 가진 노비들도 수가 많아져 관리에 어려움을 겪었다.

각 부대들은 알아서들 경계를 잘 할 것이다. 그러라고 식량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다른 이유들로 토벌대를 보낼 시기도 아니었다.

“국혼(國婚)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지.”

고려왕 왕온의 공석 황후 자리에 가장 먼저 권리를 행사한 자는 중손이었다.

그의 수양딸을 황후 배씨로 옹립한 중손은 노영희가 자신의 딸을 이용해 태자비의 자리를 가로채 가는 것을 보고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품계와 권위 상, 황후가 태자비보다 높았지만 어차피 늙고 허수아비인 황상, 차라리 젊고 기대를 걸 만한 태자의 비를 차지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기에 노영희는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황상의 후궁에는 친별초파 문신의 우두머리인 상서우승(尙書右丞) 임굉의 딸 귀비 임씨가.

왕영의 부마에는 이신손의 차남, 이연종(李昖倧)이.

왕예의 부마에는 신의군 중랑장 김상민이 내정되며 이 순서대로 혼례가 치러 질 것이다.

“김 중랑장을 호출하는 것이 좋겠군. 그래도 황가의 외척이 되었으니 마땅히 대사에 참여를 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한 번쯤 그 목줄을 잡아 챌 때가 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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